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행궁은 마치 미로처럼 연결이 되어있다. 문이 여기저기 수도 없이 많이 있어, 문 하나를 잘못 들면 이상한 곳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처음 화성 행궁을 찾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말이다. “다 비슷비슷해서 특별한 곳이 없다”는 말이다. 물론 건축의 기법이 비슷하니 다 같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행궁의 건물 하나하나는 그 용도가 다 다르다.

화성행궁은 처음부터 별도의 독립된 건물로 일시에 축조된 것이 아니다. 행궁과 수원부 신읍치의 관아건물을 확장, 증측한 것이다. 정조 13년 7월부터 현륭원 천봉을 앞두고 대대적인 구읍치의 관아와 민가의 철거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화성행궁은 팔달산 기슭 아래로 신읍치를 이치하기 시작한 지 2개월 뒤인 정조 13년 9월 말에는, 벌써 신읍에 조성된 관아 건물은 424칸이나 되었다.


화성 행궁 안에 자리한 서리청(위)과 비장청(아래)


행궁을 비롯한 전각이 500칸을 넘어

당시에 행궁 27칸을 비롯하여, 삼문 5칸, 좌변익랑 9칸, 우변익랑 6칸, 서변행각 5칸, 서상고 10칸, 중문 5칸, 내아 34칸, 중문 4처, 객사 20칸, 중문 2처, 향교 51칸, 중문 1처, 군수고 19.5칸, 공수 7칸, 관청 5칸, 창사 60칸, 각처 담장 278칸 등에 이르렀다. 그 뒤 공사는 계속되어 정조 20년에는 화성행궁이 모두 576칸의 규모를 갖게 된 것이다.

정조는 왕위를 양위하고 난 후 이곳에서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여생을 보내려고 하였다. 또한 이곳을 자신이 추구하던 강력한 왕권의 구심점으로 삼으려고 했을 것이다. 화성 행궁 곳곳에는 그러한 정조의 구상을 엿볼 수 있는 건축물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아마도 서리청이나 비장청도 그 중 한 곳이었을 것이다.

 

서리청(위)과 비장청(아래)의 현판


수라간으로도 사용한 서리청


서리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을 말한다. 서리청은 바로 그 아전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했으며 남향이다. 예전의 ‘금도청(禁盜廳)’ 건물을 이청으로 쓰게 하고, 그 건물을 증축하여 사용하였으며 1795년 을묘원행시에는 수라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2007년 복원하였다.

서리청은 남군영에서 문을 통해 들어갈 수가 있다. 하지만 서리청의 본 문은 5칸의 전각과 마주하고 있는 솟을삼문에 있다. 솟을삼문은 ㄱ자 형으로 되어있으며 중간에 솟을문을 중심으로 우측에 두 칸의 방을 드리고, 한 칸의 문, 그리고 한 칸의 방과 대청을 두었다. 그리고 꺾어진 부분에는 방과 부엌, 그리고 두 개의 방이 있다. 대문채는 모두 9칸이다.


서리청(위)와 비장청(아래) 전각의 측면. 같ㅇ는 5칸이지만 비장청은 서편 한 칸을 마루를 드렸다


화성유수부의 비장들이 묵는 비장청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 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이다.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비장청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서리청을 지나 외정리소 앞에 있는 남향 건물이다. 원래는 정조 13년인 1789년에 세웠는데 정조 20년인 1796년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서리청의 솟을대문과(위) 비장청의 솟을디문(아래). 모두 9칸 ㄱ자로 되어있다


비장청의 규모도 서리청과 흡사하다. 하지만 비장청의 다섯 칸의 건물이지만, 서편 한 칸은 마루를 놓았다. 비장은 조선 시대, 감사나 유수, 병사, 수사, 혹은 견외 사신을 따라다니며 일을 돕던 무관을 말한다. 서리청과 비장청은 각각 하나의 기관으로 독단적인 전각을 갖고 있었음도 주시할 만하다.

어릴 적에 집에는 커다란 개가 몇 마리가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라도 나가면 마을 분들은 곧잘 '개아범'이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다. 진돗개, 불독, 포인타 등이다. 그런 녀석들을 집 안에 가득 키운다는 것이 나름대로 즐거움이기도 했는가 보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 많은 녀석들이 줄줄이 사고를 당해, 몇 녀석이 목숨을 잃었다. 딱이 특별한 사고가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녀석들에 대한 생각이 나서인가 나 스스로가 개를 집에서 키우지를 않았다. 후이 말티즈를 한 마리 키웠는데, 이 녀석은 종견이었다. 머리가 비상해 사람의 지능을 능가할 정도였다. '마루'리고 이름을 붙인 이녀석, 내가 정말 힘들 때 곁에서 즐거움을 주던 녀석이다.

처음으로 새끼를 낳은 깜순이 일가. 이 녀석들을 딴 집으로 보내고 다시는 녀석들에게 정을 주지 않기로 했다.

마루에 대한 기억, 애들을 볼 때마다 새롭다

정말 힘들고 괴로울 때 곁에 있던 마루. 이 녀석은 정말 많은 즐거움을 주던 녀석이다. 여주 아우네 집에 머물면서 일을 보러나가면 항상 곁에 두고 다니던 녀석이다. 이 녀석은 몇 시간을 차 안에 두고 일을 보아도, 한 번도 차 안에 실례를 한 적이 없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이우의 집에 두고 일을 보고 들어왔더니 말가 발을 절룩거리고 다닌다. 놀라서 무슨 일인가 하고 들여다보는데, 아우녀석이 한 마디 한다.



"마루 저 놈은 개가 아녀. 저 녀석 사람인지 알아"
"왜 애가 다리를 저냐?"
'아이들에게 함부로 하길래 혼을 냈더니, 형이오니까 맞았다고 다릴 절고 있네. 형 오기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녔는데"

그럴 정도로 머리가 비상한 녀석을 떠나보내고 난 후, 참 오랜시간 마음이 허전했다. 그리고는 다시는 이렇게 마음 아픈 일은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새끼를 잃고 식음을 전폐한 깜순이

속초애 있을 때 늘 블로그에 올리던 녀석이 있다. 유기견이었는데 절집으로 들어와 돌보기를 몇 달, 이녀석이 새끼를 나았다. 세 마리가 늘 어미와 함께 붙어다니다가, 새끼들을 다른 집으로 보냈다. 그런데 깜순이 녀석 며칠을 밥도 먹지를 않고, 새끼를 찾아 여기저기 찾아 돌아다닌다.  

그런 깜순이가 나에게는 정말 아픔이었다. 아무리 달래도 녀석 낑낑거리기만 하고, 도통 먹지를 않는다. 그런 녀석을 보고 있는 나도 마음이 아프다. 녀석의 눈이 흡사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 같다.

"너도 네 자식 남에게 줘봐라. 가슴이 미어지지"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엇이 다를까? 사람들은 자기 생각만 하다. 녀석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질 않는다. 그 녀석들도 생각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후 나는 녀석들에게 절대로 정을 주지 않는다. 또 다른 아픔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참 매정하다고 한다. 그러나 몇 번을 당해본 아픔. 그것을 알리 없는 사람들의 하는 말이지만, 오늘따라 녀석들이 그립다.답사길에서 만난 조그만 녀석들 때문이다.     

짚은 우리 생활에 아주 오래 전부터 요긴하게 쓰였다. 우선 짚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초가집의 이엉 엮기이다. 추수가 끝나는 가을이 되면 초가지붕을 새로 덮는데, 짚을 엮어 씌우고 맨 위에는 용마름을 얹는다. 그 외에도 소의 사료로 사용하는가 하면, 각종 도구 등을 만들기도 했다. 새끼를 꼬는가 하면 광주리, 짚신, 삼태기, 망태기, 다래끼, 채반, 멍석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짚으로 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짚을 사용하는 것은 제작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사용을 하는 기간이 짧아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없지도 않아, 점차 짚을 이용해 제작한 도구 등이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짚을 이용해 도구 등을 제작하려면 일일이 수공예품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짚공예를 할 수 있는 어르신들이 세상을 떠나자 자연쇠퇴 되기도 했다.


‘호랑이 한 마리 사가시려우’

전주 경기전 안 서재마루. 열심히 짚을 이용해 무엇인가를 만들고 계시는 분들이 계시다. 한 분은 연신 판소리 한 대목을 불러가며 손을 놀린다. 그 옆에는 직접 만들었다는 짚공예품들이 나열이 되어있다. 일반적인 소품이 아니라 멧돼지, 호랑이 같은 동물들이다. 그 짚으로 만든 동물들을 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웃은 것이 아니고, 짚으로 만든 호랑이의 표현력 때문이다. 코털을 세우고 입을 쩍 벌린 호랑이는, 금방이라도 포효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빨이 날카롭고 혓바닥까지 있다. 외국인들은 신기한 듯 들여다보다가 연신 카메라에 담아낸다. 어린 아이 하나가 호랑이가 무섭다고 칭얼댄다. 옛날이야기라도 들은 것일까?



짚을 만지면 손이 거칠어진다. 그러나 예전에는 이렇게 직접 제작을 했다. 멧돼지와 돼지의 표현이 재미있다.

‘호랑이 한 마리 사가시려우?’농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을 듯하다. 일일이 새끼를 꼬아, 그것으로 제작한 호랑이다. 몇 날을 저 호랑이 한 마리를 만들기 위해 소일을 했을 것이다. 그런 것을 가격으로 따질 수는 없다. 그저 그 호랑이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어르신의 미투리는 신어도 좋을 듯

그 옆에는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 한 분이 연신 손을 놀리고 계시다. 앞에 보니 <김형철 할아버지의 수공예작품>이라고 쓰여 있다. 짚신이며 미투리, 소쿠리 등이 보인다. 비닐과 짚을 섞어 손수 제작하신 미투리가 눈길을 끈다. 당장 신어도 좋을 듯하다.


전주 경기전 안 서재마르에서 짚공예를 하시는 김형철 어르신과 수공예품인 미투리

짚공예의 역사는 상당히 길다. 『고려도경』에 보면 짚신을 만들 때는 삼이나 왕골 등을 섞어서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도경은 전 40권으로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 인종 1년인 1123년에 고려를 방문하여, 당대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군사, 풍속, 예술, 기술, 복식 등을 정리한 책이다.

누구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 많은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짚공예. 이제는 실생활에 사용하기 보다는, 집안을 장식하는데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짚공예가 점차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기전 서재 마루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호랑이도,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 호랑이의 떡 벌린 입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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