충남 금산군 복수면 지량리 345번지에 소재한 충남 전통사찰 제85호 미륵사. 미륵사 상량문에 의하면 미륵사는 통일신라 성덕대왕 2년인 703년 봄에 창건되었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재단법인 선학원의 분원이다.

미륵사는 1948년 불에 타 없어지기 전까지는, 대웅전과 칠성각, 산신각, 요사 등을 갖추고 있었다. 화재 후에는 인법당을 모셨으며, 현재는 대웅전을 새로 짓고, 산성각, 요사 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미륵사에는 ‘미륵암(彌勒岩)’이 있다, 두상만 남은 석조불을 바위 위에 얹어 놓은 것이다.



미륵암 위에는 고려시대의 석불의 두상이 올려져 있다. 이 두상은 선각을 한 바위 앞에 떨어져 있던 것이라고 한다. 바위에 선각은 조성한지가 얼마되지 않았다. 그리고 옆에는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가 조각이 나 있다. 안면이나 두광 등이 잘 나타나 있고, 옆에는 몸만 나온 조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삼존불 중 협시불인 듯하다.


바위 위에 얹은 석불 두상

지난 8월 28일, 장수, 진안을 거쳐 금산으로 들어갔다. 보석사의 은행나무와 미륵암을 보기 위해서이다. 미륵암은 현 미륵사로 올라가기 전, 축대 밑에서 좌측으로 70m 정도 들어가면 만날 수가 있다.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측으로 커다란 바위가 하나 보이고, 그 위에 석불의 두상을 올려놓은 것을 볼 수가 있다.

두상으로만 보아도 이 석불은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임을 알 수가 있다. 그 밑으로는 평평한 바위 면이 있는데, 누군가 그곳에 두상을 염두에 두고 선각으로 마애불을 조각하였다. 그것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니, 쪼개진 바위조각에 조각을 한 흔적이다.


조각난 바위 뒤에는 전각의 주추를 놓았던 흔적이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이 마애불을 보존하는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쪼개진 바위조각들은 마애삼존불인 듯?

미륵사로 찾아들었다. 주지스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자료를 들고 나와 보여주신다. 이곳으로 부임을 해와 보니, 바위를 절단 한 듯 톱날 등이 바위에 꽂혀 있었다는 것이다. 바위가 널린 주변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다. 어림잡아 크기는 3m가 넘을만한 마애불이다. 전체적으로 이것저것을 맞추어보니, 삼존불을 새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찌해서 이렇게 조각이 나 버린 것일까? 그리고 저 바위에 선각을 한 것은 무엇일까? 마애불을 조각한 바위는 여기저기 널려있다. 어림잡아도 10여 조각은 되는 듯하다. 미륵사 주지스님의 이야기로는 숲 속에도 조각들이 있다는 것이다. 두상은 선각을 한 바위 면 앞에 떨어져 있던 것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선각을 한 바위 옆으로는 커다란 조각이 하나 서 있는데, 그것을 추론하여 볼 때 마애불을 새긴 바위의 높이는 3m를 넘었을 것만 같다.



주변에 널려진 바위조각에는 마애불을 새긴 흔적이 보인다. 마애불은 통일신라 이후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선각을 한 것의 기법 등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작이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조각을 낸 것일까?


무지가 빚은 참화, 눈물이 난다

그리고 바위는 넓적한 돌에 마애불을 새겼을 것만 같다. 그 마애불을 이렇게 조각을 내 놓은 것이다. 현재 조각난 마애불 주변에는 옛 기와조각이 발견이 되고, 바위 한편에는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 마애불을 새기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각까지 지었다는 것이다. 기와의 와편은 보기 힘든 꽃이 새개져 있다. 와편만 보아도 이 마애불을 보존하기 위한 전각이 상당히 공을 들여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마애불 역시 상당히 소중하게 여겼을 터, 그런 문화재급 마애불이 산산조각이 나 있는 것이다.

그런 마애불을 도대체 누가 이렇게 조각을 내 놓은 것일까? 조각난 마애불을 돌아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세상에 소중한 문화재 하나가 산산조각이 나다니. 무지가 불러온 문화재 훼손. 그것도 알만한 인물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더욱 참담하다. 언제나 우리 문화재들이 제 모습 그대로, 제 자리에 편안한 모습으로 있을 것인지. 이 나라에서는 기대를 할 수 없는 것일까? 돌아 나오는 내내 마음이 편치가 않다.


전라북도 남원시 노암동에는 ‘미륵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도로에서 찾기가 수월한 것은 앞쪽으로는 건물이 없기 때문이다. 미륵암은 전각이 3곳에 요사 정도가 있는, 산 밑에 아담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암자이다. 절을 찾아들어가다가 보면 입구 양편에 목장승이 서 있다. 절의 경계를 표시하고 있는 듯하다.

미륵암에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5호인 ‘미륵암 석불입상’이 있다. 미륵암을 들어가면 좌측으로 요사가 있고, 앞으로 용화전이 보인다. 바로 석불입상을 모셔 놓은 전각이다. 이 건물은 1927년 미륵암 신도들이 기금을 모아 지었다고 한다. 그 전에는 미륵입상이 노천에 서 있었는가 보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5호 남원 미륵암 석불입상

고려초기의 일석으로 조성 된 석불입상

미륵암 석블입상은 온전한 형태를 알아보기가 어렵다. 안면은 심하게 마모가 되었다. 아마 오랜 세월 풍상에 훼손이 된 듯하다. 미륵암 석불 역시, 석불입상과 뒤에 광채를 표현한 광배가 한 돌로 만들어졌다. 남원 지역의 거의 모든 석불입상들이 이렇게 일석으로 제작이 된 것을 보면, 이 지역의 특징인 듯하다.

미륵암은 통일신라 때에 도선국사가 지었다고 한다. 미륵암에 모신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때 세웠다는 미륵암은 흔적도 없다. 다만 현재의 대웅전을 세우려고 기초공사를 할 때 예전의 와편 등이 많이 발굴이 되었다고 하는데, 중요한 것을 모르고 다 없앴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로 안타깝다.


안면은 알아보기가 힘들다. 가슴께에서 양팔을 모은 듯하다.

심하게 훼손이 된 석불에는 사연이 많아

미륵암 석불입상은 전체적인 모습은 얼굴이 둥글고 온화한 표정인 듯하다. 머리 위에는 육계가 솟았으며 귀는 어깨까지 닿았다. 코나 입, 눈 등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마모가 되었다. 미륵암의 주지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아이를 못 낳는 여인들이 와서 코를 갉아갔다는 것이다. 아마 기자속(祈子俗)에 상당한 영험을 보인 듯하다.

어깨는 둥글게 표현을 하였으며, 손은 가슴께로 모은 듯하다. 법의는 양편으로 흘러내렸으며, 밑 부분에서 양편으로 U자형을 그리고 있다. 광배에는 불꽃 문양을 새겼는데, 거의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흐릿한 윤곽만 남아있다. 광배의 한편이 떨어져 한 옆에 따로 모셔놓았다.



하반신에는 법의의 주름이 보인다(위) 받침돌은 원래 일석이었으나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떼어놓았다(가운데) 석불입상과 광배가 한돌에 조각이 되었다.

일본인에게 팔려갈 뻔한 석불입상

단단한 바위로 조각한 미륵암 석불의 광배는 왜 쪼개진 것일까? 마침 주지스님이 차 한 잔을 하고 가라고 한다. 석불입상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겸, 방으로 들어갔다.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광배는 왜 쪼개졌나요?”
“그것은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일제 때 군산에 사는 어떤 사람이, 이 미륵암 석불이 효험이 있다고 하여 일본인에게 팔았답니다. 그런 다음에 받침돌과 석불입상을 따로 떼어 내, 아마 당시에는 길이 안 좋아서 커다란 리어카 같은 것에 실어서 마을 밖으로 옮겨 갔던 것 같아요”
“그럼 그 때 깨졌나요?”
“예. 그런데 절 입구를 빠져나가자 그 사람이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바람에 두려운 마음에 다시 제자리로 갔다가 놓았다고 하네요. 그래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합니다. 그 때 광배 일부분이 깨어졌다고 합니다.”
“다시 부쳐보지는 않았나요?”
“대학에서 교수님들이 부쳐준다고 했는데, 철심을 박고 쇠를 박아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그렇게까지 해서 붙여놓으면, 볼썽사나울 것만 같아 그냥 놓아두라고 했습니다.”


일본으로 가져가려다가 쪼개진 광배의 한편과 석불입상을 모셔놓은 용화전
 
미륵암 석불입상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와서 정성을 드리면, 아이를 갖는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정성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미륵암을 떠나면서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게 하는 것은, 그래도 일본으로 팔려갈 것을 막아낸 것이 고맙기 때문이다. 아마 당시에 일본으로 건너갔더라면 다시는 볼 수 없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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