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8일은 음력으로 5월 5일로 이 날을 ‘단오(端午)’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수리’라고 부르며, ‘천중절(天中節)’이라고도 부른다. 단오는 우리민족에게는 4대 명절의 하나로 친다. 즉 설날과 추석, 동지와 단오가 그것이다. 경기지방의 각 가정에서는 ‘단오다례’라고 하여, 아침 일찍음식을 장만하여 가묘에 제를 올린다.

 

이날은 남녀가 다 새 옷을 갈아입고 서로 모여서 하루를 즐기고는 했다. 요즈음이야 음력에 대한 개념이 바뀌고 사람들이 단오에 대해서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단오절의 의례가 다 사라져 버렸다. <동경세시기>에 보면 단오를 속명에 ‘술의일(戌衣日)’이라고 하여서, 술의는 곧 차(車), 수레를 뜻한다고 하였다.

 

 

단오날에는 쑥을 따다가 잘 찧어서 팥가루에 넣고 푸른빛이 나게 하여 수레바퀴 형상으로 만들어 먹음으로 수릿날이라고 한다고 했다. 단오를 천중절이라 함은 이 날 일 년 중에서 태양이 하늘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양기가 가장 왕성한 때이므로 천중절이라 불렀다.

 

단오절에 행하는 놀이

 

예부터 단오 날은 많은 행사가 있었다. 우선 단오 날에 사람들이 즐겨하던 놀이로는 창포에 머리를 감기와 그네타기, 그리고 씨름이 있다. 단오 날에는 밭에 나가 창포를 뿌리 채 뽑아다가, 그것을 삶아서 그 물에 머리를 감는다. 단오 날 창포에 머리를 감으면 머리에 윤기가 나고, 잘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창포의 뿌리로는 비녀를 만들어 그곳에 복(福)자나 수(壽)자를 쓰고 끝에 연지를 발라 머리에 꽂고 다녔다. 이를 ‘단오장(端午粧)’이라고 불렀다.

 

그네뛰기는 ‘추천’이라고 한다. 단오 날에 전국 각지에는 큰 느티나무에 그네를 매고, 그네뛰기를 즐겼다. 그네뛰기는 혼자 타면 외그네요, 둘이 타면 쌍그네가 된다. 고려사에 보면 고려 때는 이 그네뛰기가 전국적으로 매우 성행했음을 적고 있다. <천보유사>에는 한식에 궁중에서 추천 경기를 하니, 이를 ‘반선지희’라 부른다 하였다.

 

 

추천이 여자들의 놀이라면 씨름은 남자들의 놀이이다. 각저, 각희, 각력, 상박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씨름은, 고려 때부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나라의 씨름은 오른손으로 다리샅바를 잡고, 왼손으로는 허리샅바를 잡는다. 씨름의 기술에는 ‘손재간’, ‘다리재간’. ’허리재간‘ 등 세 가지로 크게 구분을 하는데, 단오 날 씨름에서 판막음(우승)을 한 사람에게는 황소가 한 마리 주어졌다.

 

이날 씨름판은 먼저 열 대여섯살 정도 먹은 아이들이 먼저 나와서 씨름을 하게 되는데, 이를 ‘아기씨름’이라고 한다. 그 다음에는 ‘총각마구리’리고 하여서 젊은 총각들이 나와서 재간을 겨룬 다음, 맨 끝에 ‘소걸이’라고 하여서 정말 꾼들이 나와 재간을 겨루게 된다. 이러한 단오 날에 볼 수 있는 많은 놀이들이 사라져버린 것은 못내 아쉽기만 하다.

 

단오부채와 천중부적(天中符籍)

 

예전 조선조 말까지만 해도 단오 날이 되면 공조에서 부채를 만들어 진상을 하였으니, 이를 재상과 모든 신하들에게 ‘단오부채’라 하여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 때 큰 부채는 50살이나 40살 정도의 살을 가진 큰 부채를 주었는데, 이것을 받은 사람들은 그 부채에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그리거나 도화, 산수, 부용, 백로 등을 그려 넣었다.

 

공조에서 뿐이 아니라 영남과 호남 등 각 고을에서도 부채를 만들어 궁에 진상을 하였다. 이렇게 지방에서 진상을 하는 부채 중에서도 전주 남평과 나주의 부채를 가장 으뜸을 쳤다. 부채의 종류도 다양하여 승두선, 어두선, 사두선, 반죽선, 내각선, 단목선, 합죽선, 신각선, 소각선, 죽절선, 태극선 등 다양한 종류의 부채가 있었다.

 

단오 날이 되면 각 가정에서는 불길한 것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주사로 벽사문을 지어서 문 위에 붙이는데 이것을 ‘천중부적’이라고 하였다. 이 단오 날 부치는 부적을 ‘단오부’리고도 했는데, 옛날 관상감에서는 해마다 단오일에 주사로 부적을 써서 궐내에 올렸다.

 

 

수원의 단오절 행사

 

지난 8일, 수원시 영통 단오어린이 공원에서 개최된 제9회 영통청명단오제가 3천 여 명의 주민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종료되었다. 매탄2동과 태장동 사물놀이의 흥겨운 가락이 단오제의 시작을 알리며, 수령이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아래서는 당산제가 열렸다. 당산제는 전통의 맥을 잇고 올 한해 주민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한 것이다.

 

당산제를 마친 다음에는 염태영 수원시장을 비롯하여 최희순 영통구청장 및 주민들이 당산나무에 막걸리 주기 의식도 베풀어졌다. 오래된 나무에 막걸리를 부어주는 것은, 나무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함이다.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에 소재한 임 아트갤러리에서는 단오 하루 전인 6월 7일부터 6월 23일까지 김승호, 홍영표 두 화가의 부채전이 열리고 있다. 이 부채전은 ‘합죽선 위에 핀 봄 향기’라는 부제로 열리고 있으며, 문인화와 수묵화를 부채에 담아준다고 하니, 단오 절기를 맞아 합죽선의 관람을 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11월 6일, 오후까지 일을 보고 잠시 광한루원에 들렸다. 걸어서 20여분, 카메라 하나를 걸머메고 천천히 걸어 광한루원까지 가는 길에, 은행잎이 떨어져 온통 세상이 노랗게 변해버렸다. 광한루원은 명승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이다. 광한루원이야 유명한 곳이고 수많은 소개가 된 곳이니, 구태여 여기서 또 다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광한루원 한편에는 ‘월매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 언제 적에 조성한 것인지는 몰라도 춘향전에 나오는 정경을 본 따 축조를 했을 것이다. 담벼락 한편에 은행나무가 서 있어. 초가 위에 노랗게 떨어진 은행잎이 아름답다. 월매의 집은 대문채와 안채, 그리고 춘향이와 이몽룡이 사랑을 나누었다는 별채인 부용당으로 꾸며져 있다.


전형적인 민가를 잘 나타내고 있어

물론 월매의 집이 문화재는 아니다. 그리고 예부터 있던 집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이 집을 돌아보면, 예전 민가의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월매의 집 앞에는 이런 안내판이 서 있다.


월매(月梅)집 - 조선시대 우리나라 고전 <춘향전>의 무대가 된 집이다.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광한루 구경 길에 올랐을 때, 그네를 타고 있던 성춘향에게 반하여 두 사람이 백년가약을 맺은 집으로 춘향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월매집이라고 하였다.

이 집은 돌담 위에 짚으로 이엉을 올렸으며, 대문은 네 칸이다. 안으로 들어서면서 우측 한 칸은 대문채인 하인의 방이고, 대문, 그리고 좌측 두 칸은 광으로 사용을 한다. 그 옆에는 한 칸으로 지은 측간이 자리한다.

그 측간위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어 노랑 은행잎이 떨어져 가을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누가 가을은 붉다고 하였는가? 이 노랑 은행잎이야말로 가을을 알리는 가장 멋진 색이 아닐까 한다.

다섯 칸으로 구성한 안채 훌륭하네.

월매의 집 안채는 대문채를 들어서면 정면으로 자리한다. - 자로 서 있는 안채는 모두 다섯 칸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집을 바라다보면서 좌측으로부터 부엌이 자리하고, 부엌 옆에는 두 칸의 안방이 있다. 그리고 한 칸의 마루방과 맨 우측에 한 칸의 건넌방이 있다. 건넌방 앞으로는 높임마루를 놓고 정자와 같이 난간을 둘렀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안방과 대청까지 연결하여 툇마루를 놓았다. 그리고 건넌방 뒤로는 문을 달아 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를 놓은 듯하다. 문마다 잠겨있어 안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정도 집이라면, 민초들의 집 치고는 상당히 좋은 집이라는 생각이다.

안채의 앞면이다. 가끔은 앞에 굴뚝을 놓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사진 좌측 부엌쪽에도 없다





이런 세상에 집을 돌아보니 굴뚝이 없네

옆에 서 있는 ‘부용당’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이 대문채와 안채만 갖고도 충분히 아름다운 초가의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집을 돌아보다가 그만 실소를 하고 만다. 그래도 명승에 마련한 집이고, 더욱 춘향전에 나오는 대목으로 꾸민 집이다. 그런데 대문채를 들어서면 대문채 방 앞에 <행랑채 - 방자가 식사하는 장면입니다>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방자가 왜 월매네 집의 행랑채에 묵고 있을까? 그것이야 이도령이 부용당에서 춘향이와 사랑 놀음에 빠져있으니, 이 대문채 행랑방에서 방자가 밥을 좀 먹기로서니 무엇이 문제이랴. 그런데 안채를 돌아보다가 정말 어이가 없는 경우를 본다.

뒤켠에도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연도도 없다. 만일 연도가 있다면 축대와 비슷하거나 조금 아래로 내려가 지나가는 것이 보여야만 한다



안채 부엌에는 향단이가 불을 때고 있는 모형이 보인다. 이 안채의 구성으로 보아서 적어도 굴뚝이 두 개가 있어야 한다. 안방에서 나오는 굴뚝과 건넌방에서 나오는 굴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연도도 없고 굴뚝도 없다. 이런 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고 만다. 불 때는 향단이가 아마 질식해서 죽을 것이라는.

측면에도 역시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이 집에는 두 개의 굴뚝이 서 있어야 한다. 안방에서 나오는 굴뚝과 건넌방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나오는 굴뚝. 그런데 굴뚝이 없다. 보일러를 옛날에도 썼는지?


명색이 명승 안에 마련한 집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런 곳 안에 마련한 집에 굴뚝이 없다니. 굴뚝 하나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 이런 경우를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그저 건성으로 대충 만들어 놓고 보여주는 전시행정. 참으로 멋진 월매네 집의 ‘옥에 티’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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