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한 자락을 덜어놓고 가도, 한 점 미련이 남지 않을 듯한 암자. 넓지 않은 경내에는 그저 어디서 털버턱 주저 앉아도 마음이 편한 것만 같다. 이천시 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된 영월암. 1300여 년이라는 긴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아름다운 암자다.

 

영월암은 원래는 ‘북악사’란 이름으로 문헌상에 나타나고 있는 고찰이다. 영월암 중건기에 따르면 신라 제30대 문무왕 때에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 문헌이나 금석문 등은 전하지 않는다.

 

 

더운 날 오르면, 오장까지 시원한 곳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오른 영월암. 입구에는 수령 640년이 되었다는 은행나무가 한그루 서 있다. 이 은행나무는 나옹대사가 식수하였다고 전한다. 수고는 37m에 둘레는 5m가 되는 보호수이다.

 

은행나무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영월암, 설봉산 주봉 아래에 고즈넉히 자리를 잡은 이 암자는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 겸손함이 배어 있다. 그저 얼핏 구름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세월 설봉산을 넘어 흐르는 구름을 따라, 그렇게 마음 편히 만날 수 있는 그런 암자이다.

 

대웅전을 지나 왼편 암벽 위에 서 있는 삼성각으로 오른다. 영월암 삼성각에는 중앙에 유리로 앞을 가리고 뒤편 암벽에 판 후 독성을 모셔놓았다. 그 독성이 혹 나옹선사가 아니었을까? 그저 혼자만의 생각이 멋 적어 허공에 빈 웃음을 날려본다.

 

삼성각 곁에는 와편을 쌓아 올린 굴뚝이 서 있어 멋스러움을 더한다. 전국의 수많은 고찰을 찾아다니면서 보면 그 하나하나가 다 아름답지만, 그 중에도 눈에 띠는 이러한 조형물 하나는 꼭 있기 마련이다.

 

구름에 떠가는 듯한 느낌이

 

삼성각 앞에서 내려다 본 영월암. 그저 조용하게 숨을 죽이듯 엎드려 있다. 그 많은 날들을 그렇게 조용히 앉아, 참선에 든 수도승처럼, 영월암은 그렇게 지내왔는가 보다. 가지런히 줄지어 있는 기와들이 참 정연하단 생각을 한다. 작은 것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는 그러한 마음을 알려주려는 것인지, 누군가 도토리 몇 알을 게단 한편에 모아놓았다.

 

삼성각에서 내려오는 계단 밑을 보니 석조 안에 꽃들이 가득하다. 저런 것 하나도 저리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마음이 있어, 영월암은 구름을 닮았나보다. 우물 뚜껑 위에는 영월암 스님이 닦아서 말리려는 듯 다구들이 늘어져 있다. 깨끗하게 닦여진 다구들. 세상에 찌든 마음을 저렇게 닦아낼 수만 있다면. 오늘 영월암에 올라 나도 구름을 닮은 마음을 가져본다.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 그 앞에서 마음을 멈춘다.

 

보물 제822호 마애불을 바라보며 오르다가 보면 좌측에 이천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를 볼 수가 있다. 영월암 창건 당시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물은 주불이 없어 안타깝다. 문화재 답사를 하기 위해 전국을 다니다가 보면, 이렇게 일부가 훼파되거나 사라진 문화재가 있어 마음이 아프다.

 

 

 

높이 9.6m의 거대한 이 마애불은 ‘마애여래불’로 명칭을 붙였지만, 민머리 등으로 보아 ‘마애조사상’으로 보인다. 둥근 얼굴에 눈, 코와 입을 큼지막하게 새겼다. 두툼한 입술에 넙적한 코, 지그시 감은 눈과 커다랗게 양편에 걸린 귀. 그저 투박하기만 한 이 마애불에서 친근한 이웃집 어른을 만난 듯하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모두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왼손을 안으로 향했다.

 

고려 전기에 조성이 되었다고 하면 천년 세월을 이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전국을 돌면서 우리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만나는 문화재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다.

 

 

문화는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바라보며 그 소중함을 일깨우는 것이다. 낙서에 훼파를 한다면 소중한 문화유산을 어떻게 지켜갈 수가 있을까? 영월암 대웅전 뒤편 암벽에 조성된 마애불은 그런 속된 세상이 보기 싫어 아예 눈을 감아 버렸나보다.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을 닮은 마음을 갖고 있는 영월암. 설봉산 위로 흘러가는 구름을 따라, 찌든 마음 하나를 훌훌 털어버린다.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에 자리하고 있는 옛 절터인 회암사지. 사적 제128호인 회암사지는 요즈음 한창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곳이다. 원래 본격적인 발굴을 하기 전에는 회암사지에 수많은 문화재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회암사지에서 보이는 것은 전각들이 서 있던 곳의 축대와 주춧돌, 그리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부도탑 등이다.

2월 25일, 회암사지를 찾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가려고 했던 곳이다. 멀리서 보아도 발굴을 하고 있는 회암사지의 모습은 장관이다. 회암사지에는 보물 제387호 회암사지선각왕사비, 보물 제388호 회암사지부도, 보물 제389호 회암사지쌍사자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인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무학대사비, 그리고 회암사지부도탑 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승려 지공이 창건했다고 하나 그 이전에 이미 절이 있었다고도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28년에 승려 지공이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그러나 일설에는 보우선사의 원증국사탑비에 의해, 충숙왕 즉위년인 1313년에 이미 절이 창건되었다고도 추정한다. 회암사는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불사를 일으켜 큰 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각별히 관심을 가졌으며, 왕위를 물린 후에도 이곳에서 머무르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회암사지의 동쪽 능선 위에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사리탑이 남과 북으로 나란히 서있고 그 남쪽 끝에 석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옹은 고려 우왕 2년인 1376년에 삼산양수지기의 비기(秘記)에서 이곳이 인도 나란타사와 지형이 같으므로, 이곳에 절을 일으키면 불법이 크게 흥한다고 하여 절을 중창했다는 것이다.



선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

회암사지는 현재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며,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회암사는, 발굴된 터만 보아도 대가람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세종 6년인 1424년에 행해진 ‘선교양종(禪敎兩宗)’ 폐합 때의 기록으로도, 그 규모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회암사는 성종 3년인 1472년에는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의 명으로 정현조가 중창을 하였으며, 명조 때에는 보우를 신임한 문정왕후의 비호로 다시 전국제일의 수선도량이 되었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유생들의 탄핵으로 보우는 처형되고 절도 황폐해졌다. 기옥을 보면 선조 때까지는 간간이 절의 이름이 보이지만, 1818년 재건한 무학대사비에는 폐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날 꼭 비워야 하나

발굴을 한다는 안내판에는 2012년까지로 기록이 되어있다. 문화재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고 하여,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찾으니 대답이 없다. 아마도 일요일이라고 쉬는 모양이다. 그런데 소중한 문화재를 발굴을 한다고 해서, 이전을 한다는 것이 영 미덥지가 않다. 혹 이전을 하면서 훼손이라도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안내판을 보니 절터 위에 전망대가 있고, 그 곳에 가면 문화관광 해설사가 있다고 하여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해설사가 있다는 컨테이너는 굳게 닫혀 있다. 요즈음 주말과 일요일이 되면, 가족들이 나들이를 하면서 문화재를 둘러보고는 한다. 자녀들과 함께 온 가족인 듯한데, ‘꼭 일요일에 쉬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한다.

물론 일요일은 모두가 쉬는 날이기 때문에, 그들보고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딴 지역을 돌아보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주말과 일요일은 근무를 하고 평일에 쉬는 곳이 많다. 관광객들이 찾아들기 때문에, 쉬는 날을 변경해 사람들에게 문화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기대를 하고 찾아간 회암사지. 결국은 발굴중인 사지에 즐비하게 늘어선 석물만 보고 온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 하나만 갖고도 회암사지가 과거 얼마나 대가람이었는가는 충분히 가늠할 수가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고마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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