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공무원노조 수원지부장 김해영의 인생이야기

 

초등학교 6학년생이 졸지에 가장이 되었다.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남학생이, 두 동생을 이끌고 사회에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나이 33살에 수원시청에 기능직 공무원이 되었다. 그 뒤 18년 동안 근무를 하면서 중, 고 검정고시를 보아 대학을 들어갔다. 그리고는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한 마디로 놀라울 뿐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박사과정도 4곳의 학교를 동시에 다녔다. 하지만 두 곳은 중간에 포기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시 수원대 사회복지학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전국공무원노조 김해영(남, 51세) 수원지부장의 이야기이다.

 

 

 

“어려서 뛰어 든 사회생활, 별거 다 해보았네요.”

 

1962년 충남 연기군 조치원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직업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산골로 이사를 했다. 그 산골에서 시작된 김해영지부장의 인생이야기는,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다. 그 파란만장한 인생의 이야기의 시작은, 갑자기 부친이 작고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재가를 하셨는데, 계부 쪽에도 아이가 한 명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4남매 중에 한 명만 남기고 동생들과 함께 집을 나오게 되었죠. 가장인데 무슨 공부를 하겠어요. 계부가 중국집 주방장이라, 처음으로 들어간 곳이 중국집에서 배달부터 시작을 했죠.”

 

그렇게 시작한 사회생활이다. 서울 홍대 앞에서 중국집에서의 생활서부터 시작해, 수원과 화성 등지에서 전기공사와 가스배달업, 전자제품 판매원과 모터 수리, 대형트럭 운전사, 동해시와 수원에서의 공인중개사, 그리고는 북아프리카 리비아에 전기 기사직으로 1년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수원시의 기능직으로 공무원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는 초등학교 졸업자가 자격증 몇 장 있다는 것을 큰 자랑으로 알았다. 하기야 20여 년 전에는 자격증을 가진 사람을, 우대하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낯 뜨겁습니다. 한 마디로 배우지 못했기에, 제 스스로를 몰랐던 것이죠. 이제 배우고 나니 그 때 제가 얼마나 유치하고 남들에게 비웃음을 샀을까를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습니다.”

 

배움으로의 끝없는 도전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가 공부를 해 온 과정이 ‘미쳤구나.’란 생각이 든다고 한다. 검정고시로 중, 고 과정을 마치고 대학을 들어갔다. 직업을 갖고 공부를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 하지만 주변의 동료들의 이해와 도움으로 마칠 수 있었단다.

 

“제가 있는 곳이 가정집의 물을 관리해 주는 곳이었어요. 3층까지는 물이 올라갈 수 있도록 수압을 높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산 중턱에 큰 저장고가 있어, 한 사람이 12시간씩 2교대로 24시간 관리를 합니다. 공부가 하고 싶어 저는 야간만 하겠다고 했죠. 그래서 대학을 마칠 수가 있었고요. 다 주변의 직장선배님들과 동료 분들의 도움이 컸죠.”

 

낮에는 학업에 정진하고 밤에는 근무를 했다. 피곤함이 밀려왔지만 배움으로의 끊임없는 열망이 지탱을 하게 했다. 공직자 생활을 하면서 공부까지 한다는 것이 힘도 들었지만, 그래도 박사과정까지 마칠 수가 있었단다.

 

김해영지부장은 성균관 대학교에서 유교철학을 공부해 3년 조기졸업을 했다. 또한 정치외교학을 복수전공을 했다 동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또한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에서 리더십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동방대학원대학교에서 문화정보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쳤다.

 

노조활동은 천명(天命)이다.

 

수원시에 재직을 하면서 무엇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정발전연구단과 시청 공무원 중 1%에 해당하는 24명이 꾸민 혁신선도팀에서도 활동을 했다.

 

“제가 노조활동을 한 것은 2004년부터입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 때문이죠. 그리고 2009년부터 지부장을 맡아보고 있습니다. 노조를 하는 것은 그동안 저를 있게 해 준 수원시에 무엇인가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싶은 것이 이유입니다. 저희 공무원노조 수원시 지부는 현재 회원이 1,700명 정도입니다. 2,580명 정도의 전 공무원가운데 노조에 가입을 할 수 있는 공무원이 1,900명 정도로 보면, 90%에 가까운 시 공무원이 노조원인 셈이죠. 인구 100만을 넘은 지방자치단체 중에서는 가장 높은 비율이죠.”

 

 

김해영지부장은 노조라고 해서 무조건 투쟁을 일삼지 않는다고 한다. 머리띠 두르고 노조원 조끼를 입었다고 해서 일이 해결이 된다면, 머리띠를 몇 개라도 두르겠다고. 먼저 자신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연적으로 일을 해결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저희 노조가 주장하는 것이 ‘공직사회의 개혁’과 ‘부정부패척결’입니다. 사실 노조라는 곳이 가장 부패하기 쉬운 곳입니다. 시정은 노조가 관여를 할 수 있지만, 노조는 그 어느 곳에서도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장 부패하기가 좋은 조직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기 그렇게 썩어 있으면서 부정부패척결을 하자고 한다면, 그 누가 따라줄 것입니까? 저희는 노조원들이 내는 회비도 상당합니다. 그것을 회원들에게 돌려주자는 것이죠. 그래서 체육대회도 열고, 건강검진도 2년에 한 번씩 받던 것을 매년 받기로 했습니다. 또 어려움에 처한 회원이 있으면 도와도 주고, 일 년에 두 차례 장학금도 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어용’이란 소리도 듣는다고 한다. 그럴 때가 가장 마음이 아프다는 것.

 

“공무원이 매달 받는 급료를 ‘봉급’이라고 합니다. 시민들을 섬기라는 뜻이죠. 시민들의 삶을 질을 높여주라고 주는 돈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일 년에 3~4천만 원씩 받으면서 일을 하지 않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래서 일벌백계하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노조원인데 그런 말을 했다고 어용이라는 겁니다. 노조라고 해서 무조건 시정에 반발하는 것은 안 되죠. 봉급을 받으면 그만큼 시민들을 위해 일을 열심히 해야죠. 지금은 그렇게 일을 하지 않고 놀아도 될 때가 아닙니다. 시민들이 힘들게 내는 세금입니다.”

 

11월 1일 오후 5시, 수원시청 청사 한편에 자리한 노조사무실에서 만난 김해영지부장.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우리 수원시의 인구가 114만입니다. 그런데 공무원이 2,580명 정도입니다. 우리시와 비슷한 딴 지자체에 비해 적은 숫자죠. 공무원의 수를 늘려야죠. 그래야 격무에 시달리는 공무원들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공무원들이 건강해야 시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수원시는 인구는 많은데 구가 4개뿐입니다. 이제 분구를 해서 5개 정도의 구를 가져야죠. 집행부를 도와 이것을 반드시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행정안전부에 연신 드나들고 있습니다.”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지칠 줄을 모른다. 아마 그런 열정이 있어서 많은 일을 감당해 내는가 보다. 앞으로 더 많은 공부를 하겠다는 김해영지부장.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며 웃어댄다. 대담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그의 책 <변화와 희망을 위한 철학에세이>에서 본 글이 생각난다. 올해 51세 지천명에 이르렀다는.

 

‘천명(天命)이 있긴 있나보다. 하고자 한 게 아닌데 하고 있고, 이르고자 하지 않았는데 이르러 있는 것을 보면, 묘하게도 맞아 떨어지는 얘기로 들린다. 10년 주기설. 사람마다 삶의 변화가 찾아온다는, 대개 10년 주기로 찾아온다고 한다. 아전인수인지 모르겠으나 필자의 경우를 반추해보면 그리 부정할 일도 아닌 듯해 보인다.’

나의 작업은 서두르지 않는 기다림에 있다
깊은 기억의 공간에서 나만의 시각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모노톤의 색조와 긁고, 쌓는 반복적인 작업과정을 통해서
마음에 새겨진 이미지를 표현하려 한다.

2월 27일 오후, 어느 화가의 작업실 앞에 붙여진 문구이다. 수원시 팔달구 화성 행궁 인근에는, 화성 행궁을 한편으로 비켜 서 있는 낡은 건물 한 채가 있다. 벽에는 온통 칠을 해 놓은 듯하다. 이 건물은 레시던시 입주작가들이 들어 와 작업을 하는 곳이다. 건물 안에는 극단을 비롯하여 총 24개 팀이 들어와 있다.


그림은 내가 살아가는 방법

건물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 한편에 ‘초이(草而)’라는 작가의 경력이 보인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회화과 졸업, 개인전 5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선, 국내, 외 단체전 40회 이상, 현재 한국미술협회, 전업작가협회 회원, 행궁동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 중이다.

최경자(여, 54세) 작가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다고 한다. 29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느라 잠시 쉰 것을 제하면, 한 번도 그림과 떨어진 적이 없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그림이 그녀의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림은 습관적으로 숨을 쉬고 밥을 먹으며, 잠을 자는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한단다.


이곳에서 작업을 한다는 것이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곳 레시던시 입주 작가들을 보는 주민들의 시각이 많이 달라졌죠. 처음에는 이상한 사람들을 바라보듯 했었는데, 그동안 주민들과 많은 소통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주민들도 이 오래된 건물 안에서 적업을 하는 작가들을 조금씩 이해해 가고 있는 듯합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재미있게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라고 한다. 그야말로 그림을 그리면서 인생을 즐긴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활 중 90%는 그림을 대하는 시간이고, 남은 10%만이 남들과 같은 일상이라는 것이다.


열정으로 그리는 그림

스스로의 그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제 그림은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 속에서 생동하는 기운을 그림에 담아내는 것이죠. 흔히 우리가 ‘기(氣)’라고 하는 것을 그림 속에 표현하려고 합니다. 기운이 생동해야 사람이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늘 만족하지는 못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만족을 하면 늙은 것이라고들 합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언제나 조금은 부족한 듯한 생각에서 더 한발 나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리다가 힘들고 좌절이 올 때는 시장을 간단다. 그 안에서 만나는 시끄러움과 같은 것들에서 기운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 번씩 조금은 멈추었다 싶으면, 밖으로 나가 새 기운을 얻어 작업에 임한다는 것.


작가에게 그림을 잘 보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특별히 그림을 잘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 아니라, 그저 본인이 그림을 즐길 수만 있다면 된다는 것. 즐긴다는 것은 그림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림에 대한 공부를 해야만 한단다. 조금은 낡고, 조금은 어수선한 분위기가 나는 작업실. 커피 한 잔의 향이 온 방안에 가득 찬다.

인생이라는 여정을 그림을 그리듯 그려갈 수만 있었다면, 아마도 정말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을 것만 같은 최경자 작가. 49살이라는 나이에 대학원을 진학한 것도, 그녀의 그림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간다. 그래서 벽에 걸린 작품들에서 또 다른 생동감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나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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