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팔달구 지동엔 요즘 사람들이 골목마다 북적인다. 바로 벽화를 그리기 때문이다. 지동의 골목 벽은 6세 어린아이부터 80세 노인들까지, 모두 화가로 만드는 마력을 지닌 벽들이다. 마을주민은 물론, 수원의 많은 시민들과 단체에서 참가를 한다. 지동의 벽은 날마다 그림들이 늘어만 간다.

 

9월 26일 오전 7시가 조금 넘었는데 문자가 하나 들어온다. ‘지동 어린이집 원생 15명이 10시부터 지동 벽화를 그리러 갑니다.’ 라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가봐야지. 딴 행보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일정을 바꾸어버렸다. 아이들이 그리는 그림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더욱 이 날은 삼성전자 봉사단 70명이 벽화를 그리러 온다고 했다니.

 

 

 

어린 꼬마들의 마음속에 날리고 싶은 것은?

 

10시 지동 벽화골목으로 행했다. 큰길에서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이 녀석들 죽 벽에 붙어 무엇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다. 그런데 손으로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도 같이 그린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 크레파스가 없다고 하는 녀석에, 안 주겠다고 도망을 가는 녀석. 시립지동 어린이집(원장 석숙현) 꼬마들 15명이, 이유리 교사의 인솔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한 편 벽은 나비만 그리고, 반대편 벽에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게 한다. 그런데 한 녀석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검은 크레파스로 ×자를 그려 놓았다. 아마 피카소가 벽화를 그려도, 이렇게 당당하게 잘 못 되었다는 것을 표시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람나비, 조개나비...들어는 보았소?

 

아이들이 벽에 그린 나비들이 온통 날갯짓을 한다. 수백 마리의 나비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를 듯한 기세이다. 그런데 그 나비들을 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대형 나비부터 시작해, 달팽이나비, 사람나비, 굼벵이나비, 조개나비 등등. 세상에 어린이들은 무엇이나 다 날려 보내고 싶은 것일까?

 

한 녀석이 커다랗게 나비를 그린다. 그 나비를 보다가 물어보았다. 그렇게 큰 나비가 날아갈 수 있는가를. 이 녀석 당당하게 대답을 한다. 자기가 날려 보낼 수 있다고. 그래서 아이들의 마음일까? 아이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은 없다. 하기에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벽화를 그리는 아이들에게서 선지식 하나를 얻어간다.

 

 

‘네 나비는 아까 날아갔다’

 

오후에는 삼성전자의 경영혁신팀과 센서개발팀 70여명이 골목을 찾았다. 인원이 많고 어른들이다 보니, 벽에는 짧은 시간에 많은 그림으로 채워져 나간다. 달라지고 있는 벽들을 보면서, 참 사람이 노력을 하면 이렇게 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골목벽화를 담당하는 사람도 삼성전자 벽화봉사팀이 들어오면 마음이 놓인다고 한다.

 

그런데 이 틈에는 색다른 인물들이 있다. 바로 벽화를 지우고 다니는 팀이다. 벽화를 그렸는데 잘 못 되었다고 생각이 들거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면 지우고 다닌다. 그래서인가 여기저기 덧칠을 하고 새로 그린 부분이 있다. 그렇게 골목 벽화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골목 안으로 꼬마가 엄마의 손을 잡고 들어선다.

 

 

 

아침에 나비를 그리던 어린이집 꼬마가 제 그림 자랑을 하려고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한다. 이 꼬마 자신의 나비를 찾는데, 그 나비가 사라져 버렸다. 그림을 지우는 분들이 나비를 몇 마리 지운 중에, 꼬마가 그린 나비도 있었는가 보다. 여기저기 찾더니, 그래도 엄마에게 딴 아이와 함께 그린 반대편 그림을 보여준다.

 

그 모습을 보면서 꼬마가 대견하기도 하고, 갑자기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것이 마음이 짠하기도 하다. 할 말이라고는 고작 이말 밖에 없다.

 

“꼬마야 아까 나비가 몇 마리 날아갔는데, 네 나비도 날아갔나 보다.”

 

 

이 꼬마,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괜히 이야기를 해놓고도 멋쩍다. 속으로 저 어린이가 그랬을 것이다. ‘저 아저씨 정신이 이상한 것 같다’고. 그렇게 지동의 벽화는 날마다 풍성해지고 있다. 내가 지동 뒷골목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른들이 계신 방에 들어가면, 벽에 온각 색으로 꽃이며 나비, 해와 달 등 각종 채색으로 이름이며 가훈 등을 쓴 액자나 족자를 볼 수 있었다. ‘혁필화’라고 하는 이 그림과 글씨는, 납작한 가죽을 이용해, 여러 빛깔의 색을 내는 것이다.

 

오늘 아침 갑자기 혁필화 생각이 났다. 가끔 이렇게 오래전에 본 것들이 갑자기 생각이 나고는 한다. 아마 천상 이런 버릇에서 못 벗어날 것만 같다. 처음 혁필화 사진을 찍은 것이 2003년도였으니, 벌써 1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한국민속촌 장터 안에서 본 기억이 나 민속촌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혁필화를 그리는 분이 민속촌을 떠난지 꽤 오래 되었다는 대답이다.

 

 2003년 한국민속촌에 가서 혁필화를 그리시는 어르신을 만나뵈었다.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버렸다

 

집집마다 한 점씩은 벽에 걸렸던 그림

 

예전에는 집집마다 방문을 하거나, 혹은 장거리 등에서 가끔 물감을 꺼내놓고 혁필화를 그리는 화가를 볼 수가 있었다. 혁필화는 조선조 초기인 1,600년경에 유덕공 선생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많은 혁필화가들이 활동을 하였다.

 

일설에는 18세기 유득공이 버드나무 가지로 쓴 비백서에서 기인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혁필화가 언제부터 누구에게서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확실한 자료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혁필화가들은 1930년대 한창 왕성한 활동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에는 혁필로 쓴 이름이나, 가훈, 상호, 고사성어 등을 집집마다 한두 장 지니고 있었다. 혁필화가들이 적은 수로 그 명맥을 유지했던 것은 대우문제에도 있다. 같은 그림을 그리지만 정상적인 화가들에 대해서 대우를 받지 못했다.

 

화가들에게서도 냉대를 받아

 

또한 화가들 중에서는 혁필화가들은 화가의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아마 그들을 장거리로 내본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혁필화는 빠른 시간에 그려내야 한다. 가죽이라는 특성상 물감을 흡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아픔이 있다. 한 장이라도 더 그려야 먹고 살수가 있었기 때문이란다.

 

화가들처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싼값에 그려야하는 혁필화가들로서는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빠른 작업만이 살길이었을 것이다. 1960년대부터 사양길에 들어선 혁필화는 이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혁필화에 대한 올바른 가치가 정립이 안되었기 때문에, 혁필화를 그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인사동에나 가 보아야 가끔 만나볼 수가 있는 혁필화. 재빠른 손놀림으로 화려하게 그려내는 혁필화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혁필의 끝에서 뿜어져 그려대는 나비며, 꽃이며 각종 나무들이 온갖 색을 만들며 화선지 위에 춤을 춘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려낸 혁필화. 그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화가의 애환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는 이들은 그저 탄성만 흘려낼 뿐이다.

 

그 당시 어르신이 쓴 혁필화가 지동 고성주 전안의 벽에 걸려있다

 

참 이제 와서 생각을 하면, 그동안 내가 문화예술인들을 만나면서도 참 소홀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째 당시에 혁필화를 그리시는 분의 존함조차도 물어보지 못했는지. 오늘 10년 전 같이 민속촌에 가서 쓴 혁필화 글씨를 전안에 곱게 모셔놓고 있는 아우의 집에 가서, 새삼 옛 기억을 더듬어본다. 하나씩 사라져가고만 있는 우리의 소중한 풍물이 오늘따라 마음이 아프다.

 사불산(四佛山) 대승사. 경상북도 문경시 신북면 전두리에 소재한 고찰이다. 대승사는 신라 진평왕 9년인 587년, 비단보자기에 쌓여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공덕봉 꼭대기에 내려앉자, 임금이 바위 곁에 절을 세운 것이 창건 기원이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병풍처럼 둘러친 사불산의 자락 안에 자리한다.

『삼국유사』 권3 <사불산조>에 기록에 의하면 임금이 이 사면바위에 와서 절을 하고, ‘대승사’라 사액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대승사라는 사명으로 전래한 것이, 벌써 1430년 정도나 된 고찰이다. 진평왕은 망명비구에게 사면석불에 공양을 올리게 하였는데, 망명비구가 입적을 한 후 무덤에서 한 쌍의 연꽃이 피어났다고 전한다.

자장으로 점심공양을 마치고 선방으로 돌아가시는 스님들

묵언수행’을 하는 대승사

7월 22일 금요일. 아침 일찍 대승사로 향했다. 3시간 30분을 달려 도착한 대승사. 몇 번이고 주변까지 찾아가 보았지만, 정작 대승사 일주문을 들어선 것은 처음이다. 작은 일주문 앞에는 ‘사불산 대승사’라고 적혀있고, 안쪽에는 ‘불이문(不貳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불이문을 지나니 넓은 주차장이 나타난다. 대승사의 살림을 맡아하는 원주스님이 마중을 나오셨다. 공양간 한편에서는 아궁이에 커다란 솥을 걸고 불을 끓이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아궁이다. 장작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른다. 이 복중에 아궁이에 불을 때 공양을 지어야 한다니. 그래도 옛 정취가 있어 좋다는 생각이다.



대승사 일주문인 불이문과 주차장 위에 놓인 장독대

대승사에는 보물 제991호인 금동보살좌상과 보물 제575호인 목각탱부관계문서, 경북 유형문화재 제239호인 마애여래좌상과 유형문화재 제300호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이 있다. 이 중 금동보살좌상은 공개를 하지 않고 있으며, 대웅전에 모셔진 후불탱화인 목각탱화는 전국에 있는 목각탱화 중 가장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목각후불탱화는 나무를 깎아 돋을새김을 하고, 중앙에는 광배와 연꽃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별도의 나무로 깎은 아미타불이 안치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라다만 보아도 대단한 작품이라는 느낌이다.




대승사 대웅전과 보물 목각탱화, 그리고 대웅전의 꽃창상과 대웅전 앞에 서 있는 향나무

이 목각탱화는 길이 3.6m, 폭 2.7m이다. 원래는 영주 부석사에 있던 것을 옮겨왓다고 한다. 아미타불을 중앙에 배치한 이 목각탱화는 좌우로 5단에 걸쳐 협시상을 배치하고 있는데, 좌우에 3구씩 4열에 맞추어 좌우대칭으로 배열하였다. 시간이 없어 사면바위와 마애불을 오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다음번에 대승사를 방문했을 때는 그곳부터 들려보아야겠다.




대승사 꽃밭에서 만나 나비와 응진전, 그리고 응진전에 모셔진 나한상과 스님들이 수행을 하는 공간

짜장 한 그릇에 만족하는 스님들

공양간 앞에 놓인 동판을 친다. 나무망치로 치는 동판은 둔탁한 소리를 낸다. 여기저기서 스님들이 공양간으로 모여든다. 그리고 발우에 면과 짜장을 받아 섞는다. 한 그릇을 다 드시고 조금 부족하신 듯하다. 면을 더 넣어 드신 후 선원으로 돌아가는 스님들. 그 뒷모습이 참으로 한가해 보인다.



한 여름에 아궁이에 불을 때서 면을 삶아낸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수행이란 생각입니다

“잘 먹었습니다. 역시 스님이 만드신 것이라 그런가, 맛이 더 있는 것 같네요”

선원에 계신 스님들은 묵언 수행중이라 ‘맛있다’라는 말씀도 못하신다. 일을 보시는 스님이 오셔서 대신 말씀을 전하신다. 아마도 묵언 중이 아니시라면 꽤 많은 칭찬을 받았을 것을. 그렇게 공양을 하기 위해 찾아간 문경 대승사. 언젠가는 스님들의 생활을 소개할 수 있는 날이 올 수가 있을까? 점점 멀어져 가는 스님들의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공양을 준비하는데 곁에서 떠나지를 않는 대승사 견보살 백구. 스님들의 공양시간을 알릴 때 치는 동판. 그리고 스님들의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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