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벽당 일원 항공사진/ 광주북구청 제공

 

문화재청(청장 변영섭)은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위치한 광주 환벽당 일원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 제107호로 지정하였다고 고지를 했다. 환벽당은 사촌 김윤제(송강 정철과 서하당 김성원 등을 제자로 둠, 1501~1572)가 노년에 후학양성을 목적으로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흘러나온 아름다운 증암천 옆에 건립한, 남도지방의 전형적인 유실형 정자이다.

 

정자와 연못을 비롯하여 전후좌우로 송림과 죽림, 그리고 주변의 산들이 그림처럼 두르고 있어 환벽(環碧)’이란 뜻 그대로 모두 푸른빛으로 둘러싸여 청록색의 아름다운 경관을 형성하고 있어 자연경관 또한 빼어난 곳이다. 이런 고지를 만나면 즐거움이 두 배가 된다. 30년 간의 문화재 답사 때 들린 곳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흡사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온 듯하다.

 

 

또한 환벽당을 중심으로 당대 최고의 석학과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수려한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시문과 가사를 지은 조선시대 별서원림(別墅園林, 사방의 주변 경관을 조망할 수 있게 만든 정자와 정원)으로서 호남의 대표적인 누정문화(樓亭文化)를 보여주는 역사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번에 명승으로 지정한 구역은 기존 환벽당 정자와 연못,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1493~1583)과 사촌 김윤제가 처음 만난 곳이라는 전설이 깃든 조대와 용소, 송림이 아름다운 뒷동산을 포함함으로써 소쇄원(瀟灑園, 명승 제40), 식영정(息影亭, 명승 제57)과 더불어 옛 일동삼승(一洞三勝, 한 지역 안에 3개의 명승이 있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호남문학의 찬연한 꽃을 피운 광주 환벽당

 

충효동에 자리하고 있는 광주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호인 환벽당. 환벽당을 오르기 위해 숲길로 들어서면, 이 길이 무등산 역사 길의 정점이 된다. 가사문학관에서 자미탄 다리를 건너면, 왼편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만날 수 있다. 이 오솔길은 내를 옆에 두고 있어, 무더운 계절에 시원함을 느낄 수가 있는 곳이다.

 

환벽당의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정자 뒤편으로는 대밭이 들어서 있고, 축대 앞으로는 속이 빈 배롱나무가 서 있다. 예전에는 주변이 온통 대숲이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수백 년은 족히 살아왔을 성 싶은 노송 몇 그루가, 더위에 지친 나그네를 반긴다. 아마도 나주 목사를 지내고 향리로 돌아 온 사촌 김윤제가, 후일 길을 찾는 나그네들을 위한 배려는 아니었을까?

 

 

푸름을 사방에 두른 환벽당

 

아름다운 풍광, 그리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댓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환벽당은 풍광이 이름다운 곳이다. 환벽당 안에 걸려있는 임억령의 시가 환벽당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안개에다 구름 기운 겹쳐졌는데

거문고와 물소리 섞여 들리네

노을 사양길에 취객 태워 돌아가는지

모래가의 죽여 소리 울리고 있네

 

16세기인 조선조에 사화와 당쟁의 극한 상황 절의를 고집했거나,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배를 당한 인물들. 그들은 이곳 환벽당 주변으로 모여들어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모여들었던 환벽당

 

환벽당은 사촌 김윤재(1501 ~ 1572)와 더불어 송강 정철도 이곳에서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당대의 문인들이 환벽당을 중심으로 호남 문학을 꽃피운 것이다. 아마도 당대의 문인들이 이곳에 모여 술잔을 서로 기울이면서, 시문을 논하고 소리 한 자락에 목을 가다듬지 않았을까? 댓잎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 옛 정취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사촌 김윤제는 이곳에 환벽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송강 정철이나 서하당 김성원 같은 제자를 낳았으니, 가히 가사문학의 산실로도 환벽당은 손색이 없다.

 

짝 맞은 늘근 솔란 조대에 세워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대로 던져두니

홍료화 백빈주 어느 사이 지났는지

환벽당 용의 소히 배 앞에 닿았더라

 

 

정철의 시 한수를 읊어본다. 환벽당을 지은 김윤제는 이곳에서 정철을 만났다. 김윤제가 환벽당 누마루에서 낮잠을 자다가, 조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낮에 꾼 꿈치고는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에 조대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단정한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소년은 화순 동복에 있는 누이를 찾아가는 소년 정철이었다. 그렇게 김윤제와 정철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사촌 김윤제와의 인연으로 정철은 과거에 나아갈 때까지, 십여 년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정철은 환벽당에서 김윤제를 비롯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촌 양응정 같은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과 학자들을 스승으로 만난다.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운 송강 정철, 그런 연유로 가사문학을 대표하게 된다.

 

 

한적한 환벽당, 아직도 옛 풍취는 그대로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환벽당은 선비의 고고한 자태가 배어있다. 비탈진 곳에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정자는 정면에서 바라보면 우측 한 칸은 누마루를 두고, 좌측 두 칸은 방을 드렸다. 문은 모두 걷어 올려 천정에 매달 수 있게 하였다. 방 앞으로는 측면 반 칸을 앞마루를 깔아 마루와 연결이 된다.

 

앞으로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측면으로 흐르는 내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이곳에서 살았을 많은 문인들. 그들은 속을 비워냈을 것이다. 세상의 풍파에 휩싸이지 않은 방법은, 그렇게 속을 비우고 초야에 묻혀 시를 읊고 술 한 잔을 기울이는 일이 아니었을까? 속이 다 비어버린 배롱나무 한 그루가, 당시 이곳에 찾은 든 많은 문인들의 속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번에 환벽당이 명승으로 지정이 되었다는 고지를 보면서 왈칵 눈물이 난다지난 30년 동안 얼마나 많은 곳을 찾아 다녔는지. 누가 돈을 주면서 시킨 것도 아니지만, 미친 듯 돌아보았다고 해야 할까? 이렇게 지나친 곳을 다시 만나는 즐거움이 있어, 아마도 내 바람따라 걷는 행보는 계속될 것만 같다.

경기도 광주시에 소재한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가면, 동문을 지나 조금 위편 좌측으로 정자가 서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 정자를 ‘지수당’이라고 하며, 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지수당은 삼면이 연못으로 되어 있어, ㄷ 자형의 연못이 정자를 둘러쌓고 있는 형태이다.

 

이 지수당이 서 있는 연못 위쪽에는 또 하나의 연못이 있다. 중앙에 인공섬을 만들어 놓은 이 연못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또 하나의 연못이 더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있다. 이 지수당은 조선조 현종 13년인 1672년, 부윤 이세화가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물

 

남한산성은 지형이 서쪽이 높다. 그래서 성안의 모든 물은 동문인 좌익문 옆에 있는 수문으로 흘러 동쪽으로 흘러 내려간다. 광주에서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동쪽에 아름다운 계곡이 형성이 되어 있는 것도, 이렇게 동쪽으로 물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 지수당의 위편에 있는 연못에서 지수당 앞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도, 지수당이 서 있는 ㄷ 자형태의 연못이 서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수당의 연못은 땅을 깊이 파고 축대를 쌓아 조성을 하였다. 인공으로 연못을 만들고 그 한편에 정자를 지은 특이한 형태이다. 한 겨울에 찾는 정자의 모습은 어떠할까? 눈이 온 다음 날 찾아간 지수당 주변에는 눈이 쌓여있다. 연못의 물은 얼어붙었고, 정자 안 누마루에도 한편에 눈이 쌓여 있다.

 

 

지수당 동편입구 쪽에는 커다란 비가 서 있다. 부윤 이세화의 송덕비라고 한다. 정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놓았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남한산성이고, 정자가 평지에 자리하다보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다. 정자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정자 주변으로만 돌아보아도 지수당을 느끼기에는 어렵지가 않다.

 

눈 쌓인 지수당, 또 다른 멋이

 

지수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매몰이 되었던 것을, 근래에 고증을 통해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지수당은 그렇게 화려한 정자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남한산성 내에 상권이 형성되지 않고, 주변에 세 개의 연못이 더 있었다고 하면 그 모습은 사뭇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다.

 

 

정자는 연못의 한 면을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그 위에 낮은 기단을 놓고 정자를 세웠다. 정자 주변에는 낮은 난간을 두르고, 동, 남, 북쪽으로는 댓돌을 놓고 입구를 내었다. 주초석은 네모난 돌을 사용했으며, 사각형의 기둥을 세웠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집으로 마련을 한 지수당은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설 수가 있다.

 

멀리 떨어져 지수당을 바라본다. 아마도 주변이 이렇게 변하지 않았을 당시 지수당을 바라다보았다면, 그 누구라서 글 한 수 적지 않았을까? 그저 평범한 정자이긴 하지만, 당시를 돌이켜보면 꽤나 운치 있는 정자였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더구나 군영이 있는 산성 안에 이런 정자가 있었다면, 그 정자가 군사들에게 주는 감흥은 색다른 것이었지 않았을까?

 

 

부윤 이세화는 멋을 아시는 분이었을 것이다. 삼전도의 굴욕으로 남한산성의 치욕이 채 가시기도 전인, 30여년이 지난 후에 이런 정자를 지었다는 것도 의미가 깊다. 아마도 이런 지수당을 건립을 한 것도, 그런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혼자 이런저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면서 눈길을 걸어본다. ‘뽀드득’ 소리를 내며 밟히는 눈의 감촉이 좋다. 정자는 사시사철 색다른 맛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한 겨울에도 정자를 찾아 나서기도 하지만.

광주 북구 충효동 387에는, 광주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호인 환벽당이 자리하고 있다. 환벽당을 오르기 위해 숲길로 들어서면, 이 길이 무등산 역사 길의 정점이 된다. 가사문학관에서 자미탄 다리를 건너면, 왼편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만날 수 있다. 이 오솔길은 내를 옆에 두고 있어, 무더운 계절에 시원함을 느낄 수가 있는 곳이다.

환벽당의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정자 뒤편으로는 대밭이 들어서 있고, 축대 앞으로는 속이 빈 배롱나무가 서 있다. 예전에는 주변이 온통 대숲이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수백 년은 족히 살아왔을 성 싶은 노송 몇 그루가, 더위에 지친 나그네를 반긴다. 아마도 나주 목사를 지내고 향리로 돌아 온 사촌 김윤제가, 후일 길을 찾는 나그네들을 위한 배려는 아니었을까?


푸름을 사방에 두른 환벽당

아름다운 풍광, 그리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댓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환벽당은 풍광이 이름다운 곳이다. 환벽당 안에 걸려있는 임억령의 시가 환벽당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안개에다 구름 기운 겹쳐졌는데
거문고와 물소리 섞여 들리네
노을 사양길에 취객 태워 돌아가는지
모래가의 죽여 소리 울리고 있네

16세기인 조선조에 사화와 당쟁의 극한 상황 절의를 고집했거나,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배를 당한 인물들. 그들은 이곳 환벽당 주변으로 모여들어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모여들었던 환벽당

환벽당은 사촌 김윤재(1501 ~ 1572)와 더불어 송강 정철도 이곳에서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당대의 문인들이 환벽당을 중심으로 호남 문학을 꽃피운 것이다. 아마도 당대의 문인들이 이곳에 모여 술잔을 서로 기울이면서, 시문을 논하고 소리 한 자락에 목을 가다듬지 않았을까? 댓잎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 옛 정취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사촌 김윤제는 이곳에 환벽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송강 정철이나 서하당 김성원 같은 제자를 낳았으니, 가히 가사문학의 산실로도 환벽당은 손색이 없다.



짝 맞은 늘근 솔란 조대에 세워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대로 던져두니
홍료화 백빈주 어느 사이 지났는지
환벽당 용의 소히 배 앞에 닿았더라

정철의 시 한수를 읊어본다. 환벽당을 지은 김윤제는 이곳에서 정철을 만났다. 김윤제가 환벽당 누마루에서 낮잠을 자다가, 조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낮에 꾼 꿈치고는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에 조대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단정한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소년은 화순 동복에 있는 누이를 찾아가는 소년 정철이었다. 그렇게 김윤제와 정철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사촌 김윤제와의 인연으로 정철은 과거에 나아갈 때까지, 십여 년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정철은 환벽당에서 김윤제를 비롯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촌 양응정 같은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과 학자들을 스승으로 만난다.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운 송강 정철, 그런 연유로 가사문학을 대표하게 된다.

한적한 환벽당, 아직도 옛 풍취는 그대로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환벽당은 선비의 고고한 자태가 배어있다. 비탈진 곳에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정자는 정면에서 바라보면 우측 한 칸은 누마루를 두고, 좌측 두 칸은 방을 드렸다. 문은 모두 걷어 올려 천정에 매달 수 있게 하였다. 방 앞으로는 측면 반 칸을 앞마루를 깔아 마루와 연결이 된다.



앞으로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측면으로 흐르는 내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이곳에서 살았을 많은 문인들. 그들은 속을 비워냈을 것이다. 세상의 풍파에 휩싸이지 않은 방법은, 그렇게 속을 비우고 초야에 묻혀 시를 읊고 술 한 잔을 기울이는 일이 아니었을까? 속이 다 비어버린 배롱나무 한 그루가, 당시 이곳에 찾은 든 많은 문인들의 속을 보여주는 듯하다.

벌써 한참이나 지난 6월 18일 찾아간 환벽당. 그곳에는 김윤제도 정철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정취만은 그대로 환벽당에 남아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었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