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화성은 정조가 강한 국권을 상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축성한 성이다.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 18년인 1794에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인 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수원 화성은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았으며,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한국의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화성은 평산성이다. 평산성이란 성곽의 일부는 산에 걸쳐 있고, 일부는 평지에 쌓은 성을 말한다. 화성은 화서문에서 팔달문에 이르는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있고, 화서문에서 장안문과 창룡문을 거쳐 다시 팔달문으로 돌아오는 성의 동쪽은 평지에 쌓은 성이다. 성에는 많은 구조물들이 있어 언제나 돌아보아도 아름다운 성이다.

 

화성을 즐기는 방법

 

화성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대개는 크게 나누어 보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낮 시간을 이용해 화성의 구조물 하나하나를 안과 밖으로 음미를 하며 돌아보는 것이다. 천천히 화성의 면면을 살피면서 돌아보면, 두 시간 정도가 소요가 된다. 사진이라도 정성스럽게 찍으면서 돌아보려면, 족히 세 시간은 잡아야 한다.

 

또 한 가지는 야경을 즐기는 방법이다. 밤에 조명을 받은 화성의 모습은 낮과는 또 다르다. 그만큼 멋이 있다. 구조물 하나하나가 다 제 멋에 겹다는 표현이 적당하다. 그런 화성을 19일 밤 8시 경부터 장안문을 시작으로 동쪽을 돌아 남수문까지 걸어보았다. 걸음마다 눈에 보이는 절경이 발길을 붙든다. 그 경치를 하나씩 돌아본다.

 

장안문을 지나면 북동적대와 북동치를 만나게 된다. 이는 모두 장안문을 보호하기 위해 시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장안문은 화성의 북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장안문을 보호하기 위한 적대(우측)과 북동치를 처음으로 만난다.

 

북동치에서 상벽을 따라 화홍문 방향으로 걷다가 보면 성벽에서 돌출이 된 거대한 구조물을 만난다. 안으로는 3층의 구조를 갖고 있는 북동포루이다. 포루는 안에서 적을 향해 포를 쏠 수 있는 구조물로 이 안에는 개인 화기인 블랑기포를 가진 장용외영의 병사들이 숨어 있다.

 

광교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수원천으로 흘러드는 북수문인 화홍문은 칠간수문이다. 아치모형의 수문이 일곱개가 있다. 야경으로 만나는 화홍문과 그 위에 보이는 방화수류정은 가히 절경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사진을 찍는다. 

 

동북각루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방화수류정. 화성의 축조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이다. 성 밖으로는 용연을 파 배를 띠우고, 이곳에서 한 잔 술에 감흥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단독건물로도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으니, 그 아름다운을 두 말하면 무엇하리?

 

방화수류정 바로 옆에는 숨어있는 문이라는 북암문이 있다. 이 북암문은 적에게 들키지 않고 식량을 운송하거나 병사들이 이동을 하기 위한 문이다. 없던 병사들이 이 암문을 통해 뒤에서 공격을 해온다면 그 기분은 어떨까?  북암문에서 산을 오르듯 비탈진 곳 위에는 동북포루가 자리하고 있다.

 


포루란 높은 곳과 낮은 곳 등 중요한 시설물 근처에 설치하여 적에게 포를 쏘아 공격하는 시설이다. 화성에는 곳곳에 이렇게 포루가 설치되어 있어, 적이 공격을 하기가 쉽지가 읺다. 화성이 얼마나 대단한 성인가를 알 수 있다.

 

동북포루를 지나 군사훈련장이자 지휘소인 연무대(동장대)를 향해 가다가 보면 성이 깊게 들어간 곳이 있다. 양편에 난 가파른 계단 중앙에는 작은 문이 있다. 바로 동암문이다. 밖에서는 보이지가 않는다는 이 암문의 역할은 전투시에 상당히 유효했을 것이다.

   

동장대인 연무대의 위용. 이곳에서 정조는 가장 강력한 군대인 장용외영의 군사들을 지휘했다. 원행시에 주간의 군사훈련인 성조와 야간의 군사훈련인 야조를 문문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를 한 것도 강한 왕권에 도전을 하지 못하개 함이다.

 

소라각이라 불리는 화성 안의 또 다른 작은 성인 동북공심돈. 안의 통로가 마치 소라처럼 생겼다고 해서 소라각이라고도 불렀다. 맨 위에는 전각을 지어 그곳에서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었다. 동북공심돈에서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으로 향하다가 보면 동북노대가 자리한다. 쇠뇌를 쏘아 많은 적을 물리칠 수 있는 구조물이다.

 

화성의 아름다운 야경. 그 첫 번재 이야기는 장안문에서 이곳까지이다. 다음 번에는 창룡문에서 남수문까지를 걸어본다.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면서.

 

북옹성은 장안문의 외성이다. 성서(城書)에는 옹성의 크기는 정성(正城)의 대소에 따르며 모양은 옹기를 반으로 나눈 것과 같다고 하였다. 문 위에 적루를 세우지 않는 것은 정성이 가로 세워져 있어 적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중략)

오성지(五星池)[<실정기(實政記)>에 이르기를 모양이 구유 같고 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크기는 되()만 하다. 적이 문을 불태우려 할 때 물을 내려 보낼 수 있다]를 설치하였는데, 오성지 전체 길이는 14척 너비는 5척 깊이는 2척이고, 각 구멍의 지름은 1척이다.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 옹성 문 위에 보면 구멍 5개가 나란히 뚫려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오성지로 일종의 소화를 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는 시설이다. 이 오성지는 장안문과 보물 제40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팔달문의 옹성문에도 조성을 했다.

 

이 오성지가 장안문과 팔달문에는 있는데, 왜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에는 없는 것일까? 눈이 쌓인 창룡문을 돌아보면서 그 이유를 나름 생각해본다. 물론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바로 옹성의 형태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렬로 선 옹성의 문은 군왕의 위용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은 우리나라의 성문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다. 장안문의 앞으로는 북옹성을 쌓았는데, 그 중앙에 옹성의 문을 달았다. 옹성의 문과 장안문은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이 장안문과 팔달문의 옹성의 문이, 성문의 문과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것은 위용을 보이기 위함이란 생각이다.

 

평산성인 화성에는 해자가 없다. 주변이 모두 논밭이어서 해자가 없어도 공성무기를 끌고 들어오기가 쉽지가 않았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정조대왕이 화성행궁으로 이어를 한다거나, 행궁에서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인 융건릉으로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행차를 한다면 이렇게 일직선상에 문이 나 있지 않았으면 위용이 있겠는가?

 

 

하기에 그 옹성의 문 위에 적의 공략시에 화재를 대비해 오성지를 조성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꼭 오성지가 없다고 해도 장안문이나 팔달문을 공략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장안문의 양 편에는 적대를 두어 포를 설치하고 있고, 팔달문에도 남포루와 지금은 사라진 남공심돈이 있어 막강한 화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을 튼 창룡문과 화서문

 

동쪽 옹성의 제도는 고제에서 한 쪽만을 연다는 뜻을 취하여 옹성을 쌓았다. 성문의 왼쪽에 이르러서는 원성과 연결되지 않고 외문을 설치하지 않아서 경성의 흥인문 옹성의 제도와 같게 하였다. 옹의 형태는 문의 오른쪽 63척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문의 왼쪽 6 3 척 되는 곳에서 끝난다. 성과 이어지지 않는 곳은 그 사이가 41척이다.

 

옹의 높이는 96촌이고 내 면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7척이고 정문과 거리는 28척이다. 외면은 벽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1척이고 아래 두께는 115촌이며 위의 두께는 줄어서 105촌이다. 내면은 벽돌로 된 누조[각각 직경 5] 4개를 설치하였다. 평평한 여장으로 둘렀는데 높이는 3척 두께는 25촌이다. 바깥 면은 현안 셋을 뚫었다. 여장 4첩을 설치하였는데 높이는 45촌이고 원총안과 근총안 14기를 뚫었다. 옹성 위에는 회다짐을 하고, 그 남쪽 끝에는 돌층계를 설치하여 위로 원성과 통하게 하였다.

 

 

창룡문의 옹성에 대한 설명이다.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의 옹성에는 성문이 없다. 그리고 한 편을 튼 형태로 조성을 했다. 옹성의 문이 없으니 당연히 오성지도 없다. 그런데 이곳은 왜 문을 달지 않고 한편으로 성을 튼 것일까? 그리고 이렇게 옹성의 문이 없다면 적의 공략을 막아내는 대는 어렵지 않을까?

 

창룡문과 화서문이 공략하기가 더 어렵다

 

15일 아침. 이른 시간에 화성으로 나갔다. 1박 2일로 여행을 할 계획이었으나 여기저기 취재 요청이 들어오는 바람에 일정이 취소가 되었다. 눈이 쌓인 화성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추운 날씨에도 줄을 지어 지나간다. 요즈음 화성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창룡문을 꼼꼼히 따져본다. 굳이 오성지를 마련하지 않고, 한편을 튼 상태로 옹성을 축성했는가를.

 

창룡문을 돌아보면서 수긍이 간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은 옹성의 형태가 같다. 창룡문의 앞은 내리막이다. 공성무기를 끌고 올라가기가 쉽지가 않다. 거기다가 파문(破門)을 하기 위해 공성무기를 옮긴다고 해도, 옹성을 거쳐 성문을 깨기란 날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우선은 옹성의 양편이 치와 같이 돌출이 되어있다. 그곳을 통과하는 것만도 어렵다. 어렵게 그곳을 지나 옹성안으로 들어가면, 독 안에 든 쥐가 된다. 거기다가 옹성과 성문 사이가 불과 12보 정도이다. 그 안에서 성문을 깰 수 있는 공성무기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자연을 벗어나지 않은 축성과 구조물을 조성한 화성. 그 문 하나에도 일일이 지형과 쓰임새를 보고 축성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잠시 옹성을 한 바퀴 돌아 밖으로 나왔다. 저편 동장대와의 사이에 동북공심돈과 동북노대가 보인다. 창룡문을 취하기 위해서 성문으로 다가간다면, 그곳에서 쏘아대는 화력을 당해내기도 어려울 듯하다. 화서문의 곁에도 서북공심돈이 자리를 하고 있지 않던가? 문루나 옹성에 오성지가 없어 행여 화를 미치지 않을까를 생각해 낸 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괜한 걱정 떨쳐내고, 눈길을 걸어 화성의 설경에나 취해보아야겠다.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을 걷다(10) - 동북노대와 적대

화성에는 두 곳의 노대가 있다. 동북노대는 창룡문의 북쪽 96보의 거리에 있으며, 서노대는 가장 높은 서장대 뒤편에 자리한다. 동북노대는 치 위에 벽돌을 쌓아 대를 조성하였다. 대 아래의 석축은 높이가 13척, 대의 전체 높이는 18척이다. 대의 밑에는 화강암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렸으며, 위는 벽돌로 쌓았다. 벽돌을 쌓는 방식은 사각형이지만, 모서리를 깎아 벌의 허리처럼 만들어서 모를 죽인다.

노대의 안쪽 너비는 17척 4촌이고, 바깥쪽 너비는 19척이다. 성 밖으로 나온 부분이 25척 5촌, 2개의 현안을 뚫었고, 위에 둥근 여장을 만들었다. 3면에 각각 1타씩이고, 바깥 쪽 2모퉁이에는 둥근 타구를 굽게 접히게 설치하였는데, 모두 방안 3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타구마다 좌우에 凸모양의 여장을 끼고 있다.


가공할 위력의 쇠뇌를 날리는 동북노대

동북노대의 안쪽 두 모퉁이는 평여장으로 굽게 접었는데, 모두 높이 6척 5촌이다. 가운데에 벽돌 계단을 돌계단과 이어지게 하였고, 대 위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다. 이렇게 대 안을 네모난 벽돌로 깐 이유는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쇠뇌란 걸쇠라는 발사체를 유도하는 홈과, 그것을 발사하는 방아쇠를 갖추고 있다. 하기에 쇠뇌는 일반적인 활보다 그 힘이 강하며, 살상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쇠뇌는 비스듬히 적을 공격할 수 있어서 앞에 여장을 놓고도 적에게 피해를 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 힘이 있다 하니 그 사정거리도 일반 활에 비해 월등히 멀리 나갔다고 한다.




더욱 다연발로 연달아 활을 적에게 날려 보냄으로 해서 가공할만한 위력을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쇠뇌를 쏘기 위한 동북노대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감시와 공격의 효과를 노린 적대

장안문의 북서쪽 약 62.5m 지점에 있는 북서적대. 정조 19년인 1795년에 화성 축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적대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비치해 두는 한편,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물이다.

이 적대의 규모는 높이 6.7m 성곽의 성가퀴와 가지런히 쌓되, 반은 성 밖으로 나가 있고, 반은 안으로 들어와 있다. 아래 부분의 넓이는 7.8m이고 위는 좁아져서 6.4m인데, 거기에 현안 3개가 나있다. 적대의 상부는 凸자 모양으로 성가퀴를 둘러쌓고, 밖에 3면에는 높이 1.5m에 두께 85㎝의 성첩 11개를 쌓은 다음, 총안을 뚫어 놓았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적대

장안문의 동쪽에는 또 하나의 적대인 북동적대가 있다. 이렇게 장안문의 양편에 적대를 마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적대 안에는 홍이포가 놓여 있다. ‘홍이포’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유래된 대포이다. 그 당시 네덜란드를 ‘홍이(紅夷)’라고 불렀기 때문에, 대포의 명칭을 홍이포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영조 때 2문이 주조되었다.

영조 때 홍이포가 주조되었다는 사실은, 화성 축성 때에는 이미 총포가 전쟁에 사용되던 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장안문 양편에 조성한 적대는 법에 따라 적대를 만들어 창과 활 대신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총안을 마련하였다.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이다. 포루와 치성은 성곽 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이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장안문 양편에 적대를 조성한 까닭은?

왜 적대 두 곳을 북문인 장안문의 양편에 설치한 것일까? 북문의 명칭을 장안문이라 붙인 것은 이산 정조의 남다른 뜻이 있었다. 장안이란 도성을 의미한다. 정조는 화성을 거점으로 하여 북진정책을 펴기 위해 많은 고심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 북진정책을 하기 위해서는 북문의 역할이 남다르다.


즉 만일에 북진정책으로 인해 적과 교전이 붙을 경우, 가장 중요한 곳이 바로 북문인 장안문이 된다. 그 장안문을 보호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하기에 장안문의 양편에 적대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조성한 두 곳의 적대. 그곳에는 정조 이산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고 보인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걷다(8) - 서장대와 서노대

화성을 한 바퀴 돌다가 보면 사방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 있다. 바로 ‘화성장대’라 불리는 ‘서장대’이다. 서장대는 팔달산의 산마루에 있는데, 서장대 위에 올라가 사방을 굽어보면 사면팔방으로 모두 통하는 곳이다. 석성산의 봉화와 대항교의 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산 둘레 백리 안쪽의 모든 동정은 앉은 자리에서 변화를 다 통제할 수 있다는 곳이다.


서장대, 한 때 어느 취객에 의해 웅장한 서장대가 불에 타기도 했다. 그러나 <화성성역의궤>에 의해 다시 옛 모습을 찾았다. 그 문지방 위에는 정조임금께서 쓰신 큰 글자인 [화성 장대(華城將臺)]로 편액을 붙였다.

정조 이산의 꿈은 무엇일까?

정조임금은 이 장대에 올라 장용위 군사들을 호령했다. 이산은 이곳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강력한 왕권을 갖고 북진을 하여, 옛 고토를 회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마도 이 장대 위에서서 사면팔방을 바라보면서, 막힘없이 달려가는 병사들의 무한한 힘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장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곳에서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사랑을 엮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이곳에 깃든 이산의 꿈이 무엇인지를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까? 난 늘 이곳을 올 때마다 생각을 한다. 아마도 이곳에서 정조임금의 꿈을 이 나라의 청년들에게 알려줄 수만 있다면, 저마다 큰 꿈을 키워나갈 수가 있을 텐데. 늘 그것이 아쉽다는 생각이다.

장대에는 모두 네모난 벽돌을 깔고 바깥에는 둥근 기둥 12개를 세웠는데, 그 높이가 각각 7척이고 이것을 팔각형의 돌기둥으로 받치었고 있는데 그 높이는 각각 3척 5촌이다. 위층은 한 간인데 사면에 교창을 내고 판자를 깔아 바닥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그대로 아래층의 반자가 되었다. 그 서북쪽 모퉁이에 층사다리를 세워서 위층으로 통하게 하였다.




다연발 화살을 쏘아대는 노대

서장대의 뒤에는 ‘서노대’가 자리한다. 원래 노대는 <무비지(武備志)>에 설명하기를,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야 하며 대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하였다. 그 모양이 전붕과 같이 하고, 안에는 화살을 쏘는 노수가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노대의 설명을 보면 「현재의 노대는 그 제도를 본떠서 짓되 약간 달리 하였다. 집을 얹지 않고 대를 8면으로 하되 깎아지른 듯이 우뚝 서있게 지었다. 면마다 아래 너비 각 8척 5촌, 위의 줄어든 너비 각 각 6척 5촌, 높이 12척, 지대 위에 체벽으로 면을 만들고, 돌을 깎아 모서리를 만들었다. 위에는 장대를 얹고 凸 모양의 여장을 7면에 설치하였다.」




고 하였다. 장대 쪽으로는 돌계단을 만들어 놓았으며, 상부를 둘러 총안을 낸 여장을 둘러놓았다. 대 위에는 네모난 전돌을 깔았는데 아마도 이곳에서 쇠뇌를 쏘았을 것이다. 쇠뇌란 다연발로 발사하는 화살을 말한다. 쇠로 된 발사 장치를 갖고 있는 이 쇠뇌는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조임금 이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사방이 훤히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서 군사들의 움직임을 내려다보는 정조는 더 강한 군사력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많은 군사들의 위용을 보고 있는 조정 대신들의 모습도 살펴보았을 것이다. 미처 이루지 못한 이산의 꿈을 지금 이 땅의 젊음에게 전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 철모르는 사랑타령을 하고 있는 한 젊은 연인이 조금은 아쉬운 까닭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