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성사지, 수원 광교산에 있는 옛날 창성사라는 절터 이름이다. 이곳을 찾으러 9월 10일 산행을 시작했다. 창성사지를 찾기 위해 벌써 3번 째 산을 오르는 길이다. 광교산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보고 길을 들었다가, 엉뚱한 곳을 헤매기를 두 번. 이번에는 제대로 설명을 듣고 찾아가기 시작했다.

 

입구 어느 곳 한 군데 하다못해 나무 판에 화살표라도 하나 해놓았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숲속에 들어가 모기와 전쟁을 하면서 찾아들어간 창성사지. 천천히 걸어 30~40분 정도면 찾을 수 있는 곳을 그동안 그렇게 고생을 했다. 안내판 없는 문화재 하나를 찾으려면,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한다. 문화재 안내판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잡초더미에 쌓여있는 고려 때의 절터인 창성사지

 

여기가 창성사지, 해도 너무한다.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안내판이 보인다. 수원시 상광교동 산41에 소재한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인 창성사지. 창성사는 고려 말의 국사인 화엄종사였던 진각국사(1305~1382)의 사리탑과 함께 조성이 된, 보물 제14호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가 있던 곳이다. 진각국사의 탑비는 현재는 수원 화성 안 방화수류정 길 위편으로 옮겨져 있다.

 

그런데 이 창성사지를 보고 그 자리에 털벅 주저앉고 말았다. 세 번씩이나 찾아서 겨우 올라 온 곳인데, 사지라고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잡초더미에 묻혀있다. 아무리 찾아오는 사람이 없고, 향토유적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이런 꼴을 보면, 정말 부아가 치밀기 이전에 먼저 눈물이 난다.

 

창성사지의 아래편 석축. 600년이 넘는 세월을 그렇게 서 있었다 

석축 및 움막, 누가 무엇때문에 지은 것일까? 흉물로 되어버렸다.

 

도대체 이 창성사라는 곳의 가치는 알고 있는 것일까? 축대와 우물, 그리고 기단석과 주춧돌. 그 안에는 과거 창성사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잡초더미에 쌓여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풀숲을 헤집고 창성사지를 돌아보다.

 

창성사지 안으로 풀숲을 헤치고 들어섰다. 옛 축대가 보인다. 높이 4 ~ 5m 정도의 축대로 보아, 이곳을 기점으로 아래 위에 전각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잡초 속에서 꽃 한 송이가 아름답게 피어있다. 그런 모습이 더욱 눈물겹게 만든다. 축대 밑으로는 누군가 이곳에서 기도라도 한 것일까? 다 찢어져 가는 움막이 있다.

 

 

이렇게 방치된 몰골로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아예 한 번도 정비를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더럽혀진 옷가지며 그릇들이 널브러져 있는 움막, 무엇을 하던 곳일까? 조금만 걸으려고 해도 풀이 발에 감겨 걷기조차 힘들다. 풀이 워낙 우거지다 보니,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가늠하기가 어렵다.

 

현재 석축은 약 50m 정도가 남아있다. 석축으로 쌓은 기단은 2단으로 되어있는데, 아래층 기단의 위로 또 2m 정도의 석축의 흔적이 보인다. 이 위층 석축은 다 무너져 내린 형태이다. 그런 것 하나를 알아보는 것도 쉽지가 않다. 온통 풀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창성사지 안에 풀숲에 가려진 기단석과 주추돌

 

석축으로 쌓은 우물, 맑은 물이 고여 있어

 

맨 위로 올라갔다. 200년은 됨직한 소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뻗고 서 있다. 사지 안으로 들어가니 돌로 쌓은 우물터가 보인다. 밑에는 흙이 쌓여 앙금이 졌지만, 지금도 맑은 물이 고여 있다. 아마도 이 터에 남아있었던 진각국사의 사리탑과 비 등으로 유추할 때, 창성사는 고려 초에 창건된 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진각국사의 비에는 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 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인 1386년에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이 비의 내력만으로도 창성사는 625년이 지난 절이었으니, 아마 그 이전에 지어졌다고 보면 그 역사가 상당한 절이었을 것이다.

 

석축으로 쌓은 우물터. 아직도 물이 고여있다 

 

약 500평 정도의 규모를 가졌을 창성사지. 그 안 서북쪽의 대웅전지에는 장대석으로 조성한 기단석과 여기저기 주초로 사용했던 돌들이 보인다. 이곳에는 탑재편과 기단의 갑석 등도 보이는데, 어느 것 하나 잡초더미 때문에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다. 위편 석축 끝으로 가서 산 아래를 바라다본다. 이곳에 절을 지은 이유를 알만하다. 저 멀리 아름다운 산의 능선이며 수원 시가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길을 안내하는 표시판 하나 없이, 잡초에 묻혀있는 고려 때의 절터인 창성사지. 이렇게 내버려둘 것 같으면 왜 향토유적 지정은 한 것일까? 돌아서는 내내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가슴이 미어지는 문화재 답사는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창성사지에서 바라다 본 능선. 저 멀리 수원이 희미하게 보인다.

 

충북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번지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연병호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으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연병호 선생은, 오직 나라의 앞날만을 생각하다가 일생을 마친 분이다.

 

제헌과 2대 국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이런저런 재산을 마련할 때도, 태어난 생가 한 채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도대체 연병호 선생이 태어나고, 만년에 다시 돌아와 살았다는 생가는 어떠한 모습일까?

 

 

 

초라한 집을 만나는 순간 눈물이 흘러

 

석곡리 마을 길 한편에 자리 잡은 연병호 생가. 돌로 쌓은 축대 위에 담장을 두르고 계단으로 오르면, 싸리문이 손을 맞이한다. 안에는 모두 네 칸으로 마련된 초가가 한 채 있을 뿐이다. 지금은 마당 앞에 연병호 선생의 생가임을 알리는 석비가 서 있지만, 이렇게 생가지가 정비되기 전에는 정말로 초라한 민초의 집이었을 것이다.

 

정남향으로 서 있는 초가는 네 칸이다. 좌측 세 칸은 방으로 드리고, 우측의 한 칸은 부엌이다. 정면 네 칸, 측면 한 칸 반으로 꾸며진 집은, 그저 어느 깊은 산골 외딴집을 보는 듯하다. 꾸미지도 않은 초가는 사람이 겨우 살아 갈만하다. 말이 집이라고는 하나, 이 집이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분의 집이라고 하기에는 어이가 없다. 눈물이 흐른다. 지금의 내 신세를 탓하기 전에, 선생의 그 살아오신 일생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부인과 자녀들이 함께 생활을 했을까? 초라한 집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부인과 자녀들의 마음 씀씀이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본다. 아마 선생의 나라만을 생각하는 마음을, 그 가족들 역시 함께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집에서 한 가족이 함께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평생을 나라 위한 마음으로 산 연병호 선생

 

연병호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자는 순서이며 호는 원명이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맏형인 병환을 뒤따라 망명길에 올랐다. 1919년 상해임시 정부 수립 후 조국에 돌아 온 후에는, 임시정부의 후원과 국제외교를 위해 청년외교단을 조직하였다. 1921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라 북경에서 독립혁명당을 조직했으며, 이듬해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피선됐다.

 

1937년에는 일본 관헌에게 체포돼 조선총독부로 인계된 후, 8년형을 선고받고 대전과 공주 감옥 등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국이 광복이 되고 난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을 하면서, 1948년 제헌국회의원과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제헌의원 시절에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말년에는 석곡리 집으로 돌아와, 1963년 생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남긴 재산이라고는 현재의 생가 한 채가 전부였다.

 

 

이곳을 집으로 삼아 사셨다니...

 

네 칸 중 세 칸의 방을 드린 초가. 한 칸마다 좁디좁은 문이 앞으로 나 있다. 겨우 어른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문이다. 그 중 부엌과 붙은 우측의 방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는데, 그것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판자로 꾸며졌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우측의 두 칸은 하나로 만들어진 큰 방이다.

 

좌측 끝 방과 연결하는 문은 문짝이 없이, 그냥 토굴의 구멍처럼 만들어졌다.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하였다는 생가의 형태는 바라볼수록 마음이 아프다. 큰 방의 천정 아래에는 시렁대가 놓여있다. 집이라고 너무 좁아, 어디 한 군데도 마음 편하게 사용을 할 수가 없다.

 

 

 

방을 나와 부엌으로 들어가니 부엌문도 없다. 벽은 짚을 엮어 바람을 막았다. 부엌 안은 아궁이와 진흙으로 다져놓은 것이 다이다. 뒤편으로 나가도 문이 없다. 뒤편 부엌 반대편에는 벽을 일부 담을 둘러 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세상에 이런 곳에서 살면서도 나라를 위한 생각만을 하셨다니.

 

대선을 위해 뛰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집을 돌아보고 나오면서 요즈음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과연 선생과 같은 입장에 있다면, 그들도 이런 집에서 살 수가 있었을까? 당연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란 것이 내 대답이다. 혹 모르겠다. 그 시절이라면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선생의 마음은 닮지 못했을 것이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수 없이 많은 집들을 보아왔다. 말대로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집을 본 적이 없다. 비록 초라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안에는 선생의 아름다운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요즘 대선을 앞두고 저마다 난리를 치시는 분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집이 바로 이 집이다. 그리고 이렇게 그들에게 묻고 싶다.

 

“이 집에서 살다 가신 연병호 선생님처럼, 세상 모든 것 다 버리고 오직 나라와 국민들만을 생각할 수 있는가?”


이제 2010년이 4일 남았다. 올 일 년 동안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길에서 들고 온 자료도 상당하다. 아마 전체적으로 돌아다닌 거리를 따지자면, 서울서 부산거리를 50여 번 정도를 왕복을 했을 정도의 거리를 돌아다닌 것만 같다. 그 많은 여정에서 만나 본 문화재만 해도 상당하다.

글 제목에 ‘얼마나 많은 소득을 올렸나?’라고 하니, 남들은 수입으로 알고 들어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소득이라고 하는 것은 돈이 아닌, 수많은 문화재를 말하는 것이다. 일 년 동안 어림잡아 4~500점 정도는 만나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한 번 답사를 나가면 15~20점 정도의 문화재를 답사한다. 그런 답사가 한 달에 두 세 번씩 일 년 동안 30회 정도를 나가 돌아다녔으니, 어림잡아도 500점 정도는 될 것 같다.

드라마 황진이의 촬영지 예천 병암정

늘어나는 자료CD, 그동안 다닌 족적인데

그동안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자료를 담아 놓은 CD가 2,000장이 넘을 듯하다. 이제는 자료 정리를 더 말끔하게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외장 하드를 사서 지역별과 종류별로 구분을 해 담아 놓아야 할 것만 같다. CD라는 것이 영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이다. 그래야만 안심이 될 것만 같아서이다.

만 2년을 티스토리를 접었다가 다시 시작을 한 것이 올 해 8월이다. 2010년 8월 2일 첫 글을 다음 뷰로 송고를 하고 난 후 270개의 글을 썼다. 첫 글은 ‘금강가의 아름다운 정자 만하루와 연지 ’라는 글을 송고했는데, 지금 보니 추천이 43에, 단 한 개의 댓글이 달렸다. 그 댓글의 주인공이 바로 ‘친구 세라’ 님이다.

공주 공산성 안에 자리한 만하루와 연지

그리고 5개월 동안 270개의 글을 올렸으니, 적은 글은 아니다. 결국은 5개월 동안 250 점이 넘는 문화재를 답사를 했다는 것이니. 올 일 년 500점 정도의 문화재 답사를 했다는 것이 맞을 듯하다. 그 많은 문화재를 만나보면서 기쁨도 있고, 슬픔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현장에서 만나는 문화재를 보면서 눈물도 적잖이 흘린 듯하다.

2010년 한 해, 참 많이도 울었다.

길을 나서 만나는 문화재들은 다양하다. 국보서부터 보물, 사적, 중요민속자료, 등록문화재자료, 유형문화재, 민속자료, 거기다가 비지정문화재까지, 수도 없이 많은 문화재들을 접할 때마다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그 문화재들의 현실을 보면서, 참 많이도 눈물을 흘렸다. 때로는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훼파된 문화재의 몰골이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국보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과 보물 연곡사 동부도비

티스토리에 송고를 하지 않을 때도 답사는 계속되었다. 그렇게 일 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꽃이 피는 봄부터 시작해, 무더위가 기승을 떠는 뙤약볕 아래서 갈증을 느끼기도 했다. 아름다운 단풍에 취해 갈 길의 시간을 못 맞추어, 몇 시간을 걷기도 했다. 앞이 안보이게 눈이 날리는 바람에 길을 잊어 방황을 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답사를 하면서 일어난 일들이다.

사진 한 장한장이 소중한 까락은 바로 그런 고통 속에서 얻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진 안에 소중한 문화재의 정신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선조들의 예혼(藝魂)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일 년 동안 적어 온 글을 열어보면서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하지만 그 아쉬움이 있어, 2011년을 걸어야 할 힘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중요민속자료 함양 일두 정여창 가옥과 천성산 홍룡폭포

답사를 하면서 어쩌다가 만나게 되는 분들. 신묘년에는 그런 분들은 더 많이 만나게 되기를 갈망한다. 그것이 우리 문화재를 지켜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 년간 그래도 어쭙잖은 글을 보느라 말없이 들려주신 모든 분들에게 머리를 숙여 고마움을 전한다. 나를 버티게 한 진정한 힘은 바로 그분들이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올해도 상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추석날 가족들과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시간에, 홀로 절집을 찾아 명부전에 차려진 제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남자. 이유는 무엇일까? 묻기도 멋쩍어서 그냥 기다리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그냥 자신이 초라해서 그렇습니다.”
“추석인데 가족들과 함께 계셔야지 왜 혼자 이곳에서..”
“집에 갈 수가 없습니다. 가족들을 볼 수도 없고요”



가족들과 함께 못하는 추석

이야기를 들어보니 작은 개인 사업체를 운영하던 이분은, 꽤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사업을 확장할 욕심으로 여기저기서 자금을 끌어 모은 것이 화근이 되어, 급기야는 사업체까지 남의 손으로 넘어가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집의 모든 재산들이 압류가 되어, 식구들까지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막상 추석날은 친구 집에서도 신세를 질 수가 없어 무조건 길을 나섰다는 것이다.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이분은 할 수 없이 절을 찾아들고, 절에는 추석날 제상을 차려놓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곳으로 왔다는 이야기다. 들어보면 참 가슴 아픈 이야기다.

아버님의 상을 올해도 차리지 못했다는 눈물

참으로 가슴이 답답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자손이 되어서 조상님들께 제를 올려야하는데, 상을 차릴 곳도 상을 차릴 돈도 없어 절을 찾았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절에라도 와서 인사를 드리고 가면 좀 마음이 덜 아프죠.”
“시간이 되시면 이따가 공양이라도 하고 가세요."
“아닙니다. 오늘은 그저 산이라도 올라 마음껏 소리라도 쳐보고 싶네요.”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앞 다투어 길을 나서는 추석이다. 시간이 걸리고 길이 막혀도 기다리는 소중한 가족들이 있어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가 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는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명색이 명절인데 마땅하게 갈 곳도 없어, 절을 찾아 무릎을 꿇는 그 심정이 오죽할까?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는 것을 느낀다. 비록 가족들과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가족들이나 다름없는 절집 식구들과 함께 웃을 수 있으니 말이다. 거기다가 손수 차린 상 앞에 무릎을 꿇고 조상님께 잔을 올릴 수 있으니, 이 또한 행복이 아니던가. 어제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로 조금은 우울한 날인데, 오늘 이 분과의 대화로 인해 내가 얼마나 행복에 겨워 투정을 부리는 가를 생각한다.

부디 내년에는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추석날, 절집을 찾아 울음을 우는 분들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족둘과 떨어져 혼자 쓸쓸히 한숨을 쉬시는 분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느 곳에선가 말못할 사연을 안고 슬픔에 차있는 분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참 친절한 이웃 덕분에 눈물을 쏟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오늘 아침 이웃이 전 모둠을 한 접시 들고 오셨다. 마침 출출하던 차라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드린 다음,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는데 어디서 좀 상한 음식 냄새가 난다. 요즈음처럼 날씨가 무더울 때는, 그저 어떤 음식이던 간에 조심을 하는 것이 좋다.

전 모둠을 들어보니 약간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하지만 지금 방금 해왔다고 하고, 아직도 따듯한 온기가 있는데. 설마 이 음식에 무슨 문제가 있으랴 싶다. 하던 일을 마치고 출출하던 차에 전을 먹으려고 수저를 들었다.

이웃집에서 가져 온 전 모둠. 보기만해도 먹음직스럽다.

접시에는 이것저것 많이도 있다. 송이버섯이며 동태전, 꼬치에 고추. 그리고 몇 가지가 더 있는데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먹어보았지만 별 이상이 없다. 그렇다면 이 알 수 없는 냄새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런데 딴 것은 다 외형만 보고도 알겠는데, 한 가지가 영 무엇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작은 생선을 통째로 전을 만든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그런 걱정을 오래하는 성미가 아닌지라. 먹어보면 될 것을.

출출하던 차에 정말로 맛있게 먹고 있는데...

그 이름 모를 전을 입에 집어넣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웩”하고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이런 일이. 정말 잘 삭힌 홍어전이다. 세상에 난 전을 먹다가 홍어전을 다 먹어보게 될 줄은. 목은 따갑고, 입안에는 호어 특유의 냄새로 가득하고. 누군가 정말 잘 삭힌 홍어를 먹으면 ‘코가 뻥 뚫린다’고 했다. 정말 코가 뻥 뚫리는 느낌이다.

요것의 정체는 영 모르겠다. 약간 맛이 간듯도 하고. 그래서 덜썩 한입

그리고 보니 언제인가 어느 기사에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아주 잘 삭힌 홍어는 전으로 부쳐 먹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래도 그렇지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 냄새의 진원지는 바로 이 홍어였던 것이다.

세상에 잘 삭은 홍어전이다. 내 생전 처음 먹어 본. 눈물서 부터 시작해 온갖 곳에서....

이웃의 따스함에 감동이 되어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고, 그 전 모둠 안에 홍어전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감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나. 이렇게까지 감동을 하게 만들다니’라는 속없는 말을 뱉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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