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로(1792∼1868년) 선생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성리학자이다. 이항로 선생은 순종 8년인 1808년에 과거에 합격을 했으나 포기하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고종 3년인 1866년에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에게 전쟁으로 맞설 것을 건의하면서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했으며, 경복궁 중건 등 흥선대원군의 정책에는 반대를 하기도 하는 등, 조선 말기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형성하였다.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에 자리한 이항로 선생의 생가는, 부친인 이회장 때에 지은 집으로 250여 년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까지 복원을 마친 생가는 노문리 벽계마을의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하면서, 앞으로는 벽계천을 내다보고 있는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집이다. 이 집은 성리학의 요람으로 최익현, 홍재학, 김평묵, 유중교, 박문일 등 많은 선비들을 배출해 내기도 했다.

 

벽계천을 바라보며 학문을 연마한 사랑채

 

사랑채는 대문 우측에 세 칸으로 마련하였다. 마루에 앉으면 벽계천이 바라다 보인다.

 

이항로 선생의 생가는 사랑채와 대문채, 그리고 사랑채의 뒤로 이어진 행랑채가 있고, 안담장에 난 일각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안채의 뒤편에 낸 광채로 마련되어 있다. 사랑채는 대문을 바라보고 우측에 자리한다. 사랑채는 세 칸으로 되어있으며, 두 칸의 방과 한 칸의 마루방으로 꾸며졌다. 사대부가의 사랑채치고는 단아한 느낌을 갖게 한다. 사랑채의 앞으로는 모두 툇마루를 내어, 이곳에서 앞으로 흐르는 벽계천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지금은 안채의 마루방에 걸려있는 '청화정사(靑華精舍)'라는 현판은, 이 사랑채에 걸려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선생은 앞으로 흐르는 벽계천을 바라다보면서 많은 후학들을 양성했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에 찾아간 이항로 선생의 생가. 큰 길에서 5.5km 정도를 계곡을 따라 들어갔다. 길도 비좁은데 눈까지 쌓여, 차라도 만나면 몇 번이고 후진을 하면서 찾아간 곳이다. 사랑채 마루에 올라앉으니, 마을 전체가 보인다. 아마 제자들과 함께 이 마루에 앉아 강학을 하고, 벽계천 주변에 있는 노산팔경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사랑채와 붙어 역 ㄷ 자로 꾸며진 행랑채. 안 담장을 구분으로 안채와 같은 선상에 있다.

기와로 만든 굴뚝. 낮은 굴뚝에게서 스스로 겸손함을 배웠을 것이다.

 

사랑채의 뒤편에는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붙어있으며, 역 ㄷ 자형의 구성으로 꾸며졌다. 안담과 경계로 구분을 한 행랑채는 ㄱ 자형으로 사랑채와 붙어있다. 행랑채는 두 칸의 방과 꺾인 부분에 헛간을 두고, 다시 방으로 이어진다. 이 꺾인 부분에 들인 두 칸의 헛간은 밖으로도 빗장문을 낸 것으로 보아, 각종 농기구들을 넣어두고 손쉽게 드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랫사람들의 동선까지 생각해서 지은 집이다. 아마 그것이 이항로 선생의 부친 때부터 전해진, 선비의 올곧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행랑채 뒤편에 선 기와로 만든 굴뚝은, 이 집의 딱딱함을 희석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렇게 낮게 낸 굴뚝은 항상 모든 일에 겸손하라는 선생의 가르침을 일깨워 주는 듯 하다.

 

찬광을 낸 안채의 아름다움

 

중문인 일각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안채는  역 ㄱ 자형이다. 들어서면서 한 칸의 건넌방이 있다. 건넌방은 앞에 툇마루를 냈는데, 양편 툇마루를 벽으로 막았다. 흡사 이 한 칸의 건넌방이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건넌방 옆으로는 개방한 아궁이를 두었다. 그리고 한 칸의 방을 지나 두 칸의 마루방이 있는데, 툇마루가 안방까지 연결이 된다. 지금은 이 마루방 위에 청화정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집의 특징은 안채에 대청이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 두 칸의 마루방을 꾸몄다.

 

중문을 들어서면 마주하는 건넌방. 툇마루 양편이 벽으로 막혀있다. 조금은 특별한 용도로 사용을 한 듯 하다.

역 ㄱ 자로 꾸민 안채. 모두 열 칸으로 꾸며진 안채. 중간에 두 칸의 마루방을 내었다. 대청이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안방은 꺾인 부분에 드렸는데, 두 칸의 안방에 비해 부엌이 세 칸으로 넓다. 부엌 안으로 들어가면 한 칸이 벽과 판자문으로 구분이 되어있다. 문을 열어보니 현대식으로 싱크대 등을 마련해 놓았다. 아마 이곳을 한옥체험의 공간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원래 이 끝에 달린 막힌 한 칸은 찬광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을 이항로 선생의 생가에는, 그만큼 기물 등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것을 보관하기 위해 따로 한 칸의 찬광을 드려놓았다.

   

세 칸의 부엌 안에는 담과 판바문으로 구분을 한 찬광이 한 칸 있다.

                   

뒷문을 낸 광채와 대문채

 

안채 뒤편에 마련한 광채는 이항로 선생의 생가지에서 유일하게 초가로 된 건물이다. 모두 네 칸으로 구성이 된 광채는 우측 맨 끝에 문을 내었다. 문을 열면 바로 밖으로 나갈 수가 있다. 아마 이 문을 통해 집 뒤편에 있는 마을 동산으로 포행을 다녔을 것이다. 네 칸의 광채는 안채 부엌의 뒤편에 있는데, 작은 문과 두 칸의 광, 그리고 한 칸의 측간으로 지어졌다. 담장은 모두 판자벽으로 둘렀다.

 

넓지 않은 부지에 많은 건물을 들여서인가 조금은 답답해 보이기도 하는 이항로 선생의 생가.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이루어져 공간의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안채와 마주한 대문채는 광채와 마찬가지로 판자벽으로 둘렀다. 대문채는 대문을 들어서 안 담장으로 막혀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 자 형으로 되어 모두 광으로 사용을 했다고 한다.

 

안채 뒤편에 자리한 광채. 광채 끝에는 문이 있어 밖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강채는 모두 판자벽으로 둘렀다.

대문채는 판자벽으로 담벼락을 내어 운치를 더했다. 모두 세 칸으로 꾸며졌다.

 

생가 벽계천 주변에 있는 제월대, 명옥정, 분설담, 석문, 쇄취암, 일주암 등, 선생이 직접 친필로 각자를 했다는 노산팔경과 어우러진 집. 날이 춥다는 것을 잊을 만큼 빠져드는 집이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항로 선생의 생가. 구불구불 찾아들어가는 집은 한 겨울 찬바람에도 그렇게 의젓하니 객을 맞이하고 있다.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에 소재한 벽계강당. 벽계강당은 앞으로 흐르는 벽계천을 바라보고 있다. 벽계천은 용문산에서 발원을 한 물줄기가 50여 리를 서북간으로 흘러, 수입리 나루터에서 북한강과 합수가 되는데, 이 시냇물을 벽계천이라 부른다. 벽계강당은 벽계천 중간에 위치한 마을인 벽계에 소재한다.

 

화서 생전의 설계대로 지어진 벽계강당

 

지금의 벽계강당은 생전에 화서 이항로(1792~1868)가 후학을 양성하던 곳에 지은 강당이다. 이항로의 후손들과 후학, 그리고 관이 함께 힘을 모아 1999년에 이항로의 설계대로 지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곳에 벽계강당이 있었다고 한다. 양헌수, 최익현, 김형묵, 유인석 등이 이곳에서 이항로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면암 최익현(崔益鉉)은 1833년에 태어난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을사조약에 저항한 의병장이다. 양헌수는 조선 말기의 무신으로 조선 순조 16년인 1816년에 태어났다. 이항로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활쏘기에 능했다. 의암 유인석은 헌종 8년인 1842년에 태어난 의병장이다. 성리학자인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전통적 유교질서인 '정(正)에 대비하여, 서양문명의 수용을 '사(邪)'로 규정하고 이에 대항한 위정척사론자이다.

 

이러한 당대의 명사들이 모두 이항로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배웠으며, 그 장소가 바로 벽계강당이라고 한다. 그럼 점으로 보면 벽계강당은 지금의 모습 이전에 다른 모습으로 이미 이 자리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벽계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앞을 트고 주변을 방으로 둘렀다. 장대석의 기단을 높게 세우고, 그 위에 둥근 주추를 놓았다.

 

강당은 장대석으로 올린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축조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정면 3칸은 마루를 깔았다.


독립가옥으로의 가치를 지닌 대문채

 

벽계강당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것은 솟을대문이다. 중앙에는 높다랗게 문을 올리고, 양편에 방을 들였다. 양편의 방은 같은 크기로 했으며, 강당쪽과 바깥쪽을 향해 문을 양편에 냈다. 굳이 대문을 열지 않는다고 해도, 벽계천 쪽으로 낸 방문만 열어도 시원한 바람이 들어올 듯하다. 창은 벽면 위편에 조그맣게 냈으며, 밑으로는 거북이를 닮은 굴뚝을 만들었다. 이항로의 설계대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화서 선생은 설계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벽계강당의 대문채는 돌립가옥으로서의 기능을 가진 건물이다.

목이 들어간 거북이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대문채의 굴뚝이 앙증맞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이다. 사진을 찍는데도 손가락이 잘 펴지지를 않는다. 더구나 양평은 청정지역으로 주변의 지역보다 한결 춥다. 겨울이 되면 으레 주변보다 2~3도가 기온이 낮은 곳이다. 거기다가 벽계천에서 부는 바람까지 옷 속으로 파고든다. 눈이 가득한 마당을 들어서 대문채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본다.

 

벽계천 쪽으로 난 방문을 열어보니 길 아래 펼쳐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지금이야 눈이 쌓여 볼 수가 없지만, 그 아름답다는 노산팔경이 저 아래 벽계천을 중심으로 펼쳐질 것이다. 그것을 못 보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다음을 또 기약할 수 있으니 그 어찌 서글프다 하리오. 또 한 번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반갑기만 하다.

 

대문채의 양편에 있는 방에 낸 창문. 건물의 크기에 비해 창문이 작다

 
대문채 양편에 1칸의 방을 드렸다. 방문은 벽계천쪽과 강당 쪽에 마주하고 내었다.

 

참으로 좋소, 이 강당이

 

장대석 기단위에 올린 벽계강당. 눈이 쌓인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본다. 벽계강당은 중앙을 마루를 놓고, 삼면을 돌려 방을 들였다. 양편의 끝 방은 작게, 그리고 양편 안쪽의 방은 크게 들였다. 강당 마루 뒤편에 마련한 세 개의 방은 모두 같은 크기다. 아마 후학들이 이 강당에 마련된 방에 들어가, 나름대로의 배움을 익히고는 했을 것이다. 방의 뒤편으로는 모두 아궁이를 내었다. 한 겨울에도 뜨듯하게 불을 때고, 학문에 게을리 하지 말라는 화서 선생의 배려였을 것이다.

 

벽계강당의 마루에 오르면 앞으로 펼쳐지는 경관이 시원하다. 화서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강당의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강학을 하고, 경계를 즐긴 곳이 있다. 지금은 쌓인 눈으로 인해 들어갈 수가 없지만, 봄이 되면 이곳을 돌면서 평소의 선생의 마음을 느껴보고 싶다.

 

벽계강당의 마루 안편에 자리한 방. 마루정면에는 한 칸의 방 세개가 있다.

강당의 양편에 마련한 2칸짜리 큰 방은 문을 모두 걷어올리도록 하였다.

 강당의 뒤편과 옆에는 아궁이를 내었다. 한 겨울에도 운치가 있다.

 

조그마한 구름이라도 보내서

맑은 빛을 얼룩지게 하지 말라

지극히 순수하고 또 명랑하여

태양의 짝이 되게 하라

 

노산팔경 중 제일경이라는 제월대에 정자로 22자의 명(銘)을 새겼다고 한다. 이렇게 여덟 곳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는 곳이 바로 벽계강당이다. 강당 양편에 큰 방은 문을 들어 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마루를 더 넓게 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막힌 것도 넓게 보라는, 선생의 가르침이 배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눈이 쌓인 벽계강당 마루에 올라 찬바람을 맞으며, 한 없이 깊은 상념에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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