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당진시 면천면 성하리 510에 소재한 영탑사. 해발 210m의 차령산맥에서 뻗어나간 상왕산 동쪽 산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고찰이다. 영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로서 사적기가 없어서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말 풍수지리설로 유명한 도선국사가 창건했으며, 고려 충렬왕 때 보조국사 지눌이 중건했다고 한다.

 

영탑사라는 사명은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영탑사에는 부처의 진신을 이르는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으며, 유리광전 뒤에는 바위 위에 7층 석탑이 서 있어 이름과 잘 맞아 떨어지는 절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바위를 기단으로 삼은 칠층석탑

 

영탑사 경내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6호로 지정이 된 영탑사 칠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당진군사에는 조선 정조 22년인 1798년 연암당 지윤스님이 유리광전을 보수하면서, 그 뒤 바위에 5층탑을 세운 후 절 이름을 영탑사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이 석탑은 원래 7층탑이었던 것이 이후 훼손되어 5층만 남아있던 것을, 1920년대에 이 절의 신도들에 의해 다시 7층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영탑사 칠층석탑은 바위를 기단으로 삼았다. 별도의 석재로 구성한 기단부가 없이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칠층의 탑신을 올려놓았는데, 이 탑은 바위와 탑이 만나는 부분이 조금 어긋나 있어, 원래의 자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탑신의 각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1층부터 5층까지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처마의 선이 거의 직선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새로 조성한 6층과 7층은 네 귀퉁이에서 심하게 들리고, 밑면의 받침조각도 얇아서 서로 대조를 보이고 있다.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은 지극히 간략화 된 모습이다.

 

대원군 때문에 이곳으로 탑을 옮겼다고?

 

이 영탑사 칠층석탑에 대한 또 하나의 전설이 전하고 있다. 대원군이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서 덕산에 소재했던 가야사를 불태웠는데, 이 대 가야사의 스님들이 영탑사로 금동삼존불과 법당의 범종을 옮겨왔다는 것이다. 후에 가야사가 불에 타면서 무너져 있던 탑도 옮겨와 이곳에 다시 쌓았다는 것이다.

 

 

현재 영탑사 경내에 보관 중인 범종은 영조 36년인 1760년에 만들어진 범종이다. 이 종에는 ‘17602월 가야사 법당 금종을 백근의 쇠를 녹여 만들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정확하지는 않으나 대원군이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 가야사를 불태웠고, 그 때 범종을 영탑사로 옮겼다는 설이 맞아 떨어진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영탑사의 칠층석탑도 가야사에서 이곳으로 옮겨왔을 확률이 높다. 탑과 바위가 만나는 부분이 조금 어긋나 있는 것도, 탑을 단 곳에서 옮겨 왔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가야사에서 이곳 영탑사로 옮겨온 범종과 보물인 금동비로자나불 삼존좌상이 모두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야사에서 옮겨온 탑에 무게를

 

영탑사에서 칠층석탑을 처음으로 대면을 할 때 참으로 특이한 탑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바위 위에 탑을 조성한다고 해도 기단부를 놓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영탑사의 칠층석탑은 보조국사 지눌이 가야사를 중건할 범종과 샅은 시기에 가야사에 세웠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자연 바위 위에 올라있는 칠층석탑. 고려시대의 탑이라고 하는 영탑사 칠층석탑은 기교는 보이지 않지만 상당히 힘이 있어 보인다. 오층까지의 지붕돌과 6, 7층의 지붕돌이 경사면 등에서 많은 차이가 보이고 있어, 이 탑의 윗부분인 6, 7 층은 후에 보완을 한 것임을 알아 볼 수 있다.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사학을 말한다. 16세기 후반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서원은 려말선초에 존재하던 서재의 전통을 잇는 것이었다. 서재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서재는 학문을 연마하던 곳인 데 비해, 서원은 학문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선현을 모시는 사묘로서의 기능을 함께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향교에 비해서 서원은 그 규모 등에서 작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각처에 산재한 서원에는 어린 학동들이 학문의 터득을 위해 모여들었다. 서원은 대원군 때 전국에 있는 것들이 대부분 헐리게 된다. 아마도 서원철폐령이 내리지 않았다고 하면, 지금보다 몇 배나 되는 서원이 남아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계절이 배어있는 곳, 거북이와 대면하다.


정읍시 북면 보림리에 위치한 남고서원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6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그저 별다르지 않은 이 남고서원은 가을이 배어 있는 곳이다. 남고서원은 호남의 성리학자인 이항과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천일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조선조 선조 10년인 1577년 처음으로 세워져 숙종 11년인 1685년에는 사액서원으로 선정이 되었다.


사액서원이긴 하지만 여느 서원과 마찬가지로, 고종 8년인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리고 말았다. 그 후 김천일의 후손들이 1899년에 다시 세웠다. 이항의 문집목판을 소장하고 있는 남고서원은 현재는 이항, 김천일을 비롯하여 김점, 김복억, 김승적, 소산복 등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있다.


손을 맞는 두 마리의 거북이가 반기다.


가을이 되면 서원의 담 안에 가을빛이 아름답다는 남고서원. 외삼문을 들어서 뒤를 돌아보면 괜한 웃음을 짓는다. 문을 잠구는 빗장걸이가 두 마리의 거북이가 대신하고 있다. 그저 '별것이 아니다'라고 돌아설 수도 있겠지만 괜히 눈길을 끌고 싶은 것인지. 좌측 거북이는 머리를 쥐어박았는지 무엇이 보기 싫었는지 머리를 졸아들었다.

 

 


외삼문 곁 작은 쪽문도 재미있다. 돌담 사이에 난 쪽문은 그저 어른 한 사람이 통과할 만하다. 마음을 넉넉히 먹지 않으면 짜증이라도 날만한 그런 크기다. 왜 이렇게 작은 협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을까? 아마도 자신을 이렇게 작게 내려놓으란 소리인가 보다. 남고서원이 재미있는 모습들이다.


가을빛이 아름다운 남고서원


올봄과 지난가을 두 차례 남고서원을 찾았다. 서원 안으로 들어가면 서원 강당건물이 있고, 뒤로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서 있다. 서원의 뒤로는 이항 등의 위패를 모신 문경사가 자리하고 있다. 봄에 찾아갔을 때는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다고 기억을 한다. 하지만 가을에 찾아가는 남고서원의 멋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들이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우수수 떨어지는 노랑 은행잎들이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것이 마치 춤을 추는 듯하다. 그런 가을 정취를 느끼며 글을 읽는 학동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작은 시골에 소재한 서원이지만 이 남고서원이 왜 철폐령에서까지 제외가 되었는지, 나름대로 수긍이 간다.


유난히 서원이 많은 정읍이다. 아마 그만큼 이곳은 양반들이 선호하는 지역이었을 것이다. 곡창지대인 이곳에 모여들어 자녀들을 교육시키려다보니 그만큼 많은 서원이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서원의 존폐를 떠나 노랑 가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


문화재를 찾아본다는 것은 어느 때 찾아갈 것인가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남고서원이야 말로 가을 은행잎이 물드는 시기에 찾아가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다. 올 가을, 서원에 은행 빛이 아름답게 물이 들 때, 다시 한 번 여정을 잡아야겠다.

서울 종로구 사직로에 소재한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경복궁은 왕도인 한양을 상징하는 계획된 궁으로, 북으로는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를 잡고 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현재의 세종로)가 펼쳐져 있었다.

 

경복궁은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된 것을, 고종 때인 1867년 중건을 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경복궁의 중건은 전국에서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었으며,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남사당패 등 많은 유랑집단이 노역장에서 마당놀이를 펼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경복궁 안의 휴식처 향원정

 

보물 제1761호인 경복궁 향원정은,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으면서 그 앞에 연못을 판 후, 연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고 지은 2층의 정자이다. 연못 가운데 인공섬에 있는 향원정으로 가는 길은, 나무로 만들어진 ‘취향교’라는 구름다리가 있었다.

 

향원정은 왕과 그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다. 향원정은 경복궁 후원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축조가 되었으며, 육각형의 초석과 육각형 평면 육모지붕 등 육각형의 공간으로 구성하였다. 향원정은 조선조 말의 건축물 중에서도 가장 섬세하고 미려하게 다듬은 모든 구성요소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비례감이 뛰어난 정자이다.

 

 

 

 

원정은 경복궁 북쪽 후원에 있는 향원지 내의 가운데 섬 위에 건립된 정자로, 향원지의 ‘향원’은 ‘향기가 멀리 간다’는 뜻이다. 향원지가 있던 곳에는 원래 세조 2년인 1456년에 ‘취로정(翠露亭)’이란 정자를 짓고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세조실록」에 보인다. 향원은 북송 때의 학자인 주돈이(1017∼1073)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에서 따온 말이다.

 

질병통을 얹어 치장한 지붕이 압권

 

향원정의 평면은 정육각형으로 아래와 위층이 똑같은 크기이다. 정자는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으로 된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일층과 이층을 관통하는 육모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이층 기둥 위에 짜여 지는데,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결구하였다.

 

 

 

 

일층 평면은 바닥 주위로 평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고, 이층 바닥 주위로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사방둘레의 모든 칸에는 완자살창틀을 달았다. 겹처마로 마련한 처마와 육모지붕, 그리고 중앙의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중심점에 절병통을 얹어 치장을 한 것은 가히 압권이다.

 

향원지는 4,605㎡의 넓이의 방형인데, 원지의 수원은 북쪽 언덕 밑에 솟아나는 '열상진원(洌上眞源)'이라는 샘물이다. 이 물을 건너 향원정에 들어가는 다리인 '취향교'는 본래 목교로, 1873년에 향원정의 북쪽에 건청궁 방향으로 설치되었다.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들어가도록 북쪽에 있었던 다리인데, 6·25전쟁 당시 없어진 것을 1953년에 남쪽에 다리를 놓아서 현재에 이른다. 본래의 취향교는 조선시대 원지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폭 165cm, 길이 32m 정도였다.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지었다. 그리고 건청궁의 앞에 연못을 파고, 가운데 섬을 만들어 세운 2층 의 정자이다. 향원정은 고종 4년인 1867년부터 고종 10년인 1873년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복궁 안에 가장 아름다운 정자 중 하나라는 향원정. 다리를 건너면 남쪽에는 함화당과 집경당이 위치해 있다.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02호인 송호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서원은 고려 중기의 인물인 충숙공 문극겸 선생을 배향한 곳이다. 8월 20일 비가 내리는 날 다녀온 답사에서, 가장 애를 먹고도 제대로 사진조차 찍지 못한 곳이다. 관리인도 없고, 관리사는 텅 비어 금방이라도 무엇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일각문은 새로 보수를 한 듯한데, 배부른 고양이가 뛰쳐나가는 바람에 덩달아 놀랐다. 담장 밖에서 여기저기 사진을 찍으려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서원만 겨우 몇 장 사진을 찍고, 뒤편 사당은 아예 오를지조차 못했다. 비가 왔는데 잡풀이 발목을 넘게 자라, 온통 신발 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에 소재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02호인 송호서원. 계단에는 관리를 하지 않아 풀이 가득 자라나 있다.

문무를 겸비한 문극겸 선생

문극겸(1122 ~ 1189) 선생은 고려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덕병, 본관은 남평이다. 여러 번 과거에 낙방을 한 선생은,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좌정언으로 있을 때 의종의 총애를 받던 내시 백선연 등의 잘못을 비판하는 상소를 했다가, 의종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었다.

드라마 무인시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문극겸 선생은, 의종이 선생의 상소가 정당한 것임을 알고 복관시킨 뒤 벼슬을 올려주기도 했다. 1170년 정중부 등 무신들이 정권을 잡아 명종을 왕위에 앉히고 문신들을 마구 처벌하였는데, 그는 무신정변의 주역인 이의방의 인척인 점으로 무사히 살아났다. 선생은 이의방과 가까운 점을 활용하여 이때 이공승 등 많은 문신들을 구해 주기도 했다.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갔는데 서원 앞마당에는 풀이 발목을 덮어 물이 신 안에 가득고였다(위) 문이 잠겨져 있어 담 밖에서 촬영을 하였다.

원래 문신인 선생은 무신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가져, 문무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후에는 최세보 등과 함께 고려 『의종실록』을 편찬하였다. 이의방의 사돈인 선생은,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 이거의 장인이기도 하며 조선 태조 이성계의 7대 외조부이기도 하다.

두 번이나 퇴락한 송호서원,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비를 맞으며 여기저기를 돌아본다. 원래 송호서원은 1777년에 삼가현 역평에 세워졌던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지가 되었다가, 1957년에 사우 등이 복원되었다. 그런 송호서원은 합천댐의 공사로 인해 수몰지역에 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이건한 것이다.



일각문과 담장을 새로 보수를 하였다.(위) 그러나 관리동은 비어있고, 마루에는 말벌집이 떨어져 깨져 있다. 말벌이 즐비하게 죽어있다. 

두 번이나 새롭게 자리를 튼 송호서원. 계단을 올라 솟을삼문을 촬영하려고 하는데, 마당에는 풀이 가득하다. 계단을 올라가니 문은 굳게 닫혀있다. 비에 젖어가면서 옆으로 돌아가니 관리사인 듯한 집이 있다. 그러나 퇴락한 집은 금방이라도 무엇인가 튀어 나올 것만 같다. 마루에는 말벌집이 떨어져 으깨어져 있다.

죽어있는 말벌들을 보니, 누군가 약으로 말벌을 죽인 듯하다. 이왕 말벌 집을 떼었으면 청소라도 좀 해 놓던지. 질퍽거리는 땅, 그리고 자라난 잡풀들. 송호서원은 그렇게 또 한 번의 퇴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뒤돌아 나오려는데 배부른 고양이 한 마리가 울어댄다. 아마도 갈 곳 없어 이곳에 묵는 녀석이지만, 녀석도 이렇게 퇴락해 가고만 있는 서원이 안타까운 모양이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1가 154, 중앙공원 안에는 '망선루'라 이름을 붙인 누각이 서 있다. 아래는 둥근기둥을 세워 사람들이 밑으로 통행을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계단을 올라 이층 누각으로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망선루는 고려시대 청주관청의 하나로, 관리들이 머무는 숙소인 객사 동쪽에 있던 '취경루'에서 유래한 것이다. 망선루는 청주지역에 남아있는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망선루에 대한 기록은 고려 공민왕 10년인 1361년에 보인다.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청주에 머문 기념으로, 청주에서 과거시험을 치르고 합격자를 취경루에 방을 써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조선조 세조 7년인 1461년에 목사 이백상이 중수하고, 한명회가 누각의 명칭을 ‘망선루’라 하였다고 한다.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친 망선루는 근세에까지 유지되다가, 일제 때에는 무덕관의 건축으로 철거되기도 했다.  


청주 중앙공원 안에 자리한 망선루
 
역사의 중심에서 수난을 당한 망선루
 
망선루는 1923년에는 남문로 제일교회 뒤편으로 이건되어, 교육 및 집회장소로 활용이 되었다. 그 뒤 기둥이 심하게 부패가 되어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2000년 12월 중앙공원으로 복원을 하여 옮겨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마련된 목조 이층 팔작중층 누각인 망선루는, 그렇게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그 중심에 서 있던 건물이다.
   
청주 중앙공원은 늘 많은 사람들로 시끌하다. 한편에서는 술잔을 기울이고 있고, 정신없이 노름 삼매경에 빠진 어르신들도 있다. 윷놀이를 하느라 소리소리 지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저 무료하게 소일하는 것이 생활인양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재미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 중앙공원 바로 옆이 청주 젊은이들의 거리라고 한다면, 이곳은 연세가 드신분들의 천국이다.




하수도 뚜껑이 되었던 척화비

망선루는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굳게 판자문으로 닫혀있다. 이렇게 닫혀진 문화재를 볼 때마다 짜증을 내던 나이지만, 이곳에서는 오히려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공원내에 술에 취한 많은 사람들이 문을 열어놓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망선루를 돌아본 후 한편을 보니 작은 비석 하나가 서 있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이 된 '청주척화비'이다.

고종 8년인 1871년에 세워진 대원군의 척화비. 위가 잘려나간 이 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12자가 음각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글씨로 '우리의 만대자손들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라 적었다. 이 척화비는 고종 8년인 1866년 프랑스함대의 침략인 병인양요와, 동년 미국이 통상을 요구하며 침입을 한 신미양요를 거친 후 전국에 세워진 척화비 중 하나이다.


윗부분이 떨어져 나간 척화비

이 척화비는 일본 공사의 요구로 철거가 되어, 석교동 하수도의 뚜껑으로 사용하던 것을 1976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높이 108cm, 너비 47cm 크기의 이 비석 하나가 역사의 아픔을 말해주고 있지만. 이 비석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보이지를 않는다. 망선루와 척화비, 역사의 흔적인 두 가지의 문화재가 서 있는 중앙공원. 사람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이, 그저 즐기면서 하루 해를 보내고 있다. 문화재라는 것에 관심이 없는, 요즈음 세상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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