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화림동 계곡에 자리한 동호정은 많은 분들이 글로 남겼다. 그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는 우리나라 정자 증 한곳이다. 동호정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정자와는 다른 면이 있다. 적어도 내 눈에 비친 동호정은 아름답다라는 말로 표현을 해선, 죄스런 마음이 들 것 같은 그런 정자이다. 난 동호정을 보면서 자연 그대로다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함양의 화림동 계곡은 자연이다. 그곳에는 여덟 개의 정자와 여덟 곳의 깊은 물이 있다고 하였다. 그 중 동호정은 가장 큰 정자로 꼽힌다. 정자가 크면 웅장할 것이란 생각을 하지만 동호정은 절대로 웅장하지 않다. 동호정은 한 마디로 자연이다. 뛰어난 자연의 경치를 느낄 수 있는 화림동 계곡에서 자연 그대로를 옮겨 놓은 그러한 정자이다.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에 자리 잡은 동호정은 가선대부 오위장을 지낸 장재헌을 비롯해 장대부, 장서진, 장서부 등이 뜻을 모아 1890년에 세운 정자이다. 정자의 역사는 이제 130년이 되었다. 그러나 1936년 중수를 한 차례 했을 뿐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동호정은 장재헌 등이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몽진 때 임금을 등에 업고 피난 간, 동호 장만리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지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 전하다.

 

장재헌은 장만리의 9세손이며, 장대부, 장서진, 장서부는 10세손이다. 동호정의 앞에는 너럭바위라 불리는 차일암이 있다. 한 번에 수백 명이 올라가 쉴 수 있다는 이 너럭바위와 동호정, 그리고 그 앞을 흐르는 물은 그야말로 모두가 한데 어우러진 자연이다. 경남 문화재자료 제381호로 지정된 동호정 주변을 돌아보면 왜 이곳을 자연이라고 하였는지 이해가 간다.

 

정자 밑에서 바라다 본 차일암에는 비가 와 물이 불었는데도 사람들이 올라 있었다. 평소에는 너럭바위로 갈 수 있는 길이 생긴다고 한다. 이 날은 비도 왔지만, 그 전에 내린 비로 인해 길이 물속에 잠겼다. 같은 너럭바위를 보는데도 정자 위로 올라가니 사뭇 그 경치가 달라 보인다. 이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누가 감탄을 하지 않을까? 그저 시 한 수 읊조리고 싶어지는 곳이다.

 

 

'사람이 날 그대로 썼으니 나도 닮아질 때까지 사람들의 발길에 머물겠다.' 마치 그렇게 말을 하는 것만 같다. 누구나 한 번 쯤은 쓰고 지나갔을 계단이다. 동호정은 중층 누각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땅에 붙여 지으면 정자라 하고, 밑으로 사람이 다닐만한 공간이 생기면 누각이라 한다. 하지만 동호정은 '동호루'라 불러도 될 것을 정이라고 하였다. 아마 그 이름 속에도 자연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계단은 통나무 두개를 도끼를 찍어내어 홈을 파고, 그것을 맞추어 이층 난간에 걸쳐놓았다. 인위적인 모습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지켜가고 싶었나 보다. 정자를 받치고 있는 기둥을 보아도 알 수 있듯, 동호정은 자연 그대로를 최대한 살려낸 아름다움을 지녔다.

 

이른 낮술이라도 먹은 것일까? 정자 위로 올라가니 남자 몇 명이 세상모르게 지고 있다. 위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니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온다. 계단을 맞댄 쪽을 안으로 들여, 결코 나서려 하지 않는 겸손함을 배우게 하였다. 아마 장만리 선생의 성품을 닮은 후손들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다.

 

 

천정을 올려다보니 백호와 청룡이 난무한다. 양편에 머리를 내민 청룡은 한편은 여의주를 물고, 한편은 물고기를 물고 있다. 냇가나 바닷가 등 물가에 세운 용들의 입에는 이렇게 물고기를 물고 있다.

 

동호정을 조금 비켜 선 듯 서 있는 소나무. 암벽 위에 그대로 솟은 소나무 한 그루가 동호정의 극치란 생각이다. 많은 이들이 올라 계곡을 흐르는 물과, 너럭바위를 볼 때 시야를 가리지 않기 위해 한 발 물러선 듯하다. 자연 그대로를 닮아 서 있는 동호정. 이를 제일로 치는 것은 바로 그 자체가 자연이기 때문이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 소재한 송광사. 김제 금산사의 말사이면서도 사세는 어느 고찰 못지않다. 송광사는 많은 문화재가 있지만, 그 중 돋보이는 것은 당연히 조선시대에 축조된 보물 제1244호 종루이다. 송광사 종루는 십자각으로 지어진 종루이다. 중앙에 종을 매달고 동서남북 사방을 돌출시켜 열 십(十)자 모양으로 지어진 이층 누각을 말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고찰 송광사

 

완주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인 867년에 도의선사가 처음으로 창건했다고 한다. 신라 때의 승려 도의는 가지산파의 개조로 추앙을 받은 승려이다. 가지산파란 구산선문의 하나로, 헌덕왕 때 보조선사 체징이 도의를 종조로 삼고 가지산 보림사에서 일으킨 선풍을 말한다.

 

 

송광사는 그 뒤에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가 중건을 하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인 1622년에 응호, 승명, 운정 등이 중건을 했다고 한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으며, 현재도 많은 불사를 하고 있는 절이다.

 

화려한 이층 누각으로 마련한 종루

 

송광사의 종루는 조선조 세조 때 처음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던 것을 철종 8년인 1857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조선조에 세워진 수많은 건조물 중 유일한 이층 십자형 종각으로, 그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건조물이다. 이 종각은 중앙에 종을 매달고 돌출된 부분에는 각각 북과 목어, 운판을 걸어놓았다.

 

 

 

이 네 가지의 기물은 불당 앞에 위치하고 있어 '불전사물(佛前四物)'이라고 하고 있으며, 아침과 저녁 예불을 올리기 전에 울린다. 북은 땅 위에 사는 네발을 가진 짐승을 위해서, 목어는 물속에 사는 생명체를 위해서, 운판은 창공을 나는 모든 날짐승을 이해서, 그리고 종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을 위한 것이다.

 

송광사 종루는 화려하면서도 소박하다. 자연석인 정평주초 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들은 원형기둥과 사각기둥이 섞여 있다. 그 중에는 자연적인 목재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 있어, 소박함이 느껴진다. 누 위에 기둥들은 모두 원형기둥을 세워 놓았다. 송광사 종루의 공포는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다. 사방 팔작집으로 마련한 종루는 지붕 중심 용마루의 장식 또한 색다르다. 이러한 종각은 우리나라에 유일한 것이기에 그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하겠다.

 

 

 

 

 

볼수록 빠져드는 송광사 종루

 

요즈음은 참 일기가 가늠하기가 힘들다. 맑았다가도 비가오기도 하고, 여름 같은 날씨이기도 하다가 갑자기 가을이 온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완주군 소양면 방향으로 일을 보러나갔다가 송광사를 들렸다. 사월 초파일 준비로 한창인 경내에는 수많은 등에 여기저기 걸려 그 화려함을 자랑한다. 대웅전 앞에 자리한 이층 종루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전국의 고찰을 다니면서 수많은 종각을 보았지만, 송광사 중층 종각과 같은 것을 보지 못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용마루 중앙에 올린 장식도 아름답지만, 귀공포의 화려함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그리고 누마루 밑의 자연스런 기둥들. 제각각 그 모습을 달리한 기둥의 형상들이, 마치 각양각색의 인간들을 보는 듯하다. 그 많은 중생들이 서로가 불전사물을 받치고 예라도 올리는 듯한 모습이다. 송광사 종루를 볼 때마다 마음이 경건해지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언제나 그 자리에 그 모양을 하고 서 있지만, 볼 때마다 빠져드는 송광사 종루. 오늘도 온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수많은 생명들을 위해 사물에서는 저절로 소리가 울릴 것만 같다.

정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좁다. 그렇다고 볼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 눈에도 참으로 고졸한 정자란 느낌이 든다. 정자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말끔히 단장이 된 정자는 어디 한 곳 흠 잡을 곳이 없다.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에 소재한 택풍당. 양동에서 여주 북내면으로 나가는 길목 우측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마을 끝에 자리하고 있는 택풍당을 만날 수가 있다.

 

택풍당은 광해군 11년인 1619년에 이식 선생이 제자와 자손들을 가리키고,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지은 누각이다. 정자는 이층 누각형태로 지어졌으며 사방에 난간이 없이 누마루를 놓고 중앙에 작은 방을 드렸다. 그저 조촐하고 고졸한 멋을 풍기는 택풍당은, 뒤숭숭한 정국을 뒤로하고 이곳으로 내려온 이식 선생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바람따라 흘러온 것일까?

 

이식 선생은 조선시대의 한문사대가이자 대문장가로 알려졌다. 자는 여고이고 호는 택당(澤堂)이다. 누각의 이름도 자신의 호에 바람풍(風)자를 넣어 지었다. 아마 자신이 바람을 따라 이곳에 왔음을 뜻하거나, 세상의 시류에 휩쓸리지 말라는 뜻으로 지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북평사 및 선전관 등을 역임하였으나, 광해군10년인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곳에 낙향하여 오직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택풍당은 선생이 낙향한 이듬해에 지었다. 가을 단풍이 온 산하를 물들이고 있을 때, 지나던 길에 우연히 찾아들어 간 택풍당.

 

 

 

첫눈에도 참으로 조촐한 누각이란 생각으로,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지 않은 담장을 둘러치고 작은 문을 낸 택풍당은, 중층 누각의 형태로 지어졌다. 아래를 막은 것으로 보아 아마 그곳에 불을 지필 수 있도록 한 것이나 아닐까? 창호도 가장 흔한 것으로 했다. 주인은 어디 하나 검소하지 않음이 없다.

 

 

 

주인의 심성을 그대로 간직한 작은 집

 

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담 밖에서 집주위를 돌며 들여다 본 작은 정자 하나. 그 안에서 큰마음을 읽어낸다. 그것은 그저 평범한 가운데서도 고졸한 멋을 풍기고, 반듯하면서도 화려함을 피한 택풍당의 모습 때문이다. 폐모론이 일자 모든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이곳 쌍학리 촌마을로 찾아 든 선생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지금도 택풍당 주변에는 몇 집 되지 않는다. 400여 년 전에는 이곳에 몇 집이나 있었을까? 아마 이곳에 내려와 세상 인연을 끊고 후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낙을 삼았을 것만 같다. 많은 정자를 찾아다녔지만 이처럼 조촐하고 고졸한 누각은 쉽게 만날 수가 없다. 지나는 길에 우연히 따라 들어간 곳에서 만난 작은 집. 그 곳에서 큰 교훈 하나를 얻어간다. 세상 시류에 물들지 말고 초연하라는.

화성행궁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바로 ‘신풍루(新豊樓)’이다.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정조 14년인 1790년에 세운 누문이다. 처음에는 6칸으로 된 문을 세우고 조심태가 편액을 써서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정조는 1795년에 문의 이름을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명칭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정조는 이름을 고치고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를 벌리기도 했다.



2월 13일, 신풍루에 오르다

정조 18년인 1794년 가을 행궁을 대대적으로 증축할 때는 누대 양편에 군영을 설치하고, 정조 19년인 1795년에는 누문 앞으로 길이 114척, 넓이 35척의 돌다리를 설치하여 ‘신풍교’라 이름하였다.

2월 13일(월) 화성 행궁을 찾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간 곳이지만, 신풍루는 아래에서만 사진을 찍었을 뿐, 위로는 한 번도 올라가지 못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출입을 금한다는 푯말 때문이다. 화성사업소에 들려 신풍루를 촬영하겠다고 허락을 받고 신풍루로 올랐다.

1907년 헤르만 산더의 사진


신풍루는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123번지에 소재한다. 국립민속박물관에 보관중인 1907년 헤르만 산더의 사진에는 신풍루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신풍루 위로 올라보니, 팔달문 밑으로 놓인 행궁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문밖으로는 팔달문에서 장안문으로 가는 도로와, 건너편 창룡문 쪽으로 가는 도로가 보인다.

아마도 이 행궁을 짓고 난 정조 당시에도 이곳 신풍루 앞은 이렇게 길이 나 있었을 것이다. 뒤로는 팔달산을 끼고, 앞으로는 넓은 도로를 볼 수 있는 곳, 이 신풍루의 누각에 올라 정조는 마음속에 담은 큰 뜻을 펼치려고 했을 것이다.




장초석으로 바친 기둥, 장엄함의 상징

6칸 규모의 중층 누각으로 지어진 신풍루는 위로는 누마루를 놓고, 아래는 3개의 얼문을 설치하였다. 정조는 나중에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에 내려와 살 생각을 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행궁의 정문 또한 남다른 신경을 써서 축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어른 키만한 장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려 이층 누각을 받치게 하였다. 안쪽으로는 바깥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장초석을 사용하여 웅장함을 더했다. 삼문은 판문으로 해서 달았으며, 문의 좌우에도 판벽을 둘렀다. 이층 누각으로 올라가는 누각은 가파르다. 그만큼 누각을 높였다는 것이다. 누마루를 깐 이층에는 사방을 둘러 난간을 달아냈다.


이층 누각으로 오르면 좌우로는 남군영과 북군영의 지붕들이 보이고, 팔달산 쪽으로는 시원하게 공간을 내어 정전의 바깥 출입문인 좌익문을 만나게 하였다. 화성 행궁은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그 행궁의 문인 신풍루. 아마도 이 신풍루의 이름을 직접 지은 정조는, 이 누각 위에서 강한 군주가 통치하는 나라를 그렸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글을 썼다. 글마다 광한루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광한루는 조선조 세종 원년인 1419년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천경계를 즐기던 곳이었다. 1444년에는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이라는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후 ‘광한루’라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 후 광한루는 1461년 부사 장의국에 의해 보수가 되고, 1582년에는 전라도 관찰사인 정철이 광한루를 크게 지었다. 현재의 광한루는 정유재란 불에 탄 사라진 것을, 인조 16년인 1639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다. 광한루원 전체는 명승 제33호로 지정이 되어있지만, 광한루만은 보물 제28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호남제일루'라 명성을 얻어

'호남제일루', 광한루는 그런 명성에 조금도 뒤처지지 않는 누각이다.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지은 누각을 말한다. 밑으로는 사람이 서서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높인 전각이다. 광한루의 규모는 정면 5칸에 측면이 4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누마루 주변에는 난간을 둘렀고 기둥 사이에는 4면 모두 문을 달아 놓았는데, 여름에는 사방이 트이게끔 안쪽으로 걷어 올려 걸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또한 누의 동쪽에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부속건물인 날개채를 들였다. 주위로는 툇마루와 난간을 둘렀고 안쪽은 온돌방으로 만들어 놓았다. 뒷면 가운데 칸에 있는 계단은 조선 후기에 만든 것이다. 춘향전의 무대로도 널리 알려진 강한루.앞으로는 넓은 인공 정원과 인공 섬, 그리고 정자들이 서 있어 한국 누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광한루 뒤집어 보기, 문화재 관리의 양면성

누구나 광한루를 가면 그 누정에 올라 춘향이와 이몽룡의 사랑을 한 번쯤 흉내를 내보고 싶어한다. 한 때는 광한루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소중한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어째 우리나라 문화재의 보존 관리는 공무원들의 사고에 의해서 멋대로 바뀌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출입을 시켰을 때는 문화재 보호가 되지 않는 것인지.

그렇게 문화재 관리를 통제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입장료 받고 광한루원에도 출입을 시켜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 정작 광한루원은 돈을 받고 출입을 시키고, 광한루는 보존을 해랴하기 때문에 출입을 시킬 수 없다는 것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광한루의 주추는 특이하다. 밑에는 네모난 덤벙주추를 놓고 그 위에 막다듬은 장초석을 올렸다. 다시 원형의 기둥을 놓고 누마루를 받치게 하였다. 일부는 장초석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동편에 붙여지은 날개채는 온돌방이다. 그런데 그 밑에는 네모난 장초석으로 받쳐놓고 있다. 그 날개채 밑을 한 바퀴 돌아본다. 그러나 온돌방 밑에 있어야 할 아궁이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 돌 담으로 막아 놓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아궁이만 볼 수 있어도 한결 문화재를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화재 관리의 양면성을 본다. 한편에서 보존이라는 허울아래 출입을 통제시키면서, 정작 온돌방의 밑 부분은 모두 돌담을 쌓아 막아버리다니. 이런 양면적인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씁쓸하다. 아마도 저 막아버린 돌담 안에는 한편을 높게 싼 아궁이가 있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광한루, 월궁의 선녀인 항아가 노닐만 하다는 곳. 그리고 춘향전의 무대가 되었던 곳. 그 무대 주변만 맴돌다가 결국엔 열어서 위로 붙들어 맨 창틀만 찍고 말았다. 느껴야만 하는 문화재를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단절시키는 이런 행위, 이것만이 정말 보존일까? 제대로 된 문화재 정책이 아쉽다. 어느 곳은 보물인데도 사람들을 출입시켜 더욱 마루가 반들거리고 보존만 잘 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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