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딴 곳으로 옮기는 것을 두고 이건(移建)’이라고 한다. 집을 옮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을 해체하여 다시 그대로 복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체하는 과정에서 자칫 집에 손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건은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하다. 충북 청원군 문의면 문산리에 있는 문의문화재단지 안, 충북 유형문화재 제220호인 문의 노현리 민가는 바로 이렇게 이건을 한 집이다.

 

이 집은 원래 강릉 김씨 김승지의 종가였다고 한다. 그런 집을 문의면 노현리의 연안이씨 가문에서 사들인 것 같다. 괴정 이현승 참봉이 이 집을 구해 살던 집으로, 1993년 손자인 이양훈 씨에 의해 이곳 문의문화재단지 안으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이 집은 자 형의 안채와, 초가로 된 광과 사주문이 자리하고 있다.

 

 

초가로 된 광을 보면 부농이었다.

 

초가로 된 사주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대문채인 듯한 초가가 보인다. 모두 세 칸으로 된 이 초가는 한 칸의 마굿간과 한 칸의 방을 두고, 그 사이에 광을 두고 있다. 그저 어느 시골집에서나 평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다.

 

그러나 안채 앞에 있는 광채를 보면, 이 집이 부농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모두 다섯 칸으로 된 광채는 초가이면서도 보기 드물게 잘 지어진 집이다. 모두 앞에는 두 짝 판자문을 달았으며, 넓이는 동일하게 한 칸씩이다.

 

 

기단을 장대석으로 쌓았으며, 광문을 구성한 목재가 단단하다. 이런 초가로 된 광채의 형태로는 상당히 뛰어난 치목의 형태로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노현리 민가에 살았던 가정이 부유한 농가였음을 알 수가 있다.

 

뛰어난 안채의 구성

 

노현리 민가의 안채를 보면, 아마도 옛날에 이 집에는 사랑채가 별도로 있었을 것 같다. 안채의 구성에서 이 집의 모습이 그려진다. 안채는 자 집이다. 일곱 칸으로 꾸며진 안채는 부엌과 안방, 윗방이 있고, 꺾인 부분에 두 칸 대청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한 칸의 건넌방이 자리한다.

 

 

안채의 안방부터 대청까지 연결하는 툇마루는, 안채에서 주로 생활하는 여인들이 땅을 밟지 않도록 동선을 구성하였다. 툇마루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내어놓았기 때문이다. 건넌방의 마루는 대청마루보다 높인 높임마루를 놓았으며, 그 밑으로 한데 아궁이를 두었다.

 

두 칸 대청에는 예전에 사용하던 쌀독이며 반다지 등이 자리하고 있다. 대청의 뒤편으로는 두 개의 판자문을 내어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건넌방과 맞닿은 벽 위로는 대청다락을 내어놓았다.

 

 

노현리 민가의 특징은 건넌방 밖으로 낸 반 칸의 마루이다. 건넌방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누마루를 깐 정자마루가 있다. 아마도 이곳에서 부녀자들이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한담을 나누고는 했을 것이다. 안방의 뒤편에는 툇마루를 놓아, 집의 좌우에서 부녀자들이 밖을 바라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지금은 문의문화재단지 안에 자리하고 있지만, 아마도 예전 노현리 마을에 자리하고 있을 때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을 것 같다. 비록 넓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참으로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집이다. 지난 31일 찾아간 집이지만, 내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노현리 민가. 그래서인가 이 집과 닮은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여막(廬幕)’이란 오두막집을 말한다. 사람이 기거하기 위해 짓는 정상적인 집이 아니라, 임시로 필요에 의해 일정기간 사용을 하는 움막이다. 그런데 이 여막은 일반적인 움막과는 다르다. 바로 선조의 묘 옆에 짓는 집이기 때문이다. 여막에서 생활을 하는 것을 우리는 ‘시묘살이’리고 부른다.

‘시묘(侍墓)’란 말 그대로 묘를 섬긴다는 뜻이다. 즉 성분을 하고 난 후 그 서편에 여막이라는 초막을 짓고 3년을 평소처럼 부모님을 모신다는 뜻이다. 시묘는 효의 근본이며, 가장 힘든 상례 중의 하나이다. 하기에 시묘를 마친 자손을 사람들은 극진히 대우를 하기도 했다.


2대에 걸친 시묘를 한 조씨일가

충북 청원군 문의면에 소재한 문의문화재단지. 단지 안에는 묘와 함께 여막 한 채가 지어져 있다. 이 여막은 묘소 또는 혼백이나 신주를 모신 ‘궤연’ 가까이에 지어놓고, 탈상을 할 때까지 3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묘를 보살피는 것이다.

이 여막은 청원군 강내면 연정리에 한양 조씨 문중의 조육형과, 2000년 4월 작고한 부친 조병천이 대를 이어 시묘를 하였던 곳이다. 이 여막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고 있어, 효의 근본으로 삼고자 현지에 잇던 여막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현을 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특히 부친 조병천은 1957년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3년간이나 시묘를 하였다. 그것도 하루도 빠짐없이 생식을 하면서 견디었다는 것이다. 선친묘소에 공장이 들어서자 이장을 하고 난 후, 또 다시 여막을 짓고 3년간을 다시 시묘를 했다고 한다.

효의 근본이 되는 여막

여막은 돌과 흙, 그리고 짚을 이용해 지었다. 3년이라는 시간을 눈비를 피할 수 있고, 겨울 추위를 막기 위해 돌을 쌓아 단단하게 지은 움막이다. 한편에는 불을 땔 수 있도록 하였으며, 안에는 만장과 상복 등이 걸려있다. 안은 제상 위에 음식들이 차려져 있고, 하루에 세 차례씩 제상을 차리고 상식을 올린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3년이라는 세월을 묘를 지키며, 생활을 일체 접어야 한다는 시묘살이. 요즈음에도 시묘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여 방송 등에 소개를 한 적도 있다. 효의 가장 근본이 된다고 하는 여막과 시묘.

아마도 ‘시묘’라는 말도 어찌 보면 ‘시집’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시집살이’라고 하는 것도 ‘시묘살이’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도합 9년을 보내야 시집살이에서 조금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말의 뜻처럼, 시묘살이도 그와 같은 힘든 나날은 아니었을까?


요즈음 패악으로 치닫고 있는 세상을 보면서, 여막과 시묘살이라는 것이 새삼 얼마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문의문화재단지 안에 소재하고 있는 여막. 물론 재현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 안에 녹아있는 우리의 부모에 대한 효에 대한 깊은 뜻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다시 한 번 깊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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