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고색동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흔히 삭전(索戰)’이라고 해서 정월 대보름을 기해 마을과 마을이 서로 힘겨룸을 하는 대동의 놀이이다. <동국세시기>에는 충청도 풍속이 거전(炬戰)이라는 횃불싸움이 있다. 또 편을 갈라 줄을 서로 잡아당긴다. 그래서 끌려가지 않는 편이 이기는 것으로 풍년을 차지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줄다리기가 행해졌다. 지역마다 줄의 형태나 줄의 처리방법, 줄다리기가 갖고 있는 내적사고는 다르다고 해도, 하나의 공통적인 습속은 여자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거나 줄은 액막이의 상징으로 줄을 다리고 난 뒤 그것을 잘라 대문 앞에 걸어놓거나, 줄을 마을 입구에 놓으면 액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등의 사고를 갖고 있다.

 

 

줄의 효능과 처리방법

 

우리 민족은 짚으로 꼬아 만든 줄이라는 조형물에 대해 깊은 뜻을 내재하여 왔다. 짚으로 꼬아 만든 줄은 왼새끼로 꼬아 대문에 걸어두면 금줄이 된다. 집안에 큰 일이 있거나 산모가 있을 때도 이 줄을 늘여 잡인의 접근을 막았다. 또한 장을 담가도 줄을 둘러 액을 막았다. 이렇게 우리민족과 짚으로 꼬아 만든 줄은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정월 보름을 맞이하기 전에 사람들은 짚을 준비하고 줄을 꼬기 시작한다. 줄의 형태는 암줄과 수줄을 만드는데, 이것은 남녀를 상징한다. 줄다리기를 할 때는 암수줄이 한데 엉키게 되며 이를 비녀라고 하는 장목으로 고정시킨다. 줄의 용두를 만들 때는 암줄은 넓게 하고 수줄은 좁게 하여, 암줄의 용두에 수줄의 용두가 들어가게 만든다.

 

이러한 줄의 결합상태가 주는 내적사고는 바로 다산과 풍농이다. 남녀가 결합을 해서 다산을 기원하고, 짚으로 만든 줄을 결합시킴으로써 풍농을 구가하는 것이다. 줄을 당기는 이유는 마을마다 다르다. 그 마을이 처해있는 환경이나 지리적인 여건 등에 따라 내적 사고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여자 쪽이 이기면 3년간 풍년이 들고 마을전체가 평안하게 살아간다.’(성남 판교)

승자는 공동으로 이용해 보를 막기 때문에 풍년이 든다’(안양)

강물이 풀려 액송기를 꽂은 줄이 떠내려가면 모든 재앙과 액운이 소멸된다’(여주 흔암리)

 

이렇게 지역마다 줄을 다리고 난 뒤에 마을에 전하는 속설이 차이가 난다. 그것은 그 마을이 처해있는 환경에 따라 적당한 속설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 큰말 일원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줄다리기를 해왔다. 고색동의 줄다리기는 그 유래가 아주 오래인 것으로 전해진다.

 

9일 오후 고색동 줄달리기 이루어져

 

고색동의 줄다리기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행해졌으나, 요즈음은 보름 전후의 날을 잡아 일요일에 줄을 당긴다. 고색동 줄다리기는 1900년대만 해도 근동 30여 개 마을에서 풍장패를 끌고 나와 참여를 하는 큰 줄다리기였다. 일제의 문화말살정책 때는 줄을 다리지 못하자 마을에 흉사가 끼고 평안하지가 않아, 몰래 줄을 다리고는 했다고 한다.

 

 

1987년까지도 고색동의 줄다리기는 연이어져 왔다, 그 후 줄이 불에 타서 소실이 되고 마을이 급격히 도시화하면서 줄다리기가 중단이 되었다가, 고색동 청년회가 전통문화의 승계를 위해 1995년 줄을 새로 제작하고 복원하여 보름을 전후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고색동 줄다리기는 마을에 있는 당집에서 당고사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9일 아침 10시 수원시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고색동 당집에서 풍물패들이 먼저 당고사를 올린다. 그리고 길놀이를 하면서 당주네 집으로 몰려간다. 당주네 집에 도착하면 마당놀이를 하는데, 이때는 근동의 풍물패(화성시)들도 함께 와 풍물을 주고받는다.

 

암줄이 이겨야 마을이 안과태평해

 

예전 같으면 당주집에서 마당놀이를 하고나면 바로 줄을 메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길놀이를 하겠지만, 지금은 중간에 문화행사 등 많은 행사가 이루어진다. 마을잔치로 하다 보니 더 많은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오후 2시가 되어서 줄다리기가 시작이 되었는데, 여자와 아이들은 암줄을 남자들은 수줄을 잡고 다린다.

 

 

줄 위에는 각각 남장과 여장을 한 편장이 타게 되고, 편장의 지시에 의해 줄을 밀고 당긴다. 양편의 줄이 합해지면 수줄의 용두를 암줄에 밀어 넣고 빠지지 않게 장목으로 비녀를 끼운다. 징소리에 맞추어 세 번을 다리게 되는데, 암줄이 이겨야 마을에 풍년이 들고 마을이 평안하다고 한다.

 

풍물패의 빠른 가락에 이어 사람들의 함성소리. 그리고 줄을 당기는 사람들의 고함소리 등이 한데 어우러져 마을이 떠나갈 듯한 고색동 줄다리기 한 판. 줄다리기는 그 내재되어 있는 사고 외에도 겨우내 침체되었던 몸을 줄다리기를 하면서 기운을 써 몸을 푸는 효과도 가져오는 전승놀이이다. 그렇게 마음껏 소리치고 힘을 쓰면서 일 년의 안과태평을 빌었으니 마을이 편안할 수밖에.

하늘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다산 정약용이 한 말이다. 다산은 신분타파를 위한 급진주의자다. 그래서 그의 생애는 파란이 많았다. 지난 날 드라마 이산에서 보이는 다산을 처음부터 해학적인 모습으로 그려낸 것도, 아마 다산의 그런 파란만장한 일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 당시 30세이던 다산은, 화성의 모든 축성과정을 그려내고 감독하는 소임을 맡았다. 화성을 축조할 때 다산은 서양의 서적을 탐독했다. 그 결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를 만들어 화성축조에 공헌을 하기도 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다산은 대단한 학자요, 과학자였다. 이산에 다산이 처음 등장할 때 성균관 담을 넘는다거나, 망원경 같은 것으로 밖을 관찰하는 등의 행동은 결코 허황된 표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뒤늦게 벼슬길에 오른 장약용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저자로 익히 알려진 사람이다. 다산 정약용과 이산 정조와의 만남은 화성(華城)이라는 시대 최고의 걸작품을 만들어냈다. 화성은 정조 일생일대의 커다란 업적이다.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군 마현리에서 진주 목사 이제원의 넷째아들로 출생하여, 1783년 회시라는 과거에 3등으로 합격을 하였으니 22살에 급제를 한 셈이다. 그러나 바로 벼슬길에 나선 것은 아니다. 1789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 벼슬을 받았으니, 이때의 나이는 이미 27세 때였다.

 

최초로 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다

 

요즈음 군인들이 도하작전을 할 때면, 강에 배를 연결해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하작전이 다산이 최초로 사용을 하였다고 하면, 틀린 말이라고 할까?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에 보면, 한강을 건널 때 배를 연결해 배다리를 만들어 건너는 모습을 보인다. 당시의 배다리인 주교는 1795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화산을 다녀올 때 사용하였다.

 

당시 정조 이산은 1,779명의 문무백관, 나인, 호위군사 등과 함께, 779필의 말로 다리를 건넜다. 당시의 주교는 가로 4m, 세로 11m의 목선 나룻배 37척을 연결해 만들었다. 당시 이산의 능행차도에는 궁중 화원이었던 김홍도가 그린 반차도에 상세하게 남아있다.

 

우리 기록문화의 최고봉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보이는 63쪽의 반차도(班次圖)는 기록문화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이 그림들은 김홍도의 지휘아래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 등 당시 궁중 화원들이 그린 조선 최대의 기록화이다. 반차도를 그대로 재현한 수원 화성문화재의 정조 능행차는 바로 이 반차도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정약용은 이론만 내세우는 인물들과는 달랐다. 실제로 체험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리를 하는 학자이기도 했다. 정약용은 당시 서구에서 들어 온 서적은 거의 다 탐독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기에 거중기를 만들고,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를 생각해 냈을 것이다. 아마 지금 이 시대에 백성을 자신만큼 생각하는 정약용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모든 일을 슬기롭게 처리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 외에도 탐구가인 다산 정약용의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을 돌아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놀라는 것은, 그러한 당대 최고의 과학자와 행정가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강한 군주가 되고 싶어 하는 정조의 굳은 의지와, 애민사랑이 응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화성은 정부와 행정, 그리고 학자들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완성을 한 당대 최고의 걸작품이었다.

“다산, 한강[冽水]가의 삶과 꿈” - 남양주 실학박물관 특별전

 

다산 정약용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는 ‘두미’ 혹은 ․‘두물머리’라고 하는 곳에서 태어났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쳐 큰물로 아우러지는 이곳은, 향후 실학의 회합이라는 그의 운명과 이어지고 있었다.

 

다산은 30여년 넘는 서울과 강진 등의 타지 생활에서도, 다산의 마음은 항상 고향에 남아 있었다. 순조 1년인 1801년 강진으로의 유배생활, 기약 없는 해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18년 세월. 다산은 그곳에서 연구와 저술에 열정을 태우면서도, 그는 아득하게 먼 한강만을 그리워했다. 그곳은 부모형제와 처자식이, 그리고 님이 계신 곳이었다.

 

다산은 한강을 열수(洌水)로 불렀다. 1818년 강진에서 돌아온 그는, 한강에 사는 사람임을 자처했다. 그리고 18년을 고향에서 살다가 한강으로 돌아갔다. 다산은 늘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무수히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한강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발견한다. 평생의 고민이자 꿈은 민생을 위한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의 종합을 통한 부국강병이었다.

 

그가 태어난 지 25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한강을 바라보며 또다시 다산 정약용을 떠올려본다. 한강에서 품었던 다산의 삶과 꿈을.

 

소내[苕川]에서의 생활

 

다산에게 소내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곳에서의 그물치기와 낚시는 그의 일상이었고, 집 뒤의 철마산, 운길산과 수종사, 강 너머의 천진암 등은 부친을 모시고, 형제들과 함께, 어느 때는 벗들과, 때론 홀로 즐겨 찾았던 곳이었다.

 

광주부(1872년 지방지도)(위) 와 소내(정선의 《경교명승첩》중에서)(아래)

 

다산은 평소 “나의 정신이나 외모 대부분은 외가에서 받았다”고 밝혔다. 그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말 한대로 외탁을 한 그 모습은 외증조부인 윤두서(1668∼1715)에서 조금은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강진으로 떠나 홀로 생활을 한지 6년, 결혼 30년을 맞은 부인 홍씨에게서 온 치맛자락, 다산은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다시 담는다. 그리고 몇 년 후 이를 자식들에게 전한다. 그것이 바로 ‘하피첩(霞帔帖)’이다. 두 아들에게는 사대부로서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훈계했고, 시집가는 딸에게는 집안의 화락을 기원했으며, 막내딸에게는 위로의 마음을 매화가지에 앉은 새로 담아냈다.

 

1786년(정조 10) 다산이 고향 소내의 풍경에 대해 읊은 12수의 시이다. 이른바 “소천 12경”이다. 25세 때였다. 이후 그는 유배지 강진에서 이 시들을 이성화에게 써 주었다. 고향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이성화를 통해 고향까지 전해지기를 바랐던 것일까?

 

 다산의 외증조부, 윤두서 자화상(좌) 와 다산 정약용(1935년 동아일보 삽화)(우)

 

한강에 돌아와, 후세의 기약

 

18년의 세월, 그것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강진에서 다산의 저술은 경세학의 체계화라는데 특징이 있다. 조선후기의 사회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변법적 개혁론의 전개였다. 그중에서도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심서》의 ‘일표이서一表二書’는 다산 사상의 핵심이다.

 

그는 “나는 조선 사람이다. 기꺼이 조선의 시를 쓰겠다”고 선언하였다. 또 조선은 중화문화에 부속되어 있는 나라가 아니고,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체득하였다. ‘조선인’에 대한 주체적 인식이 바탕이었다.

 

다산이 그린 매화 그림, 매화병제도(좌) 와  매조도(우)

근대의 길에 대한 모색, 조선학의 발전

 

18년 강진에서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이후 자연 다산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모여들게 했다. 양반 자제뿐만 아니라 강진의 아전과 승려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시기 다산의 방대한 저작 과정은 제자들과 분업화된 공정을 거쳤다. 이를 ‘다산학茶山學’으로 규정할 수 있다.

 

다산의 거대한 담론은 한강에서 출발하여 거기서 완성되었다. 평생 자신의 학문성과에 대해 “알아주는 사람이 적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이 허락해주지 않는 것으로 여겨 한 무더기 불속에 처넣어 태워버려도 괜찮다”고 했던 그였다. 하지만 다산은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서 그 꿈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 회갑을 넘어 스스로를 ‘사암俟菴’이라 불렀듯이 그는 후세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상서지원록》과 《매씨서평》의 마무리, 다산의 고민

그가 서거한 지 100년 후, 우리는 국권을 상실한 질곡의 역사를 겪고 있었지만, 그의 학문은 조선학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이후 또 80여년이 흘러 탄신 250년을 맞았다. 그가 염원했던 민생과 부국강병은 현재진행형이다. 두 물이 합쳐져 큰물이 되었듯 다산의 거대한 사유를 마음에 담아내야할 때이다.

 

 

매달마다 농가의 모습을 읊은 농가월령가와(위) 수종사 가는 길(아래)

다산의 생

본관 나주羅州, 자는 미용美鏞·송보頌甫, 시호는 문도文度

1762년(영조38) 광주 초부면 마현리(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에서 정재원과 해남윤씨의 3남으로 출생

1765년(4세) 천자문을 배움. 2세 때 앓은 천연두로 오른쪽 눈썹이 셋으로 갈라져 흔적이 남게 되어 삼미자三眉子로 불림.

1776년(15세) 관례를 치르고 약용若鏞이라는 관명冠名을 얻음.

호조좌랑 홍화보의 딸 혜완惠婉과 혼인. 서울 남촌으로 이사.

1777년(정조1) 이가환李家煥과 매형 이승훈李承薰을 쫒아 이익李瀷의 유고를 읽고 사숙.

1779년 형 약전과 성균관 승보시陞補試에 합격.

1783년(22세) 초시와 회시에 합격, 진사가 되어 선정전宣政殿에서 정조를 처음 만남

1784년 두물머리의 배에서 이벽에게 서교西敎에 대한 이야기를 들음.

1789년(정조13) 주교사舟橋司에 배속되어 주교 설치 공사의 규제를 만듬.

1791년 호남에서 천주교도 박해로 진산珍山 사건이 일어나 천주교와 절교.

1792년(31세) 화성의 설계를 명령받고 거중기를 설계하여 공사비 4만냥 절약.

1794년(정조18) 경기도암행어사로 나가 연천, 파주, 장단 등을 감찰

1800년(39세) 정조 승하로 고향으로 돌아와 초천에서 강학, 여유당與猶堂의 편액을 달음.

1801년(순조1) 신유사옥으로 투옥되었다가 강진으로 유배.

1805년(44세) 백련사에서 혜장惠藏과 교유. 고성사의 보은산방寶恩山房으로 이사.

1806년 강진 읍내 이학래李學來 집으로 이사.

1808년(47세) 만덕사 서쪽의 다산茶山으로 이사.

1809년 초의선사와 교유

1818년(순조18) 유배지에서 풀려나 고향 마현으로 귀향. 호를 ‘열수洌水’라고 함.

1822년(61세) 회갑을 맞아 스스로 묘지명墓誌銘을 지음. 호를 ‘사암俟菴’이라고 함.

1836년(순조36) 부인 홍씨와 회혼일에 고향 마현에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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