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한 지역에 답사를 들어가면, 몇 날이고 돌아다니는 버릇이 생겼다. 경비절약도 되고, 빠른 시간에 더 많은 곳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북 정읍을 거의 15일 정도 답사를 했다. 답사의 목적은 고부에서 시작한 갑오농민혁명을 취재하기 위해서다. 한 지역을 들어가 이렇게 오랜 시간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목적한 답사자료 외에 쏠쏠한 재미를 보게 된다. 정읍에서 만난 그 쏠쏠한 재미가 바로 고려 때의 석탑들이다.

 

갑오농민혁명의 이것저것을 찾으러 고부와 정읍시 일원을 돌아다니면서, 정말로 그런 재미를 쏠쏠하게 보았다. 많은 향교나 서원이야 어차피 농민봉기의 원인 중에 하나였으니 답사목록에 당연히 들어 있었지만, 그보다도 많은 석탑과 석불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기대 이상의 문화재를 만날 때, 즐거움이 더 해

 

답사란 항상 기대 이상의 것을 만날 때 피곤함도 잊게 된다. 정읍의 답사가 바로 그렇다. 천년 세월 묵묵히 험한 풍상을 이기며 버티어 온 자태. 고려 석탑의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었다.

 

보물 제309호인 망제동 천곡사지 칠층석탑. 백제양식을 따르고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높이가 7.5m인 이 석탑은 꼭대기의 장식 부분이 없어졌다. 처음에 천곡사지 칠증석탑을 보았을 때, 그저 놀라움이 더욱 컸던 것 같다. 일반 석탑보다 상당히 높은 석탑. 7층 석탑치고는 상당히 높다고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탑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가을이 물들어가는 석탑 주변은 한창 색을 갈아입고 있었다.

 

보물 제309호인 망제동 천곡사지 칠층석탑.

 

돌로 만든 탑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면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한 마디로 그따위 돌이 무엇이 아름답냐는 눈초리다. 그러나 그저 단순한 돌이겠는가? 그 돌에는 장인의 땀과 정성, 그리고 손길이 배어 있다. 그렇기에 그 돌은 생명을 지닌다.

 

그러한 생명이 발길을 붙들고 있다. 고부면 용흥리에 소재한 전북유형문화재 제96호인 해정사지 석탑이다. 원래는 5층 석탑으로 보이나 현재는 3층만 남아 있다. 이중 기단 위에 3층만이 남아 있는데, 많이 훼손이 되긴 했으나 가만히 살펴보면 고려석탑의 고고한 자태를 지니고 있다.

 

하루에 만난 세 개의 탑,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어

 

고부면 장문리 석우제 저수지 길을 끼고 도는 야산에 석탑 1기가 보인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13호인 장문리 5층 석탑 주변에는 묘지 몇 기가 있고, 잘 다듬어진 잔디밭 사이에 저수지를 보고 서 있다. 꼭대기 장식 부분이 없어진 것 이외에는 거의 완벽한 모습의 탑이다. 지붕돌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돌을 깎아 저렇게 날아갈 듯 날렵한 모습으로 만들었을까를 생각하면서 수도 없이 감탄을 한다. 

 

위는 전북유형문화재 제96호인 해정사지 석탑, 아래 좌측은 전북 유형문화재 제13호인 장문리 5층 석탑, 우측은 전북 유형문화재 제95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남북리 5층 석탑 

 

저 날아갈 듯한 비선(飛線), 저렇게 손으로 일일이 돌을 다듬을 수 있었다면, 그 정성 또한 어떠했을까? 그저 고개가 숙여진다. 장문리를 떠나 해가 뉘엿한 길을 달려 남북리로 찾아들었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95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남북리 5층 석탑.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이 되어 있는 이 석탑은, 신라 탑의 양식을 따라 목조 건축 양식을 본뜬 것이 특이하다.

 

4기의 전혀 다른 모습, 그리고 나름대로 표출하는 아름다움. 그런 석탑들을 보면서, 이 석탑을 쌓은 장인들의 예술혼을 느낀다. 답사를 다니면서 만나는 많은 문화재들. 그 안에는 생명이 있다. 그리고 장인들의 마음이 함께 한다. 수 천 년 버티는 힘이 바로 그런 생명이 아닐까?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이나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낙안읍성을 보면 그 형태를 잘 알 수가 있다. 남원읍성은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원지역에 소경을 설치하면서 691년에 쌓은 네모난 형태의 평지 읍성이다. 처음으로 남원읍성을 축성한 것이 1,320년 전이었으니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남원읍성은 조선조인 1597년에는 왜군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중국식 읍성을 본 따서 네모반듯한 성으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의 길이는 2,5km 였으며, 높이 4m 정도로 높게 쌓아올렸다. 사방에는 문을 두었고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성곽 중간 중간에 치를 내었으며, 성안에는 71개소의 우물과 샘이 있었다.


사적 제298호인 남원성의 성곽

옛 영화는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

현재 사적 제29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남원성은 남원시 동충동에 자리한다. 교룡산성을 돌아 내려오면 광한루원으로 가는 큰길가에 성곽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는 그 일부만 남아있는 남원성은 보기에도 매우 견고한 성이었을 것 같다. 1597년 성을 다시 축성 한 후, 그 해 8월에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왜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에 연합군은 남원성에서 왜군에게 크게 패했으며, 이때 싸우다가 전사한 병사와 주민들의 무덤이 바로 만인의총이다. 그 후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 때 많이 허물어져, 현재는 약간의 성터 모습만 남아있다. 남원성은 그렇게 역사의 아픔을 안은 채 이제는 찾는 이 하나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직선으로 축성을 한 남원성. 당시에는 네모난 읍성이었다.

특별한 남원읍성의 구조

남원읍성의 성 모습을 만인의총에 있는 전시관 안에서 대충 둘러보고 와서인가, 성위에 올라 남아있는 성곽을 보니 그 안에 자리했던 성 내의 모습이 그려진다. 읍성 안에는 남북과 동서로 직선대로가 교차하고, 그 사이로 좁은 직선도로가 교차하여 바둑판 모양의 도로로 구성된 시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와 도시가 들어서면서 성곽은 대부분 헐려나갔으나, 시내 중심부의 도로는 지금도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다.

만인의총 전시관에 있는 남원읍성 모형. 네모난 성에 길이 바둑판처럼 반듯하다.

이러한 구성을 하고 있는 현재의 남원 시가지를 보아도, 과거 성내의 길의 구성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일부만 남아있는 성위로 오른다. 평지에 성을 쌓다보니 밖으로는 돌로 축성을 하고, 안으로는 흙으로 그 뒤를 단단히 쌓아 올렸다. 성 위로는 군사들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을 내었는데, 성은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있어 당시 남원읍성이 네모반듯한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간에는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구성한 치가 돌출이 되어있다.




성곽에서 돌출이 된 치(맨위) 치가 돌출이 된 모습(두번째) 치에서 바라다보이는 성벽(3, 4) 치는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치의 구조 등으로 보아 당시 남원성이 그리 쉽게 적의 수중에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성에서 적에게 패해 만여 명의 전사자가 났다면, 그 당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가늠이 간다. 지금은 그저 성을 끼고 달리는 차들의 소음만 한가한데, 당시 이 성 위에서는 성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성내의 병사들과 백성들의, 애끓는 고함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오늘따라 더욱 슬퍼 보인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양반들의 수탈에 대항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교육자이자 지도자이다. 전봉준은 1854년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전창혁과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명숙이라 했으며 족보상의 이름은 영준이라고 한다. ‘녹두장군’은 그의 키가 작아서 붙여진 별칭이다.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가난한 생활을 했으며 끼니를 잇기 위해 약도 팔고 훈장 일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전봉준을 그리는 소리 ‘새야새야 파랑새야’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어렸을 때 한 번쯤은 불러본 노래다. 음률이 처량하기도 한 이 노래는 전봉준이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난 뒤 순창으로 피해 다시 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현상금을 노린 옛 부하 김경천 등의 밀고로 관군에게 체포되었다. 한성부로 끌려간 전봉준은 1895년 3월 30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새야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는 전봉준이 교수형을 당하고 난 뒤, 백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이 성공하지 못하고, 양반들의 세를 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음을 한탄하는 소리이다.


조촐한 초가에서 세상을 바로잡다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는 사적 제293호로 지정이 된 전봉준의 고택지가 있다. 마을 한편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조금 안쪽에 초가로 지은 집이 보인다. 고택지에는 살림채 한 동과 헛간 채 한 동이 있을 뿐이다. 지난 날 어려웠던 살림살이가 느껴지는 집이다.




살림채는 전봉준이 살던 집으로 조선조 고종 15년인 1878년에 지어졌다. 4칸의 - 자형으로 지어진 살림채는 동쪽으로부터 부엌, 큰방, 윗방, 끝 방인 골방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골방 앞으로는 바람막이 벽이 있고, 그 앞에는 한데 아궁이를 두었다. 큰방과 윗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달아내고, 마루 끝에는 부엌과 연결이 되는 문을 달았다.

살림채 앞에 있는 헛간채는 측간과 헛간으로 사용이 되었으며, 두 칸으로 되어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마을의 훈장 일을 맡아하면서 가난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몰락한 양반가라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방안을 들여다보니 그저 어느 양반집 하인들의 방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허름한 가구 몇 가지가 놓여있고, 천정은 서까래와 흑이 그대로 노출이 되어있다. 집을 지을 때 사용한 부재도 모두 인근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그러한 나무들을 이용했다.

부엌은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바닥은 조개무덤이 가득하다. 예전 어머니들은 이 조개무덤이 부자가 될 징조라고도 했다. 집 뒤에는 장독대가 있고, 물길을 낸 골방 뒤로는 물길 위로 지나는 연도와 굴뚝이 서 있다. 연도와 굴뚝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집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이 만석보를 설치하고 과중한 물세를 징수하는 등, 각종 명목으로 수탈을 일삼자 고종 31년인 1894년 1월, 말목장터에서 조병갑을 응징할 것을 역설하고 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관아를 기습 점령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집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오니 우물이 보인다. 지금은 장방형 돌을 이용해 우물주변을 잘 정비를 해놓았다. 전봉준의 고택 우물이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아직도 맑은 물이 고여 있다. 조소마을 주민들이 사용하던 공동우물이다.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녹두장군. 지금은 이렇게 집과 우물만이 남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한 인물을 기억해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민초들의 아픔은 채 가시지를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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