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의 애한정은 정자 중에서도 그 의미나 경계가 남다른 곳이다. 괴강 삼거리 가까이 있는 애한정은 뒤로는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앞으로는 괴강이 흐르고 있다.

 

애한정은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의주까지 호위를 하여 그 공으로 별좌에 올랐다가, 광해군 때 낙향한 박지겸이 광해군 6년인 1614에 지은 정자 겸 아이들을 가르치던 학당이다. 원래의 애한정은 현재의 애한정 앞에 서 있다.

 

 

두 채가 나란히 서 있는 애한정

 

애한정으로 오르다가 보면 현 애한정 앞에 흙 담으로 둘러 친 정면 3칸, 측면 한 칸 반의집이 있다. 앞으로는 느티나무 보호수들이 둘러친 이 전각이 바로 박지겸이 처음에 지은 애한정이다. 이 구 애한정은 지금은 퇴락하여 여기저기 담에 흙이 떨어져 있다. 애한정을 바라보고 좌측 한 칸은 마루를 만들고, 우측 두 칸은 방을 드렸는데, 툇마루와 대청마루를 연결해 전체를 놓았다.

 


예전 처음으로 지었던 애한정. 주변 느티나무와 어우러져 빼어난 풍취를 자랑하고 있다.

 

위로 오르면 솟을대문이 있는 애한정이 보인다. 솟을대문 앞에는 처진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솟을대문과 어우러진다. 솟을대문은 양반가의 대문처럼 우측에 쪽문을 내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이면서도 하나의 독립된 가옥으로서의 구조를 하고 있는 애한정, 아마 학동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런 구조로 정자를 꾸민 것 같다. 솟을대문은 좌측에는 방을 드려 놓았다.  

 

이 새로운 애한정은 현종 15년인 1674년에, 박지겸의 손자인 박연준이 군수 황세구의 도움을 받아 새로 짓고, 그 후 숙종 38년인 1712년, 숙종 44년인 1718년, 영조 51년인 1775년에 중수를 하였다. 최근에는 1979년에 중수하였으며 정면 6칸, 측면 2칸 반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꾸몄다.

 


양반가의 집들처럼 솟을대문 우측에 쪽문을 내었다.

 

 
후일 새롭게 조성을 한 애한정. 정면 6칸으로 꾸며진 애한정은 뒤편 소나무 숲과 어우러져 있다.

 

팔각의 주춧돌을 사용한 정자

 

정자에는 애한정(愛閑亭)이라는 현판이 대청 우측으로 걸려있고, 안에는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박지겸이 지은 '애한정기'와 '애한정팔경시'등 많은 편액이 걸려 있다. 그 중 눈에 띠는 것은 현종 15년인 1674년에 우암 송시열이 지은 '애한정이창기'와 '제애한정기첩후'이다. 그리고 몇 개의 편액이 더 걸려있다.

 

정면 6칸으로 된 애한정은 정자를 바라보면서 좌측의 한 칸은 누정 형태로 높게 꾸몄다. 그리고 앞을 문양으로 내어 마감을 했으며, 방안으로 들어가면 다락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중앙에는 두 칸 대청이 있으며, 우측의 두 칸도 방으로 꾸몄다. 중앙 대청의 앞 창호는 모두 올려서 위로 걸어 놓을 수 있도록 하였다.

 


애한정의 대청에는 박지겸, 송시열 등이 쓴 글의 편액이 걸려있다.


누정과 같은 형태로 만든 끝방은 대청 옆방에서 위로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애한정의 특징은 주춧돌이다. 특이한 형태로 주춧돌을 만들어 놓았는데, 일석을 이용해 맡에는 사각형으로 조성하고, 그 위를 깎아내어 팔각형으로 만들었다. 양편 방 앞으로는 툇마루를 놓았는데, 대청과 연결을 하였다.

 


팔각으로 조형된 주축돌. 일석을 이용해 아래는 네모나게 다듬고, 위를 팔각으로 다듬었다.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애한정

 

애한정은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뒤편으로는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괴강이 흐르고 있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이 정자 앞으로는 다리를 놓기 위해, 몇 년째 교각 공사를 하고 있다. 정자의 뒤편으로 돌아가니 아직 체 녹지 않은 고드름이 처마 끝에 달려있다. 소나무 숲에서 나는 솔향이 싱그럽다.

 

애한정을 내려 괴강 쪽으로 걸어본다. 주변에 여러 가지 소중한 것들이 모여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다. 백의로 선조 어가를 모시고 그 어려운 길을 다녀 온 박지겸. 아마 그 마음이 닮아 저렇게 높이 하늘을 바라는 것은 아닌지. 괴강 위로 놓인 다리를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시끄럽다. 역사는 그렇게 주변 환경을 바꾸고, 사람들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 것인지. 바람 한 점이 몸을 감싸고 계곡으로 달아난다.

 

충북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 괴강이 흐르는 곳에 바위 암벽이 솟아오른 곳이 있다. 조선 시대의 경승지인 제월대에는 조선조 선조 때의 유근이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정자와 고산정사를 지었다. 선조 29년인 1596년에 만송정(萬松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광해군 때에는 이곳으로 낙향하여 은거를 하였다는 것.

숙종조에 편찬된 <괴산군읍지>에는 '孤山精舍 在君東八里 乙亥年 位火燒盡'이라고 적고 있다. 즉 '괴산군의 동쪽 8리에 있는 고산정사가 을해 년에 불로 인해 소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의 기록에 고산정사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점이나, 만송정이 불타 버렸다는 기록 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만송정을 '고산정(孤山亭)'이라 고쳐 부른 것으로 보인다.



괴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고산정

고산정을 찾아 길을 나섰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괴산IC를 벗어나 괴산읍을 향해 가다가 보면 제월리가 나온다. 그곳서 괴강을 굽어보고 있는 고산정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가 않다. 고산정을 오르는 산 길 앞에는 주차장이 있고, 그 한편에 제월대의 내력을 적은 석비가 서 있다. 눈이 덮인 산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눈이 쌓인 계단을 올라 괴산정 가까이 가니, 2월의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정자에 오르면 많은 현판들이 빼곡히 걸려있다. 정면 두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진 고산정은 사방을 개방하고 낮은 난간을 둘렀다. 기단위에 주추는 원형으로 다듬어 기둥을 받쳤는데, 툇돌 하나가 큼지막하게 놓여있다.



위에 오르니 이원이 썼다는 고산정이라는 현판과,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선조 39년인 1606년에 쓴 '湖山勝集'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강과 산이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뜻이다. 한편에는 명나라 사신 웅화가 광해군 1년인 1609년에 쓴 '고산정사기'도 보인다.

400년 역사의 고산정의 주인이 되어보다

고산정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밑을 흐르는 괴강이 아름답다. 봄철이 되면 저 물속을 다니며 올갱이를 잡는 아낙네들을 그려본다. 그 또한 아름다운 정경이 아닐까? 양편으로는 괴강이 보이고, 반대편으로는 참나무와 소나무들이 울창하다. 편액의 글씨를 보아도 이 고산정의 역사는 이미 400년이 지났다는 이야기다.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을 많은 사람들. 편액과 기문을 쓴 사신 주지번과 웅화도, 그리고 이 정자를 지은 유근도 모두 이 경계의 주인이다. 그리고 그 후에 이곳을 찾아 든 많은 시인묵객들도 모두 주인이다. 지금 이 자리에 선 나 역시, 오늘은 이곳의 주인이다.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어 좋다는 것은 인간 누구나가 느끼는 생각이 아닐는지. 오늘 난 고산정의 주인이 되어 말없이 흐르는 괴강을 내려다본다.

'이 곳의 참나무들이 참 이상해요'

한참을 괴강을 굽어보며 혼자 상상 속으로 빠져 절경을 느끼고 있는데, 답사에 동행을 한 아우 녀석이 흥을 깬다. 주변에 선 참나무들이 아상하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고산정 주변에 있는 참나무들이 모두 구멍이 뚫려있단 이야기다. 그 말에 주변의 참나무들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모든 나무들이 한 곳씩 깊게 파인 홈이 있다. 이것도 특별한 사유가 있지나 않을까?



아마 이 나무들이 여자들인가 보다. 이 제월대와 고산정의 뛰어난 경치에 반한 수많은 남정네들이 찾아왔으니, 그 남정네들을 사랑한 근동 여인들의 마음이 이리 되지나 않았을까? 괜한 말을 해놓고도 멋쩍어 키득거리고 웃는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괴강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낙엽 위에 쌓인 눈이 미끄럽다. 강 쪽으로 내려가 제월대를 바라보니, 위쪽 까마득하게 고산정이 보인다. 위에서 괴강을 내려다보아도 장관이요, 아래서 제월대를 바라보아도 장관이다. 그래서 이곳에 고산정을 짓고, 시심을 일깨운 것이 아닐까? 흰 눈이 쌓인 겨울 경치는 또 다른 정자의 풍취를 느끼게 만든다.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에 위치한 각연사의 주위로는 보배산, 칠보산 등이 둘러쌓고 있다. 각연사의 일주문에는 '보배산 각연사'라고 적혀있다. 신라 법흥왕 때인 515년에 유일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각연사는, 그 역사가 1500년이나 되는 고찰이다. 그만한 절이 이 곳 산중에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각연사는 어떤 모습일까?

괴강삼거리에서 올갱이 해장국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우고, 각연사로 행했다. 도로에서 각연사로 향해 마을길로 접어들자 좁은 도로가 이어진다. 눈은 치웠다고 하나, 여기저기 얼음이 얼어 미끄럽다, 거기다가 앞에서 차가 나오는 바람에 100여m를 후진을 해야만 했다.


절을 찾을 때도, 뒤로 할 때도 몇 번이고 후진을 해야 하는 길. 중간 중간 차가 비켜설 수 있도록 길을 내주면 좋으련만. 이 산중에 있는 고찰을 겨울에 가족들과 함께 찾는 사람들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자칫 초보운전이라도 되는 날은 그냥 울고 싶을 것이다.

까마귀와 연못에 얽힌 전설

각연사에는 전설이 전한다, 어느 절이나 그러하지만, 천년 넘는 고찰에는 그럴듯한 전설 한 가지는 전하기 마련이다. '각연사'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이러한 전설과 연결이 된다.


각연사 일주문과 경내에 있는 석물.좌대인 듯하다. 각연사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유일대사가 절을 짓고자 지금의 칠성면 쌍곡리에 있는 절골 근처에 자리를 잡고, 절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절을 짓고 있는 곳으로 까마귀 떼들이 날아들었다. 이 까마귀 떼는 절을 짓는 현장에 있는 나무토막과 대패 밥 등을 들고 어디론가 날아가고는 했다는 것이다. 유일대사는 기이한 까마귀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어느 날 까마귀 떼를 쫒아갔다. 그랬더니 현재 각연사의 자리에 연못이 있는데, 그 연못물 위에 나뭇가지와 대배 밥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유일대사가 연못 안을 들여다보니 석불이 있고, 그곳에서 광채가 일었다.

유일대사는 깨달음을 얻어 연못을 메우고, 그곳에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의 이름을 '각연(覺淵)'이라 하였단다. 지금 각연사의 비로전이 선 자리가 바로 그 연못이 있던 저리이고, 비로전 안에 모신 보물 제433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연못 속에 있던 석불이라는 것이다.」


대웅전과 돌계단. 장대석에서 각연사가 고찰임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신라 제23대 법흥왕은 재위기간이 514년~540년이다. 이 석조비로나자불 좌상이 신라말기의 작품이라면 년대 차이가 많이 난다. 하지만 전설이란 전해지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니 무슨 상관이랴. 이 비로전과 각연사라는 절의 명칭이 그런 연유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설화 삼아 알 수 있다면, 그 또한 귀가 솔깃한 이야기 거리가 되지 않을는지.

뛰어난 경계에 자리한 각연사

각연사를 들어가는 길은 4km나 된다. 좁은 길이 계곡을 끼고, 숲이 우거진 길을 올라간다. 말은 오른다고 하지만, 평지나 다름없다. 걸어서가도 30 ~ 40분이면 도착을 할 수 있는 거리이다. 봄철에는 주변 산을 아름답게 수놓는 봄꽃의 향에 취해 걸어볼 만한 길이다. 아니, 이 길은 걸어야 각연사를 제대로 느낄 수가 있을 듯하다.


보물 비로자나불을 모신 비로전과 비로전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덤벙주초


일주문을 지나 10여분을 걸어 경내로 들어선다. 중앙에 낮은 구릉을 뒤로하고 대웅전이 자리한다. 대웅전은 충북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정면 세 칸, 축면 두 칸의 다포식 맞배집이다.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 때 유일대사 혹은, 고려 초의 통일대사가 지었다고 전한다. 현재의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짜임새 있는 건물이다.

상량문에 의하면 그동안 각연사의 대웅전은 몇 차례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융경 년간(1567~1572), 순치 년간(1644~1661), 강희 년간(1662~1722)에 보수를 하였고, 영조 44년인 1768년에 중건을 하였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는 1979년에 보수를 하였다.

보물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비로전

각연사라는 명칭을 갖게 했다는 비로전. 전설에 의하면 이 비로전이 있는 곳이 연못이었다는 것이다. 비로전은 현재 충북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으로 지어진 이 비로전은, 인조 26년인 1648년, 효종 6년인 1655년, 광무 3년인 1899년, 그리고 1926년에 중수하였다.

초석은 신라 때 사용하던 자연석 위에 원형으로 깎아 도드라진 위로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이 비로전 안에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시고 있는데, 그 뛰어난 조각 솜씨에 압도당한다. 앞에가 서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듯하다.

각연사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두 가지 문화재인 보물 제1370호 각연사 통일대사 부도와, 보물 제1295호인 통일대사탑비를 보려고 했으나, 아직은 길이 녹지를 않아 다음으로 미루었다. 경내를 돌아보면 기단을 쌓은 장대석이나 주추 등이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적당히 자리를 잡은 전각들이 화려하지는 않으나,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꽃이 피는 봄에 다시 한 번 각연사를 찾아보리라 마음을 먹고, 보개산을 뒤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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