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니 골이 지끈거린다. 요즈음 연말이라고 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보니 몸살이라도 오는 것일까? 오전에 약속이 되어있는 일정을 오후로 미루어 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머리가 이렇게 맑지가 않으면 도통 글을 쓸 수가 없다.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다가 보니 앞에 달력이 눈에 들어온다.

 

2015년 달력이다. 이 달력은 지동 벽화골목 총괄작가이자 제일교회 종탑에 자리한 노을빛 갤러리이 관장인 유순혜 작가이 손 그림 달력이다. 달마다 작은 달력 안에 화려하게 그려진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세상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달력 안 사람들이 모두 한 마디씩 하는 것만 같다.

 

 

2014년 난 과연 부지런히 살아왔는가?

 

달력을 한 장씩 넘겨본다. 달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그림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벌써 2014년도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벌써 1215일이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을 때마다 꺼내들었던 기자수첩을 꺼내본다. 두 권이나 되는 수첩에 글자들이 빼곡하니 차 있다.

 

수첩을 넘기면서 올 한 해 만난 사람들과 일들을 기억해 본다. 참 많은 곳을 다녀왔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11일부터 어제까지 e수원뉴스에 송고를 한 기사가 450개나 된다. 하루에 1.3개꼴로 기사를 쓴 것이다. 거의 기사를 쓰지 않고 넘어간 날이 없다. 그렇게 많은 기사를 써 가면서 만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까?

 

아마도 행사장에서 만난 사람들을 따져본다면 수천 명이 넘을 것만 같다. 사람은 많은 사람들과 많으 일들을 겪으면서 세상을 산다고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과연 2014년 한 해 동안 나는 잘 살기는 한 것일까? 혹 나로 인해 누군가가 마음에 상처를 입지는 않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다. 부지런히 산다고 해서 세상을 잘 살았다고 착각을 하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한 해의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보면 산다는 것이 참 단순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세상의 일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그 문제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또 일 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나이가 먹으면 시간이 지나는 것이 같다고 했던가? 생각해보면 그 말이 딱 맞는 듯하다.

 

10대 때 처음으로 작곡이라는 것을 해서 상을 받았을 때,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작곡가가 되겠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많은 노력을 했고 나름대로 이름께나 알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나는 세상을 돌아보고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그런 젊은 시절의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기자라는 명함을 남들에게 건네는 사람이 되었다. 뒤틀어진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또한 따듯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다. 나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한다는 것이 올해 첫날 가졌던 생각이다. 하지만 과연 난 그렇게 최선을 다한 한 해를 살았을까?

 

이제 보름 남짓 남은 2014. 15일 동안 과연 올 한 해 내가 정한 일들을 제대로 마무리 할 수는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니 지끈거리던 마리가 가시는 듯하다. 오늘 약속을 한 곳을 찾아가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231, 올 한 해 내가 꼭 이루고 싶었던 일을 이루는 해로 기억하고 싶다.

 

전날부터 내리는 비가 28일에도 추적거린다. 이번 비는 농사꾼들에게는 상당히 반가워야 할 비인데, 사람들은 이 비도 슬픔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하늘도 슬픈 모양이네요.” 28일 오전 수원시청 앞뜰 전광판 아래 마련된 세월호 침몰사고 희생자 수원시 추모분향소에 분향을 하러 온 한 시민의 독백이다.

 

수원시는 28일 오전 9시부터 세월호 희생자들의 추모분향소를 설치했다. 24시간 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분향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한 것이다. 오후 1230분 현재 300여 명의 시민들이 분향소를 찾았다. 비가 오고 있는 궂은 날인데도 불구하고, 세월호의 희생자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전달하고자 찾은 것이다.

 

 

아파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삼켜

 

오전 10시가 조금 지난 시간 분향을 하기 위해 분향소를 찾았다. 멀리는 가지 못한다고 해도, 거주하고 있는 수원에 분향소가 차려졌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가슴에 검은 조의를 표하는 리본을 달고, 이름을 적은 후 흰 국화 한 송이를 받았다. 분향소 안으로 들어가 향을 사른 후 고개를 숙인다.

 

못다 피운 꽃 하늘에서 활짝 피길

당신의 모습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친구들아 따듯한 곳에 가서 편히 쉬어라. 정말 미안하다

잊어버리지 않고 여러분을 기억할게요.’

 

노랑 리본에 적혀있는 추모의 글귀들이다. 아침부터 이곳에 나와 봉사를 하고 있는 수원시 중부녹색어머니연합회 김영옥 연합회장과 회원들은 분향소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안내를 맡고 있다가, 마음이 어떠냐는 질문에 아파요라는 말만 남길 뿐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글썽인다.

 

 

모든 국민이 다 아픈데, 댁들은 괜찮소?”

 

12시를 넘기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기 시작한다. 아마도 점심시간을 이용해 시청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듯하다. 분향을 마치고 나온 시민 한 사람은

우리나라 전체가 다 아픕니다. 방송을 본다는 것 자체가 이젠 두렵기조차 하네요. 도대체 이 나라가 안전 불감증에 걸렸다고 해도 이럴 수는 없다고 봅니다. 모든 국민이 다들 아파하고 힘을 잃고 있는데,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더 편치가 않습니다. 아이들을 볼 면목도 서질 않고요라고 한다.

 

점심시간에 친구와 함께 분향소를 찾은 한 여학생은

세월호에서 사고를 당해 돌아오지 못하는 많은 선배님들께 죄스러운 생각에 찾아왔어요. 제발 하늘나라에선 이런 아픔이 없었으면 해요. 어른들이 무책임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면서 책임을 지지 않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두렵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고개를 들 자격도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분향소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더 많이 이어진다. 시청 본관 앞 정원 한편에 마련한, 노란리본을 다는 곳에도 분향을 마친 사람들이 노란 천에 글을 적어 달고 있다.

 

하늘나라에서 친구들과 행복하게 살아라.’

미안하다. 구하지 못해 사랑하는 단원친구들

하늘나라엔 이런 아픔이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행복하세요.’

 

분향을 하기위해 점심도 걸렸다며 총총히 발길을 옮기는 한 사람은, 아침 출근길에 시청 홍보전광판을 보고 분향소가 차려진 것을 알았다면서

이 앞에만 서도 눈물이 쏟아지네요. 아직도 시신조차 발견하지 못한 100명이 넘는 고귀한 생명들. 그 속에서 얼마나 추울까요. 집에서 잠을 잘 때도 따듯하게 자는 것이 죄스럽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 되어버렸네요. 고개를 들고 살 수없는이라면서 말끝을 흐린다.

 

순식간에 300명이 넘는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그리고 벌써 10여 일이 훌쩍 지났지만 아이를 찾아 바람이 이는 팽목항을 떠나지 못하는 있는 유가족들. 매번 뒷북만 치고 있는 안전타령. 아이들에게 우리는 영원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몰염치한 어른들이 되고 말았다.

취재를 하거나 답사를 할 때 이동수단이 버스나 열차인 나로서는, 그 시간에 할 일이 많다. 우선은 출발지에서 신문을 하나사서(주로 시사주간지이지만) 꼼꼼히 읽어본다. 그 안에 기삿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면 블로그에 접속을 해서 글을 읽거나 추천을 한다. 그런 시간이 꽤 걸리기도 한다.

 

물론 트윗과 페이스북 역시 이동 중에 하는 일이 잦다. 하기에 주변의 이야기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 더 더욱 바깥으로 지나는 경치는 아예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물론 처음 가는 길이라면 예외이기도 하지만.

 

사진은 기사와 무관함

 

뒤에서 거는 전화 자꾸만 신경이 쓰여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라야 고작 10여 몀이다. 자리가 많아 일부러 신문을 보느라고 뒤편으로 가 앉았다. 그런데 그 많은 자릴 두고 한 분이 내 뒤에 앉는다. 문제는 차가 출발하자마자 전화를 건다. 친구들 모임에라도 나가는 것인지, 약속시간과 장소를 이야기를 하는데 마치 연인에게라도 하듯 소곤거린다. 뒤에서 계속 소곤거리는 전화소리에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여보, 나 차 탔어 갔다 올게. 일찍 올꺼야.”

 

갑자기 톤이 달라졌다. 아마도 남편에게 잘 다녀오겠다고 전화를 하는 것인가 보다. 참 이런 전화를 걸 수 있다는 것이 참 부럽다. 언제 적에 이런 전화를 걸어 보았는지, 혹은 이런 전화가 걸려왔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런데 정작 조금 후에 이 분의 전화가 이상해졌다.

 

“응 자기야 나야, 모임에 한 30분 정도만 있다가 나갈 테니까 그 앞으로 와 알았지”

“.....”

“아냐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 해. 먼저도 늦어서 눈치 보여 혼났어.”

 

이 여자분 남자가 도대체 몇이여?

 

중간 기착지에서 황급히 차를 내리는 여자분. 그 뒷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열심히 가족을 위해 일을 하고 있을, 그 남편이란 분이 불쌍해진다. 물론 남의 사생활에 대해 내가 ‘감 나와라 배 나와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나도 남자인데 이런 사람을 보면서, 요즘 남자들이 바보일까? 아니면 저 여자 분이 너무 한 것일까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보면 이런 경우를 참 많이도 보았다. 가끔은 정말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대화 내용으로 본다면 이 분 이렇게 밖으로 돌아다닌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닌 듯하다. 남편을 속이면서까지 꼭 그랬어야만 했을까? 하긴 남녀사이라는 것이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속이야 내 알 수가 없다. 하긴 요즘 하는 말을 들으면 잘 나가시는 분들은 남자가 하나, 둘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정말로 연애의 고수 시대가 도래한 것인지는 몰라도.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노라면 누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있다.

 

“형님 괜히 부러우니까 시비 거는 것 맞죠?”

 

그런가? 나도 잘 모르겠다. 사실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다 보니 너무 혼자 오래 있었나? 그냥 넘겨버릴 일도 두 귀를 곧추세워 들었으니 말이다. 아우 녀석 이야기대로라면 난 역시 속물일 수밖에 없다. 세상일을 그냥 보아 넘기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블로그를 너무 오래 한 것일까?

이게 무슨 말입니까? 선생님 덕분에 파출소 신세까지 졌다니. 아마도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지 않으면 오해의 소지도 있습니다. 하기에 끝까지 정독을 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40년이 훌쩍 지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보니 참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습니다. 세월이 언제 이리 되었는지....

 

제가 다니던 학교는 한 학년에 한 학급만 있는 특수음악 학교였습니다.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늘이 바로 ‘스승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참 잊지 못할 선생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하지만 3년 동안 담임을 맡으셨던 이 선생님은, 제게 잊을 수 없는 선생님이시기도 합니다.

 

 

검소가 몸에 배신 선생님

 

어릴 적 가끔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 속으로 꽤나 웃고는 했습니다. 선생님이 속옷을 기워 입는다는 말씀에. 하기야 1960년대 중반 누구나 속옷을 기워 입었을 때입니다. 당시야 모두 뻣뻣한 광목으로 된 속옷을 입었을 때니까요. 지금 사람들이 들으면 ‘설마’라고 하겠지만, 당시는 너나없이 광목으로 된 속옷을 입었습니다.

 

그렇게 오래 입다보면 앞쪽보다 먼저 뒤쪽이 떨어집니다. 실제로 많은 접촉을 하게 되는 뒤쪽이 닿아 구멍이 나는 것이죠. 그러면 뒤쪽을 갈아 반대로 입으신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설마’라며 배를 잡고 웃었지만, 능히 그럴 만도 하단 생각을 합니다. 워낙 검소함이 몸에 배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3년을 두고 보아도 양복 한 벌로 3년을 보내신 분입니다.

 

그렇다고 생활에 쪼들리지는 않으셨던 듯합니다. 성북동에 꽤 넓은 땅을 갖고 계시면서, 직접 농사를 짓기도 하셨으니까요. 그런 선생님 때문에 파출소 신세까지 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음만 나옵니다.

 

 

선생님 댁에서 생긴 일

 

당시 선생님 댁은 성북동이고 제가 사는 곳은 돈암동입니다. 멀지 않은 곳이죠. 한 마디로 동과 동이 그리 멀지 않게 접해있는 곳입니다. 여름 방학이 지나고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러 댁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왜 그랬는지. 선생님 댁을 찾아가면서 제가 사들고 간 것이 식빵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리 배부른 시절이 아니었으니, 식빵을 사들고 가 그것으로 점심을 대신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댁에서 빵을 찍어 먹으라고 내 놓으신 것은 꿀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당시 벌을 상당히 많이 치셨습니다. 집 뒤편이 산이기 때문에 그곳에 양봉의 벌통이 즐비하게 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꿀에 찍어먹는 식빵. 아마 그 당시는 그 무엇보다도 맛이 있는 잠심이었을 것입니다. 함께 동행을 한 친구녀석과 둘이 꿀 한통을 다 비웠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외출에서 돌아오신 사모님께서 울안에 가득 달린 포도송이를 몇 개 따시더니, 집에서 키운 것이니 맛이라도 보라는 것입니다. 그 맛 또한 일품이었죠.

 

 

속이 부글거리기 시작해

 

문제는 그때부터입니다. 속이 이상하게 부글거리더니 열이 실실 나기 시작합니다. 오래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아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게 먼 일입니까? 꿀과 포도가 뱃속에서 사단이 된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라 영 죽을 맛입니다. 그런데 그 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어이, 거기 학생들 이리와 봐”

“저요?”

“그래 너희들”

 

바로 선생님 댁을 내려오면 길가에 서 있는 파출소 앞에서 한 분이 불러대는 겁니다. 무슨 일인가해서 갔더니, 다짜고짜 파출소 안으로 밀어 넣는 겁니다. 당시는 학생이 대낮에 얼굴이 벌겋게 되었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 이러세요?”

“대낮에 학생녀석들이 술을 먹고 다녀”

“저희 슬 안 먹었는데요”

“그런 하~ 해봐”

 

이런 세상에 점심 때 먹은 포도와 꿀이 뱃속에서 발효가 되었는지. 술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포도주 냄새가요. 일단 엎드리라고 해서 엎드려 있다가, 도저히 안될 것 같아 일어났습니다. 다시 엎드리라면서 머리통을 쥐어박기에, 이야기나 들어보라고 하면서 사실대로 말을 했죠. 결국은 선생님 댁에 전화를 하고 풀려났지만. 참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옵니다.

 

벌써 45년이나 된 기억입니다. 포도하고 꿀을 함께 먹으면 그것이 발효가 되긴 하나요? 지금까지도 이해가 가질 않는 것 중 하나입니다. 날이 덥다고 하지만, 그렇게 발효가 몸 속에서 빨리 되는 것인지. 아무튼 스승의 날만 되면, 그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그립기도 하고요. 우리들에게는 선생님이기 이전에 아버님 같은 분이셨기도 합니다.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잊히지 않는 선생님에 대한 기억입니다.

어릴 적에 집에는 커다란 개가 몇 마리가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라도 나가면 마을 분들은 곧잘 '개아범'이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다. 진돗개, 불독, 포인타 등이다. 그런 녀석들을 집 안에 가득 키운다는 것이 나름대로 즐거움이기도 했는가 보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 많은 녀석들이 줄줄이 사고를 당해, 몇 녀석이 목숨을 잃었다. 딱이 특별한 사고가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녀석들에 대한 생각이 나서인가 나 스스로가 개를 집에서 키우지를 않았다. 후이 말티즈를 한 마리 키웠는데, 이 녀석은 종견이었다. 머리가 비상해 사람의 지능을 능가할 정도였다. '마루'리고 이름을 붙인 이녀석, 내가 정말 힘들 때 곁에서 즐거움을 주던 녀석이다.

처음으로 새끼를 낳은 깜순이 일가. 이 녀석들을 딴 집으로 보내고 다시는 녀석들에게 정을 주지 않기로 했다.

마루에 대한 기억, 애들을 볼 때마다 새롭다

정말 힘들고 괴로울 때 곁에 있던 마루. 이 녀석은 정말 많은 즐거움을 주던 녀석이다. 여주 아우네 집에 머물면서 일을 보러나가면 항상 곁에 두고 다니던 녀석이다. 이 녀석은 몇 시간을 차 안에 두고 일을 보아도, 한 번도 차 안에 실례를 한 적이 없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이우의 집에 두고 일을 보고 들어왔더니 말가 발을 절룩거리고 다닌다. 놀라서 무슨 일인가 하고 들여다보는데, 아우녀석이 한 마디 한다.



"마루 저 놈은 개가 아녀. 저 녀석 사람인지 알아"
"왜 애가 다리를 저냐?"
'아이들에게 함부로 하길래 혼을 냈더니, 형이오니까 맞았다고 다릴 절고 있네. 형 오기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녔는데"

그럴 정도로 머리가 비상한 녀석을 떠나보내고 난 후, 참 오랜시간 마음이 허전했다. 그리고는 다시는 이렇게 마음 아픈 일은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새끼를 잃고 식음을 전폐한 깜순이

속초애 있을 때 늘 블로그에 올리던 녀석이 있다. 유기견이었는데 절집으로 들어와 돌보기를 몇 달, 이녀석이 새끼를 나았다. 세 마리가 늘 어미와 함께 붙어다니다가, 새끼들을 다른 집으로 보냈다. 그런데 깜순이 녀석 며칠을 밥도 먹지를 않고, 새끼를 찾아 여기저기 찾아 돌아다닌다.  

그런 깜순이가 나에게는 정말 아픔이었다. 아무리 달래도 녀석 낑낑거리기만 하고, 도통 먹지를 않는다. 그런 녀석을 보고 있는 나도 마음이 아프다. 녀석의 눈이 흡사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 같다.

"너도 네 자식 남에게 줘봐라. 가슴이 미어지지"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엇이 다를까? 사람들은 자기 생각만 하다. 녀석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질 않는다. 그 녀석들도 생각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후 나는 녀석들에게 절대로 정을 주지 않는다. 또 다른 아픔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참 매정하다고 한다. 그러나 몇 번을 당해본 아픔. 그것을 알리 없는 사람들의 하는 말이지만, 오늘따라 녀석들이 그립다.답사길에서 만난 조그만 녀석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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