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하지 마라 내가 다 도와주마.

너희 자손들 부귀공명하고 무병장수하게 도와주고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 집안에 우환 없고 날마다 복이 넘치게 들어오게 도와주마.“

 

20일 오전 10, 수원시 영통구 원천동 595번지에 소재한 매원초등학교 건너편, 광교호수공원 마당극장에서는 한바탕 질펀한 굿판이 벌어졌다. 원천동주민자치위원회가 주관을 하는 주민소통과 화합하는 공감의 장 마련을 위한 2014 원천저수지 당산 용왕제 축제가 판을 벌인 것이다.

 

 

지금은 광교호수공원으로 명명된 이곳은 과거 원천유원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곳이다. 수원은 물론 근동의 사람들은 이곳에 대한 추억이 남다른 곳이다. 연인끼리 이곳을 찾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가 하면, 과거 멀리 떠나지 못하는 신혼부부들도 이곳으로 신혼여행을 오고는 했던 곳이다.

 

원천동은 장주면 원천이 태장면 원천리가 되고, 광교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이의동으로 흘러 원천저수지가 되었다. 이 물은 수원의 동쪽 경계를 흐르는 냇물로 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수자원이었다. 이러한 원천저수지는 후에 원천유원지로 조성이 되어 수많은 추억을 많은 사람들에게 만들어 주었다.

 

 

옛 추억을 되살리다.

 

이곳 원천동에는 아직도 원천유원지 시절을 못 잊는 토착민들이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다. 지금은 광교신도시로 탈바꿈을 해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주변은 완전히 변해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곳 원천동에는 두 곳의 서낭터가 있었다. 원천동 80-15에 있던 서낭터는 역말 사람들이 모시던 서낭으로 수백 년 묵은 소나무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 한 곳은 원천동 155번지에 있던 서낭터로 원천유원지 입구 어수내 마을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서낭은 마을 주민들이 당제를 지내던 곳으로 지역주민들의 대동단결을 위한 서낭제가 지내졌으나, 원천유원지가 개발되면서 사라졌다. 이러한 원천유원지의 변화를 안타깝게 여기던 주민들이 원천이라는 이름과 옛 풍취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원천 저수지 당산 용왕제를 축제화 시킨 것이다.

 

 

이날 굿은 경기안택굿보존회(회장 고성주) 회원들이 담당을 했으며, 앉은부정으로 굿을 시작했다. 이날 이 용왕제를 지내는 자리에는 영통구 지역의 박광은 국회의원과 경기도의회 오완석의원, 수원시의회 조석환의원, 최영옥의원 등이 참석을 했다. 또한 수원시 김영규 안전기획조정실장과 이해왕 영통구청장 등도 함께 자리를 했다.

 

굿판은 열린 축제요 나눔의 미학이란다

 

토요일이라고 해도 오전시간이라 그리 많은 주민들이 동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 사람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200여 명의 주민들은 순서가 바뀔 때마다 큰 박수로 화답을 했다. 이해왕 영통구청장은 인사말을 통해

우리가 이렇게 원천저수지 당산 용왕제를 열게 된 것은 우리 시민 모두가 잘 살고,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있기를 바라는 의미에서이다. 또한 우리 전통을 지켜 가는데 우리 모두가 함께 동참하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다. 이러한 용왕제를 우리는 우리의 문화로 받아들여 앞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다.

 

 

굿은 경기안택굿보존회 부천지부장인 이정숙의 본향도당맞이에 이어 고성주 회장의 안당제석굿으로 이어졌다. 이어서 김애선의 살풀이와 임영복의 대감굿, 김현희 외 3명이 추는 신칼대신무 등이 무대에 나섰다. 대감굿에서는 굿판에 모인 관람객들에게 술을 따라주고 떡을 나누어주었다.

 

끝으로 굿석에 들어선 고성주 회장은 창부와 서낭굿을 하면서 한바탕 소리를 풀어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박수를 치면서 즐거워했으며 굿을 마친 후에는 굿상에 진설된 모든 음식을 관람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굿판은 열린 축제요 나눔의 미학이란다. 처음부터 끝까지 굿을 지켜본 한 시민은

정말 즐겁습니다. 사회자가 굿은 종교로 다가서지 말고 즐거운 축제로 다가서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마음을 열고 보니 정말 흥겹기 짝이 없습니다. 앞으로 이 용왕제를 매년 이어간다고 하니 우리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축제로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라고 한다.

당산이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의 신표이다. 당산은 장승, 신목, 돌탑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에 있는 당산은 당산나무와 석장승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0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이 당산은, 운봉읍사무소 근처 숲 앞에 자리하고 있다.

남녀 한 쌍으로 조성된 석장승은 가운데 길을 두고, 양편에 마주보고 서 있는 남녀 한 쌍의 부부장승이다. 주변에는 숲이 있고, 남장승 곁에는 당산나무가 있다. 이 곳 당산나무 앞에는 제단이 있으며, 주변에는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다. 원래는 솟대와 함께 있었다고 하나, 현재 솟대는 사라지고 장승만 남아있다.



허한 곳을 방비한다는 서천리 장승

마을 입구 양편에 서 있는 이 부부장승은, 마을의 허한 곳을 방어하고 서쪽을 진압한다는 의미에서 각각 ‘방어대장군’과 ‘진서대장군’이라고 복판에 새겨져 있다. 남장승의 복판에는 ‘진서대장군’이라 쓰여 있으며, 머리에는 벙거지를 쓰고 튀어나온 둥근 왕방울 눈을 하고 있다. 얼굴에는 주먹코와 아래로 쭉 뻗은 송곳니가 표현되어 있다.

처음 대할 때는 우락부락한 것이 무섭게 보이지만, 찬찬히 훑어보면 친근한 이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장승은 ‘방어대장군’이라 복판에 음각을 하고 있으며, 귀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석장승을 가만히 보면, 그 제작기법이나 시기가 다른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어느 시기에 한 기의 장승이 먼저 서고, 후에 나머지 장승이 제작된 것은 아닐까 추정한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목이 부려졌다는 석장승

이 석장승을 보면 양편의 석장승이 모두 목 부분에 회칠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목이 떨어진 것을 붙여 놓은 듯하다.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두 부부장승이 싸움을 하다가 진서대장군의 목이 부러져 마을 주민들이 붙여 놓았다고 한다.

이 장승의 곁에 있는 당산나무에서는 정월 초하룻날 주민들이 음식을 차려놓고 당산제를 지내고 있으며, 당산나무에 제가 끝나면 장승 앞에도 간단한 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이 마을의 주신은 당산목이 된다. 하지만 이 석장승의 경우 주신은 아니라고 햊도 목장승과 같이 썩어서 부러지거나 넘어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중요한 문화재이다.




일몰에 찾아간 장승, 해학적인 모습이 정겨워

마을 사람들은 이 석장승을 ‘벅수’라고도 부른다. 7월 24일 오후 6시가 넘어 찾아간 장승이다. 늘 운봉지역을 다니면서도 꽤나 늦게 찾아갔다. 자세히 살펴보면 가슴에 희미하게 표현이 된 창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눈은 왕방을 눈으로 이 지역 장승의 형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복판에 뚜렷한 ‘방어대장군’이나 ‘진서대장군’이라 쓰인 글씨는, 이 장승이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의 직능을 갖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은 정월 초하루에 당산나무에 당산제를 지내고 난 후, 장승에 조촐하게 제를 지내고 있지만, 어느 시기에는 이 장승이 주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장승은 한 때 도난을 당했다가 다시 찾았다고 하는데, 도난당했을 당시 장승에 올리던 당산제가 신목으로 옮겨 간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마을을 수호한다는 남원 운봉 서천리 석장승. 오랜 세월을 주민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 두 기의 석장승은, 그 해학적인 얼굴 모습만큼이나 주민들의 마음에 편안함을 주고 있다.

6월 24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장맛비라고 하더니 며칠 동안 참 사람을 움직일 수 없도록 뿌려댄다. 일기예보에서는 남부지방에 꽤 많은 비가 내릴 것이란 예보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진주에 볼일을 보아야하니, 후줄근하지만 길을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출발은 했지만 이 빗길에 어찌해야 할지.

몇 곳을 들려 당동 당산을 찾아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거창 가조면 소재지에서 가북면 방향 지방도 1099호 선을 타고 가다보면, 우측으로 사병리 당동마을이 나온다,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당산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외부인에게 그 속내를 보여주기 싫은가보다. 몇 분에게 길을 물어 겨우 마을 뒤편에 자리한 당산을 찾았다.



당산은 우리민족의 정신적인 거처

‘당산(堂山)’은 지역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서는 산신당· 산제당 혹은 서낭당이라고 부른다. 영남과 호남 지방에서는 주로 당산이라고 한다. 당산은 돌탑이나 신목, 혹은 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신표로 삼는다. 집을 지었을 때는 그 안에 당신(堂神)을 상징하는 신표를 놓거나, ‘성황지신’이란 위패를 모셔 놓는다.

당산은 내륙지방과 해안지방의 부르는 명칭 또한 다르다. 내륙에서는 신당, 당집, 당산 등으로 부르지만, 해안이나 도서지방에서는 대개 ‘용신당’이라고 부른다. 이 당산에서는 매년 정월 초나 보름, 혹은 음력 10월 중에 길일을 택해 마을 주민들이 정성을 드린다. 당산제를 지낼 때는 집집마다 추렴을 하여 제물을 마련하는데, 이런 이유는 마을 사람 모두가 똑 같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당산제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일제치하에서 문화말살정책을 편 것도, 그 한편에는 당산이 갖는 공동체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은 이 당산에 모여 정성을 드리고 음식을 나누면서, 서로의 끈끈한 정을 이어갔던 것이다. 마을의 안녕과 풍농과 풍어, 그리고 다산을 기원하던 곳인 당산. 그 당산에서 이루어지는 기원은 우리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당산은 우리의 마음의 거처이기도 했다.

당동마을 당산을 찾아가다

비는 잠시 멈춘 듯하다. 그러나 논둑길에 자란 풀들이 다리를 휘감는다. 빗물에 젖은 풀들을 헤치고 걷노라니 바짓가랑이가 축축이 젖어온다. 돌담을 쌓은 안에 작은 집 한 칸이 바로 당동마을 당집이다. 옆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아마도 할아버지 할머니 당산이라도 되는 듯.

당동마을 당산제는 삼국시대부터 전해졌다고 한다. 그 숱한 세월을 당동마을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자리를 잡아 온 것이다. 이 당산은 철종 9년인 1858년과 고종 15년인 1878년에 부분적인 중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1년에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은 1858년에 기록한 상량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당동마을의 당산제는 정월 초하루에 마을 원로회의에서 제관을 정한다고 한다. 보름이 되면 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위치하고 있는 문수산, 금귀봉, 박유산, 장군봉의 산신께 제를 지내고 난 후 마을에 있는 당집에서 제를 올린다. 당동 당산은 경남 민속자료 제2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당산을 만나 마음을 내려놓다.

멈추었던 빗방울이 다시 떨어진다. 당집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문을 열어본다, 한 칸 남짓 돌과 흙으로 지어진 당집 주변에는 금줄이 여러 겹 쳐져있다. 이 당동 당산제에서는 닭피를 뿌린다고 한다. 당집 안에는 간소하다. 벽에 걸린 선반에는 ‘당사중수기’와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밑에는 촛불과 향을 피웠던 그릇들이 있다. 당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마을 주민들만 아니라 아마도 무속인들도 이곳에 와서 정성을 드린 것인지. 소나무 가지와 금줄에 오색천에 걸려있다. 당집을 찬찬히 돌아본 후 머리를 조아린다. 마음 한 자락 이곳에 내려놓고 가고 싶다. 삼국시대부터 전해졌다는 당동마을 당산이다. 그 안에 마음 하나두고 빗길을 돌아선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