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 위기를 초래한 정당공천 폐지공약을 외면하지방선거 때마다 우려먹는 자치구의회 폐지논쟁을 강력히 규탄하며 중앙정치권은 이와 같은 헌정질서 파괴행위를 즉시 중지하라!

 

작년 1028일 심대평 지방자치발전위원장은 기자단과의 간담회를 통해 부산시 등 6대 광역시의 자치구의회를 폐지하는 방안을 피력하며 자치구의회 폐지 논란을 다시 지피운데 이어 지난 15일 새누리당 당헌·당규 개정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한구 의원은 지방자치 제도개선안을 거론하며 다시금 자치구의회폐지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다.

 

대도시 자치구의회 폐지 논란은 비단 작금의 문제가 아니었다. 2010지방선거와 201219대 총선 직전에도 논란의 불씨를 키워 마치 방의원 길들이기 혹은 정당공천 폐지 입막음용 협박 카드로 사용하듯 써먹어온 것이다.

 

이 같은 논란에 대해 국회 입법조사처에서 2010자치구의회 폐지관한 헌법상 쟁점이란 보고서를 통해 지방자치법상의 자치구를 존치하면서 구의회만 폐지하는 입법은 현행 법 제118조 제1에 위배될 수 있음을 밝힌바 있다.

 

지방자치시대 개막 이후 열악한 재정 여건 하에서도 방자치단들은 경쟁적으로 지역경제 활성화 노력에 최선을 기울이며 행정서비스 향상은 물론 환개선을 통하여 주민의 삶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하여 왔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지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중앙정치권에서는 지방선거에서의 하향식 당공천으로 금권공천 등 정치부패물론 방정치를 앙정치에 확실히 예속시킴으로서 지방자치의 기능과 역할을 제한시켜왔다.

 

위와 같이 우리나라 지방자치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은 대부분 잘못된 지방자치제도에 기인하고 있다. 기초지방선거에 대한 정당공천제도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각계각층의 전문가를 비롯하여 국민 대부분공천제도의 폐지를 찬성하고 있으나 유독 입법부인 국회의원들만이 폐지반대에 목숨을 거는 구차한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국민여론을 의식하여 지난 18대 대선 당시 여야를 비롯한 주요후보 세 명 전원이 서로 앞 다투어 정당공천 폐지를 당선공약으로 내세웠으며 20121120일 전국의 지방의원 3천여 명이 참석한 종문회관에서는 서면약속은 물론 구두 연설에서도 아주 강력하게 공천폐지를 약속하고 우뢰와 같은 환영과 감사의 박수를 받은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정당공천폐지 공약이행은 안중에도 없고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그동안 지방의 발전을 통하여 국가발전의 원동력되어 왔으며 대의 민주주의의 표본이 되어온 자치구 및 자치구의회를 폐지하겠다는 협박은 뿌리 민주주의의 지방자치 이념 훼손은 물론 지방자치제도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발상이며 민주주의의 크나큰 퇴보이자 손상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아울러 주민들의 참정권을 축소시키는 행위로 이는 민주주의 원리에반하며 대도시의 주민들은 다른 도의 주민들과 달리 기초지방의원에 대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 할 수 없게 됨으로서 평등권 침해와 동시에 주민의 기본권을 제한한다는 측면에서 이는 위헌적 행위임이 분명하며 풀뿌리 민주주의 말살 정책의 표본이 될 것이며 다시 구시대의 중앙집권적 행태로의 회귀를 뜻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이제 겨우 돋아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싹을 무참히 짓밟으면서까지 중앙정치인들의 욕심만 채우겠다는 이 같은 움직임은 세계흐름에 역행하는 일부 정치세권력독점욕의 산물이라고 규정하며 자치구의회 폐지 등 풀뿌리 민주주의에 반하는 움직임에 대하여 즉시 중단 할 것을 온 국민의 이름으로 엄중히 경고한다.

 

우리는 나라의 격변기 속에서 30년간 중단되었던 지방자치를 풀뿌리 의를 염원하는 온 국민의 여망으로 우여곡절 끝에 재출범 발전시켜왔다. 이제 와서 다시 지방자치를 포기하는 우를 범해서는 절대 안 될 것이기초지방선거에서 만큼은 하향식 정당공천제를 즉시 폐지하여 지방정치는 지역주민들에게 맡기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진정한 지방분권을 통한 지방자치 실현에 중앙정치권이 적극 앞장서 줄 것을 다음과 같이 강력히 촉구한다.

 

첫째, 정치부패의 온상이며 지방자치의 위기를 몰고 온 정당공천제를 즉시 폐지하라

둘째, 풀뿌리 민주주의 말살정책인 자치구의회 폐지 논의를 즉각 중단하라

셋째, 국회정치개혁특위는 즉시 기초지방선거 정당공천폐지 결정으로 6.4 지방선거에 임해 줄 것을 요구하며 또 시 국민들의 기대에 반하는 결과에 대하여는 시민사단체와 연계 투쟁 등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20141월 9일 전국시군자치구의회의장협의회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에 소재한 월정사. 오대산 월정사에는 국보 제48호 고려시대의 석탑인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과 보물 제139호인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을 만날 수 있다. 현재 석조보살좌상은 원작을 모사한 보살좌상으로 대체하였다. 구층석탑과 보살좌상은 고려시대에 조성이 되었으며, 월정사는 자장율사 창건한 사찰이다. 탑과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많은 불교문화재들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불교조형물 중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된다. 월정사의 구층석탑 역시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팔각의 귀퉁이마다 달린 풍경, 그대로 장엄

 

국보인 팔각 구층석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 위에, 9층의 탑신을 올린 뒤, 머리장식인 상륜부를 얹어 마무리를 한 모습이다. 기단의 중석에는 안상을 새겨 놓았고, 아래와 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팔각의 갑석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주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다.

 

이 석탑의 1층 탑신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의 모형은 고려 석탑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층 몸돌 4면에는 작은 규모의 불상을 모셔두는 감실을 마련했으며, 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받침을 두지 않고 간략하게 마무리하였다. 이는 목조건물의 모습을 본따서 조형을 한 것이다.

 

 

 

화려한 고려탑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추녀가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으며, 바람이라도 불면 풍경소리가 은은하여 절 경내에 가득하다고 한다. 이 팔각 구층석탑은 지붕돌 위의 머리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고려 초기에 조형한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려불교문화의 특징을 보이는 공양보살좌상

 

석탑 앞으로는 공양을 올리고 있는 보살좌상을 두었다. 이는 강릉 신복사지 석탑과 같은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보물 제13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보살좌상은 팔각 구층석탑을 향해서 정중하게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다리를 세워 탑에 대해 공양하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높이는 1.8m의 정도이며 밑에 받침돌을 두고 있다.

 

석탑을 향해서 공양을 올리는 이 석조보살상은 ‘약왕보살’이나 ‘문수보살’이라고 하지만, 있지만 어쨌든 머리에는 높다란 관보을 쓰고 있으며 갸름하면서도 복스러운 얼굴에는 만면에 미소가 어려 있다. 보살상의 머리칼은 옆으로 길게 늘어져 어깨를 덮고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이 되었다.

 

 

목걸이는 매우 섬세하고 곱게 조각하여 가슴에까지 늘어지게 장식을 하였는데, 보살이 입고 있는 옷은 얇고 가벼워 몸에 밀착되어 있고 옷주름은 모두 희미하다. 원형의 보살좌상은 동자상을 받침으로 고이고 있으며, 오른쪽 팔꿈치를 동자상의 머리에 올려놓아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모사품에는 동자상이 보이지 않는다.

 

당대 불교미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는 월정사 구층석탑과 보살좌상. 5월 6일 찾아간 월정사에서 만난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비천도(飛天圖). 손목에 묶은 ‘표대’(혹은 복대라고도 한다)를 바람에 날리며, 그 표대로 하늘을 날면서 바람의 방향과 이동하는 방향을 알 수 있게 만든다. 생명에 없는 차디 찬 돌에 새겨진 비천도로 인해, 돌이 생명을 얻는다. 아마 비천인들은 그린 많은 화공이나 조각을 하는 장인들은, 그들 스스로가 하늘을 날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천도는 범종에 많이 장식되지만, 법당의 천정이나 석등, 부도, 불단, 또는 전각의 외부 단청 등에도 나타난다. 비천은 ‘불국(佛國)’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춘다. 때로는 두 손에 공양물을 받쳐 들기도 하고, 꽃을 뿌려 부처님을 공양을 찬탄한다.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며 허공에 떠 있는 비천상은, 도교 설화 속의 선녀를 연상케 한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에 새겨진 비천도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 온 비천상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인 허균의 글에 따르면(2005, 1, 14 불교신문) 2000여 년 전 불교가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전래될 때 비천도도 그 뒤를 따랐다. 불교의 중국 전래의 통로였던 돈황 막고굴 벽에 그려진 비천은, 인도신화의 건달바나 긴나라의 괴이한 모습이 아닌 도교의 여신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상반신은 배꼽을 드러낸 나체이고, 하반신은 비단처럼 부드러운 속옷 차림이다. 표정 또한 요염하고, 손동작은 유연하고 섬세하다.

이렇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변신한 비천상이, 4세기 말경 우리나라의 삼국 시대에 불교와 함께 전해졌다. 불교미술에 수용이 된 비천상은 약간의 양식적 변천을 거치며 한국적 비천상으로 정착됐다고 한다. 이후 한국 불교의 모든 곳에서는 비천상이 불교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를 잡으면서 나름대로 변화를 한 것으로 보인다.

화성 용주사 보물 범종에 새진잰 비천인

비천상은 나름대로 중요한 우리 미술의 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으며, 어느 절을 찾아가도 비천도는 쉽게 접할 수 있는 불화 중의 하나다. 이 비천도가 요즈음에는 현대적인 것과 우리 전통예술과 접목이 되면서 나날이 변화를 하고 있다. 요즈음에 그려지는 비천도는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이 되고 있다.

동종에 새겨진 비천도를 보고 반해

아름다운 천인을 그려내는 비천도는 불교미술에서는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야 미술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니, 어디 이렇다 저렇다 할 자격이야 있겠는가? 그저 보고 느낀 바를 적는 것이다. 내가 비천도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상원사 동종 등 사인비구가 제작한 보물 제11호 동종에 나타나는 비천도를 보고나서 부터이다.

작가 김선옥의 그림 비천인(2007년 작)

그 다음 절마다 찾아다니며 비천도를 유심히 보고 사진에 담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인가 절집에 들리면 먼저 벽화며 탱화에 그려진 비천도를 찾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버렸다. 그것은 비천도를 잘 알아서가 아니라,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새 나 자신이 천인이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음악을 전공한 나로서는 부처님을 찬양하는 천인상이라는 비천도가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가 요즈음 현실적으로 많이 발전한 비천도를 보면, 비파를 타거나 횡적을 불거나 아니면 춤을 추는 비천도도 있다. 심지어는 무당춤을 추는 비천도까지 그려질 정도니, 나날이 변화를 해가는 천인상인 비천도는 이제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장르로 발전을 하는 것인 아닌지 모르겠다.


비천도를 보며 마음은 불국토를 향해

비천도 그 자체만 보면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저 표대를 바람에 날리며 때로는 앉아있기도 하고, 때로는 날아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그 비천상이 주는 느낌은 볼 때마다 달라진다. 어느 때는 그 비천상을 바라보며 함께 하늘을 날기도 하고, 어느 때는 비천인과 함께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런 비천상을 만날 때마다 달라지는 기분은, 스스로의 마음이다. 비천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당시의 느낌이 바로 나란 생각이다. 불교의 교리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그저 전각에 들어서면 절로 머리를 조아리고 참례를 한다. 그리고 비천상을 물끄러미 쳐다보기가 일쑤이다. 하늘을 날고 있는 그 비천인의 모습에서, 굳이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한다.

불국토가 따로 있겠는가? 그 비천상을 따르는 마음 하나가 불국토가 아닐는지. 오늘도 마음 한 자락 허공에 띄워 비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 세속의 답답함을 훌훌 떨쳐내고, 어디론가 가을바람에 실려 떠나가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려니.(위 사진은 고기와에 그려진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인/ 김선옥 작 2007년)

문경 봉암사. 일 년에 단 하루 ‘부처님오신 날’을 제외하고는 산문이 굳게 닫혀 열리지 않는 곳.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는 유일한 절이기도 하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9년 지증도헌 국사가 창건하였다. 당시 심층거사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지증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의 지세를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이 날개를 쳐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흐르니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며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이곳이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라고 절을 지었다.


절의 창건을 마친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개산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러번 소실과 중건을 반복 한 봉암사는 1982년 6월 조계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였다. 1982년 7월 문경군에서는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고, 희양산 봉암사 지역을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절집 안 땅을 밟기도 송구스럽다

아침 일찍 출발을 하여 문경으로 향했다. 문경 봉암사 입구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 30분경. 들어가는 입구부터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안거 중인 스님들께 ‘스님짜장’보시를 하러 왔으니 어찌하랴. 닫힌 산문이 열렸다. 버스로 구불거리는 길을 들어간다.

경내로 들어가니 절 입구에는 통행금지 푯말이 여기저기 붙어있다. 100여명이 넘는 스님들이 안거 중인데도 소리하나 없이 조용하다. 마당을 둘러본다. 조그만 풀 한 포기 없이 말끔하다. 세속에 묻힌 때를 갖고 이곳 땅을 밟기조차 송구스럽다.



버스에서 짐을 내려 공양간으로 옮겨 놓고 절 경내를 돌아본다.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놓여진 널찍한 돌들. 그저 앉으면 자리가 된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맑다 못해 푸르다. 한 여름의 더위를 식혀주기 위한 물소리가 암반 위를 흐르면서 경쾌한 소리를 낸다. 길가에 놓인 이끼가 가득한 돌. 그대로 자연이다.

돌아다니기조차 죄스럽다. 정말 조심스럽게 절 경내를 돌아본다. 어디 하나 군더더기가 없다. 깨끗하기가 이를 데 없다. 아마도 선원에 계신 스님들의 수행으로 인해서 인가보다. 봉암사 안에는 몇 점의 문화재가 있다.




봉암사 삼층석탑, 지증대사 적조탑, 지증대사 적조탑비와 극락전이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사진 한 장을 찍으면서도 죄스럽다. 오늘따라 셔텨 소리가 유난히 크게만 들린다. 금색전 쪽으로 지나다가 보니 입구 한편에 기와조각, 돌들이 모여져 있다. 돌 하나도 허투루 놓아두지 않는 곳이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나오다가 피식 웃고 만다. 이 빈틈없는 봉암사 경내에서 돌절구 하나가 마당에 쓰러져 있다. 그 모습이 정감이 간다. 아마도 마음에 한 점 여유를 느끼고 싶으셨을까? 나중에 안 일이지만 비가 오면 물이 고여 썩으니, 일부러 쓰러트려 놓았다는 것이다. 수행자와 속인의 느낌의 차이인지. 봉사도 정해진 시간 안에 산문을 나가야 된다는 봉암사. 3시간의 짧은 머무름 속에서 그래도 볼 것은 다 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깊숙한 곳은 발도 들여 보지 못했는데.



이끼가 가득 낀 바위가 길가에 놓여있다. 바위 하나도 자연이 되기싶은 곳이다. 전각 입구에 놓여있는 돌들. 돌맹이 하나도 돌아다니지 않는 경내이다. 돌절구 하나가 쓰러져 있다. 봉암사에서 본 마음의 한자락 여유이다.  




봉암사의 전각들. 많은 전각들이 있지만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맨 아래 극락전은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는 봉암사 삼층석탑과 보물 지증대사 적조탑과 탑비를 모셔놓은 전각(문화재에 대한 글을 다시 쓰도록 하겠습니다. 하나 하나)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