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전 판소리의 명창들은 스스로의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흔히 <독공>이라 하는 이 소리공부는, 동굴 속에서 혹은 폭포에서 수년에서 10년이란 긴 시간을 소리에만 전념을 하는 것이다. 때로는 피를 토하고 병이 걸리기도 하지만, 오직 명창의 반열에 들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노력을 했다고 한다. 고 박동진 명창은 생전에 "여주 벽절이란 곳에서 염계달 선생님이 득음을 하셨는데, 잠이 오면 대들보와 상투를 끈으로 연결하고 소리를 했지. 명창은 그렇게 노력을 하지 않으면 태어나지가 않아"라는 이야길 하셨다.

 

17세에 길에서 장끼전을 주워 벽절 신륵사를 향한 염계달. 낮에는 절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면서 밤이 되면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런 날들이었을까? 그렇게 하기를 10년. 당당히 명창의 반열에 오른 염계달 명창.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강월헌.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예전의 정자는 아니다. 홍수로 무너져 내린 것을 다시 지었다. 신륵사 경내 남한강가, 그리고 벽절이란 이름을 만들어 낸 보물 다층전탑 아래 자리를 잡고 있다. 

 

  
▲ 강월헌 강월헌의 현판

  
▲ 강월헌 판소리 중고제라는 한 류파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염계달 명창은 조선조 정종 때부터 철종 때까지 활동을 한 명창이다. 판소리에 경기도 소리조인 경드름을 새롭게 창출해냈다. 판소리 명창들이 '추천목'으로 지목하는 곡도 바로 염계달 명창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염계달 명창은 바로 경기 충청의 소리제인 중고제 중에서 경제중고제의 시조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염계달 명창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홀로 소리공부를 했을 것으로 보이는 강월헌. 그 위에 오르면 남한강의 물살에 해가 비추인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그 10년 세월 피를 토하는 독공으로 득음을 한 것이다.

 

"염계달 선생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소리공부를 했기 때문에 10년이 걸렸을 것이여. 부여 무량사에서 득음을 하신 우리 선생님 김창진 명창도 10년만에 득음을 했거든."

 

고 명창 박동진 선생님의 생전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강월헌에 올라 남한강을 내려다본다. 지난 역사를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강. 그 강이 좋은 것은 슬픈 역사나 기쁜 역사가 모든 것을 다 알고도 말이 없다는 것이다.

 

왜 소리는 강을 끼고 만들어질까? 문화는 왜 강을 중심으로 창출이 될까? 그저 학자들의 논리만으로는 그 속 깊은 해답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강을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그 강으로 인해 아픔을 당하면서도 강과 함께 살았다. 자연을 거스리는 것이 아닌, 자연과 동화되는 법을 배웠다. 

 

  
▲ 강월헌 명창 염계달이 밤마다 소리를 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강월헌

 
판소리는 자연이라고 한다. 자연이 아니면 인간의 신체적 조건만 갖고는 그 해답이 나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으로 산으로, 그리고 동굴로, 폭포로 찾아다니면서 스스로 자연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전설처럼만 여겨지는 소리꾼들의 그 득음과정이 그렇다.
 
이곳에 염계달이란 명창이 있었던 곳이라는, 그리고 판소리의 한 류파가 생겨난 곳이라는 아무런 표시 하나가 없다. 강월헌은 그저 벽절 신륵사 경내 전탑 아래에 남한강을 굽어보며 언제나 그랬듯이 그렇게 서 있다.  나옹선사의 당호에서 따온 명칭인 강월헌(江月軒). 그리고 조선조의 명창 염계달이 소리를 하던 곳. 작은 이 정자 안에는 또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에는 보물 제97호로 지정된 거대한 원풍리 마애불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12m 높이의 자연 암벽 가운데 약 6m 정도의 네모 난 크기의 방형 감실을 파고, 그 안에 두 구의 불상을 나란히 배치했다. 이렇게 쌍 좌상으로 조각을 한 예나, 자연 암벽에 감실을 조성한 경우는 극히 희귀한 예로 주목받고 있다.

 

연풍에서 충주 방향으로 새로 난 3번 도로를 이용해 나가다가 보면, 조령교를 지나 조령교차로가 나온다. 그곳에서 신풍삼거리 지방도로 내려 3번 도로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우측에 내를 끼고, 좌측 계단 위 암벽에 마애불이 자리하고 있다.

 

 

눈이 채 녹지 않았을 때 찾아간 원풍리 마애불 가는 길은 그야말로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로 올라야 했다. 쌍 좌상으로 조성된 마애불을 바라보고, 눈이 쌓인 계단을 오르니 염불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마애불 앞에 천막을 치고, 안에서 염불을 하고 있다. 무슨 염원이 있기에, 추운 날 저리도 열심히 염불을 하고 있는 것일까?

 

거대한 마애불 조성 누가한 것은 나옹조사일까?

 

원풍리 마애불은 석가여래와 다보여래를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다보여래는 석가모니가 설법을 할 때 다보탑과 함께 땅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그리고 석가모니의 설법이 참이라고 증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석가모니와 다보여래를 함께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경주 불국사에 조성된 석가탑과 다보탑이다. 법화경에 나오는 내용을 상징한다는 이러한 쌍 좌상은 우리나라에서는 극히 드문 예이다.

 

 

 

자연암벽을 움푹하게 파서 자연적인 감실을 만든 것도 그러하지만, 그 안에 돋을새김으로 두 분의 여래와 작은 화불을 조각한 것은 뛰어난 예술품으로 평가된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말기 범어사에 묵고 있던 고승 여상조사가 조성했다고도 하고, 고려 때 나옹선사가 조성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인근 지역의 거대마애불의 한 형태로 보아, 고려중기인 12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서 전설에 보이는 나옹선사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근한 이름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란 유명한 글을 남기신 분이기 때문이다. 나옹선사는 고려 말의 고승으로 역사의 격동기를 살았던 분이다. 1320년에 태어나 1376년에 입적한 나옹선사는 공민왕의 왕사이며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여상조사는 신라 말에 범어사에 묵었던 고승이라는 점을 보아도, 원풍리 마애불을 조성한 주인이라고 보기에는 시대가 맞지를 않는다. 과연 누가 이 거대마애불을 조성한 것일까?

 

 

이여송이 두 부처님의 코를 망가트렸다?

 

감실 안에 조성된 두 분의 여래상을 보면 넓적한 얼굴에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번지고 있다. 보는 이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이 마애불은 가늘고 긴 눈과 큰 입, 평평한 가슴 등 형식화된 면이 많이 보인다. 마모가 되어 알아보기 힘든 광배에는 작은 화불들이 5구씩 조각이 되어있다.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면 장식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현재 어떠한 장식을 한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그런데 두 분 마애좌상을 보면 코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저 높은 곳에 조성한 마애불의 코가 어떻게 떨어져 있는 것일까? 전하는 말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주기 위해 온 중국의 이여송이 원풍리 마애불을 보고, 그 마애불의 모습이 장사와 같다고 하여 코를 떼어갔다고 한다.

 

 

아마도 이여송은 이 마애불로 인해 주변에 장사라도 태어날 것을 염려했는가 보다. 또 일설에는 인근 마을에서 사는 여인들이 아들을 낳기 위해 코를 떼어갔다고 하지만, 그 높은 곳을 올라 코를 떼어갔다는 것은 믿기가 어렵다.

 

원풍리 마애불을 보고 내려오면서 도로 앞으로 흐르는 내를 보니, 자연 바위 위를 타고 흐르는 물이 작은 폭포처럼 보인다. 저렇게 맑은 물이 흐르는 이곳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도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올려다 본 마애불이 엷은 미소를 띠우는 듯하다. 역사의 흔적을 찾아 전국을 다니면서 만나는 많은 얼굴들. 그 온기 없는 얼굴이 오히려 더 따듯하게 느껴진다. 아마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온기를 느끼고 싶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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