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0. 11월의 끝 날이 토요일이라서 인가, 시청 건너편 올림픽 공원 앞에는 많은 차들이 모여 있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모여 어디론가 떠나는가 보다. ()화성연구회(이사장 이낙천) 회원 30여 명도 버스에 올라, 2013년 추계 답사를 준비하고 있다. 마침 날씨도 며칠 간 추웠었지만, 이날은 많이 누그러져 답사하기에는 최적의 날씨였다.

 

일행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에 소재한 백제 때의 고찰인 성주사지. 사적 제307호인 성주사지는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이다. 성주사는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고 하였다.

 

 

평지형 가람 배치인 성주사

 

당시의 절들은 산골에 자리 잡았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의 형식을 택하였다. 절터에는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처, 충남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석등, 보물 제19호인 5층석탑, 금당건물과 그 뒤에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26호인 동삼층석탑, 보물 제20호인 중앙 3층석탑, 보물 제47호인 서삼층석탑가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도 절의 북서쪽에 있다.

 

성주사지는 발굴조사결과 건물의 초석, 통일신라시대의 흙으로 빚은 불상의 머리,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주사는 당대 최대의 사찰이었으며,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사실 성주사지는 1110일에 다녀 온 곳이다. 이 날은 12일로 보령시와 서천, 공주를 돌아보았고, 성주사지는 벌써 10여 차례나 돌아본 곳이다. 하지만 문화재라는 것이 어디 한 반 가보아서 끝낼 일이던가? 시간이 날 때마다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 문화재이고 보면, 이번 성주사지 여행은 또 다른 모습을 보고 왔다.

 

남포읍성과 옛 동헌을 만나다

 

보령시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그 중에도 남포면 읍내리에 소재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5호인 남포관아문을 만났을 때는 신이 난다. 이렇게 읍성과 함께 있는 문화재를 한 곳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한 곳에서 진서루와 내삼문, 외동헌 등을 만날 수가 있고, 거기다가 충남 기념물 제10호인 읍성까지 돌아보았으니.

 

 

남포관아문은 조선시대 남포현의 관아 건물이다. 앞에는 중층 누각인 진서루가 서 있고, 그 뒤편에 내삼문을 들어서면 동헌 마당을 지나서 외동헌을 만나게 된다. 진서루는 외삼문으로 옛 남포현의 출입문이다.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2층 문루인데,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팔작지붕집이다. 아래층은 삼문을 달았고, 2층은 누마루를 깐 후 사면에 난간을 세웠다. 그 위에 올라서면 주변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이 누각에서 남포현감은 주변 경관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동헌의 출입문인 내삼문은 정면 7,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가운데 1칸은 출입문으로 큰 대문을 달고 나머지 칸은 방으로 꾸몄다. 중앙 칸은 한단 올려 맞배지붕으로, 좌우의 방은 지붕 옆면이 여덟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이 문은 출입문 앙 옆을 살창으로 꾸민 특이한 형태이다.

 

 

남포현의 업무를 보던 외동헌은 대청으로 정면 7,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건물이다. 앞면 중앙에 2칸의 대청이 있고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이렇게 외삼문인 누각과 옥산아문, 동헌 등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옛 동헌답게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중앙집권적인 권위의 상징으로 전국의 아문이 똑 같은 형태로 축조되었다. 남포관아를 돌아보고 난 뒤, 읍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읍성은 동헌 뒤편에 성곽이 이어진다.

 

대천 앞바다를 돌아보고, 한 횟집에 들려 푸짐하게 차려진 상으로 점심을 먹은 후 서산 부석사를 거쳐 돌아온 ()화성연구회의 추계답사. 답사를 함께 한 모든 회원들은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담아가기 위해 열심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추억 하나를 만들어주었을 것 같은 좋은 사람들과의 동행. 답사란 아름다운 과거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510일 행궁동을 들려 수원천을 따라 걷다가보니, 어미오리 주변에 무엇인가 작은 것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자세히 보니 오리새끼들이다. 6마리 정도의 새끼오리들이 열심히 물을 휘젓고 다니면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먹을 것이라도 찾는 것인가 보다. 어미오리는 연신 새끼들을 둘러보고 있다.

 

새끼오리들의 크기로 보아, 이 녀석들은 수원천에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생태순환 하천인 수원천에서 오리들도 알을 낳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만큼 수원천이 생명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어미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먹을 것을 찾고 있는 새끼들을 보면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수원천에서 태어날 것인가가 기대된다.

 

 

화성의 주요시설인 수원천

 

수원천은 광교산에서 발원을 한다. 광교산에서 여러 갈래로 내려오는 물줄기를 서쪽으로 유도하여 용연(龍淵)의 곁을 지나게 하였다. 화성에는 750보 거리의 남북을 관통하는 수원천(水原川)이 정비되어 있는데, 화성성역 당시에는 대천(大川)이라고 칭하였다. 축성 당시에는 매년 반복되는 범람이 문제였던 수원천을, 정조 18년인 17943월에는 개천을 깊이 파는 준천(濬川)작업을 하였다.

 

광교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광교대천(光敎大川)’이라고 했는데, 용연을 침범하지 않게 제방을 따라 화홍문으로 들어오는 물길을 대천(大川)’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북수문인 화홍문의 7간 수문으로 유입된 수원천을 너비는 20여 보(23.5m), 깊이는 반장에서 1(1.5m에서 3m) 정도로 정비를 하였다고 하였으니 지금보다 상당히 넓고 깊은 아천이었다.

 

 

행궁에서 창룡문으로 나가는 길목과 대천이 만나는 곳에는 길이 95척의 오교(午橋)’라는 나무다리를 놓았다. 이 오교가 후에 매향교(梅香橋)’로 이름이 바꾸게 된다. 7칸의 홍예를 가진 화홍문을 지난 대천은 성곽 내의 하수(下水)가 더해지면서 수량이 증가되어, 남수문에 이르면 9칸의 홍예를 통과하게 된다. 이 때부터는 '구천(龜川)'이라는 이름으로 성 밖으로 배출된다. 지금 남수문 아래편의 구천동도 수원천의 명칭에서 유래한 동명이다.

 

아름답게 지켜져야 할 수원천

 

이렇게 수원천이 생명의 보금자리로 변화하고 있는 시기에, 마침 13()부터 염태영 수원시장을 비롯하여 시의회 의원과 수원시정연구원, 기업 등 78명이 내달 3일까지 수원천을 비롯화여 서호천과 원천리천, 황구지천 등 수원의 4대 하천을 도보 탐사할 예정이라고 12일 밝혔다.

 

 

이번 하천탐사의 주요 일정으로는 13일에는 수원천 약 14유역(광교저수지~남수문~군부대앞), 20일에는 서호천 약 12유역(이목2~SKC~평고교)을 돌아본다. 28일네는 원천리천 약 11km 유역(원천저수지방류구간~삼성교~대황교동)을 걷게 되며, 63일에는 황구지천 13km 유역(왕송저수지~금곡교~서호천합류지점)을 돌아보게 된다

 

수원시는 이번 탐사에서 하천 유역주변의 오염원과 수질상태, 하천생태계 등을 육안으로 조사할 예정이며, 퇴적구간, 주변토지이용 상황 등 유지관리 실태를 세밀히 살펴볼 방침이다. 또한 하천정비 사항과 장마철 대비 하천관련 안전관리 여부, 산책로 안전 등 안전문제도 집중 점검할 예정이다.

 

 

시는 대대적인 도보탐사를 통해 강제적 하천 관리보다 자연상태의 하천을 유지하고 생태계를 보전할 효율적 방안을 도출하는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4개 하천에 대한 도보 현장탐사가 마무리되는 6월초에는, 염태영 시장 주재로 대규모 토론회를 개최해 하천살리기 사업의 바람직한 방향과 하천의 사전관리 기능 강화방안 등을 수립할 예정이다.

 

수원시민의 휴식공간이자 역사의 현장인 수원천. 새 생명을 잉태한 수원천이야말로 깨끗하게 보존하여야 수원시의 젖줄이다. 곳곳에 나뒹구는 오물 등이 보인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이번 탐사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은, 시민들의 수원천을 깨끗하게 지켜야하는 의식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