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낮의 더위가 30도를 웃돈다. 올해는 무더위가 상당히 기승을 부릴 것만 같다. 이럴 때는 그저 시원한 계곡이나 숲속으로 들어가, 폭염을 피할 수가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일도 없을 듯하다. 이런 더위에는 그저 시골 숲이나 계곡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이, 한 없이 부럽기만 하다.

 

올 여름에는 더위가 유난히 맹위를 떨칠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기온이 점점 아열대성으로 변해간다고 하니, 더위를 유난히 많이 타는 나로서는 정말로 눈앞이 캄캄할 지경이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린다. 지칠 대로 지쳐있는데, 누군가 ‘갤러리아’로 가자고 한다. 그 곳에 숲과 내가 있다고.

 

 

도심 한 복판 옥상에 웬 숲?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125-1번지에 소재한 갤러리아백화점 수원점. 그 주변까지 가서 아무리 돌아보아도, 숲 같은 것은 보이지를 않는다. 하긴 이 빌딩이 들어찬 인구 120만의 수원의 중심부에, 답답한 빌딩 숲 말고 무슨 숲과 내가 있을까? 갑자기 더 더워지는 듯하다. 동행을 한 일행이 눈치를 챘는지, ‘옥상으로 올라가세요.’ 라고 한다.

 

옥상에 무슨 숲이 있을라고? 하긴 요즘 옥상에 텃밭을 만들고, 나무를 키우는 것은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커다란 백화점 옥상에 무슨 숲이 있고, 전원의 목가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인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볼 때까지는 믿지를 않았다.

 

 

 

나무와 돌로 조성한 길. 그리고 한 옆을 흐르는 냇물, 시골마을 논 한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초가로 된 모정, 그리고 물레방아. 흐르는 냇물 옆에는 이곳에 서식하고 있는 ‘수상생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우렁이, 비단잉어, 금붕어, 토종붕어, 토종잉어, 메기 등 다양한 수상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단다.

 

‘하늘공원’, 이름만큼이나 신선하다

 

이곳을 ‘하늘공원’이라고 한단다. 이름만큼이나 신선한 곳이다. 도심의 건물 옥상에 정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여기저기 곳곳에 사람들이 앉아 쉴만한 곳을 마련하였다. 7월 2일 한낮의 온도는 이미 30도를 넘고 있었지만, 이곳은 별천지였다.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소리, 작은 연못과 같은 곳에서 인조암벽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만 들어도 시원하다.

 

 

 

 

“이런 곳이 있었으면 진작 이야기를 했어야지”

“저도 말만 들었어요. 이제 자주 오려고요”

“혼자 다니지 말고”

“언제든지 오세요. 늘 이 자리는 비워놓을 테니까요.”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곳

 

시원한 냉수 한 잔이 정말 고마운 날씨에, 이렇게 숲 내가 나는 곳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은 각별하다. 젊은 연인인 듯한 두 남녀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한편에 무엇인가를 달고, 환하게 웃는다. 무엇인가 궁금하여 가보니, ‘사랑의 잠을 통’이다. 아마도 이렇게 하늘 가까운 곳에 와서 두 사람의 마음을 잠가놓았으니,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그저 돈을 들여 어디론가 가길 좋아한다. 그것이 피서라고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곳을 놓아두고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요즘같이 경제사정도 좋지 않을 때, 이런 하늘공원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다. 주변에서 느낄 수 있는 작은 행복.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봉화법전에서 울진으로 가다가 보면 삼거리에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울진금강소나무 군락지라는 이 이정표를 따라 좌측으로 10km 정도를 들어 가다가 보면 포장이 안 된 곳도 나오고, 좁은 길이라 차가 마주치면 뒤로 물러나기도 한다. 그렇게 찾아들어간 곳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0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소광리황장봉계표석'이 있다.

울진군 서면 소광리 산262에 속하는 이곳을 가다가 보면 우측에 MBC대하드라마 <영웅시대>의 야외 세트장이 있다. 퇴락한 이 세트장을 둘러보고 길을 재촉해 찾아 간 황장봉계표석. 자연암석에 글을 새겨 놓은 경계표시다. 그리고 보니 벌써 다녀온지가 꽤 오래되었다.

처음만난 봉계표석, 기대를 하고 찾아가

솔직히 이 황장봉계표석을 찾아갈 때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처음으로 이런 표석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일반문화재와 같은 멋진 부분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은 문화재를 만나면서도, 정작 이런 부분에는 전무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기대가 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앞에 도착해보니 계곡을 흐르는 하천가에 커다란 자연암반이 있고, 그 주위에 철책을 둘러놓았다. 이것이 우여곡절 끝에 찾아온 황장봉계표석이란다.

황장봉계표석이라는 말에 난 ‘금표비(禁標碑)’ 같은 것으로 생각을 했다. '모르면 물어보라, 그리고 찾아보라'는 나름대로의 문화재 답사에 대한 나만의 방법이 있었지만, 집 한 채 없는 곳으로 들어갔으니 물어 볼 곳도 없다. 그저 안내판을 참고하는 수밖에.

그동안 황장표석은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치악산 입구, 영월 황장골, 인제 한계리 등에서 발견이 되었지만, 울진소광리 황장금표는 이보다 시기가 앞선다고 한다. 황장금표가 있는 바위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울진 금강소나무 군락지가 있으니, 이곳에 금표석을 세웠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무지한 답사, 그래도 계속하면 눈을 떠

안내판을 몇 번이고 읽어본 다음에 바위를 찬찬히 돌아본다. 자세히는 볼 수 없는 음각을 한 글자들이 보인다. 설명에는 "황장봉계 계지명생달현 안일왕산 대리 당성 산직명길"이라고 쓰여 있다고 하나, 글이 마모가 되어 쉽게 판독이 되지 않는다. 그 내용은 오른쪽 5행 19자, 왼쪽 1행 4자로 되어 있으며, 황장목을 벌채할 수 없는 지역이 생달현(生達峴), 안일왕산(安一王山), 대리(大里), 당성(堂城)의 네 지역이며 관리 책임자는 명길(命吉)이라는 산지기라는 것이다

자연암반에다가 글을 새겨 넣은 봉계표석. 지금은 냇물이 흐르는 쪽에 글이 있고 그 위에 길이 있지만, 예전에는 이 냇가에 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황장봉산의 경계를 표시하는 이 제도는 숙종 6년인 1680년 처음으로 시작이 되었으며, 그 후 여러 지역으로 확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소광리황장봉계표석을 시작으로 원주, 인제, 영월 등에도 봉계를 정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관곽으로 사용하기 위한 황장목을 확보하기 위해 벌채를 금지한 조치였다. 아마 당시에는 나무가 유일한 땔감이었으니 벌채가 심했을 테고, 그런 벌채를 막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금강송 베면 다쳐', 그때나 지금이나 벌목은


이 자연암반에 새겨 넣은 19자의 봉계금표석이 참 고맙다고 느낀 것은 바로 울진금강소나무 군락지가 이 안쪽에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 봉계표석으로 인해 이곳의 소나무 군락지가 보호를 받았으니 말이다. 조선조 때는 사람들이 집을 지으면서 사람들이 소나무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소나무 보호정책을 펴기도 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수차 거론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현종 9년인 1668년에는 백성들이 큰 소나무를 마구 베어가므로 엄단할 것을 공포하였다. 사복이 범법을 하였을 때에는, 그 주인까지 논죄 를 따진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바로 송금사목, 송금절목, 송계절목, 금산, 송전, 봉산 등 소나무를 지키기 위한 강력한 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무지함으로 인해 실망을 하고, 그 뜻을 알고 난 후에는 또 한 가지를 배웠다는 뿌듯함으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이 바로 문화재답사의 묘미다. 황장봉계표석의 답사를 마치고 돌아서면서 날이 저물어 금강소나무 군락지를 못 들어 간 것이 내내 서운하지만, 다음번 답사 때는 군락지까지 꼭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한다

왜? 탱자가 익어가는 가을에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순흥을 가? 이상한 사람이구만’ 그래 난 이상한 사람이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려, 안 가고는 견디질 못한다. 나하고 순흥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순흥은 경북 영주시에 속한다. 순흥에는 유명한 소수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 순흥을 왜 술병을 들고 찾아갈까?

소수서원은 조금 지나면 금성대군 신단이 있다. 그곳을 조금 지나 좌측 마을 길 안으로 들어서면, 내가 가을마다 찾아가는 곳이 있다. 바로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를 당했던 곳이다. 이 계절, 탱자가 익어가는 계절만 되면 그곳을 찾아가 술 한 잔 따라놓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허허로운 벌판의 땅굴 속에서 죽어간 금성대군 때문이다.


32세에 처형이 된 불귀의 원혼

금성대군은 이름이 유이며 세종의 여섯 째 아들이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단종의 숙부이기도 한 금성대군은, 세종 15년인 1433년에 대군으로 봉해졌다.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이 복위하자 형 수양과 함께 단종을 도울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수양이 왕위에 오를 야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반대한다.

단종 3년인 1455년 금성대군은 모반을 했다는 협의를 뒤집어쓰고, 현 경기도 연천인 삭녕으로 유배가 된다. 세조 2년인 1456년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를 하자, 이에 연루되어 다시 경상도 순흥으로 옮겨졌다. 금성대군은 이곳에 와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관노의 고발로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을 당한다.



위리안치, 그 통한의 형벌이여

조선시대 형벌 중에 유배형에 해당하는 것은 부처와 안치가 있다. 부처란 유배형을 당한 죄인이 부인과 함께 유배지에 머물며 생활을 하는 형벌이다. 안치란 부처형을 받은 죄인이 왕족이나 고관일 경우, 유형을 받은 장소에서 주거와 행동을 제한시키는 형벌제도이다. 아마도 처음 이곳 순흥에 온 금성대군은 단순한 안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안치에도 종류가 있다. 고향 등으로 행동을 제한시키는 본향안치. 육지와 떨어진 절해고도에 안치를 시키는 절도안치. 그리고 가장 중형에 속하는 위리안치이다. 위리안치는 형벌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형벌이라고 한다. 큰 죄를 범한 죄인을 허허벌판에 돌우물 같은 웅덩이를 파고, 그 안에 죄인을 가두는 형벌이다.




이곳 순흥에 바로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를 당했던 곳이 남아있다. 위리안치는 그야말로 인간을 말려죽이기에 적당한 형벌이다. 장정의 키보다 높은 돌 웅덩이 안은 지름이 2m가 조금 넘을만한 둥근 형태이다. 그 안은 맨바닥이고, 어디 편하게 기댈 수조차 없다. 사방이 모두 돌로 쌓여 있으니, 벽에라도 기댈라치면 배기기 일쑤이다.

거기다가 인근에는 물이 흐르기 때문에 바닥은 축축하다. 어디 한 곳 발을 뻗고 편히 몸을 누일만한 곳이 없다. 지붕은 비를 피하도록 덮었다고 하지만, 비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웅덩이 안으로 물이 차 들어올 것이다. 웅덩이 밖으로 나간다 해도 도망을 갈 수가 없다. 위리안치지 주변이 모두 탱자나무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촘촘히 심어 놓은 탱자나무 울타리를 어떻게 빠져 나갈 것인가? 가시에 온 살이 찢겨도 빠져 나가지를 못한다. 나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입구뿐이다. 그곳은 더욱 나갈 수가 없다. 결국 처형을 당할 때까지, 그 습한 웅덩이에서 발 한 번 제대로 뻗지 못하고 고통을 당해야만 한다. 그것이 위리안치이다.

오늘 이 술 한 잔으로 몸이나 녹이시오.

그래서 가을이 되면 순흥을 간다. 술 한 잔 따라놓지 않으면 죄 없이 역사의 제물로 희생이 된 분에게 너무 죄스럽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처음으로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찾아간 곳에서, 역사의 아픔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0월에 이곳을 다시 찾았다. 술 한 병을 사들고. 그 뒤 10월이면 이곳을 간다. 요즘 사극이 인기를 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재미로 보는 사극 뒤편에는 이런 엄청난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저 술 한 잔 따라놓고, 넋두리를 해댄다. 세상을 달라졌다고 해도, 아직 대군의 통한의 아픔을 따라 사는 자들은 그치지를 않았노라고.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순흥으로 길을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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