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나 무속에서는 윤달이 되면 여러 가지 행사를 한다. 절에서는 윤달이 들면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생전예수재를 열고, 무속에서는 윤달에 삼사순례를 한다., 삼사순례란 말 그대로 하루에 절 세 곳을 돌아오는 일이다. 절 세 곳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염원하는 바를 서원하는 것이다.

 

9일 오전 7.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에 소재한 고려암 신도들이 버스에 올랐다. 45명 정원인 버스는 빈자리가 하나도 없다. 지동을 오전 730분경에 출발해 서산 간월암과 예산 수덕사를 거쳐, 다시 서산 상왕산 개심사를 돌아오는 여정이다. 하루에 세 곳의 절을 돌아본다는 것은 사실 쉽지가 않은 여정이다.

 

 

웬 사람이 이렇게 많아?

 

서산 간월암에 도착한 시간이 9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그런데 간월암부터 사람들이 많다. 무슨 일일까? 1113()이 수능일이다. 그래서 절마다 사람들이 휴일을 맞아 찾아들어 서원을 하고 있다고 한다, 넓지 않은 간월암 대웅전에 사람들로 만원이다. 연신 나가고 또 들어오고. 아마도 윤달과 수능일이 겹치다보니 이렇게 사람들을 끌어드리는 것은 아닌지.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에 소재한 간월암. 물이 만조가 되면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는 이 작은 암자는,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도를 닦던 중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서 간월암이라는 암자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무학스님은 20세 때 이곳에 들어와 토굴을 짓고 열심히 수도를 하다가 달을 보고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무학이라는 법호도 나옹스님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하여 법호를 무학(無學)이라고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불타는 수덕사, 이렇게 아름다웠었나?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에 소재하는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554 ~ 397) 때에 지명법사가 사비성 북부에 수덕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불교의 5대 총림의 한 곳인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 때 지명법사가 창건을 하고, 고려 공민왕 때 중수를 하였다. 그리고 조선조 고종 2년인 1865년 만공스님이 중창을 하였다. 전설에는 세 번을 지은 것으로 전하고, 실제로 수덕사는 창건 이후 두 번을 중창을 해 세 번째 모습을 갖추었다.

 

수덕사 입구부터 사람들이 길을 빼곡하게 채웠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걷는 길이 온통 단풍으로 물들었다. 3 자녀를 둔 부모들부터 올 단풍의 절정을 맛보려는 관광객들까지 그야말로 북새통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왔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북적인다. 사진을 어디서 찍어야 사람들을 피할 수가 없다.

 

 

문화재 사진촬영을 하고나서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다. 그야말로 수덕사에 불이 붙었다. 그동안 수십 차례나 찾아 온 수덕사다. 그런데 이렇게 단풍이 아름다운 절인 것을 알지 못했다. 문화재 하나를 사계절 다 찾아보아야 한다고 늘 생각을 했지만, 이 계절에 수덕사를 찾은 것은 처음이다. 형형색색의 단풍에 그저 입을 다물지 못한다.

 

상왕산 개심사 여긴 또 왜 이래?

 

가을이면 상왕산 개심가로 가라고 했단다. 그동안 가을이면 빠트리지 않고 찾아왔던 서산 개심사. 그런데 예전의 그 화려했던 단풍이 아니다.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11-5에 소재한 개심사는, 아직도 백제 때의 기단이 남아있는 절이다. 개심사를 찾아가는 길을 굳이 가을을 고집했던 것은, 가을이 참 아름다운 절이기 때문이다.

 

 

개심사 명부전 앞 텃밭 가운데 있는 감나무 한 그루. 잎은 다 떨어지고 감만 주렁주렁 달려있다. 스님들이 이 감을 마다하고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것일까? 그 감을 바라다보다가 산신각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곳에서 진정한 가을을 만난다. 붉은 단풍이 아닌 색이 바란 나뭇잎들이 떨어져 만든 가을. 개심사는 그렇게 조용히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저 사람도 손잡고 가는데 우리도 손잡고 가요.”

 

일행 중 부부가 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부부끼리 모두 손을 잡고 걷고 있다. 그럼 난 누구 손을 잡아? 괜히 퉁명스런 말 한마디 한다. “여자들 많이 있네요. 아무나 골라잡아요.”라는 대답에 갑자기 옆구리가 시리다. “그럴까라는 대답으로 말을 막는다. 하지만 이 가을에 불붙는 단풍을 보고도 쓸쓸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 옆구리는 왜 이리 시린 것이고.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 우리는 흔히 사람이 죽으면 저승을 간다.’라는 표현을 한다. 그 저승이란 곳이 어디일까? 상여소리의 사설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저승일세.”라는 대목이다. 저승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대목이다. 우리 소리가 갖는 극단적인 여유요, 어찌 보면 표현의 잔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죽으면 천도 의식이라고 하는 지노귀(진오기)굿을 한다. 전문적인 무격(巫覡-무는 여자무당, 격은 남자무당을 말한다)에게 굿을 일임하여, 망자의 넋을 위로하고자 함이다. 사람이 죽어서 49제 안에 하는 굿을 진진오기라 하고, 49일이 지난 다음에 굿을 하면 묵은 진오기라고 한다.

 

 

일본에서까지 찾아 온 경기도 굿판

 

823().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에 소재한 고려암. 고려암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대문 앞에는 경기 안택굿 보존회라는 현판이 걸린 것으로 보아, 전문적인 무격이 전안(신령을 모셔 놓은 신당)을 모셔놓은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집은 4대 째 경기도 전통 안택굿을 이어오고 있는, 남무 고성주의 집이다.

 

고성주(, 58)18세에 내림을 받은 강신무이다. 어려서부터 춤과 소리를 배운 탓에, 내로라하는 굿 잘하는 무격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이날 진오기굿을 의뢰한 사람들은 남양주시에 사는 여흥 민씨의 자손들이다. 돌아가신 조상님들의 천도굿을 뒤늦게 하는 묵은 진오기 굿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날 굿판에는 굿을 하는 무격과 악사, 그리고 집안에서 일을 보는 사람들 외에, 멀리 일본에서 이 굿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 동경에서 찾아 온 Efubun-no-ichi-inc 의 디렉터인 Ayumu Yasuhara(安原 步)이다. 사전 답사를 나왔다고 하면서 굿을 하는 것을 유심히 보면서 질문을 하고, 일일이 카메라에 담기에 바쁘다.

 

이른 아침부터 준비한 상차림

 

고성주의 전안은 상당히 넓다. 아마 우리나라의 무격들의 전안 중에서는, 가장 넓고 깨끗하다고 악사들이 말을 한다. 악사들은 굿판을 전문적으로 다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많은 무격의 집을 방문하기 때문에 많은 무격들의 전안을 보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부터 전을 부치고 과일을 씻어서 쌓고, 각종 떡을 진설한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다 마친 것이 오전 930분경.

 

 

이날 굿판에는 주무 고성주를 비롯해, 여무(女巫)인 서정숙(67), 임영복(59), 홍형순(40)과 악사 김상건(, 61) 등이 굿을 진행했다. 굿은 고성주의 앉은부정으로 시작해 임영복의 산거리, 서정숙의 불사거리, 고성주의 대안주와 이어서 서정숙과 임영복의 조상, 군웅 등을 마친 후 진오기굿인 바리공주의 차례로 진행이 되었다.

 

굿판은 열린 축제이며, 지켜가야 할 문화유산

 

우리는 흔히 굿판을 일러 열린 축제라고 표현을 한다. 굿판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다 함께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안택굿을 여는 집이 있으면,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참여를 한다. 진오기굿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생전에 고인과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해서, 고인의 극락왕생을 함께 기원하는 것이다.

 

 

그런 우리의 축제인 굿이 언제부터인가, 깊은 산중으로 숨어들었다. 종교적인 심한 박해와 주변의 반대로 인해서, 전문적인 굿을 하는 굿당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다행히 고성주는 자신의 단골들의 굿은 언제나 자신의 전안에서 행한다. 그만큼 자신의 단골들에게 당당히 행한다. 이날 굿도 마찬가지였다.

 

오전에 시작한 굿은 오후 6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준비를 한 시간부터 따지면 11시간 정도가 소요가 된 셈이다. 굿의 끝판에 천기를 벗긴다.’고 하여, 제가 집 부부를 앉혀놓고 그 위에 오색천을 덮고 악귀를 쫒는 의식으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이때쯤이면 모두가 지쳐간다. 더구나 날이 무더워 평소보다 더 많은 고생들을 했다.

 

 

 

미신(迷信)’ ‘혹세무민(惑世誣民) 이라는 일제와 유교적 배타와 함께, ’우상숭배(偶像崇拜)‘라는 이종교의 배척 등으로 제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우리의 열린 축제인 굿. 그나마 근근이 맥을 이어가고 있는 경기도의 전통적인 굿 한 마당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외국에서도 눈여겨보기 시작한 경기도의 굿이, 정작 지역에서는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제는 겨우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경기도의 전통굿이 제대로 전승, 보전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려암 고성주 백미 100만원 상당 희사

 

6월 12일(화) 오후 2시 팔달구 지동 271-124 고려암에서는 고성주와 박찬복지동장, 그리고 신도회장 최병석 등이 참가해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백미 전달식을 가졌다. 이 행사는 매년 2~3차례 지역의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쌀 등으로 도움을 주는, 고성주(남, 56세)의 이웃돕기 일환으로 열렸다.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에 신도들이 부처님께 바친 공양미를 재포장해서 불우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준비를 했습니다. 매년 두 세 차례씩 한 번에 5가마 정도의 백미를 제공합니다. 저희는 신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라 수양자들이 정성을 들인 쌀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면, 그 복을 골고루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이죠.”

 

 다섯가마 분량의 백미전달식. 좌로부터 최병석 신도회장, 박찬복 지동장, 고성주


사비를 들여 경노잔치도 열어

 

고성주는 남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무당이다. 스스로는 자신을 ‘만신’이라고 표현을 한다. 늘 수양부리들을 위해 정성을 드려 그런가, 이 집 신도들치고 잘못된 사람은 없다고 한다. “자신들이 떠나서 잘못되고 나면, 한 10년 지나 또 찾아옵니다. 하지만 신의 세계에서 영적인 부모자식을 맺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죠. 그렇게 잘못 되어서 찾아올 때, 그것이 가장 슬픈 일입니다”

 

자식들이 잘되게 하는 길은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어야 된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늘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천성으로 알고 있다.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준비한 음식 하나라도 먹여 보내야 직성이 풀린다. 늘 끊임없이 찾아드는 손님들에게 정성을 다한다. “어차피 자식들이 갖다 준 물질입니다. 더 많이 베풀어야 그 덕을 자식들이 보는 것이죠.”

 

그래서 30여년 이라는 시간은 사비를 들여 집에서 경노잔치를 해왔다. 한 번에 2~300명이라는 많은 인원을 감당해낸다. 그런 날은 온통 집안에 어르신들이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음식만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도 들려주고 춤도 춘다. 그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제자들이라고 한다.

 

쌀을 모두 재포장하였다. 재포장된 쌀임을 알리는 표시를 한다. 재포장을 하는데만도 10만원의 비용이 들어갔다고 한다 


처음으로 맡은 지동, 새로운 마을을 만들 터

 

지동은 1912년 당시에는 수원군 남부면 지동이었다가, 19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하면서 태장면 지리라고 하였다. 1949년에는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되면서 수원시 지동으로 되었다. 1972년 수원시의 동을 통폐합할 때 지동과 우만동을 합하여 행정동명을 지만동이라 하였다.

 

1988년 수원시의 구제 실시로 장안구에 편성되고, 1990년 1월 1일, 시 조례 제1607호로 지만동을 지동과 우만동으로 분동하였다. 1993년 수원시 팔달구의 설치로 인해, 팔달구 지동으로 되었다. 지동은 수원에서도 낙후된 마을 중 한 곳이다. 더구나 이곳은 화성과 접해있어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개발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우리 지동은 큰 연못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고유어로는 '못골'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쓰이고 있으며, 약 7,500세대에 인구 20,000명 정도입니다. 저는 그동안 30년 정도의 공직생활을 보건소 쪽에서 해왔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지동 동장의 소임을 맡아, 어제는 저녁 8시까지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지동을 둘러보았습니다.”

 

직접 쌀을 수령하러 온 팔달구 지동 박찬복(여, 57세) 동장은 앞으로 지동을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겠다고 한다.

 

“비록 우리 지동이 낙후되고 노인층이 많다고는 하지만, 정말 깊은 정들이 있는 분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남을 위해 도울 일을 찾는 분들이 저희 지동에는 상당히 많죠. 오늘도 두 곳에서 경노잔치를 했는데 부녀회원들이 직접 반찬을 만들어 어르신들께 대접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가족들이 먹는 음식처럼 준비를 해 온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지동은 지동시장을 비롯하여 못골시장, 미나리광시장 등 재래시장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래서 장을 가깝게 두고 있어 어느 곳보다도 상권을 접하기가 쉽기 때문에, 그것만 해도 지동의 자랑꺼리가 된다는 것.

 

 

“일전에 지동 살인사건으로 인해 주민들이 많이 마음 아파하고들 있습니다. 지동은 방값이 싸기 때문에 저소득층 사람들과 외국인들이 많이 세를 들어와 살고 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방이 나가지 않아 어려움을 당하는 집들이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언론에서 하도 심하게 다루어놓으니, 지동 전체가 다 그런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동처럼 정이 깊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없는 듯합니다.”

 

골목길의 벽마다 그림을 그려 놓은 지동. 사람냄새 나는 ‘골목길 축제’는 또 하나의 명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앞으로 좋은 마을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지동의 골목길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합니다. 지동처럼 골목이 많은 곳도 흔치 않습니다. 이제는 주민들 스스로가 참여를 해서 보수를 하기도 합니다. 올해도 유순희 작가와 삼성전자, 그리고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그림 그리는 작업을 계속할 것입니다. 삼성전자에서는 3,000만원 정도 지원도 해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사람이 살기 좋은 지동, 정이 묻어나는 지동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박찬복 동장은 “올 연말에도 부탁드립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추석 때 또 한 번 도와드릴게요.”라고 대답을 하는 고성주. 그래서 지동은 살기 좋은 마을인가 보다.

요즈음 불교계가 시끄럽다. 하긴 어떤 종교라고 시끄럽지 않은 것들은 없다. 그곳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고 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어제(28일)가 불기 2556년 ‘부처님 오신 날’이다. 그 분은 이 땅에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주시기 위해 스스로 영화를 버리고 수행을 하셨다.

 

난 수행자가 아니기 때문에 불교의 깊은 가르침은 알지 못한다. 다만 그저 요즈음은 나름 열심히 살기 위해 노력을 할 뿐이다. 예전 같으면 열을 펄펄 내고 생 나리를 쳤을 세속의 시끄러움도, 요즈음은 그저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아마도 나이가 먹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어른들 틈에서 배운 마늘을 가는 것을 겨들고 있는 세 살배기 꼬마 여자아이 고아라


 

‘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말의 진리

 

부처님은 중생들에게 아이와 같이 살라고 하셨단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의 초심을 잃지 말라는 뜻인 듯하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에 있는 ‘고려암’을 찾아갔다. 아침 일찍 가까운 절집을 찾아갔다가 들려본 곳이다. 등을 달고 난 많은 사람들이 쌀에 촛불을 켜고 축원을 한다. 절집과는 또 다른 초파일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복잡한 와중에 한 꼬마 아이가 눈길을 끈다. 어른들이 매운 마늘을 까고 있는데, 그 틈에 끼어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이제 겨우 뒤뚱거리며 걸음을 걷는 세 살짜리 여자아이이다. 웬만한 아이들 같으면 맵다고 울음이라도 울 것 같은데, 꿋꿋하게 곁을 지키고 있다. 그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소재 고려암의 전안에도 많은 등이 걸려있다. 아레는 쌀을 담은 그릇에 촛불을 켜 축원을 한다. 불교와는 또 다른 축원의 형태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만 자지러지는 줄 알았다. 전안(무당들이 신령님들을 모신 곳을 전안이라고 부른다)에 들어간 이 꼬마 아이. 이른들 틈바구니에서 신나게 따라서 절을 한다. 그 전에도 이 아이가 인사를 하는 것을 한참이나 웃었다. 어른들만 보면 합장을 하고 인사를 하기 때문이다.

 

아이 때의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

 

이 꼬마 여자아이 때문에 전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어찌나 천연덕스럽게 절을 따라 하는지, 그 모습이 너무 귀엽기 때문이다. 엉덩이를 하늘로 추켜올리고 절을 하는 모습에, 세상 사람들이 정말로 아이와 같은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세 살배기 여자아이 고아라가 어른들을 따라 절을 하고 있다


저 세 살배기 어린이가 무엇을 알 것인가? 그저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는 것이다. 난 그 모습에서 공부를 한다. 아이들을 키울 때 가정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비록 세 살배기 어린 꼬마가 하는 짓이 귀엽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웃음을 자아내게 하지만 그 안에는 큰 공부가 숨어있는 것이다.

 

아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아이들이 성장을 하면서 그대로 어른들의 흉내를 낸다는 것이다. 아이들 앞에서 불화가 잦은 부모님들을 보고, 아이들은 결국 싸움 밖에는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에 세 살배기 꼬마 아이(여, 고아라)에게서 배운 부처님의 지혜. 역시 어른의 스승은 아이라는 말이 맞는 말인 듯하다.

 

“경기안택굿은 예술적인 면과, 신성적인 면이 잘 조화를 이루는 굿입니다. 우리 굿은 연희와 신성이 한편으로 치우치는 경우가 많은데, 경기안택굿의 경우에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갖고 있는 곳이죠.”

 

5월 9일, 오전 9시 30분.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번지에 소재한 경기안택굿을 보존하기 위해 보존회를 운영하고 있는 고성주 회장의 전안(신령들을 모셔 놓은 곳)에는, 경기대 사학과 2, 3학년 학생 30여명이 윤한택 교수의 인솔로 찾아왔다.

 

문화재를 현장에 나가 직접 보고 배우는 학생들이다. 학생들은 우리 굿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들은 후에, 제석굿의 시범까지 보는 시간을 가졌다. 2시간 동안 진지하게 경기안택굿에 대해 공부를 마친 학생들. 일부는 강의시간에 맞추어 현장을 떠나고, 일부는 남아 점심대접까지 받았다.

 

‘우리 굿 처음 접했습니다. 절로 흥이 나네요.’

 

“오늘 여러분에게 제석굿을 보여드리는 것은, 제석이 자손들의 수명장수를 위하는 신격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곳에 오신 여러분들이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모든 일이 잘 되라고 수명장수와 부귀공명을 위해 축원을 하겠습니다.”

 

 

 

30여분 동안 제석굿을 하였다. 학생들은 박수로 화답을 했다. 자신들을 위해 보존회원들(장고 이정숙, 피리 박노갑)까지 모여 굿판을 열어준 보답이었다.

 

굿을 마치고 난 뒤 보존회 고성주 회장의 살아 온 이야기를 듣는 학생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점심을 먹기 전 잠시 밖으로 나온 사학과 3학년 이아무개군에게 물어보았다.

 

 

“그동안 굿을 본 적이 있으세요?”

“오늘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굿은 미신이라는 말을 들어와서인가, 그런 것을 접한다는 것이 왠지 내키지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보시고 나서는 어떤 것 같으세요?”

“오늘 보니 정말 우리민족의 정서에 맞는 듯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냥 복을 달라는 것이 아니고, 복을 준다는 것이 색다른 것 같아요”

“오늘 처음으로 굿의 한 부분을 보시고 난 뒤 느낌은?”

“앞으로 우리 것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제석굿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잘못 된 교육이 불러온 우리것에 대한 무지

 

우리는 그동안 굿이라는 것에 대해 너무 무지한 교육을 시켜왔던 사실이다. 일제의 잔재로 ‘미신’이라고 치부를 하였는가 하면, ‘우상숭배’라는 말로 도외시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기록을 볼 때 우리나라의 무속인(巫俗人)들은 고려 때는 각 고을에서 병의 치료를 담당했는가 하면, 조선조에서는 마을마다 병을 치료하는 의사와 함께 의녀(醫女)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오늘부터 우리 굿에 대해 그동안 안 좋은 선입견을 갖고 있었던 것을 다 버리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 주신데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난생 처음 굿을 보았다는 학생들. 예전에는 집집마다 안택을 하기 때문에, 마을 어디서나 굿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러한 굿이 점점 ‘굿당’이라는 전문적인 장소가 소재한 산 속으로 숨어들면서, 점점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된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굿이 온전히 신성과 연희성을 함께 지켜가면서 전승이 되는 길은,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절대 미신이나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시켜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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