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은 우리 전통문화의 중심지였다. 한 때 수원은 우리나라 전통예술이 집약된 곳으로 전국을 누비는 재인들이 모두 수원으로 몰려오기도 했다. 그런 수원이 언제부터인가 우리 전통문화와는 거리를 두고 서구문화에 치중한다는 느낌이다. 자신의 지역이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산실이요 수백 년 동안 전통문화를 이어가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작금에 들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내팽개친 꼴이 되었다.. .

 

과거 일제치하에서도 수원은 우리나라 모든 재인이 거쳐 기던 곳이다. 제인청은 광대청(廣大廳장악청(掌樂廳신청(神廳풍류방(風流房공인청(工人廳)이라고도 하였다. 한말 재인청은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삼도에 두었는데, 경기도의 재인청은 수원군 성호면 부산리(현 오산시 부산동)에 있었다.

 

1920년대 일제에 의해 우리문화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재인청이 폐청됐다. 폐청 될 당시 재인청에 속해있던 재인의 수는 전국에 4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니(1925년 당시 인구 12,997,611) 그 방대한 조직은 현재의 예총이나 민예총을 능가하는 대단한 조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재인청의 조직을 관리하던 곳이 바로 삼도의 재인청 중 당시 수원군에 소재하고 있던 경기재인청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재인청 직제는 도 재인청을 비롯해 각 군마다 군 재인청이 있었다. 각 도 재인청의 수장을 대방이라 하고, 군 소재 재인청의 우두머리는 청수(廳首)라고 불렀다. 이들은 각 도 재인청의 총수였던 대방의 아래 두었던 각 도의 책임자인 도산주(都山主)로부터 행정적인 지시를 받았다. 어느 지방이던 재인청에 매였던 광대나 재인들의 행정적인 업무는 청수가 거느린 공원(公員)과 장무(掌務)에 의하여 처리되었다.

 

 

까다로운 규제 속에 생활한 재인청

 

재인청은 그 규제가 까다로워 스스로의 천시 받는 형태를 벗어나기 위해 당시에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스승에게 예를 갖추지 않거나 주정을 하면 태장을 칠 정도로 엄한 규제 속에서 조직을 이끌어 갔다.

 

지금도 경기도 내의 여러 곳에 보면 광대마을, 혹은 재인마을로 불리는 곳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지난 날 군 재인청이 있던 곳으로 보인다. 재인청이라는 곳은 춤을 추거나, 단지 소리를 하거나 하는 예인의 집단이 아니다. 재인청이란 한 마디로 3도에 있던 모든 예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거대한 기, 예능조직이었다는 점이다.

 

아키바 다카시의 <조선 무속의 연구>에 의하면 대방의 선출은 재인청 인원 중에서 3명을 추천하고, 그 이름 밑에 권점이라는 점을 찍어 다수표를 얻은 사람이 맡아보는 직선제 선출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당시에도 상당히 민주적인 방식의 선거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대방은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모든 재인(광대, 재인, 소리꾼, 화랭이, 춤꾼 등을 합친 모든 예술인)들을 총괄하는 자리였으며, 그 밑에는 좌우도산주가 있어 재인들을 관리했다. .

 

 

재인청의 폐청으로 뿔뿔이 흩어진 재인들

 

1784년부터 1920년까지 130여년에 걸쳐 경기, 충청, 전라 삼도에 존속했던 재인청은 폐청 이후 제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자신이 배운 학습을 이용해 단체를 조직해 맥을 이어갔다. 그들 중 일부가 오산 부산리에 거주하던 이용우 가계로 12대 째 대를 물린 전형적인 산이계열의 집안이다.

 

경기도 수원군 성호면 부산리의 경기재인청 도산주인 이종하의 집에는 경기도 창제도청안1, 경기도 재인청 선생안1, 경기도 창재청2책이 있어서, 1784년부터 1920년까지 130여 년에 걸쳐 재인청에 소속되었던 재인들이 이곳을 터전으로 삼아 우리 전통문화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으며 그들의 주 활동무대는 수원화성이었다.

 

이렇게 방대한 조직으로 운영되던 재인청이 사라지고 난 뒤, 현 수원화성행궁 운한각 옆 풍화당에 거주하던 고 이동안은 이곳에서 재인청 춤 선생인 스승 용인춤꾼 김인호로부터 전수받은 경기재인청춤을 제자들에게 전승시켰다. 또한 이용우도 수원영동거북산당을 근거지로 경기도당굿을 전승시켰으며 인천 동막, 부천 장말 도당굿 등에서 지역에 전승되던 전통예술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재인청이라는 거대한 민간예술조직이 와해되고 난 후 기능을 가진 각 예인들은 파별로 전통문화를 이어나갔다. 그 중에서도 이용우와 이동안의 예술세계는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도산주 이종하의 아들 이용우는 많은 재인의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경기도당긋이 19901010일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기 전 세상을 떠났다.

 

화성출신 이동안 역시 경기도재인청 춤으로 문화재 지정을 받으려고 노력했지만 춤으로 지정을 받지 못했다. 이동안은 재인청의 세습광대 후손인 이재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이화실은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고, 작은할아버지 이창실도 줄타기의 명수였다. 이동안은 용인의 재인청 춤꾼 김인호로부터 전통무용의 장단(젓대, 해금, 꽹과리, )과 춤을 익혔으며 박춘재로부터는 발탈의 연희를, 김관보에게는 줄타기를 전수받았다. 하지만 그는 춤으로 지정을 받지 못하고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로 지정받았다.

 

 

재인청 폐청 100년의 아픔, 이제 수원에서 되살려야 한다

 

이렇게 많은 뛰어난 예능을 보유하고 있던 재인들이 모인 경기재인청. 이동안이 수원화성 운한각 풍화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수원은 전국의 수많은 예인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런 경기재인청이 폐청된지 올해로 100. 100년 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찾으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일 년 동안 수원에서 무대에 오르는 전통공연을 보면 미비하다. 그래도 이용우 가계와 이동안 가계로 이어진 전통을 지키기 위해 몇몇 후학들이 애를 쓰고 있지만,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지원은 극히 미비한 상황이다. 40여 년 동안 전통을 지키기 위해 매년 공연을 두 차례씩 벌이고 있는 안택굿 명인 고성주는 한 번도 지원을 받지 못하고 늘 자비를 들여 무대를 마련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국의 수많은 전통예술인들을 관리하고 전통문화를 지켜왔던 경기재인청. 그 중심에 있던 수원으로서는 재인청 폐청 100년이 지난 2020년을 맞아 수원의 정신적 중심으로 남아있는 경기재인청에서 이어진 전통예술을 찾아 그 정체성을 지켜가야 할 것이다.

 

요즈음 우리는 각처에서 열리는 많은 행사를 보면서 지역적 특성이 강한 우리 것이 너무나 홀대를 받는 것은 아닌가 염려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문화는 백리부동풍(百里不同風)’이라고 하여서 그 지역마다 각기 다른 풍속과 문화예술을 지니고 있다. 즉 살아가는 방법과 주위환경, 그리고 역사적, 시대적 배경을 민속 창출의 요인으로 삼아 각 처마다 다른 형태의 풍속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기에 우리는 적어도 한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사람들이 딴 곳으로 이주를 하면, 3대 정도를 지나야 그 곳의 풍습을 익히고 그 지역의 토착 풍속과 동화된다고 한다. 그 예로 판소리의 경우 전라도 사람의 성음이 틀리고, 경상도 사람의 성음이 틀리다. 또한 경기도 사람의 성음이 달라 각기 그 지역 나름의 창제(唱制)를 갖고 있다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이다.

 

각 지역마다 환경에 따른 문화가 창출돼

 

풍물을 보더라도 기 지역에 따라 각기 처해진 바대로 다른 음악성향을 띠우고 있어 우리는 웃다리농악, 호남좌도농악, 우도농악, 삼천포농악(영남) 등 지역의 다른 색을 보이고 있는 농악을 볼 수가 있다. 춤 또한 지역적으로 각기 특색 있는 춤의 형태가 있고, 그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람들의 태가 다르다고 표현을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는 문화를 지켜가야 할 사람들의 문화를 망치는 행위를 보거나, 우리 것인지 남의 것인지, 우리 지역 것인지 남의 마을 것인지, 있었는지 만들어졌는지. 구분도 되지 않는 그러한 것들을 너무나 흔히 접할 수가 있다. 전통예술은 그 지역에서 함께 그 행위를 하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정서가 그 안에 송두리째 담겨있는 것이기에 더욱 소중하다고 볼 수있다.

 

 

그런대도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지역의 정서가 사라진 전통예술이 마치 그 지역에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있었거나, 혹은 전혀 다른 정서인데도 불구하고 그 지역의 것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수 없이 오랜 시간동안 그 지역에 전해지면서 자연적이고 순차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그 지역민의 정서를 내포하고 있는 아름다운 전통예술이야말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지역적 특성이 사라진 전통은 자긍심을 죽이는 행위

 

그러나 우리의 정서도 없고, 그 지역적 사고도 없는 예술은 이미 전통이 아니다. 더욱 그런 것들 - 지역적 정서도 없고, 특성도 없으며, 현대적 냄새가 나는 그러한 것들 - 은 더 이상은 우리가 방관을 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없애고 민족적 자긍심을 죽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어찌 보면 매국적 행위라고 볼수도 있다. 민족적 자긍심을 죽이는 행위는 그 자체가 바로 망국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미 일제에 의해서 문화말살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수 없이 많은 전통문화예술이 훼파되고, 얼마 남지 않은 부분을 지켜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이즈음의 현실이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묻기를 원한다. 관리를 하는 행정부서의 담당자는 우리 것에 대해서 얼마나 애착을 갖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는지. 문화를 지켜가야 할 당사자들은 그 지역적 사고를 지닌 예술적 행위를 하고 있으며, 양심을 속이는 일은 없는지. 타 지역의 정서를 갖고 있으면서도 가장 그 지역사람인체 하고, 나 몰라라 하는 행위는 하지 않고 있는지.

 

전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통인체 가면을 쓰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것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으면서도 우리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 것인 양 탈을 쓰지는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답을 내리시길 바란다. 그리고 더 이상은 우리의 정서가 내포되어 있지 않고, 지역의 특성이 없는 그러한 국적불명, 지역불명의 문화를 내세우는 행위는 삼가 하기를 바란다. 그 길만이 스스로가 이 나라 사람임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문화, 문화재에 대해서 글을 쓴 것은 벌써 20년이 훨씬 지났습니다. 그 동안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나름대로 보람도 있었고, 기쁜 일도 많았습니다. 또 좋은 분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그 좋은 분들 중에는 가까운 지인들도 있고, 이웃 블로거님들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전혀 일자면식도 없는 낯선 거리에서 만난 분들도 있습니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도 남들은 돈을 벌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인간은 어찌 된 것인지 지금까지 벌기는커녕, 수없이 없애기만 하였습니다. 그 돈, 절대로 아깝지가 않은 것은 우리문화재에 대해서 단 한 명이라도 더 알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금은 보람된 일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방치된 문화재가 반듯하게 제 자리를 잡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글 정말 쓰기 싫습니다.

문화재 답사를 하고나서 글을 쓰는 일은 재미있어야 합니다. 좋은 글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문화재의 문화적 특징과,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글을 쓰고 싶어 답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답사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난 문화재에게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문화재의 훼손, 관리의 허술, 문화재 폄하 등 정말 쓰기 싫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글을 쓸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합니다. 문화재를 볼 낯이 없습니다. 문화재는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문화재를 조성한 장인의 숨결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기에 전 문화재는 각기 생명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문화재에 대해 나쁜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문화재를 아프게 하는 것이란 생각입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정제성은 있으십니까? 문화재의 소중함이나 중요성은 알고 계십니까? 아니 그보다 먼저 묻습니다. 문화재가 무엇인지는 아십니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것을 의식 있게 바라보고 있는 분들은 극히 일부라는 것입니다. 아니 일부가 아니라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늘 이런 주장을 해왔습니다. 모든 분들이 문화재 지킴이가 되어 줄 것을 말입니다. 이렇게 백날 소리를 질러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대답 없는 메아리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부탁을 드립니다. 문화재는 우리의 역사와 정신, 그리고 민초들의 애환과 사고를 그 안에 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문화재를 훼손하고 폄하하며 나하고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등한시 하는 행위, 이것은 매국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떻게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날마다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는지 아십니까? 왜 사람들은 소중한 문화재보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그런 것에 더 광분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의 무관심과 문화재를 비하하는 행동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에 동조를 하며 외래의 문화나, 이상한 것들에 심하게 광분하고 있는 분들, 무관심으로 바라보는 문화재와 우리 문화. 그것은 바로 매국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



전 오늘도 길 위에 있습니다. 우리의 낯선 문화재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합니다. “문화재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맞습니다. 밥 안 먹여 줍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길에서 생을 마감하는 일이 있다고 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 문화를 방치한 사람들에 비해서는 말입니다. 일본도 끝내 빼앗지 못한 우리의 정체성은, 바로 우리의 문화에서 온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별 짓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네들은 그들보다 더한 말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중한 우리 문화를 지금 여러분들이 팔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가 문화의 매국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어찌 보면 일본인들보다도 못한 쪽팔리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아닌지?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기 바립니다. 답은 당신들 스스로가 내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344-1에 가면 사적 제104호인 황산대첩비지가 있다. 솟을대문으로 마련한 삼문을 들어서면 중앙에 대첩비가 서 있다. 좌측으로는 사적비가 우측에는 파비각이 보인다. 이 사적지는 고려 말 우왕 6년인 1380년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금강어귀에서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하였다. 이성계를 대장군으로 한 고려군은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황산대첩에서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왜장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트리고. 뒤이어 이두란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다. 우두머리를 잃은 왜구를 고려군이 몰아쳐 완전히 섬멸하였다. 이곳에서 승리를 한 이성계는 한양으로 돌아가던 길에 전주 이목대에서 잔치를 베풀고, 나라를 일으킬 의중을 보였다.


파비각(破碑閣)에서 분노를 느끼다

일본으로서는 이 황산의 대첩비가 상당한 수모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보니 이 비를 놓아들 리가 없었던 것. 선조 때 개국시조인 이성계의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대첩비를 1943년 11월, 조선총독부에서는 비문을 쪼고 비신을 파괴하였다. 방치가 되어있는 대첩비를 1977년에 수습을 하고 비각을 세웠다.

파괴된 비는 몇 조각이 나 있다. 그리고 비문에 새겨졌던 글은 모두 쪼아 알 수가 없게 만들어 버렸다. 전국의 수많은 문화재를 수탈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이렇게 소중한 역사의 기록을 망쳐놓은 일본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이런 패악을 저지르고서도 반성은커녕, 아직도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면서도 이 나라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있다.



조각이 나버린 황산대첩비. 일제는 비를 이렇게 파괴했다.

울분은 극에 달하고

대첩비지를 나와 담을 끼고 돌아가니 전각이 보인다. 안에는 편편한 바위가 있고, 그 위는 축대를 쌓았다. 이 전각을 ‘어휘각’이라고 한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한 후, 다음에 본 석벽에 8원수 4종사관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황산대첩의 승리는 자신의 공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공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승전을 적은 비를 모두 쪼아내 무참하게 훼손을 했다.

이 어휘각의 안에 있는 바위벽의 아래편을 보면 글이 써졌을 것 같은 공간이 보인다. 그런데 그 부분이 심하게 훼손이 되어있다. 600여년이나 잘 보존이 되어있던 이 글씨를, 1945년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해 훼손을 시켰다는 것이다. 일제는 이 비전을 폭파하고, 철정으로 글씨를 모두 쪼아버렸다고 한다.

우리의 승전의 역사를 기록한 대첩비. 그것을 모두 훼손한 일제의 만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수많은 문화재를 수탈하고도 돌려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일본. 그러한 나라에 대해 언제나 저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라. 도대체 우리 선조들의 기개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오늘 황산대첩비지에서 본 파비와 훼파된 성지를 바라보면서, 이제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수탈해 가고, 우리 문화를 말살시키려 했던 책임을 물어야 할 때란 생각이다. 그리고 당당히 우리의 문화재를 돌려달라고 요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수많은 아픔을 당한 이 민족의 상처에 대한 보상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찾는 이 없는 황산대첩비지를 우리민족의 기개를 찾을 수 있는 교육장으로 활용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만이 또 다른 문화말살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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