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인 ‘장곡사(長谷寺)’는,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에 소재한다. 사지에 의하면 장곡사는 통일신라시대 문성왕 12년인 850년에, 보조선사가 창건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 장곡사는 두 개의 대웅전을 갖고 있는 절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사찰이다.

 

7월 14일(일), 엄청나게 들이 붓는 장맛비 속에서 찾아간 장곡사. 경사진 산비탈에 여지저기 전각들이 서 있고, 산비탈에는 몇 백 년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들이 서 있다. 그런 나무들만 보아도 장곡사의 역사를 가늠할 수가 있다. 장곡사는 왜 두 개의 대웅전을 갖고 있을까?

 

 

왜 두 개의 대웅전을 갖고 있을까?

 

장곡사 경내로 들어서면 운학루와 보물 제181호인 조선조에 지었다는 하대웅전을 만날 수가 있다. 하대웅전의 전각 안에는 보물 제33호로 지정이 된 고려시대에 조성한 금동약사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하대웅전 뒤편으로 난 산으로 오르는 계단을 따라 오르면, 보물 제162호인 상대웅전을 만난다. 상대웅전의 전각 안에는 국보 제162호인 통일신라시대의 철조약사불좌상과 석조대좌, 그리고 보물 제174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석조대좌가 나란히 봉안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장곡사에는 대웅전이 두 개일까 하는 점이다. 구전이겠지만 2005년 장곡사를 찾았을 때, 그 이유를 들은 적이 있다.

 

‘장곡사의 대웅전은 원래 상대웅전이다. 그런데 상대웅전에 모셔놓은 철조약사불좌상이 하도 영험해 이곳에 와서 병이 낫기를 바라고 불공을 드리는 사람은 모두 완치가 되었다. 그 소문을 듣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와, 약사불 한 분을 아래쪽에 하대웅전을 짓고 모셔놓았다.’는 이야기를.

 

그래서인가 장곡사 하대웅전에도 석가모니불을 모시지 않고, 금동약사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이번에 장곡사를 답사하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워낙 많이 쏟아지는 장맛비로 인해 여정을 서두르는 바람에 미쳐 확인을 하지 못했다.

 

 

범종루에 있는 기물 두 가지

 

장곡사 경내에 들어서면 운학루 옆에 범종루가 자리하고 있다. 범종루는 종과 북, 운판과 목어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이 범종루에 있는 네 가지를 ‘불전사물’이라고 부른다. 이 범종각에 있는 불전사물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범종은 용뉴와 음통, 그리고 종 등으로 연결이 된다. 이 범종에서 걸 수 있도록 조성한 용뉴는 용왕의 아들인 ‘포뢰’를 상징하는 욤머리를 조각한다. 그리고 대개 몸통에 조각을 하는 보살상은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려는 목적이다. 즉 범종은 온 우주의 모든 생명을 깨우치는 대자대비의 소리라고 볼 수 있다.

 

불전사물은 처음에 법고를 먼저 치고 나서, 그 다음에 종을 친다. 그리고 목어와 운판의 순으로 진행을 한다. 법고는 대개 범종루의 대들보 등에 매달거나, 법고좌라는 북의 받침에 올려놓기도 한다. 법고는 온 사바세계에 부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법고는 소가죽 등을 이용하기 때문에 축생을 제도한다는 뜻이 강하다.

 

 

목어는 나무로 물고기 형상을 조각하여 그 속을 파내고, 채로 속의 안면을 두드려 소리를 낸다. 목어는 바다 속에 살고 있는 생명들을 제도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운판은 청동으로 만든 금속판을 두드려 소리를 낸다. 이 운판은 뭉게구름 모양으로 만들어 ‘운판(雲版)’이라고 했으며, 이는 대개 모든 것을 배불리 먹인다는 뜻을 함께 갖고 있다.

 

일설에는 중국 송나라 때 운판을 공양간에 매달아 놓고 대중들을 모이게 할 때 쳤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보면 운판은 모든 생명을 배불리 먹인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듯하다. 거기다가 공양간에 이 구름처럼 생긴 운판을 매달아 놓은 것은, 화재를 막기 위한 뜻도 있을 것이다. 구름이 비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장곡사 법고와 통나무 그릇

 

범종각 왼쪽에는 찢어진 큰 북 하나가 매달려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이 큰 북은, 오랜 옛날 장곡사에 있던 한 승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중생을 계도하는 뜻에서 코끼리 가죽으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북은 생김새가 지금의 북과는 다른 부정형으로 북통이 조형되어 있다. 앞 뒤편의 가죽은 모두 찢어졌으나, 북통은 그대로 보존을 하고 있다.

 

 

대북의 반대편 바닥에는 통나무 그릇 하나가 보인다. 이 통나무그릇은 오래전 장곡사 승려들이, 밥통 대신 사용하던 생활도구로 전해오고 있다는 것. 길이 7미터, 폭 1미터, 두께 10Cm인 이 통나무 그릇의 바닥 한 복판에는 물이 나갈 수 있는 배수구가 보인다. 도대체 장곡사에 얼마나 많은 승려들이 살았던 것일까?

 

장대비 속에서 만난 장곡사 범종각의 두 가지 기물. 대북과 통나무 그릇의 연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만 갖고도 과거 장곡사의 크기를 짐작할 수가 있다. 어찌 꼭 문화재로 지정이 된 것만 중요한 것일까? 이렇게 과거의 소중한 기물 하나가 주는 의미는 또 다른 깊은 뜻이 있는 것을.

전남 구례 화엄사, 하왐사상의 중심지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을 널리 알리던 절이다. 신라 후기에는 도선스님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다. 회엄사가 더욱 그 사세를 떨친 것은 고려 문종 때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화엄사에 매년 곡물을 바치도록 허락해 주었다고 하니, 당시 화엄사의 사세를 알 수가 있다. 이는 고려가 국교를 불교로 했고, 화엄사는 화엄사상의 중심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화엄사 일주문 밖에는 큰 창고를 짓고, 경상도와 잔라도에서 실어오는 곡물을 저장했다고 한다. 화엄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7년 만에 여러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 그 뒤로도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많은 전각들이 중창되었다.



각황전 한편에 자리한 사자탑

화엄사 각황전 앞에 난 계단을 오르면 우측에 탑이 서 있다. 보물 제300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이 탑은 <화엄사 사자탑>이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조성한 독특한 석탑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형태를 사찰에서는 '노주'라고 부르는데,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일설에는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기단은 이층으로 꾸며졌으며, 위층 기단을 네 마리의 사자가 머리에 받침돌을 이고 그 위에 비를 받치고 있다. 그 모습은 각황전 뒤 효대에 있는 국보 제35호인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을 모방했으니, 조각수법 등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조성시기도 사사자삼층석탑보다 뒤인 9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비의 형태로 만들어진 탑이 독특해

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은 2단이다. 아래층 기단은 문양이 없는 단순한 석재를 이용해 꾸며 놓았다. 소박하면서도 꾸밈이 없는 모습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로 넘어갈 당시의 석조물인 듯 하다. 이 탑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위층 기단의 각 모서리에 사자상을 놓은 모습이다. 사자들은 비스듬히 밖을 바라다보고 있으며, 그 표정이 각각 다르다.

네 마리의 사자들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연꽃이 조각된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아마 불교적인 형태를 강조하기 위한 조각품으로 보인다. 이런 조각을 보아 이 사자탑ㅁ이 사리탑이었을 것이란 조심스런 추정을 해본다. 네 마리의 사자가 몸돌의 받침돌을 이고 있는데, 탑신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몸돌이 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으며, 그 안에 신장상을 조각하였다. 몸돌 위에는 1장의 판돌이 있는데, 밑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반구형의 돌이 솟아 있다.



몸돌에는 네모나게 판 후 그 안에 신장상을 조각하였다.

무엇에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화엄사 사자탑. 아마 당시에는 소중한 절의 기물로 여겼을 것이란 생각이다. 수많은 불교 유물이 전하지만, 아직은 지식이 모두에 미치지 못함이 안타깝다. 사자탑을 돌아보면서도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지만, 짧기만한 지식을 어찌하랴. 해가 떨어지는 시간에 더 지체를 못하고, 아쉬움으로 뒤만 연신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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