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만 명이나 되는 왜군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남원성을 지키고 있던 군관민은 서로가 하나가 되어 전투에 임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군은 호남을 범하지 못하면 승전하지 못했다는 판단으로, 전주성과 남원성을 공격한 것이다. 우군은 전주성을 공략하고, 좌군 5만 6천은 남원성을 공략하였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전라병마사 이복남 장군이 이끄는 병사 1천과,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천군사로 남원성을 지키게 히였다. 1597년 8월 12일, 왜군은 남원에 도착하여 남원성을 에워쌓았다. 그리고 13일부터 16일까지 공격을 감행하였다. 당시 남원성에는 성 안에 6천여 명의 백성들이 살았다. 군관민 등 이들 1만여 명은 중과부족으로 혈전을 벌이다가,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남원성을 지키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은 만여 명의 군관민을 모신 만인의총과(위) 선조 30년인 1597년 8월 12일 1천여명의 아군 병사들이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위용을 떨치면서 행차를 하고 있다.(가운데) 그리고 1597년 8월 16일 처절한 혈투를 벌이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아래)

만인의총, 그 역사의 현장

남원시 향교동에 자리한 만인의총. 사적 제108호로 지정이 되었으나 이전으로 인해 해제가 되었다가, 1981년 사적 제272호로 재지정이 되었다. 정유재란 이후에도 수많은 폐해를 당한 만인의총이다. 정유재란이 끝난 뒤 피난에서 돌아 온 사람들은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1597년 9월에 용성관 동편에 유택을 조성하였다. 그 후 광해 4년인 1612년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이곳에는 전라병마사 이복남 등 7충신을 모셨다.

효종 4년인 1653년에는 ‘충렬의사 액’이 하사되었고, 숙종 원년인 1675년에는 남원역 뒤 동충동으로 이건하였다. 그 뒤 고종 8년인 1897년 사우를 철폐하고 단을 설치하여 춘추로 배향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단소를 파괴하고 칠백의총 재산을 압수하는가 하면, 제사를 금지시키고 관련자들을 투옥을 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만인의총으로 오르는 계단 입구와 충의문, 그리도 성인문과 위폐를 모신 전각(위로부터)

만인의총, 역사의 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분들이 영면을 하고 있는 곳이다. 초가을이라고는 해도 한낮의 따가운 햇볕은 땀을 솟게 만든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힘들고 지쳤지만,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고 계단을 오른다. 계단 위 대문인 충의문을 지나 성인문으로 들어섰다. 전각이 보인다. 충렬사다. 만인의 위폐를 모신 전각 앞에서 묵념을 올린 후 뒤편으로 돌아 계단을 오른다. 만인의총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다.

목이 메고 눈물이 흐르다.

묘역은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그 한편에 만인의총이란 비가 서 있다. 앞으로 다가간다. 갑자기 목에 메인다. 아주 오래전 우리 선조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던져버렸다. 그리고 이곳에 하나의 봉문만 덩그러니 남겨놓았다. 당시 얼마나 처절한 전투를 벌인 것일까? 변변한 무기도 없는 성내의 백성들은 곡괭이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항전을 했을 것이다.

고작 4천명의 군은 총으로 무장한 왜병을 맞아 살이 찢기고 피가 튀었을 것이다. 그렇게 4일 밤낮을 성을 지키기 위해 혈투를 벌였다. 만인의총 앞에 무릎을 꿇는다. 참 편하게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다. 선조님들의 이런 죽음으로 지켜낸 이 땅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누구랴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겠는가?




경내에 세워진 순의탑과 만인의총 옆에 세워진 비, 그리고 팔충신 사적비와 기념관 내부(위로부터)

이렇게 9월의 한낮에 고요하기만한 봉분 한기. 저 안에 만 명이나 되는 나라를 위해 장렬히 죽음을 택한 우리 선조님들이 계시다. 지금 우리는 저분들에게 어떤 후손들일까? 과연 저들에게 부끄럽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다. 오늘 이 자리에 고개를 숙인 또 하나의 모자라는 후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 같다. 이 아름다운 땅, 단 한 뙤기라도 빼앗기지 말라고.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이나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낙안읍성을 보면 그 형태를 잘 알 수가 있다. 남원읍성은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원지역에 소경을 설치하면서 691년에 쌓은 네모난 형태의 평지 읍성이다. 처음으로 남원읍성을 축성한 것이 1,320년 전이었으니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남원읍성은 조선조인 1597년에는 왜군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중국식 읍성을 본 따서 네모반듯한 성으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의 길이는 2,5km 였으며, 높이 4m 정도로 높게 쌓아올렸다. 사방에는 문을 두었고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성곽 중간 중간에 치를 내었으며, 성안에는 71개소의 우물과 샘이 있었다.


사적 제298호인 남원성의 성곽

옛 영화는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

현재 사적 제29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남원성은 남원시 동충동에 자리한다. 교룡산성을 돌아 내려오면 광한루원으로 가는 큰길가에 성곽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는 그 일부만 남아있는 남원성은 보기에도 매우 견고한 성이었을 것 같다. 1597년 성을 다시 축성 한 후, 그 해 8월에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왜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에 연합군은 남원성에서 왜군에게 크게 패했으며, 이때 싸우다가 전사한 병사와 주민들의 무덤이 바로 만인의총이다. 그 후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 때 많이 허물어져, 현재는 약간의 성터 모습만 남아있다. 남원성은 그렇게 역사의 아픔을 안은 채 이제는 찾는 이 하나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직선으로 축성을 한 남원성. 당시에는 네모난 읍성이었다.

특별한 남원읍성의 구조

남원읍성의 성 모습을 만인의총에 있는 전시관 안에서 대충 둘러보고 와서인가, 성위에 올라 남아있는 성곽을 보니 그 안에 자리했던 성 내의 모습이 그려진다. 읍성 안에는 남북과 동서로 직선대로가 교차하고, 그 사이로 좁은 직선도로가 교차하여 바둑판 모양의 도로로 구성된 시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와 도시가 들어서면서 성곽은 대부분 헐려나갔으나, 시내 중심부의 도로는 지금도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다.

만인의총 전시관에 있는 남원읍성 모형. 네모난 성에 길이 바둑판처럼 반듯하다.

이러한 구성을 하고 있는 현재의 남원 시가지를 보아도, 과거 성내의 길의 구성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일부만 남아있는 성위로 오른다. 평지에 성을 쌓다보니 밖으로는 돌로 축성을 하고, 안으로는 흙으로 그 뒤를 단단히 쌓아 올렸다. 성 위로는 군사들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을 내었는데, 성은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있어 당시 남원읍성이 네모반듯한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간에는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구성한 치가 돌출이 되어있다.




성곽에서 돌출이 된 치(맨위) 치가 돌출이 된 모습(두번째) 치에서 바라다보이는 성벽(3, 4) 치는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치의 구조 등으로 보아 당시 남원성이 그리 쉽게 적의 수중에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성에서 적에게 패해 만여 명의 전사자가 났다면, 그 당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가늠이 간다. 지금은 그저 성을 끼고 달리는 차들의 소음만 한가한데, 당시 이 성 위에서는 성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성내의 병사들과 백성들의, 애끓는 고함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오늘따라 더욱 슬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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