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사는 지리산의 천왕봉 동쪽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천년이 지난 사찰이다. 신라 제 24대 진흥왕 9년인 548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하여 ‘평원사’라고 했다. 그 뒤 천여 년 동안 폐쇄되었던 것을 조선조 숙종 11년에 운권선사가 문도들을 데려와 평원사의 옛 절에 사찰을 건립, 대원암이라 개창하고 선불간경도량을 개설하여 영남의 강당이 되었다.

 

조선조 고종 27년에는 혜흔선사의 암자가 무너져 크게 중건하였다. 서쪽에는 조사영당을 보수하였고, 동쪽에는 방장실과 강당을 건립하여 대원사라 개칭하고, 큰스님을 초청하여 설교를 하니 전국의 수행승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전소된 대원사를 중창

 

1914년 1월 12일 밤에 다시 불로 절이 모두 타버린 것을 여러 스님들이 다시 중창하여 1917년 전(殿), 누(樓), 당(當), 각(閣), 요사채 등 12동 184칸의 건물을 지었다. 그 이후 여순반란사건과 한국전쟁 등으로 폐허가 되어 방치되다가, 1955년 9월에 비구니 법일화상이 주지로 임명되어 1986년까지 대웅전, 사리전, 천광전, 원통보전, 봉상루, 범종각, 명부전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집 부근에는 옛적 선비들이 수학했다는 거연정과 군자정이 있다.

 

지리산 자락인 시천면의 천왕사 성모상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들린 대원사는, 한창 관람을 위한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대원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방장산 대원사라는 일주문이 보이고,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부지런히 발길을 옮긴다. 아마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것을 둘러보고 싶어서인가 보다.

 

 

대원사와 인근 지리산 일원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11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만큼 자연의 경관이 빼어난 곳이기도 하다. 새로 깔아 놓은 아스팔트가 발목을 마구 잡아끈다. 아마 너무 수려한 절경이라는 대원사를 쉽게 보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돌아가는 길을 택해 길을 잡는다. 이번에는 내리는 잔비로 길이 푹푹 빠져버리니 이래저래 대원사를 찾는 길은 쉽지만은 않다.

 

아름다운 계곡과 어우러진 대원사

 

절이 보이는 입구에 다다르니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계곡이 보인다. 대원사의 계곡은 대원사입구 주차장에서 대원사까지 약2km에 이르는데, 산이 높고 물이 맑을 뿐 아니라 바위틈 사이로 뿜어내는 물과 괴암은 절경이다. 용이 100년간 살다가 승천했다는 용소, 가락국 마지막 구형왕이 이곳으로 와서 소와 말의먹이를 먹였다고 하는 소막골 등이 위치하고 있다.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대원사 앞에 이르니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짙은 신록을 자랑하고 있다. 빗줄기가 거세지더니 급기야는 소나기로 변했다. 우산도 없이 여정을 재촉했는데 이런 낭패가 있나. 그래도 어찌하랴 다만 몇 장이라도 사진을 담아야겠다고 작정을 한다.

 

손으로 카메라는 덮고 사진을 몇 장 찍는다고 노력을 해보았지만 허사다. 빗방울이 금방 렌즈에 떨어져 얼룩이 져 버린다. 지난 번 대원사를 찾던 날도 봄비가 장맛비처럼 쏟아져 사진을 찍지 못하고 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이번에도 또 비가 온다. 대원사와 나와는 아무래도 비로 맺어진 인연인가 보다.

 

 

초겨울에 달려가고 싶은 대원사

 

대원사는 늘 느끼는 것이지만 참 아담하고 가지런한 가람이다. 이 지리산 자락 깊은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절집이 1,500년이라는 세월을 숨어 지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수행승들이 이 절집을 찾았으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거쳤겠는가? 지리산이라는 지명도 알고 보면 이곳에 머물면 사람이 지혜로워진다고 하여서 붙여졌다고 하는데, 거기다가 대원(大源)이니 계곡에 물이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듯 뜻을 세운 일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을 듯하다.

 

 

오는 비를 아랑곳하지 않고 몇 장인가 더 사진을 찍은 후 대원사를 떠난다. 오늘 갑자기 방장산 대원사로 달려가고 싶다. 아마 그 절경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비로 인해 맺어졌던 인연이 또 다른 모습으로 맞이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이다.

우리나라의 석탑 중에서 가장 특별한 석탑을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지리산 대원사에 소재한 보물 제1112호인 ‘대원사 다층석탑’일 것이다. 경남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에 소재한 지리산 대원사는, 손꼽히는 참선도량 중 하나로서 지리산의 절경과 잘 어우러진 사찰이다. 경내 사리전 앞에 서 있는 이 다층석탑은, 2단의 기단 위에 8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일부만 남아있다.

이 탑이 왜 특별한 것인가는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기단부 모서리 기둥 모양을 본 떠 만든 문인상이 네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웃기단부 사면에는 사천왕상을 새겨 놓았으며, 탑은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다. 석재나 형태 모두가 일반적인 석탑과는 다르다.


어렵게 들어가 본 다층석탑

대원사 다층석탑이 서 있는 곳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다. 그 동안 두어 번 대원사를 찾았지만, 밖에서 탑의 윗부분 밖에 볼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큰 맘 먹고 찾아갔던 차라 종무실에 허락을 받고나서야, 잠시 사진만 조용히 찍고 나오겠다는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이 탑은 646년 신라의 자장율사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높이 6.6m의 탑이다. 석탑 앞에 있는 배례석에는 조선조 정조 8년인 1784년에, 다시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그 후 1989년 해체복원 때에 58과의 부처님 사리와, 사리를 넣는 사리장엄구편이 발견이 되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다층석탑

그저 밖에서 바라다볼 때는 붉은 색이 감도는 탑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전체적인 모습에서 다른 석탑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한 마디로 상상을 초월한 모습이다. 2단의 기단부에 8층의 탑신을 올렸는데, 기단 맨 위 갑석을 일층으로 삼아 전체를 9층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석탑의 경우 짝수로 몸돌을 올리지를 않기 때문이다. 상륜부에는 탑의 높이와 비례가 되는 찰주가 솟아있다. 그 밑으로는 보주와 복발이 남아있다. 전체적인 상륜부는 보존되지 못했다고 해도, 남은 것만으로도 탑의 모습을 한결 신비롭게 만든다.



2단의 주름이 있는 지붕돌은 약간 투박한 듯하며, 각 지붕돌의 처마는 두껍고 네 귀퉁이에서 약간 들려있다. 맨 위 8층 지붕돌에는 금방이라도 맑은 소리를 내며 경내를 잠 깨울 풍탁을 달아놓았다. 현재 달려있는 풍탁은 아마도 후에 달은 것으로 보인다.

기단석 사방 모서리를 받친 문인석, 그 이전에는 무엇이?

임진왜란 때에 탑이 파괴가 되자, 정조 8년인 1784년에 다시 세웠다는 대원사 대층석탑. 8층이나 되는 탑은 높지만 전체적으로 체감비율이 뛰어나다. 조각은 웃기단부 사면에 새겨 놓은 사천왕상뿐이다. 이 탑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는 탑에서 서광이 비치고, 향기가 경내에 가득했다고 한다. 또한 마음이 맑은 사람은 근처 연못에 비친 탑의 그림자로 탑 안의 사리를 볼 수 있었다고도 전한다.



이 탑의 기단부 모서리에 세운 문인상은 왜 세운 것일까? 이 문인상이 조선 정조 때에 탑을 새로 고쳐 세울 때, 사방 모서리에 기둥을 대신하여 세웠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다층석탑의 사방 모서리에는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웃기단부 돌이 일층 몸돌보다 작은 것을 보면, 처음부터 사방에 무엇인가가 몸돌을 받치고 있었다는 뜻이다.

문인상을 사방에 세운 이유도, 그리고 그 이전에 있었던 모서리의 모습도 다 궁금하다. 외국인들까지도 이 탑의 아름다움에 반해, 출입금지 구역인데도 들어와 열심히 촬영을 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석탑 중에서도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는 대원사 다층석탑. 처음으로 전체를 다 볼 수 있었던 다층석탑은, 오랜 시간 눈앞에 아른거릴 것만 같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