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은 건물 대지의 경계선이나 설치물의 주위에 두른 구조물을 말한다. 담은 순우리말이며, 한자로는 원(垣)·장(墻)·원장(垣墻)·장원(墻垣)·장옥(墻屋), 우리말과 한자가 합쳐진 말로는 담장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그중 경미한 재료로 만들어지거나 안이 보이게 만들어진 것을 울·울타리·바자울[笆子籬]·울짱·책(柵)·장리(牆籬)라 한다. 반대로 성벽·성곽과 같이 대규모인 것도 있다. 담의 기능에는 공간의 구획, 외부로부터의 침입이나 들여다보는 것의 방지, 화재 등의 위험방지, 위엄과 존엄성을 나타내는 것 등 여러 가지 기능이 있다.(출처 / 다음 백과사전)

 

담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생나무를 심는 생울이 있는가 하면, 싸리나무 등을 엮어 막아놓은 울타리가 있다. 진흙에 짚을 썰어넣어 이겨서 만든 흙담도 있고, 널판지로 계를 두른 판장과 판담이 있기도 하다. 그 외에도 돌담, 영롱담, 꽃담 등 담은 그 재료 등으로 담장의 구분하고 있음을 본다.

 

 

 

담장의 용도는 과연 경계이고 차단일까?

 

그러나 정말로 이 담이 경계를 막고 설치물을 보호하기 위함일까? 담장이 이웃과의 경계를 가르는 용도로 쓰이는 것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 담은 경계를 나누는 것이 아니고 이름이다. 그리고 외부와의 차단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결성을 위한 보호적인 차원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먹을 것을 담장 너머로 전해주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이 차단이라면 이해가 안된다. 우리의 담은 바로 나눔이요, 소통이다.

 

 

 

 

 

민초들의 담과 가진자들의 담은 극과 극이다

 

우리 민가의 담을 보면 막힘이 아니다. 문이라고 해보아야 싸리를 엮어만든 문이다. 그리고 담장이라고 해보아야 어른 키의 목밑이다. 누구나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있다. 옆집과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보호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 상통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민가의 담장이다. 사대부가의 높은 벽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그렇다면 왜 우리 민가의 담은 이렇게 낮은 것일까?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소통이다. 사대부가들이 숨길 것이 많다면 민초들은 숨길 것이 없다. 어느 집이나 터놓고 돌아다녀도 잊어버릴만한 것도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담을 높게 두를 이유도 없고, 안이 안 보이게 문을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바람 정도만 막아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저 허전함만 가리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것은 같은 민초들끼리는 서로 피가 통하기 때문이다. 숨기고 감추고 속이는 그러한 담장이 아니라, 소통하고 열고 보여주는 그런 것이 바로 민초들의 담장이다.

 

역사는 늘 담으로 사람들을 구분했다

 

민가의 담을 보면 끝이 없다. 그저 이집에서 저집으로, 또 그 다음집으로 담이 연결이 된다. 낮은 처마 밑으로 두른 담장은 그보다 많이 낮게 만든다. 나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나를 숨길 것도 없고 은밀히 숨어서 할 일도 없다. 그런데 이런 담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즉 담은 어느 시대에서나 소통과 단절로 대두된다.

 

 

 

 

 

소통은 민초들이요, 단절은 가진자들이다. 가진자들은 보여주기를 꺼린다. 그리고 늘 은밀히 안에 틀어박혀 궁리를 한다. 대개는 그 안에서 서로 목소리를 죽여 몹쓸 짓을 연구한다. 그리고 더 많은 몹쓸 짓을 생각해 낸다.

 

민초들의 담장은 스스로 낮춘다. 스스로가 부끄러움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저 있는 대로 행하고 먹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진자들은 항상 숨기려고만 든다. 그러한 검은 사고들이 담장을 높게 만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그것이 위엄이라고 생각들을 했기 때문이다. 소통과 보여줌, 숨김과 차단. 이것은 긴 세월 속에서 변하지 않고 전해진 우리 담장의 철학이다.

 

 

 

 

 

담은 공유를 하는 것이다

 

가진자들은 늘 소통하고 보여주는 민초들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은 감추고 가리는 것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늘 자신들은 서민을 위해서 산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집의 담을 낮추고, 마음의 담을 낮추지 않고는, 절대로 낮은 담을 사이에 두고 사는 민초들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다. 담장의 철학은 사람들을 일깨우지만 그들은 그 속내조차 모르고 산다.

 

우리의 담장이 주는 철학. 내가 쌓은 담은 안편에서는 우리 담이 되지만 밖으로는 상대의 담이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담장의 마음이다. 하나의 담장이 서로를 소통하게 만드는 것이다. 높은 담을 가진 자들. 이제 스스로 그 높은 담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그들과는 절대로 담을 공유할 수가 없다.

응청각은 원래부터 청풍 한벽루의 좌측에 자리하고 있었던 전각이다. 지금도 제천청풍문화재단지 안 한벽루의 좌측에 예전 그대로 자리를 하고 있다. 이 응청각의 용도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인조 15년인 1637년에 충청감사 정세규의 일기에 응청각에서 유숙한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아, 이 응청각이 한벽루 옆의 있는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응청각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관수당이라는 당호가 붙어있다. 일반적으로 당이라고 하면 누정의 효과를 나타내는, 관아 안의 건물 등에 많이 붙이는 명칭이다. 물을 바라보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수당(觀水堂)은 아마 당시에도 이 건물이 물가에 서 있었음을 알게 한다.

 

 

관수당의 당호가 주는 의미

 

관수당이라고 전각의 뒤편에 붙인 현판으로 보아, 이 건물은 관아의 한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누정의 형태를 보면 누(樓), 정(亭), 대(臺), 당(堂), 제(齊), 헌(軒) 등 다양한 명칭으로 나타난다. 조선조 중기 이후에 들어서 이 이름이 모두 혼용이 되어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명칭에 따라 용도가 다 다르다.

 

우선 '누'란 밑으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이층의 전각을 말한다. 거기에 비해 '정'이란 공간이 없이 단층으로 되어있는 경우이다. 간혹 주추를 높여 밑으로 공간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런 공간이 사람들이 다닐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거기에 비해 '대'란 관아에 속해있는 정자를 말할 때 흔히 사용한다. '제'는 향교나 서원 등의 기숙을 할 수 있는 집이며, '헌'은 원래 왕실의 가족들이 묵는 공간에 붙이는 이름이다.

 

 

 

이외에도 '합(閤)'과 '각(閣)'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당'은 여러 사람이 집회를 할 수 있는 일정한 공간을 말한다. 흔히 '서당'이란 배우는 학동들이 모이는 곳을 의미한다. 이런 용도로 볼 때 '관수당'이란 물가에 서 있는 청풍현의 관아 중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도 하고, 묵을 수도 있는 정자 건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래층을 벽으로 막은 응청각

 

응청각은 일반적인 전각과는 달리 아래층을 석축벽으로 막았다. 토석을 섞어 아래를 둘렀으며, 한편은 트여놓았다. 아마 그곳은 기물 등을 둘 수 있는 공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층은 나무로 만든 목조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층의 둘레는 난간을 둘렀다. 응청각이 언제 지어졌는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조선조 명조 초에 이황(1501 ~ 1570)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응청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런 기록으로 보면 응청각은 500년 세월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응청각. 이층은 계단을 올라 문을 열면 마루방이고, 문을 지나면 온돌로 놓여있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기둥을 세우고 그 틈을 모두 돌과 황토를 섞어 발랐는데, 중간부분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보인다. 구멍을 들여다보면 위로 비스듬히 뚫려있다. 아마 이곳이 방에 창불을 때는 곳은 아니었을까?

 

일반적인 전각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지어진 응청각. 주변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의아한 곳이 많은 집이다. 그래서 이런 집을 돌아볼 때는, 더 많은 상상을 할 수 있어 즐겁지만.

 

예전에, 아마 10여년은 되었을 것이다. 현재 수원 행궁 앞에서 매교동으로 내려가는 현재의 행궁 길에 대한 기억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날만 저물면 술이 취해 비틀거리는 취객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저 몸을 흔들면서 노상방뇨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 행궁 길에 대한 기억이 영 가시지를 않았다.

12월 첫 날, 오후에 들려본 행궁 길. 예전에 모습은 단 한 곳도 찾을 수가 없다. 깨끗한 거리에는 커다란 화분위에 사철나무가 심겨져, 날이 추워졌는데도 불구하고 푸른색을 자랑하고 있다. 몇몇 집은 공사를 하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아름다운 행궁 길, 이름에 걸맞아

행궁 길이라는 어둡고 우중충한 뒷골목이 변화를 한 것은 몇몇 사람에 의해서였다. 하루 종일 기다려보아도 몇 사람 지나다니지 않는 뒷골목으로 들어 온 예술가들에 의해, 어둡고 침침하던 행궁 길이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현재 이곳에는 20여명의 예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이 거리를 살리기 위해 자비를 들여, 거리축제로 시작을 했다. 그리고 아는 예인들을 끌어들여 함께 축제에 동참을 했고, 서서히 그 축제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와를 이용해 담장을 아름답게 꾸몄다

행궁 길 테마거리 예술인회 박영환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하루 종일 기다려보아도 사람을 볼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날이 저물면 술 한 잔으로 시름을 달래기도 했고요.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거리축제를 시작하게 되었죠. 이 거리가 이렇게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작년서부터 였나 봐요. 2~3년 전부터 도로를 파헤치는데 하나가 끝나면 또 파기 시작하고, 참 대책이 없었죠.”




그렇게 아름답게 변한 도로에 걸 맞는 길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행궁 길에 입점한 예술인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 등을 개발하고 본격적인 거리축제를 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입점을 하기도 힘들어

“현재 이곳에는 공방이 15군데 정도 들어와 있어요. 이곳에 입점을 하려고 도자, 공예작가 등 5~6명이 대기를 하고 계신데 점포가 비질 않아요. 이렇게 길이 아름답게 변했으니 누가 이곳을 떠나려고 하겠어요?”

‘나녕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행궁 길 테마거리 예술인회 김난영 사무국장은, 이제는 들어오려는 예술인들이 있어도 자리가 없다고 귀띔을 한다.




행궁 길을 걷다보면 재미가 있다. 옛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집들이 있고, 가끔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들도 보인다. 걷는 재미만으로도 쏠쏠한 행궁 길에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행궁 길에서 ‘소담 국시방’이라는 잔치국수전문점이 보인다. 겉모양으로만 보아도 예사 국수집이 아니다. 알고 보니 주인 김영수씨는 칠보공예작가라고 한다. 이렇게 나름대로의 예술인들이 모여 자비를 들여 축제를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거리를 조성하는데 가장 신경을 쓴 것은 바로 간판과 기와로 만든 외벽의 장식, 그리고 집 앞에 놓인 커다란 화분입니다. 이 화분에는 각자 이름이 적혀 있어요. 관리를 맡은 점주들이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으면, 바로 딴 것으로 옮겨다 놓습니다. 그래서 각자 명패를 달고 있는 것이죠.”

행궁 길 조성에 심혈을 기울인 예술인회 박영환 회장(우)과 사무국장 김난영

염태영 수원시장의 그린정책에 동반하여, 수원을 더 알릴 수 있는 공예품을 생산하겠다는 아름다운 행궁 길 예술가들. 2011년 3월부터 시작한 거리축제는 이제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들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래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를 만들고 싶다고 한다. 지금은 팔달구청과 행궁동에서 많은 신경을 써주어 더 좋은 거리가 될 것이라고 한다.

수원의 아름다운 행궁 길. 앞으로 이런 아름다운 길이 수원의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충북 영동군 양강면 괴목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42호인 김선조 가옥. 아마도 이 집을 돌아보면 옛 선인들의 집을 짓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전형적인 양반가의 구조를 갖춘 이 가옥은, 안채는 17세기에 안사랑채는 그보다 조금 늦은 17세기 말쯤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곳간채와 대문채는 20세기에 들어서 지었다고 한다.

김선조 가옥은 전국을 다니면서 만날 수 있는 고택 중 하나이다. 그저 평범한 집 같지만, 찬찬히 돌아보면 뛰어난 건축기법이 보인다. 물론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이 될 때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 이겠지만, 그냥 돌아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자연을 배경을 한 안채

김선조 가옥은 ‘배산(背山)’의 특징을 갖는다. 집 뒤에 있는 낮은 구릉은 여름철이면 녹음으로 뒤덮히고, 겨울이 되면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자연을 이용해 집을 지은 건축의 교과서 같은 집이다. 집 뒤편으로는 고목들이 서 있는 구릉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흡사 산속에 지은 집을 연상케 한다.

예전에는 안채 앞에 사랑채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랑채가 없어지고 기단만 남아있다. 대문채에서 안채까지 휑하게 빈 공간은, 사랑채가 없어 외부공간이 전체적인 균형을 잃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허전함을 안채 뒤에 있는 녹음이 진 구릉이 막아주고 있다.



김선조 가옥의 안채는 ㄷ자형의 구성으로 건조되었다. 부엌, 안방, 대청, 윗방 등이 일렬로 배열이 되어있다. 안채의 앞쪽에만 마루를 놓은 것이 아니고, 뒤편에도 툇마루를 길게 늘였다. 이 뒷마루는 사람이 편히 앉아 구릉의 녹음을 바라다보기도 좋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용도로 사용이 된다. 멀리 돌지 않고 가까이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안사랑채가 되돌아 앉은 사연

김선조 가옥을 돌아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건물이 한 동 있다. 바로 안사랑채이다. 안사랑채는 부엌, 안방, 윗방, 대청을 일렬로 배열한 전형적인 별당 형식이다. 안채 앞에 있던 사랑채는 없어졌다는데, 이 안사랑채는 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있다. 그런데 안사랑채의 전면이 아니고 돌아 앉아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안사랑채는 여자들의 공간이다. 사대부가의 집들은 사랑채에서 바깥주인이 기거를 하면서 외부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로 이용을 한다. 그리고 안채는 대개 사랑채에서 담을 쌓고 그 안에 일각문을 두어 바깥주인이 출입을 한다. 그리고 그 안채 후원에 별당채가 두어, 집안의 과년한 딸들이 기거를 한다.


그런데 김선조 가옥에는 별당채가 없는 대신, 안사랑채를 대문 안에 마련을 했다. 그러다보면 외부인들이 집안을 들어섰을 때, 안사랑채를 사용하는 여자들과 마주치게 된다.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집을 돌려놓은 것이다. 사람들은 여자들이 기거를 하는 방이면 괜히 눈길을 주게 된다. 그러한 외부인의 눈길을 피하기 위한 방법인 듯하다. 생각만 해도 재미있는 집의 구조다.

문은 있는데 벽은 왜 없지?

이 안사랑채를 돌아보면 참으로 재미있다. 대문을 들어서 보이는 안사랑채의 끝에는 불을 떼는 아궁이가 있다. 그런데 이 아궁이는 부엌의 용도는 아니고, 불을 지피고 물을 데우게 되어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 아궁이가 있는 불을 떼는 곳에 안채의 방향으로는 담도 없는데, 마당 쪽으로는 문을 내달았다.



불을 때는 곳인데 구태여 문을 해 달아야할 필요가 있었을까? 벽도 없이 노출이 되어있는 곳인데 문을 단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집 주인의 세심한 배려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바로 안사랑채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부녀자라는 점이다. 집의 안식구뿐만 아니라, 집에서 일을 하는 여자들까지도 가려주는 마음. 이 아궁이가 그런 것을 알려준다. 집안을 드나드는 외부의 남정네들이, 부녀자들을 함부로 볼 수 없도록 마음을 쓴 것이다. 김선조 가옥에는 숨어있는 비밀이 많아, 둘러보는 재미에 푹 빠진다.

측간도 곳간채 한편에 숨어있어

안사랑채의 뒤편 건너편에는 곳간채가 있다. 곳간채는 ㅡ 자형으로 지어졌는데 모두 5칸으로 나뉘어졌다. 좌측 두 칸은 곡물을 쌓아두는 창고로 사용하고, 중간은 뒤주로 사용을 했다. 그런데 맨 우측의 한 칸은 문이 없다. 문이 어디로 갔을까? 창고를 돌아 뒤로 가보니. 세상에 여기 측간이 숨어 있다.



'처갓집과 측간은 멀수록 좋다'고 했던가. 그런데 멀리 둘 수가 없는 집안의 구조 때문에 측간을 광의 뒤편에 두었다. 집안에서는 보이지 않으니, 용변을 보는 사람들도 편했을 것이다. 측간은 안쪽으로 들어가게 내었다. 세세한 부분까지도 신경을 써서 구성을 하였다. 고택에서 찾아보는 숨은 멋. 김선조 가옥은 그런 재미가 쏠쏠한 집이다.

담은 무슨 용도로 사용이 되었을까? 단지 건물과 대지의 경계선이나 설치물의 주위에 두른 구조물일까? 담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한자로는 원(垣)·장(墻)·원장(垣墻)·장원(墻垣)·장옥(墻屋), 등으로 사용하며, 우리말과 한자가 합쳐진 말로는 담장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그 담 중에서 간단하게 구조물을 설치한 것이나, 안이 들여다보이게 만든 것을 울·울타리·바자울[笆子籬]·울짱·책(柵)·장리(牆籬)라 한다. 우리 소리에 보면 ‘울도 담도 없는 곳에...’ 라는 노래가사가 있다. 이렇게 울과 담은 그 형태에서 구분이 지어진다. 아마도 양반가의 높은 벽은 ‘담’으로, 민초들의 낮은 울타리는 ‘울’ 생각하면 맞는 뜻일 것이다.


담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생나무를 심는 생울이 있는가 하면, 싸리나무 등을 엮어 막아놓은 울타리가 있다. 진흙에 짚을 썰어 넣어 이겨서 만든 흙담도 있고, 널판지로 경계를 두른 판장과 판담이 있기도 하다. 그 외에도 돌담, 영롱담, 꽃담, 와담 등 담은 그 재료를 무엇으로 사용했는가에 따라 구분하고 있음을 본다.

담장의 용도, 과연 경계로 구분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담을 경계를 구분하거나 사람들이 사는 곳을 보호하기 위한 설치물로 구분 짓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이 담이 경계를 막고 설치물을 보호하기 위함일까? 물론 그 말이 맞다고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담과 울은 엄연히 다르다. 담은 경계를 가르고 안을 보호하지만, 울은 굳이 경계를 가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담은 경계를 나누고 보호를 위한 것이지만, 울은 하나의 결성을 위한 보호적인 차원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먹을 것을 담장 너머로 전해주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이 차단이라면 이해가 안된다. 우리의 울은 바로 나눔이요, 소통이다.

민초들의 울과 가진 자들의 담은 극과 극이다

우리 민가의 담을 보면 막힘이 아니다. 문이라고 해보아야 싸리를 엮어 만든 문이다. 그리고 담장이라고 해보아야 어른 키의 목 밑이다. 누구나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있다. 옆집과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보호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 상통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민가의 담장이다. 사대부가의 높은 벽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그렇다면 왜 우리 민가의 담은 이렇게 낮은 것일까?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소통이다. 사대부가들이 숨길 것이 많다면 민초들은 숨길 것이 없다. 어느 집이나 터놓고 돌아다녀도 잊어버릴만한 것도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담을 높게 두를 이유도 없고, 안이 안 보이게 문을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허전함만 가리면 그것으로 족하다. 숨기고 감추고 속이는 그러한 담장이 아니라, 소통하고 열고 보여주는 그런 것이 바로 민초들의 울이다.

역사는 늘 담으로 사람들을 구분했다

민가의 담을 보면 끝이 없다. 그저 이집에서 저 집으로, 또 그 다음 집으로 울이 연결이 된다. 낮은 처마 밑으로 두른 담장은 그보다 많이 낮게 만든다. 나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나를 숨길 것도 없고 은밀히 숨어서 할 일도 없다. 그런데 이런 담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즉 담은 어느 시대에서나 소통과 단절로 대두된다.



소통은 민초들이요, 단절은 가진 자들이다. 가진 자들은 보여주기를 꺼린다. 그리고 늘 은밀히 안에 틀어박혀 궁리를 한다. 대개는 그 안에서 서로 목소리를 죽여 몹쓸 짓을 연구한다. 그리고 더 많은 몹쓸 짓을 생각해 낸다.

민초들의 담장은 스스로 낮춘다. 스스로가 부끄러움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저 있는 대로 행하고 먹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진 자들은 항상 숨기려고만 든다. 그러한 검은 사고들이 담장을 높게 만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그것이 위엄이라고 생각들을 했기 때문이다. 소통과 보여줌, 숨김과 차단. 이것은 긴 세월 속에서 변하지 않고 전해진 우리 ‘담’과 ‘울’의 철학이다.


(주) 이 글은 '오마이 뉴스'에 송고가 되었던 것을 다시 정리하였습니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