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0년도에 발행했던 글입니다.
문화재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기 위해 가끔 옛 기사들을 하나씩 재송고 하려고 합니다. 이점 유념해 주시고 오해 없으시기 비립니다. 

 

사람들은 절이 있는 곳은 잘 찾아가지만 사지를 찾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그런 사지를 찾아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소중한 문화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철안마을. 청룡사지 입구에 도착하면 주차장이 있고, 우측으로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청룡사가 있다. 이곳이 예전 청룡사가 자리 잡고 있었던 곳인가는 확실치가 않다. 청룡사는 고려 말 청계산 중턱에 작은 암자가 있던 것을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국사인 보각국사가 은거하였으므로, 태조가 큰 사찰을 세우도록 했다고 한다.

 


사찰은 간곳없고 문화재만 나란히

주차장에서 앞으로 난 개울가를 낀 길을 따라 들어가면 문화재들이 있는 청룡사지를 만나게 된다. 당시의 웅장했다고 전하는 청룡사는 사라지고 이곳에는 국보 제197호인 보각국사의 부도탑인 정혜원융탑과 보물 제656호인 석등, 그리고 보물 제658호인 정혜원융탑비 등이 남아 있다.

석등과 사리탑, 그리고 탑비가 나란히 서 있는 청룡사지. 국보 제197호인 청룡사보각국사 정혜원융탑은 보각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이다. 보각국사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 이성계가 왕명으로 탑을 짓게 하여, 권근이 비문을 짓고 탑명을 정혜원융이라고 하였다. 이 탑은 무너져 있던 것을 1968년 복원하였다고 한다.

 

청룡사지에 자리한 보물 제656호 사자석등과 보물 제658호 정혜원융탑비

 

흔히 장명등이라고 하는 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보물 제656호인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전사자석등’이란 긴 명칭을 갖고 있는 이 석등은 사리탑에 있는 보각국사의 사리를 지킨다는 뜻으로 조성이 된 듯하다. 석등은 조선시대 석등의 기본형인 평면정사각형으로, 아랫부분에 한 마리 사자가 힘찬 모습으로 조성이 되어있어 사자석등이라고 부른다.

보물 제658호인 정혜원융탑비는 보각국사를 기리기 위한 비로 고려 우왕 9년에 국사가 되어, 73세에 입적한 사실과 보각국사의 덕과 지혜를 기린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융탑 뒤편에 자리한 이 탑비는 윗부분의 장식물인 지붕돌인 개석이 없는 대신에, 비신 양 끝 부분의 모서리를 깍은 귀접이 양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국보 융탑의 조각 솜씨를 보고 숨이 멎다.

 

국보 제197호 청룡사지보각국사정혜원융탑. 크지 않은 그 탑을 보고 숨이 막힌다. 아래 기단을 부풀려 놓고 그 위에 몸돌을 올려놓았다. 지붕돌의 합각마루에는 용머리와 봉황이 장식되어 있다.

이 융탑의 몸돌은 항아리처럼 부풀려 있는데, 팔각의 몸돌을 이용해 많은 조각들을 해 놓았다. 모서리에는 기둥을 놓고 그 기둥마다 용이 기어오르고 있는 형상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사천왕을 새겨 넣어 이 탑이 특이함을 보인다. 사천왕의 모습은 힘이 있고, 금방이라도 돌을 박차고 튀어나올 듯한 기세다. 조선 초기 석조미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것도 이러한 조각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이 융탑은 몸돌 뒤편에 사리공이 있어 이곳에 사리 및 옥촛대, 금망아지, 금관 등이 있었다고 하나, 일제 때 도난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많은 문화재들을 수탈을 당했으면서도 아직도 수난이 거듭되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들. 언제나 온전하게 이 땅에서 지켜질 수가 있으려는지. 절로 한 숨이 나온다.

 

국보로 지정이 된 대웅전. 고려 충렬왕 34년인 1308년에 지은 전각이라고 한다. 우리는 국보나 보물이라고 하면 먼저 화려함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국보 제49호인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우리의 그런 편견을 깨고 있다. 어디에도 칠을 한 흔적이 없이 목재의 속내를 다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 재위 시에 창건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위덕왕은 44년 동안의 재위 기간 중에, 왕흥사라는 호국사찰을 지을 정도로 불교에 관한 많은 문화재를 남겼다. 부친인 성왕이 관산성(지금의 옥천) 전투에서 전사를 하자, 아들 창(위덕왕)은 승려가 되려고 하였으나, 즉위를 하여 왕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 때의 주심포 양식인 대웅전

 

하지만 덕숭산 수덕사는 백제 후기에 숭제법사가 처음으로 절을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선사가 중창을 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덕숭산 수덕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창건연대는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대웅전에 대한 기록은 1937년 수리공사 때 발견 된 묵서의 내용으로 인해 고려 충렬왕 34년에 건립된 것으로 밝혀져,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잘 다듬은 8단의 바른 돌쌓기로 쌓은 장대석 위에 올려 세웠다. 양편으로는 난간을 놓은 계단이 있으며, 건물은 고려 때의 양식인 주심포 양식이다. 정면 3, 측면 4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꾸민 대웅전은, 사각형의 자연석 주초를 이용했다. 기둥은 배흘림 기둥으로 조성했으며, 정면에는 빗살 삼분합문으로 꾸몄다.

 

 

단청을 하지 않은 고졸한 건축양식

 

국보라서 칠을 하지 않았나?”

아냐, 국보도 칠을 한 것이 있던데

그럼 왜 이렇게 그냥 놓아두었지? 이러면 오래가지 않을 텐데

 

대웅전을 구경하던 관광객들이 하는 말이다. 요즈음은 주말을 맞아 관광지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전문가가 아니라고 해도 점점 문화재에 관심이 높아진 듯하다. 수덕사 대웅전은 단청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고졸한 멋을 풍긴다.

 

9일 오전에 찾아간 수덕사 대웅전에는 수능을 볼 자녀들을 둔 부모님들이 찾아들어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괜히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기가 부담스럽다. 남들이 열심히 자녀를 위해 공을 들이고 있는데 방해라도 될까해서이다.

 

 

조성을 한 형태가 아름다운 수덕사 대웅전, 맞배지붕 안으로 보이는 장식적인 요소가 색다르다. 대웅전 뒤편으로 돌아가니 3칸 벽면에 모두 문을 내었는데 양편에는 문을 장식하고 가운데만 널문을 달았다. 외부로 나타난 목재는 그대로 나무의 재질이 들어나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백제계통의 목조건축 양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는 수덕사 대웅전. 건축 당시의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느껴지는 대웅전 안을 들여다본다.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에 아미타와 약사불을 협시불로 모셔놓았다.

 

대웅전 안에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세운 서원을 위해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데, 사진을 찍기가 죄스러워 카메라만 만지작거리다가 뒤돌아선다. 돌계단을 내려오면서 만난 신라 때 원효대사가 중수했다고 전해지는 삼층석탑에도 누군가 합장을 하고 열심히 탑돌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사람들은 단풍이 짙게 든 경내에서 여기저기 모여 사진촬영을 하기에 바쁜데, 천년세월을 그렇게 버텨 온 고졸한 멋을 풍기는 대웅전은 오늘도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에 소재한 용주사. 일 년이면 4~5차례 이곳을 들리고, 들리면 곡 돌아보는 것이 바로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동종이다. 용주사 동종은 신라의 종 양식을 보이는 종으로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졌다. 거대한 범종인 이 동종은 높이1.44m에 입지름 은 0.87m, 무게는 1.5톤이다.

 

용주사 경내를 들어가면 대웅보전의 계단을 올라 왼쪽에 범종각이 자리한다. 이 범존각은 1911년 무렵에는 보신각(普信閣)’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종의 윗부분에는 신라 종에서 보이는 용뉴와 용통이 있다. 용뉴는 용이 정상부의 보주를 물고, 발톱을 세워 종을 천판을 붙들고 있는 형태이다.

 

 

비천인들은 바로 날아오를 듯

 

용통은 연주문을 돌렸는데, 여섯 단으로 구분을 하고 당초문과 연꽃잎으로 장식을 하였다.종의 어깨 부분은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으며, 아래 위가 서로 어긋나게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꽃과 구슬문양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사방에 조상한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유두를 조형했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을 두었다. 사방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두었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인데,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상대의 경우 신라 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원권 아래위에 서로 교대로 배치하고, 그 사이 사이에 당초문양으로 장식을 하였다. 종 밑 입구에 돌린 하대에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어깨띠와는 다르게 연속 된 당초문양으로 장식을 하여 이 동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신라 때 조성했다고 후대에 새겨

 

종신의 비천상과 삼존불상의 사이에 추각한 명문에 의하면, 이 종을 신라 문성왕 16년인854년에 주조된 것이라 하는데, 이는 종의 형태가 고려양식이라는 점에서 일치하지 않는다. 종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황산(成皇山) 갈양사 범종 한 구 석() 반야(般若)25천근을 들여 조성하였다.금상(今上) 169월 일 사문 염거(廉居) 연기(緣起)

 

 

종에 새겨진 이 명문은 통일신라 문성왕 16(854)에 조성된 것이라고 후대에 새긴 글로 추정하고 있다. 국보 제120호인 이 용주사 동종은 용통에 약간 금이 가고 유두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1,100년이 넘는 세월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탑비 한기.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8에 소재한 국보 제8호인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사적 제307호인 성주사 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의 탑비이다. 신라시대인 890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비를 만난 것은 106일이다.

 

낭혜화상은 신라 무열왕의 8세손이다. 신라 애장왕 2년인 801년에 태어나,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헌덕왕 13년인 821년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인 845년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중요한 신라역사를 알 수 있는 탑비

 

무염이 이 이 절에서 선()을 널리 알리고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다. 그 뒤 이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던 무염이 진성여왕 2년인 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려주었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다. 비 몸돌에 새겨진 비문은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다.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인 890년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를 세운지 벌써 1,123년이나 되었다.

 

 

이 비에 적힌 기록을 보면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이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 자료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 비는 성주사 절터 서북쪽에 세워져 있는데,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 보수하였다.

 

다양한 문양과 힘 있게 조성한 탑비

 

6, 12일의 보령시로 답사를 떠나,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성주사지이다. 국보 1점과 보물 3, 그리고 지방문화재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 자리에서 이렇게 많은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그리고 성주사지에서 제일 먼저 만난 것이, 바로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 탑비이다.

 

 

벌써 몇 번째 찾아 본 낭혜화상 탑비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그만큼 문화재를 보는 안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탑비는 보호각 안에 자리하고 있는데,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다. 받침돌인 귀부는 머리의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다. 귀두 부분이 깨어진 부분이 있어 전체를 파악하기가 힘들지만,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통일신라시대 탑비의 백미

 

귀부의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인 문양을 새기고, 중앙에는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는데, 안상을 파고 그 안에 꽃을 새여 넣었다. 귀부 위에 올린 비몸은 앞면에는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린 머릿돌인 이수는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다. 이수에는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앞으로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문화재답사는 문화재와 함께 호흡을 하고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찾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내어 찾아가야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는 낭혜화상 탑비.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로 조성한 이 탑비는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백미로 꼽힌다. 모처럼 찾아가 만난 그 탑비 앞에서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는 동안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그동안 참 많이도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산재한 문화재를 담고는 있지만, 돌아보면 아직도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괜히 마음만 바쁘다.

 

수많은 문화재 중에는 갖가지 사연을 지닌 것들이 많다. 떄로는 해학적인 것도 있지만,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것들도 있다. 내용이 가슴저리기도 하고, 볼썽사납게 흉물로 보낸 현재의 모습이 안타깝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화재답사 힘들고 고통스럽다

 

4문화재를 찾아 길을 떠난다는 것, 그리고 문화재를 만났을 때의 행복함. 그런 것을  항상 느끼기게 발길을 멈추지 못하는가 보다. 정혜사지 석탑을 처음 만나는 순간, 그야말로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석탑이 있을 수 있나? 전국을 그렇게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석탑이 있었다니.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문화재 중에서 85%가 불교문화유물이다. 그것은 우리 역사 중에서 삼국시대를 비롯해, 고려조를 거치는 동안 불교가 흥성을 했기 때문이다. 천년 이상의 세월을 이 땅에 뿌리박은 불교이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문화유물을 창츨했기 때문이다. 행여 이 시대에 종교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또는 4대강 개발을 한다는 구실로 이러한 문화유산이 훼파가 된다면,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역사의 죄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보 제4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54번지에 소재한 국보 제40호 정혜사지 13층석탑. 이 탑을 본 순간 가장 먼저 생각이 든 것은, 도대체 이 탑을 조성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것은 정혜사지 13층석탑의 독특한 양식 때문이다.

 

 1층 몸돌에는 4방에 감실이 나있다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든 모습을 보인다

과연 이 석탑의 장인이 누구였을까?
 
 

정혜사지 13층석탑은 통일신라 석탑 가운데서 그 유형을 찾아볼 수가 없다. 흔히 이러한 석탑의 형태는 우리나라보다는 동남아쪽 탑사 비슷한 형태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가 이 탑을 볼 때마다 도대체 이 13층 석탑을 누가 조성하였을까 하는 의문점이다.

 

9세기 경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정혜사지 13층석탑. 전국을 돌면서 수많은 석탑을 보아왔지만 이런 형태의 석탑을 찾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이 정혜사지 13층 석탑을 볼 때마다 '누가 세웠을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언젠가는 누구에 의해 그 비밀이 밝혀지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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