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온 뒤에 걷는 화성은 아름답다

 

어제 수원에는 첫눈인데도 불구하고, 10cm가 넘는 눈이 쌓였다. 거기다가 밤에 갑자기 기온이 하락하여 뒷골목 등의 도로는 그야말로 빙판을 방불케 한다. 12월 6일 아침, 아직 몸이 채 추슬러지지도 않았지만 화성을 향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다. 그저 눈 온 뒤의 아름다움 광경을 공유하기 위해서이다.

 

화성은 어느 계절이나 다 아름답다. 자연과 자연을 닮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자연처럼 화성을 그렇게 은색의 세계로 변해있었다. 지동 골목길을 벗어나 화성 겉으로 천천히 갇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동문(창룡문)을 들어서 동북공심돈과 연무대를 들러 본 후, 다시 남수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2시간 만에 돌아 본 화성 설경

 

제일교회 종탑에 올라가 주변 설경을 먼저 본 후, 돌아본 화성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르고 지냈던, 또 하나의 가슴 뜨듯한 사연을 만났다. 그래서 늘 주장하는 것이, 화성은 보면 볼수록 좋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부터 화성의 전체 구간 중 25%에 해당하는 화성의 설경을 함께 돌아보자.

 

 

화성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명소가 한 곳 생겨났다. 바로 제동 제일교회 종탑이다. 이곳에 올라가면 눈 앞으로 펼쳐지는 화성의 설경을 한 눈에 볼 수가 있다.  

 

 

지동 골목길을 벗어나 화성의 성곽 밖으로 봉돈으로 향했다. 하얗게 변한 화성과 가끔 보이는 발자국들이 조화를 이룬다, 오래 묵은 빛갈과 어우러지는 하얀 색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전설 하나쯤 들려줄 것만 같다. 그리고 포루지붕에 쌓인 하얀 눈이 우리에게 지난 역사의 이야기 한 토막을 알려주려는 듯하다.

 


적송과 눈, 그리고 화성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래서 화성은 눈이 와 미끄럽고 바람까지 불어 조금은 추운 듯도 하지만, 발밑에서 감촉있게 밟히는 눈이 좋기도하다. 동문 앞에는 이 추운 날씨에도 관람을 하러 오는가 보다.      

 

 

 

여장 위에도 눈이 수북히 쌓였다. 어제 내린 눈이 10cm가 넘는다고 한다. 성 벽에는 연신 카메라로 설경을  찍느라 분주하다. 공심돈도 예외는 아니다.

 

 

치성 안을 누군가 한바퀴 돌아서 갔다, 아마도 그 누가보다도 먼저 눈이 쌓인 화성의 벽화길을 걷고 싶어쓴가 보다.그렇게 돌아보는 시간에 화성과 정조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노려을 한다. 

전북 기념물 제9호인 교룡산성. 남원시 산곡동 16-1에 소재한 이 산성은 해발 518m의 교룡산의 천연적인 지형지세를 이용하여, 돌로 쌓은 산성으로 그 둘레는 3,120m이다. 9월 18일 한 낮의 날씨는 아직도 무덥다. 남원으로 들어가 교룡산성을 오르는 길은, 그리 가파르지만 않지만 그래도 꽤나 시간이 걸리는 거리이다. 성은 보이지를 않는데 숨이 차고 땀은 비오 듯 흐른다.

산성 앞으로 가니 성 안에서 무슨 공사를 하는지, 성벽이 터진 곳으로 차들이 드나든다. 차를 왕래하게 하느라, 물길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공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저렇게 아름다운 물길을 막아 찻길을 내 놓은 것이 아쉽다. 교룡산성은 언제 축성이 되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성을 쌓은 방식이나 입지의 형태로 보아 백제 때의 성으로 보인다.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남아있어

현재는 산성의 동문인 홍예문과,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옹성이 남아있다. 그리고 동문의 양 편으로 길게 복원을 한 성곽이 보인다. 군데군데 아직 성벽이 남아있다는 교룡산성. 신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쌓았다는 이 산성은, 우리나라 성곽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남원은 『춘향전』의 무대인 광한루원과, 매월당 김시습의 단편소설인『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인 만복사지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만큼 역사 속에서 정치, 군사, 문화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교룡산성 안에는 우물 99개와 계곡이 있어, 산성 주변의 주민들이 유사시에 대피나 전투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좋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아직도 성 안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군기터 등 당시의 흔적이 보인다.




주변 성곽 중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해

남원에는 주변지역을 합해 20여 개의 산성이 있던 곳이다. 그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그 중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이 바로 교룡산성이다. 고려 말에는 이성계가 퇴각하는 왜구를 맞아 싸웠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는 승병장 처영이 성을 수축하였다고 한다. 성안에는 무기고를 비롯해 별장청, 장대, 염고, 산창 등의 시설이 있었다. 전쟁에 대비해 정유재란 시에는 남원도호부 관내인 운봉, 장수, 임실, 구례, 곡성, 담양, 옥과 등의 양곡을 거두어 교룡산성에 보관하였는데, 각 지역의 곡식을 저장하는 곡성창, 구례창 등의 곡식창고가 있었다.



홍예문 안에 줄지어 선 비(위) 홍예문 안에서 밖을 보면 옹성이 드러 쌓고 있다(가운데) 홍예문 위에서 본 옹성 

홍예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간다. 홍예문 아래편에는 문틀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움푹 파인 돌에는 물이 고여 있어, 흔적 없이 사라진 당시의 영화를 아쉬워한다. 높이 4.5m의 성벽은 단단하게 축성이 되었으며, 축성 당시에는 치첩 1,016개소에 달했다고 하니, 교룡산성의 축성이 대단했음을 알 수가 있다.

홍예문 안쪽으로는 줄지어선 공덕비 등이 보인다. 홍예문의 위로 올라서니 비탈길에 조성한 옹성이 단단해 보인다. 성문을 공격하려면 그 옹성 위에서 쏟아지는 불과 기름, 돌 등을 피하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을 것 같다. 동문 옆으로는 산 정상부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빠져나가고 있다. 아마 저곳에 수문이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교룡산성 안에는 물이 풍부했다는 것을 일 수 있다.



백제 때 축성한 교룡산성. 성곽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을 밟으며 걸어본다. 발아래 밟히는 풀들이 소리를 낸다. 백제 때에 처음으로 축성을 하여,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전쟁의 회오리를 거쳤을까? 아마 그 옛날 우리의 선조들도 이렇게 성곽을 밟으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느라 밤잠을 설치지는 않았을까? 성 안에 자리한 초옥에서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하다. 그렇게 9월 중순 땀을 흘리며 찾아간 교룡산성은,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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