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천동은 수원시 장안구의 율전동과 천천동을 합한 지역이다. 인구 45천여 명의 율천동은 수원시의 주민센터 중에서도 많은 인구를 갖고 있는 동에 속한다. 율전은 밤밭이다. 율전은 조선 시대애는 수원부 형석면 지역이었다. 191441일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 때 율전리라 하여 일형면에 소속되었다.

 

193141일 수원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1936101일 일형면과 의왕면이 통합되어 일왕면이 되었는데, 이때 일왕면에 소속되었다. 해방 후인 1949 8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자 이 지역은 화성 군 일왕면 율전리로 개편되었다. 이후 196311일 법률 제1175호에 의하 여, 화성군 일왕면에서 수원시로 편입되었다. 이 때 파장리, 이목리, 천천리, 정자리 등과 함께 행정동인 파정동 관할이 되었다.

 

1983101일자 시 조례 제1139호 에 의하여, 파정동이 파장동과 정자동으로 분리될 때 이목동, 파장동, 천천동 등과 함께 파장동 관할이 되었다. 199011일자 수원시 조례 제1607호에 의하여, 파장동이 율천동과 파장동으로 분동되었다. 이때 율전동은 천천동과 함께 파장동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어, 율천동 관할 하에 들어갔다. ‘율전이라는 동 이름은 밤밭을 한자화 한 것인데, 이 지역에 밤나무 밭 이 많았던 데서 나 온 것이다.

 

 

1990년 천천동은 율전동과 함께 파장동에서 떨어져, 율천동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된다. ‘천천(泉川)’이라는 동 이름은, 이 지역에 큰 샘이 있어서 샘물이 내를 이루어 서호천으로 흘러들어갔으므로, ‘샘내또는 이의 한자어인 천천이라 불리던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 동 이름으로 정한 것이다.

 

좋은시장 열린대화열기 뜨겁다

 

20일 오후 3시 율천동 밤밭문화센터 3층 대강당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김주성 경기도의원을 비롯하여 강장봉, 염상훈, 유철수 수원시의회 의원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열린대화가 시작되기 전에 밤밭문화센터의 동아리인 밤밭예술단의 연극과 벨리댄스도 식전행사로 무대에 올라 많은 박수를 받기도.

 

수원시장이 주민들에게 필요한 사항이 있느냐고 질문을 하자, 여기저기서 주민들의 이야기가 터져 나온다. 지역의 한 주민은 게이트볼장이 비가 오면 온통 물이 차 진흙 밭으로 변한다고 새롭게 조성해 줄 것을 요구했다. 또 한사람은 성균관대 역 앞에 지하차도가 음습해 등하교를 하는 어린이나 주민들이 불편해 한다고 개선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요구사항에 관해 수원시장은 홍성관 장안구청장과 관련 과장들에게 신속히 처리해 줄 것을 시달하기도. 좋은시장 열린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한 주민은

우리 율천동은 많은 인구를 갖고 있는 동입니다. 마을에 숙원사업도 상당히 많은 편이고요. 요즈음은 우리 수원이 자랑스럽고, 제가 율천동에 거주한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이곳에 복지관과 도서관, 그리고 성균관대 역사가 새로 조성이 되면 정말 좋은 마을이 될 것 같습니다라고 행복해 하기도.

 

처음부터 두 시간 가까이 걸린 열린대화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한 어르신은

우리 수원이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마을인 것 같다. 오늘은 우리 수원이 여섯 번째로 목민대상을 받았다. 목민대상이 무엇이겠느냐.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에 가장 걸 맞는 행정을 폈다는 것이다. 지난 한 해 우리 수원은 모두 60여 차례의 상을 받은 도시이다. 그만큼 많은 일을 했다는 소리가 아니겠느냐? 그리고 율천동에는 노인복지관이 새로 건립중이다. 율천동은 경로당이 18개나 있다. 그만큼 많은 노인들이 지역에 있다는 것이다. 노인복지 면에서도 우리 수원이 당연 최고라고 생각한다.”면서 노인을 공경할 줄 아는 율천동이 아니겠느냐고 은근한 자랑을 하기도.

 

칠보산 무학사 태고종 대종사 혜성 큰스님을 뵙다

“저희 큰스님께서는 출가를 하신 후에 평생 남을 위해서 살아오신 분이십니다.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시죠. 지금까지도 40년이 넘는 세월을 그렇게 남을 위해서 살아 오셨습니다.”

칠보산 아래 금곡동 무학사 주지이신 혜성 큰스님. 스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대뜸 ‘아! 그분’하고 머리를 끄덕일 것이다. 1969년 태고종에 입문을 하신 후, 1969년 12월 칠보산 중턱에 무학사라는 절을 지으셨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남을 위한 삶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혜성 큰 스님의 이러한 남을 위한 삶은 아직도 계속 중이다.

“큰스님 어째 그렇게 남을 위해서 사시나요?”

참으로 큰스님께 드려서는 안 될 우문(愚問)을 드린 셈이다.

 

어려서부터 고통 받는 사람들을 두고 볼 수가 없어

 

“아마도 어려서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것이 이유인 듯합니다. 조국의 분단의 비극과 한국전쟁을 겪고 나서 주변을 돌아보니, 저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이 보였어요. 그래서 집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가를 하게 되었죠.”

 

사실 알고 보면 이렇게 남을 위해 봉사를 하고, 가진 것을 선뜻 내어주는 것은 집안의 내력이다. 혜성 큰스님의 조부는 8,15 광복 후에 현 화성시 매송면(당시 수원군)의 초대 면장을 지내셨다. 1958년 당시 자비를 들여 어천수리조합이라는 것을 조성해, 수리조합장을 역임하면서 농민들에게 물을 대어주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신이 갖고 있는 수만 평에 달하는 농토를 농민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매송면, 남양면, 비봉면 일대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분들은, 조부의 공을 기억하고 있다고. 조부의 뒤를 이어 부친도 3대 면장이었다고 한다. 부친 역시 남을 돕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사셨다는 것. 어려서부터 그런 선조들의 삶을 보고 자라난 혜성 큰스님께서도, 자연이 남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 손에 무엇을 쥐고 나오나요? 아니죠. 빈손으로 나옵니다. 본디 세상에 내 것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마치 내 것 인양 알고 있기 때문에 분란이 오고 화가 미치는 법이죠.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죠.”

 

100억대에 달하는 땅도 쾌척하신 혜성 큰스님

 

“큰스님, 그 많은 재산을 어떻게 그렇게 기부를 하셨습니까?”

질문마다 참 우문을 한다는 생각이다. 이미 혜성 큰스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을 뛰어넘어 피안에 살고 계신 것은 아니신지. 그럼에도 속된 질문을 하고 말았다. 혜성 큰스님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우시면서

“본디 내 것이 없다고 말씀을 드렸죠. 그리고 그런 재산을 갖고 있으면, 이다음에 우리 문도들이 환란을 당하게 됩니다. 팔요 하신 분께 드려야 그 분들이 또 좋은 일을 하시는 것이죠.”

혜성 큰스님은 2012년에 1차로 시가 약 15억 원에 달하는 땅 3천 평을 사회에 헌납하셨다. 그리고 이어 남들이 금싸라기 땅이라고 하는, 시가 100억 원에 달하는 땅마저 노인복지발전을 위해 기부를 하셨다는 것이다.

“그 때는 그렇게 큰 돈 인줄 몰랐어요. 기부를 하고보니 시세로 따져 그렇게 큰 금액이라는 겁니다.”

얼굴 가득 웃음을 띠신 혜성큰스님은, 세상에 태어나 꼭 해야 할 일이 바로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강조를 하신다.

 

 

세 번이나 총무원장의 소임을 맡아

 

“우리 큰스님은 참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남들은 한 번도 하기 어렵다는 총무원장을 세 번이나 역임하셨고, 입적하신 큰 스님들도 받지 못하는 대종사 칭호를 살아생전에 받으신 분이십니다. 이런 일은 모두 그동안 큰스님께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해 오셨는가를 알 수 있는 일이죠.”

한 자리에 앉아 대화를 하시던 처사님 한 분이 말씀을 하신다. 그런 말씀을 듣는 혜성 큰스님은 손 사례를 치신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저는 그저 제가 할 몫을 다했을 뿐이죠. 제가 너무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기가 송구해, 몇 번을 고사를 하기도 했죠. 지금도 부끄러울 뿐입니다.”

 

혜성 큰스님은 1989년 대한불교 법상종 총무원장. 1989년 한일불교 문화교류 한국대표. 1991년 남북불교도 한국대표. 1995년 한국불교 미륵선종 총무원장. 1997년 한국불교 법왕종 총무원장. 2011년 대만국제불교 재승대회 한국대표 등을 역임하셨다, 2013년에는 한국불교 태고종에서 큰스님들이 타계 후에야 받는다는 ‘대종사’ 칭호를 생존에 받으셨다.

 

 

30년 넘는 세월을 이어온 장학사업과 노인복지사업

 

혜성 큰스님께서는 남을 위하는 것이 몸에 배셨다. 198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장학 사업을 하고 계시다. 언제나 소문 없이 하시기 때문에 아직도 큰스님의 소문이 나지 않고 있단다. 큰 스님의 장학 사업은 칠보초등학교를 비롯해 서호, 매송, 송라, 호매실, 탑동, 금호, 능실초등학교 등 졸업식 때만 되면 어김없이 이어지셨다. 미래에 이 나라를 짊어질 동량이 될 어린이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아 부으신 것.

 

그런가하면 노인복지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계시다. 1980년부터 어르신들을 위한 경노사업도 이어오고 계신 것. 매년 칠보초등학교 강당에 500~600명의 어르신들을 초청해 식사를 대접하시고 계시기도. 또한 (사)대한노인회 금호동 협의회 23개 회장단에게 월례회마다 점심식사대접을 하셨다. 그 외에도 45개 통장님들에게도 많은 위로와 함께 지원을 하기도.

 

현재 혜성 큰스님께서는 사단법인 사회복지발전협의회 이사장님으로, 하루 24사간을 쪼개, 봉사 일에 전념을 하고 계시단다.

 

“큰스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법문 한마디 부탁드려도 될까요?”

없는 시간을 쪼개어 만나주신 스님께 법문을 부탁드렸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남에게 의지해서 살면 안 됩니다. 자신이 노력을 해서 얻은 수익 중, 단돈 1,000원이라도 남을 위해 쓸 수만 있다면, 굳이 복지라는 것을 정부에서 할 필요가 없죠. 그저 사람은 아무것도 갖고 갈 수 없습니다. 하기에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니 내려놓아야죠. 그 마음만 갖고 있다면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 도래할 것입니다”

 

대담을 마치고 포행을 나가시는 혜성 큰스님의 뒤로 바람 한 점이 따라간다. 아마 저 바람도 큰스님 마음이 닮고 싶었나보다.

아침 일찍 출근을 하려고 집을 나섰다. 빗방울이 약간씩 뿌리고 있는데, 두 노인이 손수레를 끌고 힘들게 비탈을 오르고 있다. 손수레에는 폐지와 공병 등이 가득하다. 요즈음 어딜 가나 골목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래도 그렇지 비가 뿌리는데, 이 이른 시간에 손수레에 가득한 고물을 끌고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우리사회의 노인인구, 특히 자식과 떨어져 홀로 사는 인구가 이미 120만을 넘었다고 한다. 그만큼 노인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의 노인복지정책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데 그치고 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현실적이지 못하고, 행정편의주의식 발상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사진은 본문의 내용과 관계가 없습니다

한 논문의 내용을 요약해보자

「실제로 노인복지정책과 관련해서 최근 우리나라 노인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목소리들을 보면 국가는 노인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는 것 같다. 노인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노인문제에 무관심한 정부당국의 처사에 분노를 느낀다.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박재간,1999)」

물론 그 1999년보다는 많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노인복지를 제대로 하는가?’ 라는 질문에는 ‘그렇다’라는 대답을 하게에는 부족한 듯하다. S시의 경우 주민등록상 65세 이상의 노인이 모두 80,992명이다. 그 중 기초노령연금을 받는 세대는 39,981 가구에 수급자는 47,053명이다. 이들은 소득에 따라 차등지원을 받는데, 노인단독의 경우 20,000~94,600원이고, 노인부부인 경우는 40,000~151,400원을 수령한다,

이것은 기초노령연금으로 65세 이상 전체 노인의 70%가 혜택을 받는다. 2012년 현재 선정기준은 노인단독의 경우 소득만 있는 경우는 월 78만원 이하가 해당되며, 부부의 경우에는 월 124.8만원이 해당된다. 소득은 없고 재산만 있는 경우, 수원은 중소도시에 해당된다. 1인 단독의 경우에는 2억 5,520만원 이하, 부부의 경우에는 3억 6,752만원이 해당된다.

그나마 S시는 각 구청 단위로 담당자들이 일일이 노인들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한 구의 노인복지 담당자의 말을 빌리면 독거노인들을 상대로 수혜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소득이 있거나 재산이 있는 노인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재산도 없이 단칸 셋방살이를 하거나, 월 소득이 전혀 없는 노인들의 경우는 여러 가지 조항에 부합이 되어야 수혜를 받을 수가 있다. 우선 재산도 없고 자녀들이 부양을 하지 않을 경우의 노인이 신청을 하면, 먼저 본인소득재산을 알아보고, 부양의무자인 자녀들의 생활도 알아보게 된다.

그리고 난 뒤 자녀들에게 일정액의 부양의무금을 부담시킨다는 것이다. 문제는 연세가 많은 노인들이 이런 것을 일일이 다니면서 알아보기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신청을 한 경우에만 움직일 수 있다는 현재의 복지정책. 그러는 동안 한편에서는 많은 노인들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폐지를 주우러 다니고 있다는 현실이다.

골목길마다 구부정한 허리로 폐지 등을 주우러 다니는 노인들. 비가 오는 날 골목길에서 만난 노인은 이미 나이가 75세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자녀들과 함께 생활을 하지 않고, 저렇게 고생을 하는 것일까?

“할머니 힘 안 드세요?”
“힘들지. 벌써 나이가 75살이나 먹었어.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야 먹고살지”
“아니 동사무소에서 생활보조금 안주나요?”
“호적상에 자식들이 있어서 도와줄 수가 없데”
“자녀분들은 어디에 사는데요?”
“몰라, 벌써 소식이 끊긴지 10년이 지났어.”


결국 실생활과는 관계없이 호적에 자식이 있다고 하여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복지정책의 현실이다. 자녀들은 이미 만나본지가 10년이 지났다고 하는데도, 호적상에 자식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수많은 노인들. 그들이 손수레로 끌고 거리로 나선 이유이다.

결국 나라에서 수많은 노인들을 굶주리고 힘들게 만들고 있다. 노인의 보건과 복지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법률(전문개정 1997. 8. 22, 법률 제5359호)을 좀 살펴보자.

「노인의 질환을 사전예방 또는 조기발견하고 질환상태에 따른 적절한 치료·요양으로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노후의 생활안정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강구함으로써 노인의 보건복지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노인은 후손의 양육과 국가 및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여 온 자로서 존경받으며 건전하고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으며, 능력에 따라 적당한 일에 종사하고 사회적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보장받으며, 노령에 따르는 심신의 변화를 자각하여 항상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그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노력하여야 함을 기본이념으로 한다.

국가와 국민은 경로효친의 미풍양속에 따른 건전한 가족제도가 유지·발전되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노인의 보건 및 복지증진의 책임을 지고 그 시책을 강구하여 추진하여야 한다. 해마다 10월 2일을 노인의 날로, 10월을 경로의 달로 하며, 5월 8일을 어버이날로 한다. 시·군·구에 노인복지상담원을 둔다.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는 65세 이상의 생활보호대상자, 65세 이상의 소득이 기준금액 이하인 자에게 경로연금을 지급한다. 연금수급권은 양도·압류하거나 담보에 제공할 수 없다..[출처] 노인복지법 중에서]

참 이 내용대로라면 길거리에서 비가 오는 날 폐지를 주우러 다니는 노인들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왜 골목마다 노인들이 손수레를 끌고 비를 맞으며 다니는 것일까?

“할머니 비가 오는데, 오늘 같은 날은 좀 쉬셔야죠?”
“그래도 다녀보아야지.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방법이 없어”

딱히 할 말이 없다.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는 노인의 지역봉사활동 기회를 넓히고, 노인에게 적합한 직종의 개발과 그 보급을 위한 시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노인복지법에는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근로능력이 있는 노인에게 일할 기회를 우선적으로 제공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헌법으로 명시한 노인들을 위한 복지정책. 그러나 정작 혜택을 받아야 할 노인들은 손수레를 끌고 비를 맞고 다니고, 어느 누구는 잘 살고 있는데도 도움을 받는다고 볼멘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독거노인 120만 시대를 맞이한 고령화사회. 앞으로 3년 정도 뒤에는 독거노인이 200만을 넘을 것이라고도 한다. 이제는 정말 현실에 맞는 복지정책을 펴야하지 않을까? 비를 맞으며 폐지를 줍고 있는 노인들을 보면서, 하루 종일 마음이 짠할 것만 같다.

‘노인복지법’이 있다. 어르신들의 생활을 여유롭게 하자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노인복지법 제 1조는 ‘목적’이다. 그 목적을 보았더니 「제1조 (목적) 이 법은 노인의 질환을 사전예방 또는 조기발견하고 질환상태에 따른 적절한 치료·요양으로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노후의 생활안정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강구함으로써 노인의 보건복지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되어있다.

제2조는 기본이념이다. 그 내용은 「①노인은 후손의 양육과 국가 및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여 온 자로서 존경받으며 건전하고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는다. ②노인은 그 능력에 따라 적당한 일에 종사하고 사회적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보장 받는다. ③노인은 노령에 따르는 심신의 변화를 자각하여 항상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그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했다.


노인복지 제대로 행해지고 있나?

우리나라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점점 나이가 많은 분들의 사회참여도 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사회의 일면에는 복지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있다. 노인복지가 과연 어디로 가고 있을까? 난 복지전문가도 아니고, 복지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하지만 내가 다니면서 피부로 느끼는 것은 과연 노인복지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데 의아심이 들기도 한다. 점점 어려워져만 가고 있다는 어르신들의 이야기. 실제로 생활이 어려워 하루 한 끼 식사를 무료급식소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분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과연 우리 사회에 노인복지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점점 늘어만 가는 급식소의 어른들

‘스님짜장’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부산 구서전철역 옆에 자리한 무료급식소를 찾아간다. 처음에는 600여명, 그리고 한 달 후에는 700여명, 이번에는 800명이 넘는 인원이 점심시간에 모여들었다. 지난 달 기준으로 준비를 해갔는데, 결국에 모자라고 말았다. 당연히 큰 소리가 나올 상황. 긴급히 대처를 하기는 했지만, 여기저기서 볼멘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짜장을 달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오래 봉사를 하고 있는 분들에게 물었다. 급식소를 찾는 인원이 얼마나 늘어난 것이냐고. 대답은 ‘자꾸만 늘어만 간다’ 였다. 물론 그 중에는 그저 친구와 함께 나왔다가 잠시 들려 점심 한 그릇을 먹고 간다는 분들도 계시다. 그러나 세 번째 간곳에는 안면이 있는 분들도 생겼다.


정말 대책이 없는 것인지?

이 어르신들 중에는 이곳에 와서 하루에 한 끼만을 해결하는 분들도 계시다고 한다. 그리고 배식이 12시 부터인데 10시가 조금 넘어서면 이미 자리는 다 차고, 밖으로도 줄이 늘어선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해본다. 과연 우리사회에 노인복지가 제대로 실행이 되고 있는 것일까?

기본이념 제 1항에 보이는 ‘노인은 후손의 양육과 국가 및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여 온 자로서 존경받으며 건전하고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는다.’라는 조항. 이 조항만 제대로 지켜주어도 고맙겠다. 존경은 그만 두고라도 건전하고 안정된 생활이라도 보장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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