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종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남양주 봉선사의 말사이며, 운길산 8부 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 초기에 중창한 사찰이다. 소재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로 433번길에 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되는 두물머리(양수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수종사는, 그 경계가 빼어난 사찰로 명성을 얻고 있다.

 

수종사라는 절 이름은 1458년 세조가 신병치료차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올 때, 밤이 되어 이수두(二水頭=두물머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밤이 늦었는데 운길산 어디선가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와 다음 날 숲 속을 둘러보게 하니, 천년고찰의 폐허 바위굴에는 18 나한상이 줄지어 앉아 있었는데 그 바위굴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종소리처럼 들렸던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세조는 감동하여 왕명으로 지금의 자리에 절을 중창케 하고 절 이름을 수종사라 부르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의 명문장가인 서거정은 수종사에서 두물머리를 내려다보고, 동방의 사찰 중 제일이라 했을 정도이다. 수종사 절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북한강의 경관이 그 정도로 빼어나다.

 

 

8각으로 조성한 조선시대의 부도

 

수종사 경내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7호인 남양주수종사부도(南楊州水鍾寺浮屠)’가 자리한다.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탑이다. 수종사의 부도는 전체적으로 8각을 기본으로 하여, 2단을 이루는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수종사를 다녀온 지도 벌써 한 달이 훌쩍 자났다. 하지만 문화재 답사라는 것이 다녀온 후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기록할 수가 없으니, 이제라도 정리를 하는 수밖에. 수종사 부도의 기단부는 긴략하게 2개의 돌로 마련하였다. 일반적으로 부도의 경우 상, , 3단으로 구성되는데 비해 특이한 형태이다.

 

 

몸돌에 새긴 구름과 용, 장엄해

 

부도의 탑신인 몸돌은 둥근 형태가 변하여 거의 사각형에 가깝고, 용의 모습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겨 넣었다. 구름과 함께 새긴 용은 섬세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장중함을 더하고 있다. 지붕돌은 두꺼운 편이고, 처마는 느린 U자형을 이룬다. 꼭대기에는 노반(머리장식받침) 위로 보주(구슬모양 장식)와 보륜(수레바퀴모양 장식) 등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지붕돌 낙수면에 남아 있는 기록에는 <태종태후정의옹주사리탑시주○○유씨금성대군정통사년기미십월일입>고 적고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조선 세종 21년인 1439년에, 왕실의 뜻을 모아 이 부도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부도 안에서 고려시대 청자로 만든 항아리와 은으로 만들어 금을 입힌 6각의 단지(보물 제259)를 발견하여,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태종의 다섯째 딸인 정의옹주의 부도로 알려진 수종사 부도. 두 마리의 용이 구름 위에서 여의주를 움켜잡고 비상하려는 용트림이 새겨져 있는 이 부도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운룡문 만으로도 장엄함을 엿볼 수가 있다. 원통형으로 조성한 탑신의 둘레가 218cm인 수종사 부도. 575년 세월을 그렇게 수종사에서 두물머리를 바라다보고 자리하고 있다.

 

찻집인 삼정헌 옆으로 다가가 두물머리를 내려다본다. 과거에는 수많은 배들이 드나들었을 두물머리. 지금은 그저 무심한 바람 한 점이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다산 정약용은 15세에 수종사에 노닐다라는 글을 지었다. 이곳이 다산의 놀이터였기 때문이다.

 

다래덩굴 드리운 비탈진 섬들이나

경내로 드는 길은 과연 어느 곳인고?

응달 숲 속에 아직 묻은 눈이 남아있고

양지바른 물가엔 아침햇살에 이슬이 반짝인다.

샘물이 솟아 땅은 표주박처럼 움푹하고

종소리는 메아리쳐 깊은 산속으로 흘러가네.

내 여기를 수없이 노닐었지만

그 그윽함을 아직 다 모르겠구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로 운길산에 소재한 수종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로, 조선 세조 5년인 1459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온다. 이 수종사 경내에는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 오층석탑은 보물 제1808호로 올해 94일에 지정이 되었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운길산 중턱에 위치한 수종사에 전해오는 조선시대의 석탑이다. 이 석탑은 원래 사찰 동편의 능선 위에 세워져 있었다고 전한다. 원래의 위치에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되는 양수리 지역이 훤히 내려다보여, 경관이 우수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현재 이 오층석탑은 석조부도, 소형석탑과 함께 대웅전 옆으로 옮겨져 있다.

 

운길산을 오르다

 

수종사 오층석탑이 보물로 지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종사로 향했다. 915일에 찾아갔으나, 생태교통 수원2013으로 인해 아직 정리조차 못한 자료를 모처럼 뒤져냈다. 운길산을 오르던 이 날은 한 낮의 온도가 꽤 무더웠다. 그래도 문화재를 보기 위해 얼음물 한 병을 들고 걸어 올랐지만, 워낙 가파른 비탈이라 땀이 비 오듯 한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맥이 풀릴 때는, 어렵게 찾아 간 문화재 앞에 공사 중이란 글씨와 함께 문화재를 가려 놓았을 때이다. 수종사 오층석탑도 주변에 천막을 친 것을 보니, 주변 정리를 하는 듯 한데 다행히 탑은 온전히 볼 수가 있었다. 조선초기의 석탑이라고 하니 500여 년은 족히 넘었을 석탑이 온전히 남아있다.

 

 

불상 등에서 1493년에 조성한 탑임이 밝혀져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같이 고려시대 팔각석탑의 전통을 이으면서, 규모가 작아지고 장식적으로 변모한 조선 초기 석탑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이 탑에서는 1957년 해체수리 시에 1층 탑신과 옥개석, 기단 중대석에서 19구의 불상이 발견되었고, 1970년 이전 시에는 2, 3층 옥개석에서 12구의 불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함께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서 이 불상들 가운데 태종의 후궁이었던 명빈 김씨(?-1479)가 발원조성하고, 성종의 후궁들이 홍치 6년인 1493년에 납입했다고 하는 불상 2(석가여래 1구와 관음보살 1)와 인목대비의 발원으로 조성된 금동불과 보살상들, 숭정원년인 1628년에 조각승인 화원 성인이 조성한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이 확인되어, 석탑 건립의 하한은 1493년이며 1628년에 중수된 것을 알 수 있다.

 

 

화려한 문양의 조선 초기 석탑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탑이 여러 형태의 문양으로 인해 화려해 보인다. 오층석탑은 지대석 위에 팔각의 대석을 올리고, 그 위에 불상의 팔각연화대좌와 같은 형식의 기단을 올렸다. 팔각 대석의 각 면을 2등분하여 장방형의 액을 새기고 그 안에 안상을 표현하였으며, 같은 형태의 안상은 기단의 받침과 탑신 받침에도 통일되게 새겨져 있다.

 

기단부는 상대 앙련석과 하대 복련석에 16엽의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연판에는 고려중기 때부터 유행했던 화려한 꽃머리 장식이 새겨져 있고, 팔각 중대석에는 각 모서리에 원형의 우주가 입체적으로 조각되었다. 5층의 탑신 역시 팔각 모서리에 원형의 우주가 새겨져 있고 옥개석에는 각각 3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다.

 

이 탑은 목조 탑을 석재로 옮긴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이채롭다. 옥개석 처마의 부드러운 곡선과 원형 기둥, 옥개받침 등이 목조 건축의 형태이다. 머리부분에는 합각지붕 형태의 삼각형 문양이 조각된 복발과 보주가 올려져 있다. 이 탑은 복장된 내용물에서 확인이 되듯, 왕실 발원의 석탑임을 알 수 있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많은 조선시대의 석탑 중에서 특별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불상대좌와 같이 조성하였고, 탑신부는 목조건축의 양식이다. 또한 상륜부는 팔작 기와지붕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형식은 현재까지 조사된 조선시대에 조성된 석탑 중 유일한 팔각오층석탑이다.

 

9월 중순의 한 낮에 오른 운길산. 많은 사람들이 찻집에 들려 차 한 잔을 마시고 있지만, 갈 길 바쁜 일정에 오래 머물 수가 없다. 경내를 바삐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을 촬영을 한 후에 다시 하산을 서두른다. 전날 내린 비로 인해 물줄기가 시원한 소리를 낸다. 이 무더운 날에 그 물소리도 행복이려니.

예나 지금이나 잘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하다. 시쳇말로 백 없고 돈도 없고, 거기다가 줄도 없으면, 그야말로 세상살이가 힘들어진다. 가끔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씁쓸한 때가 있다. 넓은 평수에 사는 사람들이, 임대주택의 아이들과는 한 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없다고 억지를 부렸다는 소식을 접할 때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소재한 궁집. 영조의 막내딸인 화길옹주가 살던 집이다. 아마도 화길옹주가 이곳으로 시집을 왔을 때, 시비들이 이곳으로 따라왔을 것이다. 또한 능성위 구민화의 집에도 아랫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궁집 옆으로 초가가 한 채 보인다. 바로 궁집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묵었다는 집이다.

 

 

신분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초가

 

하지만 궁에서 따라 나온 시비들이나, 마름 등은 이 초가에 묵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궁집 안에도 행랑채가 있어, 마름들이나 궁에서 나온 시비들은 그곳에서 생활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 아마도 그보다 신분이 낮은 머슴이나 종들이 살던 집은 아니었을까?

 

궁집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묵었다고 전하는 이 초가는, 궁집을 지었을 때와 같은 시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 집도 25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집이다. 이 초가는 현재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옛 고택들 중에서도 특히 초가의 경우 사람이 살지 않으면 퇴락해 버리고 만다. 이 초가 역시 많이 훼손이 되었다.

 

 

 

 

연륜을 알 수 있는 주변의 경관

 

궁집의 하인들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초가. 주변으로는 꽤 오래 묵은 듯한 나무들이 서 있어, 이 집의 역사를 가늠할 수가 있다. 초가는 ㄷ 자 형으로 되었다. 앞으로 사랑채를 놓고, 그 중간에 대문을 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ㄴ 자의 꺾인 부분에 대청을 두고, 양편으로 방과 부엌을 드렸다.

 

이 초가는 일반적인 초가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꾸며졌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양편에 방에 불을 때기가 편하도록 깊게 골을 파서 연결하였다. 한 사람이 양편에 불을 한꺼번에 땔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아궁이의 형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안으로 들어가면 양편으로는 방을 드렸다. 아마도 초가의 사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이 초가에 살던 사람들이 신분이 낮았으니, 아랫사람을 두고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양편의 방을 일꾼들이 사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의 밖으로는 툇마루를 놓아 주변 경관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안채의 특이한 구성, 머슴들이 생활한 집인가?

 

사랑채에 비해 안채는 간결하게 꾸며졌다. 사랑채에 붙여 ㄱ 자로 지은 안채는 작은 방 하나를 놓고 부엌과 안방을 드렸다. 안방은 뒤로 물려 앞을 마루를 놓았으며, 꺾인 부분에는 넓은 대청을 놓았다. 그리고 건넌방을 드렸다. 이런 구조로 볼 때 이 초가에는 주로 일을 하는 머슴들 위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일반적인 중부지방의 초가와 다름이 없지만, 그 집의 구성으로 볼 때는 상당히 특이한 형태인 초가. 부엌 뒤편으로는 장독을 놓았으며, 사랑채를 맞물려 안채의 뒤편으로 연결이 될 수 있도록 담장을 둘렀다.

 

 

 

 

사람이 사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재신이나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 집의 형태. 그런 집들을 돌아보면서 참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신분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7월 17일에 찾아간 남양주시 평내동의 궁집. 그곳에는 또 다른 신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번지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서 있는 보물 제928호는, 조선 광해군 때 세워진 사리탑과 그 안에서 발견된 여러 사리장치들을 일괄 지정한 것이다. 사리탑 1기와 탑 안에서 발견이 된 6물 6점을 지정하였다. 이 사리탑은 영원히 우리 땅에서 볼 수 없었던 것 중 하나이다.

 

보물의 공식 지정 명칭은 ‘남양주 봉인사 부도암지 사리탑 및 사리장엄구’이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사리를 모셔 둔 탑으로, 광해군은 왕세자의 만수무강과 부처의 보호를 바라며 봉인사의 부도암이라는 암자에 사리탑을 세우게 하였다. 사리탑에는 승려의 사리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탑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일본으로 건너갔던 보물 사리탑

 

이 사리탑은 1620년경 봉인사 부도암(경기도 남양주군 진건면 송릉리 소재)에 세워졌던 것이다. 일제시대인 1927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고베로 반출되고 그 뒤 대판 시립미술관에 보관되었다가, 1987년 2월에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봉인사 사리탑은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조선시대의 유물연구에 기초적인 자료가 되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높이 3.08m의 사리탑은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단은 상·중·하의 세 부분으로 나누었고, 그 위로 북처럼 둥근 탑 몸돌을 올려 사리를 모셔 두었다. 8각의 지붕돌을 그 위에 올린 뒤 꼭대기에는 길쭉한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보기에도 조선시대의 사리탑 중 걸작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초기 사리탑의 전형

 

이 탑의 뛰어난 조형은 기중돌인 중대석에 새겨진 구름과 당초문양, 꽃잎과 여의주무늬, 상대석 옆면 테두리 속의 당초무늬, 탑신부의 운룡무늬 등에서 새로운 조형적 특색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경사가 급한 지붕에 처마 밑으로 서까래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거나, 윗면에 용머리를 새긴 수법 등은 기존의 사리탑과는 다른 형태이다.

 

상륜부가 길쭉하게 올라간 형태나 왕릉의 호석처럼 주위에 난간과 궁판석을 돌린 방식 등은 이 탑이 곧 조선 초기에 제작된 중원의 청룡사의 사리탑이나, 양주의 회암사의 사리탑을 모방하여 조선 초기 사리탑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작연대가 밝혀진 사리탑

 

이 탑의 발견 당시 외합 속에는 명주실과 비단, 향이 남아 있었으며, 은으로 만든 내합의 뚜껑에는 마름모형의 무늬를 볼록 눌러새김의 수법으로 낸 후 그 안에 역동적인 운룡무늬를 장식하고 금박을 입혔다. 그리고 이 합의 밑바닥에는 네 줄의 명기와 함께 '만력 48년 경신 5월(萬曆四十八年庚申五月)의 글귀가 새겨져, 이 유물이 광해군 12년인 1620년에 봉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사카시립미술관에 전시가 되어있던 이 사리탑은, 1987년 소유자인 이와다 센소의 자발적인 기증 반환으로 되돌아 오게 된 것이다. 이는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는 원소유국에 반환되어야 한다’는 유네스코 협약정신에 의해 돌아오게 된 것이다. 수많은 누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찬탈해 간 일본인 중에, 이런 양심적인 사람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놀랍기만 하다.

 

 

아직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우리의 문화유산들. 그 역사 속에서 찬연하게 빛을 발했던 문화재들이, 언제나 돌아와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인지.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들의 빈자리를 볼 때마다 답답함만 더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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