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심신이 피로하면 쉬러가는 여주. 이곳을 찾는 이유는 공기 좋고 물도 맑은 것이 좋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정감이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정말 착하게 사는 아우들이 있어, 이곳을 찾아가면 제 스스로가 조금은 세속에서 묻은 때가 가시는 듯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자주 찾는 곳입니다.

 

22(), 여주에 가서 또 한명의 아우를 만났습니다. 이 아우도 벌써 인연이 닿아 얼굴을 익힌 가 17년 정도 되었는가 봅니다. 형이 왔다고 하니, 원주에 가면 맛있는 칼국수가 있다고 점심을 먹으로 가자고 합니다. 줄을 서서 칼국수를 먹는 집이라니, 이보다 즐거운 일이 있겠습니까? 무조건 좋다고 했죠.

 

 

해물장칼국수 한 그릇에 6,500

 

5명이 함게 찾아간 칼국수집. 원주시 문막읍 동화리 1180-1번지에 소재한 곰제부도 해물 칼국수. 이 집은 메뉴가 간단합니다. 칼국수 두 종류와 만두 두 종류. 딱 네 가지 메뉴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조금 남았는데도, 이미 식당안은 만원입니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먹는다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식당이 좁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되니 꾸역꾸역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만큼 맛에 자신이 있다는 것이겠죠. 거기다가 값도 비싼편이 아닙니다. 세 사람은 해물장칼국수를 두 사람은 해물칼국수(6,000)을 주문했습니다. 거기다가 야채만두 한 접시(6,000) 김치만두(6,000) 한 접시도요.

 

 

커다란 그릇에 푸짐하게 내어놓는 해물 장칼국수. 그런데 강원도와는 달리 이 집은 장이 된장입니다. 거기다가 각종 해물과 배추로 시원한 국물이 일품입니다. 홍합과 바지락 등을 듬뿍 담아내어다 놓는 장칼국수. 전날 먹은 술로 인한 숙취가 한꺼번에 가시는 듯합니다.

 

 

역시 음식은 맛입니다. 만두를 하나 집어 갈라봅니다. 속이 꽉 차 있습니다. 국내산 고기만 사용한다는 만두. 그래서인가 더 맛있어 보입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맛있는 음식. 이보다 좋은 힐링은 없다는 생각입니다. 한참이나 웃고 떠들면 맛있게 먹은 음식. 큰 대접에 조개껍질이 하나 가득합니다.

 

 

산다는 것이 별 것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좋은 사람 만나 값싸고 맛있는 식당에 가서 정말 푸짐한 점심 한 그릇으로 느끼는 행복. 그것이 최고의 힐링이란 생각입니다.

 

 

곰제부도 해물칼국수

원주시 문막읍 동화리 1180-1

(033) 745-4515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

 

송도 명기인 명월이 황진이가 벽계수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지었다는 시조이다. 세월은 덧없는 것이라. 황진이의 시는 전하지만, 벽계수는 대체 어떤 이유로 첩첩산중 찾는 이 없는 외로운 곳에 유택을 마련했을까?

 

그러고 보면 이곳을 다녀온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문막에서 원주로 가는 도로 우측 편에 보면 ‘동화사’라는 이정표와 함께, 벽계수 이종숙 묘역이라는 입간판이 있다.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면 큰 돌 하나를 세워 세종대왕의 증손인 벽계도정 후손묘원이라고 썼다. 양편으로 밭이 있고 임도를 따라 조금 들어가다가 보면 벽계수 묘역이 우측 산길로 400m 라는 표시가 보인다.

 

 

찾는 이 없는 벽계수를 찾아가다

 

조금은 가파르다 싶은 산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고묘가 한기 보이고, 그 앞에 벽계수묘역이 100m 전방에 있다는 표시를 본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동화리 산90번지, 바로 벽계수와 부인인 해평 윤씨가 함께 잠들어 있는 유택이다. 세종대왕의 증손으로 알려진 벽계수는 왕족이다.

 

세종대왕과 신빈 김씨 사이에서 영해군이 태어났고, 영해군의 차남은 ‘길안도정’이다. 이 길안도정의 3남이 바로 황진이와 의 애틋한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뻔한 벽계도정 벽계수이다. 여기서 도정이라 함은 세자의 증손 혹은 대군의 손자나 세자의 아들 및 적증손 에게는 정3품 계자를 제수하고 도정이라고 했다. 벽계수 또한 도정이라는 품계를 제수 받았다.

 

 

 

현실과 거리가 먼 벽계수의 사랑

 

벽계수는 중종 3년인 1508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사망한 년대는 불분명하다. 품계는 명선대부에 올랐으며 휘는 종숙, 호는 현옹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혼탁한 세상을 싫어하며, 빗대어 쓴 시가 많이 전한다. 35세인 1542년에는 관찰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흔히 드라마 속의 벽계수를 기억한다. 황진이와 서로 사랑놀음을 하면서 밀고 당기는 가운데, 자신이 연모하고 있는 여인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표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거리가 먼 것일까? 황진이는 송도 부근 성거산에 있는 화담 서경덕을 찾아가, 그를 유혹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는 다시 서경덕을 찾아가 스스로 송도에 꺾을 수 없는 것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박연폭포요, 둘째는 화담 서경덕이요, 셋째는 바로 황진이 자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유명한 송도삼절이 생겨난 것이다.

 

벽계수의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일까?

 

그러나 막상 청산리 벽계수의 주인공인 벽계수는 황진이의 그 애간장을 녹이는 시조 한수로 그만 낙마를 하고, 황진이의 마음속에서 멀어졌다. 문막읍 동화리 산 속에 있는 벽계수 이종숙의 묘, 묘지 위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자라있다. 앞에 석물 몇 기는 최근에 후손들이 세운 듯하다. 묘역 한편에 있는 석물을 보니, 꽤나 오래된 돌이다.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묘역은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묘역이 배향한 방향을 보니, 이 길로 가면 송도로 가는 방향은 아닐까? 한참이나 묘역 앞에 앉아 벽계수와 황진이,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기억해 낸다.

 

누군가 묘역 앞에 술병을 치우지 않고 갔다. 그럴 줄 알았으면 막걸리라도 한 통 받아올 것을. 내려오는 길에 숲속에서 나무 부딪는 소리가 나 쳐다보니, 커다란 노루 한 마리가 산등성이를 향해 치닫는다. 아마도 벽계수의 영혼이 그리운 황진이를 찾아 뛰어가는 것은 아니었는지. 그 사라진 숲만 쳐다보고 있다.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그 문화재에서 기운을 얻고는 한다. 언젠가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만난 노스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네는 그렇게 천년이 지난 것들을 보고 다니니, 그것에서 나오는 기운을 많이 받을 것이네’라는 말씀이셨다. 아마도 그런 기운이 답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517-2에는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45호인 흥법사 터가 있다. 이 흥법사 터에는 보물 제463호인 진공대사 탑비 귀부 및 이수와 제464호인 흥법사지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 중 진공대사 탑비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진공대사(869∼940)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이 새겨진 탑비의 몸돌은 깨어진 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놓아, 이곳에는 비의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 남아 있다.

 

 

뛰어난 조각기술이 돋보이는 받침돌인 귀부

 

진공대사는 장순선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당나라에서 수도하고 공양왕 때 귀국하여 왕사가 되었다. 신라가 망하고 고려의 건국 후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그의 설법에 감응하여 스승으로 머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진공대사는 이를 사양하고 소백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였다. 고려 태조 23년에 입적하니 태조가 손수 비문을 짓고, 최광윤이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모아 비를 세웠다.

 

탑의 몸돌이 없어져 받침인 귀부 위에 머릿돌인 이수를 올려놓은 형태로 있는 진공대사 탑비 귀부 및 이수. 거북의 몸에 용머리를 한 고려 초기의 특이한 형태를 보이는 이 귀부는 용머리의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귀의 옆에는 물고기의 아가미가 벌어진 것처럼 펼쳐져 있으며, 귀는 위로 솟아 있다. 용의 머리 위에는 네모난 구멍이 나 있는데, 이 구멍은 용 뿔을 조각해서 끼웠던 것으로 보인다.

 

 

 

 

앞 뒤 네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는 형태로 조각이 된 발은, 동적인 힘을 느낄 수가 있다. 목은 짧은 편이며 거북의 등껍질 무늬는 정육각형으로, 만(卍)자 무늬와 연꽃을 새겨 넣었다.

 

머릿돌의 조각솜씨 보고 절로 탄성이

 

비의 몸돌이 없어져 귀부 위에 이수만 얹혀 있는 진공대사 탑비의 머릿돌. 앞면 중앙에는 <진공대사>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을 조각하였다. 머릿돌에는 모두 여섯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중앙으로 용 두 마리가 서로 무섭게 노려보고 있고, 양편에 밖을 주시하고 있는 각각 한 마리씩의 용이 있다. 뒤편으로도 양편에 한 마리씩의 용이 있어, 전체적으로 네 마리의 용이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 형태이다.

 

 

 

이 이수의 형태는 웅장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당시의 높은 예술수준이 엿보인다. 돌로 만든 조각품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진공대사 탑비의 받침돌과 머릿돌.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비의 몸돌은, 여러 개의 조각으로 깨져있어 부분적으로 비문을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라고 한다. 그러나 그 비문에는 진공대사의 생애와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흥법사지 정비 아쉬워

 

원주 지정면에서 다리를 건너 양평군 양동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문막으로 빠지는 새로 난 길이 있다. 이 길로 접어들어 조금 가다가 우측으로 난 소로 길로 따라 들어가면 흥법사지가 있다. 현재 흥법사지에는 보물인 삼층석탑과 진공대사 탑비 귀두와 이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주변을 살펴보면 여기저기 주춧돌이었을 석물들도 보인다.

 

 

 

 

탑 옆에는 누군가 밭을 일구었고, 막 쌓은 축대 주변에도 모두 밭을 개간했다. 조성된 석물로 보아 한 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았을 흥법사지. 그러나 이렇게 오랜 세월 방치가 되어있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두 기의 뛰어난 보물이 서 있으면서도 아직 제대로 정비조차 되어 있지 않다. 진입로나 주변이 속히 정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우리 문화재의 우수함을 느낄 수 있도록.

김두한가옥이라고 하면 백야 김좌진장군의 아들이자, 현 탤런트 송일국의 외할아버지인 김두한 전 의원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김두한 가옥은 전 김두한 의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집이다. 다만 이 가옥의 소유자가 김두한이란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동명이인인 김두한 가옥이라고 명칭을 붙였을 뿐이다.

 

김두한 가옥은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건등리에 소재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6호이다. 이 가옥은 원주목사와 남원목사를 지냈던 김탄행(1714 ~ 1774)의 묘를 관리하기 위하여 지은 묘막이다. 250여 년 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고 하며, 1936년에 크게 보수하였다고 한다.

 

 

3단의 장대석 위에 세운 사랑채

 

김두한 가옥은 ㄱ자형의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되어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를 연결하여 짓는 경우는 그리 흔치가 않다. 그러나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고, 사랑채는 다시 대문으로 대문채와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에 연결이 된 대문채는 잠시 사이를 두고 헛간과 방이 있는 광채와 합해, 튼 ㅁ 자형을 이루고 있다.

 

대문을 사이로 사랑채와 대문채가 연결이 되어있는 이 집은, 밖의 길에서 사랑채와 대문채가 한눈에 보인다. 사랑채는 3단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올렸다. 긴 장대석의 석재를 이용한 것이나 3단으로 기단을 쌓은 것들을 보면, 당시 이 묘막을 지은 가문의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집은 밑에 넓고 위가 좁은 마름모꼴형의 주추 위에, 방형의 기둥을 세웠다. 사랑채의 마루방은 앞면과 측면의 문을 모두 열어젖힐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랑채의 문들이 재미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의 규모로 지었으며, 집을 바라보면서 왼쪽 1칸은 마루방으로 꾸몄고, 오른쪽 2칸은 방으로 되어 있다. 마루방의 문은 앞면과 측면이 판자문으로 막았다. 판자문은 4짝을 모두 함께 열어젖힐 수가 있다. 마루방의 뒤쪽으로도 사방 1칸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이 방은 안채의 부엌과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앞에 돌출이 된 마루방을 빼고, 두 칸 방 앞으로 마루를 놓았다. 이 마루에 올라서면 좌측으로는 마루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우측으로는 작은 쪽문이 보인다. 이 쪽문은 무엇에 쓰는 것일까? 이 여닫이로 된 쪽문을 열면 좁은 네모난 공간이 나온다. 그리고는 대문과 사랑채의 끝이 이어지는 아궁이가 있다. 이 문안에 있는 공간은 아궁이에서 사랑방으로 통하는 공간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네모난 작은 공간은 무엇이고, 마루 끝에 보이는 쪽문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 공간은 대문간에 붙은 아궁이에서 음식 같은 것을 만들어, 사랑채로 옮기던 창구가 아니었을까? 안채에 붙은 부엌에서 이곳 사랑채까지 나르기는 힘이 들고, 안채와 연결이 되어있다고 해도 사랑채가 외간남자들이 드나드는 곳이었으니, 이 쪽문을 통해 네모난 공간에 음식을 놓고, 그것을 사랑채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안채에 딸린 부엌, 유난히 환기장치가 많은 이유는

 

안채는 안방과 윗방이 부엌에 접하여 있고 그 옆으로 대청과 건넌방이 있다. 일반적인 고택의 경우 - 자형의 집이 아닐 때에는, 안채와 사랑채가 별도의 건물로 구성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김두한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가 붙어있다. 다만 그 구별은 중간에 안채의 부엌을 놓아 구분을 해 놓았다. 이렇게 전체적인 가옥구조의 중간에 부엌을 놓은 경우는 아주 특이한 경우이다. 김두한 가옥의 특징은 바로 이 부엌이 건물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이 부엌에는 아랫부분에 나 있는 양편으로 마주 뚫어놓은 까치구멍과, 위편에 또 하나의 커다란 까치구멍이 있다. 이렇게 많은 환기장치를 해 놓은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김두한 가옥은 묘막으로 지어진 집이다. 그러다가 보면 제의를 행할 때, 많은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 그 음식들을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해서는, 환기가 잘 되어야함은 기본이다. 그렇게 음식을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가옥보다 환기장치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김두한 가옥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대문채와 광채를 이어주는 담장이다. 이 담장은 일반적인 담장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흡사 이 담장이 어느 건물의 담벼락과 같은 형태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담장에는 가로 세로로 나무를 질러 담벼락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 실제로 이 김두한 가옥이 모든 담벼락들이 이와 같은 형태로 되어있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담벼락으로 오인을 할 수 있다.

 

250년의 긴 세월을 자리를 잡고 있는 김두한 가옥.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아 여기저기 파손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옛 모습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우리 고택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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