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통영으로 가는 대진고속도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보면 무주 나들목이 나온다. 이 곳을 빠져나가 바로 만나게 되는 19번 국도에서 무주읍 쪽으로 방향을 잡아 들어가다가 무주시내에 진입하여 37번 국도를 따라가면 무주구천동 33경 중 제1경인 라제통문이 나온다. 과거 신라와 백제의 관문이라고 하는 라제통문은 전라북도 무주군 설촌면 소천리에 위치하고 있다.

 

라제통문은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의 경계관문이었다고 전해지는 석굴문이다. 문은 산을 뚫어 관통을 했는데 밑으로는 시원한 계곡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어 자연적인 경관을 보여준다. 인간의 힘을 뚫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동굴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곳 라제통문으로부터 덕유산 정상 부근까지를 구천동 계곡이라고 부른다. 라제통문은 높이 3m, 길이 10m 정도의 산자락 암벽을 뚫은 통문으로 원래 동쪽은 무풍현(茂豊縣), 서쪽은 주계현(朱溪縣)의 땅이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서 무주현이라 하였다.

 

풍습과 문물이 다른 곳을 관통

 

무풍현은 신라의 무산현으로 경덕왕 때 무풍현으로 고쳐 개령군(현 경북 김천시)에 소속시켰다. 주계현은 백제의 적천현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단천현이라고 부르다가 고려시대에 추계현으로 고쳤다. 이와 같이 통문을 사이에 둔 동, 서 두 지역은 고려조에 이르기까지 풍습과 문물이 전혀 다른 지역이었다.

 

6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통문을 사이에 둔 두 지역은 언어, 풍습 등의 차이는 물론 말의 억양까지 달라 두 지방의 차이를 식별 할 수 있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하는 계절에 라제통문을 찾은 날은 비가 뿌리고 있었다.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은 실비가 뿌리고 하늘엔 잔뜩 비구름이 끼어있다.

 

 

라제통문을 바라보니 넓지 않은 통문은 실비 속에서 신비롭기까지 하다. 지난 날 수많은 우리 선조들이 이 곳을 통하여 다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괜히 길이 걷고 싶다. 라제통문 앞에 있는 정자에 오르니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시원하다. 아마 우리 선조들은 이 곳에서 턱에 찬 숨을 돌리고 시원한 물줄기에 부푼 발을 담가 쉬면서 주변 경관을 바라보는 여유를 갖지는 않았을까?

 

무주구천동 계곡은 곳곳이 절경

 

무주군에 걸친 덕유산(해발 1,614m)에서 시작하여 이 곳 라제통문까지 70리에 걸쳐 흐르는 계곡을 무주구천동이라 하여 곳곳에 절경이 펼쳐져 있다. 라제통문을 제1경으로 하여 33경이 펼쳐져 있으니 가히 그 절경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지 않은가? 덕유산은 전라북도의 고산지역으로 무주, 장수. 진안을 걸친다.

 

 

무주군은 충청남북도와 경상남북도 전라북도 등 5개도를 접하고 있는 곳이다. 그만큼 한 군이면서도 각기 다른 생활권을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무주구천동 33경중에 라제통문에서 삼공리까지 13km에 이르는 길에는 14경이 있다.

 

라제통문에서 쉬면서 계곡에 흐르고 물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비가 그치고 조금씩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물기를 머금은 꽃잎들이 싱그럽다. 아마 이런 시원함 때문에 사람들은 이 곳을 찾아 드는 것은 아닌지. 라제통문을 지나 영주 쪽으로 국도를 달리다가 보니 산허리에 걸린 구름사이에 해가 삐죽이 얼굴을 내민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거쳐서 지나갔을 라제통문은 그렇게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구불구불 돌아서 바쁜 숨을 헐떡이며 오른 적상산(1,034m). 덕유산 국립공원 내 소백산맥에 있는 적상산은, 한국 백경 중 하나로 손꼽힌다. 상산(裳山) 혹은 상성산(裳城山)이라고도 불리는 적상산은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을이 되면 온 산이 빨간 치마를 입은 듯 하다고 하여 적상산이라고 했다는 이 산 정상 밑에 적상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10월 중순 답사일정의 끝 날에 찾아간 적상산성은 붉은 나뭇잎이 떨어져 성곽주변을 온통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적상산성은 붉은 나뭇잎이 떨어져 성곽주변을 온통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성곽 안편의 높이는 현재는 1m 남짓하고, 넓이도 1m정도 되게 쌓여있다.


사적 제14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적상산성은 언제 축성이 되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용해 축성을 한 산성은 보기에도 천연의 요새다. 성곽의 높이는 현재는 1m~1m 50cm 남짓하고, 넓이도 1m정도 되게 쌓여있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험한 지세로 인해 성의 구실을 충분히 할 것 같다.

 

총 길이 8,143m에 이르는 적상산성은 본래 동서남북에 4개의 성문이 있었고, 성문에는 2층으로 된 문루가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안국사 주차장 밑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적상산성 호국사비가 남아있어, 이곳 산성 안에 사고를 짓고 사고를 지키는 승군을 모집하던 호국사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적상산성 호국사비가 남아있다.

  
가울이 되면 온통 붉은 치마를 펼친듯 하다는 적상산. 성곽 주변도 온통 붉은색으로 닾였다.


적상산성은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이 있었을 때는 마을 주민들이 산성으로 피난을 하였으며, 고려 공민왕 23년인 1374년에는 최영 장군이 탐라를 토벌한 후 귀경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산의 형세가 요새로서 적당하다고 하여, 왕에게 축성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이곳에 산성을 축성할 것을 건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 산성의 형태로 보아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 그 후 이 산성의 중요성을 느껴 증축하기를 건의했을 것이다.

 

  
적상산성은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이 있었을 때는 마을의 주민들이 산성으로 피난을 하였을 정도로 난공불락이다

  
낙엽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적상산성

 

산성을 따라 거닐어본다. 저 밑에 가물거리는 곳에 마을이 보인다. 그 위로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어, 이곳을 적이 기어오르기란 수월하지가 않을 것 같다. 설령 이곳을 오른다고 해도 성벽 자체를 허물어 버린다면, 오르기도 전에 다 돌에 묻힐 것만 같은 형국이다. 축성을 한 돌은 이리저리 모서리가 날카롭다. 그런 자연스런 돌들을 다듬지도 않고 쌓아올렸다. 성곽 주변은 온통 붉다. 성벽에 난 작은 배수구에도 붉은 단풍이 쌓여,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적상산성에서 내려다 본 마을. 저 밑에 가물거리는 마을이 있다. 저곳에서 적들이 기어오를 수가 있었을까?

  
성에 나있는 배수구에도 온통 붉은색으로 도배를 하였다.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오랜 세월 이 산을 지키고 있었을 적상산성. 가을이 깊어 그 마지막 불을 태우고 있을 때 찾아간 산성이다. 일요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안국사를 찾아든다. 적상산 정상을 밟아보기 위해서다. 산성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보니, 이 높지 않은 성곽이 얼마나 자연과 동화가 되어 있는지를 깨닫는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축성. 우리 선조들의 자연과 하나 됨이 참으로 놀랍다. 늦가을, 붉은 칠을 한 적상산성은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오랜 세월 기다리고 있었다. 


‘사지’란 옛 날에 절이 있던 곳을 말한다. 사지에는 많은 문화재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곳도 있지만. 흔적조차 없이 기록에만 존재하는 곳도 상당히 많다. 지난 5월 20일에 찾아간 사지 두 곳은 바로 후자에 속하는 사지였다. 한 곳은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죽전리에 소재한 전라북도 기념물 제67호인 ‘원통사지(圓通寺址)’ 였다.

또 한 곳은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소정리에 소재한, 현재는 전통사찰 제57호인 송계사가 서 있는 ‘송계사지(松溪寺址)’이다. 현재 원통사지에는 원통사라는 절이 서 있으며, 송계사지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해인사의 말사인 송계사가 서 있다. 그러나 두 곳 모두 옛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어 안타깝다.


나라를 구한 의병의 요람 원통사

무주군 안성면 죽전리에 소재한 원통사지. 이 절은 1949년까지만 해도 원통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순사건 때 옛 건물은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은 1985년 이후에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원통사는 신라 대 처음으로 짓고, 조선조 숙종 24년인 1698년에 고쳐지었다고 하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덕유산 깊은 계곡에 자리한 원통사. 가파른 길을 돌아 오른 절 마당에서 앞을 바라다보면, 덕유산에서 뻗은 산자락이 아름답다. 이 산 중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걱정하다가 피를 흘린 것일까? 원통사지는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의병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싸웠다는 의병의 요람이라고 한다.



송계사 여기저기 널린 돌들이 옛 절터임을 알리는 것인지

원통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돌계단을 올라가니, 정면에 원통보전이 보인다. 우측으로는 명부전이 좌측으로는 요사가 있다. 이 세 전각은 모두 정면 세 칸씩이다. 그리고 원통보전 좌측 뒤편으로 한 칸의 산신각이 서 있다. 전각 모두를 다 합해도 열 칸 밖에 안되는 절이다. 옛 흔적은 찾을 길이 없는데, 여기저기 널려있는 돌에서 그나마 이곳에 옛 절터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과 1907년의 정미칠조약 때, 문태서. 신명선, 김동신 등의 의병장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항일투쟁을 벌였다고 하는 원통사. 이제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돌들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는다.

송계사에서 바라본 덕유산 자락이 아름답다

원효와 의상이 이룩한 송계사, 세월의 아픔만 남고

무주에서 도계(道界)를 넘어 경남 거창군으로 접어들었다. 덕유산 수리봉의 남쪽 기슭에 자리한 송계사. 절을 올라가는 입구에는 커다란 바위돌이 계곡을 덮고 있는데, 맑은 소리를 내며 물이 흐른다. 아마도 이러한 깊은 골에 찾아든 원효와 의상 두 분은, 이 맑은 물소리에 취했는가 보다.

 

송계사를 오르는 길에 만나는 약수터와 영취수를 해체하여 이루었다는 송계사 문각


신라 진덕여왕 6년인 652년에 원효와 의상 두 분의 고승이, 북상면 소정리에 영취사를 창건한 후 5개의 암자를 지었는데 그 중 하나가 송계암이라는 것이다. 그 뒤 영취사가 폐사가 되면서 송계사가 그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송계사는 조선조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5개의 암자가 모두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폐허로 남아있던 송계사는 조선조 숙종 때 진명스님이 송계암을 복원했으나, 6.25 한국전쟁 때 또 다시 전소가 되고 말았다. 그 뒤 여러 번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문각에는 종루가 있다. 대웅전은 신축을 한 것이다

계곡 물소리를 뒤로하고 송계사로 올랐다. 기울어진 영취루를 해체하여 복원한 문각이 저만큼 보인다. 문각으로 향하는 흙길 좌우에는 커다란 노송들이 가지를 아래로 처트리고 있다. 약수 한 그릇으로 목을 축인 후 송계사 경내로 들어갔다. 공양주인 듯한 여자분 한 분만 보일뿐 인적이라고는 없다.

안으로 들어가 삼성각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바람에 대나무 잎이 부딪치며 바스락거린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크지 않은 절집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내려오다 보니 스님 한분이 나와 계신다. 송계암의 옛 흔적을 물으니 알 길이 없다는 대답이다. 하루에 두 곳의 사지를 돌았지만, 기록에만 전할 뿐, 옛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세월은 그렇게 많은 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버렸다. 그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이 두 곳 모두 마음에 멍울을 남겨놓는다. 그저 눈여겨 볼만한 것들만 돌아본 사지탐방. 어디 한 곳 흔적이라도 있지나 않을까 했지만, 남은 것은 바람소리와 물소리뿐. 가슴 한편이 허해져 온다.

전라북도에는 ‘삼한(三寒)’이 있다. 세 곳의 찬바람을 맞을 수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이다. 그 하나는 전주천 가에 자리하고 있는 ‘한벽당(寒碧堂)’이요, 또 하나는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이다. 그리고 남은 하나가 바로 무주에 있는 ‘한풍루(寒風樓)’라고 한다. 세 곳 모두 물에 가까이 있어 시원한 바람을 맞기에 적합하다.

한풍루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한풍루가 언제 지어졌는가는 정확지가 않다. 다만 14세기경에 지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동국여지승람』무주 누정조에는 ‘한풍루재객관전’이라고 적고 있어, 한풍루가 객관에 달려있는 건물임을 밝히고 있다. 한풍루는 선조 25년인 1592년에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현감 임환이 다시 지었다.


한풍루의 수난, 그러나 당당한 자태로 남아

한풍루는 누마루 밑으로 어른들도 지나갈만한 높이로 지어졌다. 정면 세 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정자는, 이층 누각을 계단을 이용해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한풍루의 주초는 네모난 모형으로 돌을 다듬어 사용하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전체적으로 보면 당당한 자태가 남아있어 ‘호남제일루’라고도 부른다.

한풍루는 수난의 역사를 당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임환이 다시 지었으며, 그 뒤에도 몇 차례 중수를 하였다. 이러한 한풍루는 한 때는 일본인의 소유로 넘어가 불교포교당으로 사용이 되기도 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금호루’란 명칭으로 바뀌기도 했다. 수난의 역사를 당한 한풍루는 1971년에야 제 이름과 옛 모습을 찾았다.




아름다운 우물천정, 그러나 굳게 닫힌 문

밖에서 올려다 본 한풍루는 아름다웠다. 주심포계로 지어진 누정은 우물천정을 하고 화려한 색채로 그림을 그려 넣었다. 기둥 밖으로 뺀 누마루에는 난간을 둘러 멋을 더했다. 이층으로 올라가 한풍루의 풍취를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누각으로 오르는 출입구에는 널판으로 짠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도대체 문화재 보호를 한다고 하면, 이렇게 문을 달아 잠가버리다니.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어 찾아간 곳이지만, 가는 곳마다 이렇게 문을 달아 닫아놓기가 일쑤다. 문화재보호라는 것이 문을 닫아야 가능한 것인지. 물론 화재 등 위험으로부터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겠지만, 하루에 몇 시간만이라도 개방을 할 수가 없는 것인지.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이렇게 문이 잠긴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참으로 난감하다. 같은 문화재인데도 불구하고 문을 잠그지 않아도 보존이 잘 되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문을 잠근다고 해서 문화재 보존을 잘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렇게 잠가버리고 나서 제대로 간수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최선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각에는 글귀가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그러나 오를 수 없는 누각 위에 있는 글귀를, 아래에서 읽을 수는 없는 일이고보면 답답하기만 하다. 위로 올라 주변 풍광을 볼 수가 있다면, 더 아름다운 모습을 적을 수 있을 텐데. 보존이라는 명분으로 그저 꽁꽁 닫아버린 문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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