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 산곡동에 소재한 전라북도 기념물 제9호인 교룡산성은, 참으로 슬픔이 많은 산성이다. ‘교룡산성’이라는 산성 명칭은 아마도 이 산성이 물이 많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룡산성에는 모두 9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5월 12일, 비가 뿌리는 날 찾아간 교룡산성은 이번 답사가 두 번째였다.

산성 입구에서부터 길이 미끄럽다. 돌계단을 따라 좌우로 길게 뻗어있는 산성은 그 높이가 5~8m 정도로 단단한 석축 쌓기를 하였다. 이곳은 해발 518m인 험준한 교룡산을 에워 쌓고 있는 산성이다. 산은 그리 높지가 않지만 밀덕봉과 복덕봉 등의 봉우리를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일부만 남아있는 성곽으로 추정하다

교룡산성은 백제시대에 처음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빗방울이 뿌리는 가운데 천천히 교룡산성을 오르기 시작한다. 산성 입구에는 양편으로 성이 쌓여있고 가운데 계곡부분에는 끊어져 있다. 아마도 예전에는 저곳에 수문을 두었을 것이다. 99개나 되는 우물이 있었다고 하면, 그만큼 수원이 풍부하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산성의 입구 좌우로는 산성이 남아있는데, 그 길이는 고작 200m 정도일 뿐이다. 원래 교룡산성의 전체길이는 3.1km 정도가 되는 제법 큰 성이었다. 아직도 군데군데 성곽이 남아있다고 한다. 성문으로 다가가니 반월형으로 조성한 성문이 나타난다. 안쪽으로 보니 문을 달아냈던 툴이 보인다. 그런데 한편 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외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외문을 달아냈던 흔적이나, 성문의 규모로 보아 아마도 암문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무지개 모양의 성문은 모두 장대석을 이용해 아치형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한 장의 장대석을 서로 맞물려 틀을 만들었다. 성문 안으로는 비석군이 서 있다.

옹성은 후에 쌓은 듯

성문 앞에는 옹성을 쌓아놓았다. 옹성이 있다는 것은 이 문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옹성은 임진왜란 당시 쌓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대장 처영이 성을 고쳐 쌓았다고 하는데, 그 때 이 옹성을 축성했으리란 생각이다. 남원은 임진왜란 때나 정유재란 때 일본군과 심하게 격전을 벌인 곳이다.

일본군이 남원성을 지나 한양으로 올라가려면 아무래도 이곳 교룡산성의 아군과 교전을 하여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남아있는 이 문이 가장 먼저 공격을 해야 할 곳이다. 하기에 비탈이 진 성이지만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 옹성을 쌓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작은 문이지만 견고함을 갖추고 있다.



교룡산성의 슬픈 역사

비에 젖은 돌계단을 따라 위로 오르니, 선국사가 보인다. 아마도 승병들은 이 절을 거점으로 활동을 했을 것이다. 선국사는 3.1 독립만세를 주도한 33인 중 한 명인 백용성 조사가 처음으로 출가를 한 곳이기도 하다. 그 곳을 지나 좀 더 오르니 대밭이 양편으로 늘어서 있다. 그 대밭 사이에 석비 하나가 보인다.

‘군기 터’라고 쓰여 있다. 선국사 뒤편에 이런 군기터가 있었다는 것이 승병들이 선국사를 거점으로 삼고 활동을 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교룡산성은 백제를 거쳐 조선조에 들어서 두 번의 일본과의 교전, 그리고 나중에는 동학군의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도 이 산성을 방어선으로 진을 치고 주둔하였다. 결국 교룡산성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산성이었다는 생각이다.




동학군의 지도자 김개남의 피에 젖은 역사

김개남(1853년 ~ 1894년)은 조선 말기의 전라북도 태인의 대접주이다. 전라북도에서는 전봉준 다음가는 동학의 실력자였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남원을 기반으로 삼고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일대에서 활동을 하였다. 녹두장군 전봉준과는 달리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전라북도의 실력자로 스스로 ‘개남국왕’이라 사칭했다는 설도 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군의 봉기 때, 김개남은 처음부터 김낙삼과 김문행 등 1,300여 명의 농민군과 이끌고, 백산에 모인 뒤 남원을 점거하여 전라도를 통할하였다. 같은 해 4월 에는 고부 백산에서 농민전쟁의 본부격인 호남창의소를 설치하였다. 전봉준을 동도대장으로 추대한 김개남은, 전봉준을 능가할 만큼 위세를 떨치며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해 갔다.

동학혁명군의 토벌 책임자인 홍계훈과 협상을 벌인 김개남은, 동학도를 박해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고 전주성을 관군에게 내주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간섭하게 되자, 다시 5 ~ 6만 명이나 되는 대병력을 이끌고 남원에서 전주까지 진격하였다.


10월 14일 남원에서 전주로 진격해 새로 부임하는 남원부사 이용헌을 처단하고, 자신이 그곳의 책임자가 되어 새로운 제도를 실시하는 등 남원에서 강력한 실력자가 되었다. 아마도 이때에 스스로 ‘개남국왕’이라 칭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김개남은 전주 수비군 5천명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패한 다음 야산에 은신하였다. 12월 27일 매부인 서영기의 집에 숨어 있다가 태인에서 체포된 김개남. 전라감사 이도재는 그를 전주에 압송한 뒤 남원부사 이용헌의 원수를 갚는다며, 서울로 이송하지 않고 가두었다가 1895년 1월 8일 전주 감영에서 처형하였다.

처형을 당한 김개남의 수급은 한성부로 이송, 1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3일간 효수된 뒤 다시 전주로 보내졌다. 농민군을 모아 막강한 실력자로 부상하였던 김개남. 그러나 불과 1년 만에 처형을 당하고 난 후, 서소문 밖에 목만 매달린 채 피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말았다. 교룡산성의 역사는 그렇게 피의 역사로 끝이 나고, 슬픈 역사를 알리 없는 5월의 비만 추적거리며 내리고 있다.


앞으로는 남원 시내를 가로지르는 요천이 흐르고, 뒤로는 금암봉이 솟아 있다. ‘금수정(錦水亭)’은 그렇게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요천을 바라보면서 금암봉을 오르는 중턱에 자리한 정자 금수정. 말 그대로 물 맑고 산세가 수려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지붕이다.

남원 광한루원에서 요천을 가로지르는 승사교를 건너면, 금암봉을 오르는 나무 계단이 끝나는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금수정이 있다. 금수정은 1936년에 이현순, 조광엽, 서봉선 등이 주축이 되어, 시를 읊고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세월이야 그렇게 물 흐르듯 70여 년이 훌쩍 지나버렸지만, 새롭게 단청을 한 정자는 갓 조성을 한 것처럼 보인다.



남원 요천 가에 서 있는 금수정과 정자 안에 걸린 퍈액

비안정은 사라지고 금수정이 자리 잡아

금암봉이란 이름은 요천의 물가에 커다란 반석에 붙인 이름이다. 족히 백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인데, 주변 경관이 빼어나 많은 사람들이 천렵을 즐기는 곳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용성 팔경 중에는 ‘금암어화(金岩漁火)’라고 하여, 밤에 고기를 잡는 불빛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것을 알려주고 있다.

비안정은 요천가 금암봉 아래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현재의 금수정 인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금암봉의 부근에는 비안정, 혹은 비오정이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이름이 정자 명칭에서 비롯한 것이란 생각이다. 옛 시구에는 이 비안정에 대한 글이 보인다.


금암봉을 오르는 나무계단과 정자 앞으로 흐르는 요천

사방 십리에는 저녁 안개 피어나고
소나무 대밭 속에 작은 정자 하나.
필마로 찾아오니 날은 이미 저물고
외로운 여정 속에 새벽에야 닿는구나.
오작교 가로질러 광한루에 당도하니
교룡산을 둘러싼 옛 산성이 보이네.
이곳에서 그대와 노년을 마칠까
늙어 요천가에 낚시나 드리우세.

광해군 1년에 공조참판을 지낸 현곡 조위한의 시이다. 조위한은 글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주생면 제천리에 도산정을 건립하였다. 이렇듯 요천가에 서 있었던 비안정은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기에 빠짐이 없었나 보다.



아름다운 조각과 단청

금수정은 민족정신이 깃든 정자

금수정이란 현판의 글씨는 1935년에 조정훈이 썼다. 조정훈은 남원 광한루의 ‘호남제일루’의 현판을 쓰기도 했다. 금수정을 지을 때는 일제의 우리문화 말살정책이 한창 펼쳐졌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리고 금암봉 정상에는 남원의 신사가 세워졌는데,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 이곳에 정자를 새웠다고도 전한다. 즉 이곳에 금수정을 짓고 신사참배를 하러 간다고 오르다가, 이곳에서 멈추었다는 것이다.

정자는 주심포계로 배흘림기둥을 놓았다. 연등 천정에 우물마루를 깔고, 난간을 밖으로 내어돌렸다. 당시의 정자치고는 상당히 화려하게 지은 건축물이다. 아마 신사보다 더 잘 짖겠다는 마음이 정자에 배어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정자에 올라 내려다보는 요천과 교룡산성, 그리고 광한루원은 예전과 다름이 없다.


금수정 현판과 벼랑 위에 선 금수정

가파른 절벽에 앞으로 기둥을 내어 정자를 내어지었다. 이 정자에 올라 시 한수 읊으며, 나라 잃은 슬픔을 가신 것은 아니었을까? 요천 물가에 한 다리를 들고 서있는 새 한 마리가, 무엇인가를 잡았나보다. 큰 날개를 퍼덕이며 멀리 날아간다. 그 새 등에 마음을 실어 따라갈 수만 있다면. 아마 그런 마음들이 금수정을 이곳에 지었나보다.


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419 교룡산성 동문 안으로 들어가 산길을 10여분 정도 오르면 선국사를 만나게 된다. 선국사는 통일신라 당시에 지어진 절로 알려져 있으며, 경내에는 전북 유형문화재 제114호인 대웅전이 서 있다. 이 대웅전은 교룡산성 안에 자리한 선국사의 중심 법당으로, 통일신라 신문왕 5년인 685년에 처음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 선국사가 개창한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순조 3년인 1803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선국사의 대웅전은 산성의 안에 비탈진 곳에 절을 마련했으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돌로 단을 쌓고 그 위에 대웅전을 앉혔으며, 지금은 한창 전각을 짓느라 부산한 모습이다.



퇴락한 단청에 숨은 화려함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이 대웅전은 돌로 낮은 기단을 쌓고, 주추는 넓적한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기둥은 위아래의 변화가 없는 기둥을 사용했으며, 지붕이 밖으로 많이 돌출이 되어 사면에 바깥기둥을 대었다. 대웅전의 단청은 다채로운 그림을 그려 넣어 화려함을 느끼게 한다. 색은 오래되고 퇴락했지만, 그 화려함을 숨기고 있는 듯하다.

선국사의 대웅전을 돌아보니 이상한 것이 하나가 있다. 작은 법당치고는 유난히 여기저기 용의 조각이 많다. 대웅전 앞이나 측면의 공포와 부연 등에서 용의 조각이 보이고 있다. 법당 안에 있는 닫집에도 끝에 용두가 조각되어 있으며, 대들보 끝에도 용이 있다. 대웅전에서 만날 수 있는 용만해도 10여 마리는 됨직하다.




대웅전 외부에서 보이는 용조각

임진왜란 때 승병이 주둔하던 곳

왜 이렇게 크지 않은 대웅전에 용의 형상이 많은 것일까? 대웅전 안에는 한편에 커다란 북이 매달려 있다. 이 북은 전북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또한 승병대장이 사용했다는 인장도 있다고 한다. 이곳이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주둔했던 곳이라고 한다.

이 북은 둘레가 269cm, 지름이 79cm, 길이는 102cm로 절에서 사용하는 법당용 북으로는 상당히 큰 편이다. 소나무 몸통에 쇠가죽을 씌워 만든 이 대북은, 그 제작시기가 조선조 말엽으로 추정한다. 이 대북은 언제 사용을 했던 것일까? 교룡산성 안에 있는 선국사가 승병의 주둔지라고 한다면, 아마 이 북도 그와 관련이 잇을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안에 걸린 민속자료 대북

선국사의 옛 이름은 용천사였다.

북과 인장은 그렇다 치고 도대체 이 선각사 대웅전에는 왜 특별히 용의 조각이 많이 나타나고 있을까? 선국사는 나라의 안녕을 비는 절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 전에는 어떤 이름을 썼을까? 바로 ‘용천사’였으며, 승려가 300여명이나 기거하던 대규모 절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국사에 용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의 산성명칭도 교룡산성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이곳이 특별히 용과 관련이 된 전설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용이 유난히 많은 선국사의 대웅전. 그 용들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본다. 대웅전 현판 옆에 있는 용은 입에 물고기를 물고 있다. 가끔 물가에 서 있는 정자 등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대웅전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용조각

사실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반야용선’으로 비유한다. 그래서 대웅전의 중앙에는 용머리를 항상 조각한다. 하지만 선국사처럼 중앙과 네 귀퉁이에 용을 조각하는 예는 그리 흔치 않다. 그리고 법당 안에도 용의 조각이 있다. 이는 교룡산성, 용천사 등과 이곳의 지세가 남다른 점으로 보아, 이곳에서 더 큰 대국의 꿈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다음번 이곳을 답사할 때는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겠다.

전북 기념물 제9호인 교룡산성. 남원시 산곡동 16-1에 소재한 이 산성은 해발 518m의 교룡산의 천연적인 지형지세를 이용하여, 돌로 쌓은 산성으로 그 둘레는 3,120m이다. 9월 18일 한 낮의 날씨는 아직도 무덥다. 남원으로 들어가 교룡산성을 오르는 길은, 그리 가파르지만 않지만 그래도 꽤나 시간이 걸리는 거리이다. 성은 보이지를 않는데 숨이 차고 땀은 비오 듯 흐른다.

산성 앞으로 가니 성 안에서 무슨 공사를 하는지, 성벽이 터진 곳으로 차들이 드나든다. 차를 왕래하게 하느라, 물길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공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저렇게 아름다운 물길을 막아 찻길을 내 놓은 것이 아쉽다. 교룡산성은 언제 축성이 되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성을 쌓은 방식이나 입지의 형태로 보아 백제 때의 성으로 보인다.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남아있어

현재는 산성의 동문인 홍예문과,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옹성이 남아있다. 그리고 동문의 양 편으로 길게 복원을 한 성곽이 보인다. 군데군데 아직 성벽이 남아있다는 교룡산성. 신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쌓았다는 이 산성은, 우리나라 성곽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남원은 『춘향전』의 무대인 광한루원과, 매월당 김시습의 단편소설인『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인 만복사지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만큼 역사 속에서 정치, 군사, 문화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교룡산성 안에는 우물 99개와 계곡이 있어, 산성 주변의 주민들이 유사시에 대피나 전투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좋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아직도 성 안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군기터 등 당시의 흔적이 보인다.




주변 성곽 중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해

남원에는 주변지역을 합해 20여 개의 산성이 있던 곳이다. 그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그 중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이 바로 교룡산성이다. 고려 말에는 이성계가 퇴각하는 왜구를 맞아 싸웠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는 승병장 처영이 성을 수축하였다고 한다. 성안에는 무기고를 비롯해 별장청, 장대, 염고, 산창 등의 시설이 있었다. 전쟁에 대비해 정유재란 시에는 남원도호부 관내인 운봉, 장수, 임실, 구례, 곡성, 담양, 옥과 등의 양곡을 거두어 교룡산성에 보관하였는데, 각 지역의 곡식을 저장하는 곡성창, 구례창 등의 곡식창고가 있었다.



홍예문 안에 줄지어 선 비(위) 홍예문 안에서 밖을 보면 옹성이 드러 쌓고 있다(가운데) 홍예문 위에서 본 옹성 

홍예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간다. 홍예문 아래편에는 문틀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움푹 파인 돌에는 물이 고여 있어, 흔적 없이 사라진 당시의 영화를 아쉬워한다. 높이 4.5m의 성벽은 단단하게 축성이 되었으며, 축성 당시에는 치첩 1,016개소에 달했다고 하니, 교룡산성의 축성이 대단했음을 알 수가 있다.

홍예문 안쪽으로는 줄지어선 공덕비 등이 보인다. 홍예문의 위로 올라서니 비탈길에 조성한 옹성이 단단해 보인다. 성문을 공격하려면 그 옹성 위에서 쏟아지는 불과 기름, 돌 등을 피하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을 것 같다. 동문 옆으로는 산 정상부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빠져나가고 있다. 아마 저곳에 수문이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교룡산성 안에는 물이 풍부했다는 것을 일 수 있다.



백제 때 축성한 교룡산성. 성곽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을 밟으며 걸어본다. 발아래 밟히는 풀들이 소리를 낸다. 백제 때에 처음으로 축성을 하여,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전쟁의 회오리를 거쳤을까? 아마 그 옛날 우리의 선조들도 이렇게 성곽을 밟으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느라 밤잠을 설치지는 않았을까? 성 안에 자리한 초옥에서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하다. 그렇게 9월 중순 땀을 흘리며 찾아간 교룡산성은,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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