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만해기념관(관장: 전보삼)에서 8월 광복의 달 한 달 간 2019 경기도 지역문화예술 플랫폼 육성사업의 일환으로 2019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진행되는 만해기념관 특별기획전 그 여섯 번째 전시인, 화산 신일호 선생의 독립운동가의 친필 소장품 스토리 을 개최한다.

 

본 전시에서는 20193.1운동 100주년과 8월 광복의 달을 기념하여 만해기념관에 한용운 친필 유묵을 기증해주신 신석수 선생의 선친이신 화산 신일호 선생께서 소장하고 계시는 독립운동가 친필 유묵 작품들을 선보인다.

 

화산 신일호 선생께서 1931년 여순 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같은 고향의 친척이신 단재 신채호 선생(1880 - 1936)을 어렵게 면회하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화산 신일호 선생은 단재 신채호 선생 소개로 임시정부를 방문하게 되어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 후 8차례나 더 김구 선생을 만나면서 이동녕, 조소앙, 이준, 윤봉길, 안중근, 김좌진, 이범석, 한용운, 오세창, 신익희 선생 등과 차례로 인연을 맺게 되었고, 자연스레 친필 유묵들을 소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선친의 대를 이어받은 신석수 선생께서 친필 유묵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계시다가, 이번 2019815일 해방의 달을 맞아 광복절을 기념하여 평소 선친께서 존경하신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남한산성 만해기념관에서 친필 소장 작품들을 한데 모아 전시를 열게 되었다.

 

따라서 이번 기획 전시에서는 백범 김구, 의암 손병희, 고하 송진우, 철기 이범석, 석해 손정도, 일성 이준, 석오 이동녕, 조소앙, 매헌 윤봉길, 안중근, 철기 이범석, 만해 한용운, 위창 오세창, 해공 신익희 선생의 친필 유묵 작품들을 화산 신일호 선친께서 소장 하게 된 흥미로운 일화와 스토리를 소개하고, 한 개인이 가보로 간직해 오던 지금껏 단 한번도 공개된 적 없는 독립지사들의 친필 유묵 작품을 전시한다는 데에 그 의의가 크다.

 

8월 광복의 달을 맞이하여, 본 기획 전시를 화산 신일호 선생께서 직접 독립 운동가들과의 인연으로 기증받은 애국지사들의 얼과 혼이 생생히 담긴 작품들이다. 만해기념관에서 화산의 아드님이신 신석수 선생의 협조로 열리는 특별한 기획전에서 애국지사들의 향훈을 직접 만나기를 바란다.

 

전시기간: 2019.08.01.()~08.31.()

전시장소: 남한산성 만해기념관

주최, 주관: 남한산성 만해기념관

지원: 경기도, 경기 광주시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되고 있는 세계유산정부간위원회는 제3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정부간위원회(6.15.-25)에서 현지시간 22일 우리나라가 등재 신청한 남한산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키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수원 화성을 비롯해 두 곳의 성곽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는 등 모두 11종목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유네스코 세계유산(문화, 자연, 복합) 목록 등재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21개국으로 구성된 정부간위원회로서, 우리나라는 2013-17년 임기 위원국(2013. 11월 위원국 당선)으로 동 위원회에 참여 중이다.

 

 

정부는 이번 위원회에 나선화 문화재청장을 수석대표로 하여, 외교부, 문화재청, 주 유네스코대표부, 주 카타르대사관, 경기도청, 경기도 광주시청,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한국위원회,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관계자들로 구성된 대표단을 파견했다.

 

신라 문무왕 때는 주장성으로 불러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에 소재한 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 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 , 남문루와 수어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정비된 곳으로 손꼽힌다.

 

웅장하고 거대한 성곽이 세계문화유산으로 가치 인정해

 

이번 등재 결정 과정에서 세계유산위원회과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남한산성의 문화유산이 17세기 초 비상시 임시 수도로서, 당시 일본과 중국의 산성 건축 기술을 반영하고 서양식 무기 도입에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군사 방어 기술을 종합적으로 집대성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은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 단계와 무기체제의 변화상을 잘 나타내며, 지금까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어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계곡을 따라 성을 축성한 형태나,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것 등을 등재 조건으로 꼽았다. 또한 산성 안에 행궁의 복원 등 주요시설물이 보존되어 있는 것도 선정의 이유라고 밝혔다.

 

앞으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

 

세계유산위원회는 남한산성 인접 지역의 개발 행위를 적절히 통제하고, 주민들이 유산 관리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추가로 권고하였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은 경기도 등 관련 지방자치단체와 긴밀히 협력하여, ‘남한산성의 체계적 보존관리와 활용을 위한 종합계획을 수립·이행해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앞으로 남한산성의 종합계획을 보면, 유산의 중장기적 종합 발전 계획 수립과 정기 모니터링 체계 구축, 세계유산 전문 연구·교류 기능 강화, 지역주민 참여 촉진 등을 통해 남한산성의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보호·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추진하겠다는 것. 또한 본성의 미정비구간인 제1남옹성 등에 대한 정비를 조기 완료하고, 훼손된 여장을 전면 보수하겠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인해 경기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수원 화성과 남한산성 두 곳의 성곽 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낭보가 전해지자 수원에서도 수원화성의 미연결 구간인 팔달산에서 내려오다 끓긴 팔달문과의 구간과, 팔달문과 남수문 구간의 남공심돈과 남암문 등의 복원을 서둘러야 하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 번지에 소재하며 사적 제57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현재 남한산성의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한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광주시는 약 80%가 산이며 나머지 20% 정도가 평야부에 속하는 경작지이다.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주장성이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조 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한강과 더불어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는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는 숭열전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이다.

 

치욕의 장소이기도 한 남한산성

 

조선왕조 시대의 남한산성은 선조 임금에서 순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 그 중에서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에는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조 2년인 1624년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인 1626년에 완공한 남한산성.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 , 남문루와 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 등이 있다. 또한 비밀통로인 암문과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도 볼 수 있다. 남한산성은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이 남한산성의 행궁 앞편 산 중턱에 서 있는 정자가 바로 침괘정이다.

 

무기제작소로 잘못 알려진 침괘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인 침괘정은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조선 영조 27년인 1751년애 광주유수 이기진이 다시 지은 후에 이름을 침과정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백제 온조왕의 궁궐터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며, 침괘정의 오른쪽에는 무기를 보관하던 무기고나 무기를 만들던 무기제작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면 7, 측면 3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침괘정의 안쪽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고, 회랑과 툇마루를 길게 놓았다. 뒤편에는 연도를 빼 건물에서 떨어져 굴뚝을 세웠다. 이 침괘정의 주변에 있던 무기창고를 명나라 사신 정룡이 총융무고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있었던 전각으로 보인다.

 

침괘정은 네모난 기둥을 쓰고 있으며, 툇마루는 앞과 뒤, 그리고 측면에도 놓았다. 주초는 커다란 돌을 네모나게 다듬어 사용을 하고 있으며, 7칸 중 두 칸은 전체를 문으로 돌렸다. 이를 보아 이곳이 온돌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침괘정은 무기고나 무기제작소가 아닌 하나의 정자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 만해기념관(관장. 전보삼)은 갑오년 봄을 맞이하여 41()부터 531()까지 2달동안 새봄, 매화 향기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특별기획전을 개최한다. 만해 한용운(1879~1944)은 매화(梅花)를 매우 좋아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쌓인 눈 찬바람에 아름다운 향기를 토하는 것이 매화라면,

거친 세상 괴로운 지경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는 것이 용자니라.

꽃으로서 매화가 된다면 서리와 눈을 원망할 것이 없느니라.

사람으로서 용자가 된다면 행운의 기회를 기다릴 것이 없느니라.

무서운 겨울의 뒤에 바야흐로 오는 새봄은 향기로운 매화에게 첫 키스를 주느니라.’

 

 

지조와 절조를 지킨 만해 한용운

 

만해 한용운 선생은 눈 서리치는 혹독한 시절 그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매화처럼 지조와 절조와 품격을 유지하면서 민족적 자존을 지켰다. 엄동설한의 매화나무에 꽃이 필 때 차디찬 설중(雪中)에서 그윽한 향기를 품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였다.

 

설중매는 만해의 생애를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새봄, 매화 향기를 찾아서특별기획전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이러한 염원을 꽃피우고 매화 향기를 통하여 그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전시를 기획하였다.

 

 

한용운 선생은 1879829일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여 1944629일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이자 승려, 독립운동가로 한국 근대시사의 불후의 업적인 님의 침묵을 펴냈고, 한국 근대 불교계에서 혁신적인 사상과 활동을 펼쳤다. 또한 3·1독립선언에 민족대표로 참가하는 등 일제강점기의 혁명적인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본관은 청주. 속명은 유천(裕天). 자는 정옥(貞玉). 용운은 법명이며 득도할 때의 계명은 봉완(奉玩), 법호는 만해(萬海 : 또는 卍海)이다.

 

만해매화첩 등 전시

 

전시 주요 작품은 만해의 매화 관련시를 매화 그림 엮은 무곡 최석화의 만해매화첩 하가 첫 선을 보이며, 그 외에 총 37점 내외의 문인화가 있다.

 

 

주요 작가로는 소치 허유, 가헌 이석하, 미산 허형, 춘원 정재민, 해주 원용식, 매산 황영두, 의재 허백련, 소연 박홍주 작품을 비롯하여 홍석창, 무림 김영기, 창현 박종회, 운당, 매천, 계정, 지산, 근원, 우봉, 운계, 매산, 임전, 무곡 최석화, 루예, 지봉, 효당, 석당, 추전 등의 새로운 작품을 전시한다.

 

이번 전시를 통하여 만해 한용운 선생의 매화사랑, 나라사랑의 의미를 이해하고, 남한산성의 봄의 정취와 매화꽃의 향기를 동시에 느끼며, 만해 한용운 선생의 정신의 참의미를 찾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에 소재한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제 때의 성으로도 알려진 남한산성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 , 남문루와 수어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정비된 곳으로 손꼽힌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였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 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아픔을 당한 남한산성

 

남한산성의 축성은 인조 2년인 1624년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인 1626년에 완공하였다.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작금에 들어 다시 재조명되고 있는 남한산성. 연차적인 복원공사를 통해 지금은 많은 구조물과 성벽 등이 옛 모습을 다시 찾아가고 있다. 남한산성은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남한산성은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남한산성의 총 길이는 11.76km에 달한다. 본성은 9.05km이며 옹성이 2.71km이다.

 

 

남한산성 제1암문을 돌아보다

 

남한산성의 축성 때 승병들이 묵었던 9개소의 사찰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는 장경사. 그 주차장 한편에 성 밑으로 내려가는 암문이 있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다. 암문은 본성에 11, 봉암성에 4, 그리고 한봉성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암문이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하는 비밀통로라고 생각하면 된다. 적에게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적의 배후를 교란하거나, 식량을 은밀히 운반하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장경사 암문이라고도 부르는 제1암문은 형태가 특이하다. 딴 암문들은 성곽을 돌출시키고 그 안에 암문을 숨겼지만 이 암문은 좌우의 성벽이 돌출되어 있지 않다. 성벽에 아취모양을 구성하고 그 안에 문을 달았다. 문의 기둥을 고정시키는 돌출부는 아래와 위 양편에 조성한 것으로 보아 이 암문은 작지만 두 짝의 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암문은 성벽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높아진다. 이곳은 경사가 급하고 성벽이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주변의 성벽에는 몇 개의 수로가 나 있다. 바닥에는 돌을 깔았으며 천정도 커다란 장대석을 이용해 덮었다. 암문을 들어서면 바로 장경사로 통하게 되어있어, 비상시에는 많은 승병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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