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사는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산의 서쪽에 위치한 사찰이다. 백제 의자왕 11년인 651년에 창건되었으며, 경내에서 백제연화문와당이 출토되었다. 신원사의 중악단은 삼국시대부터 산신사상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산신제는 신라 문무왕이 오악제를 올린 이후, 곳에 따라 현재까지 제사가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신원사는 고종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신원사의 사명을 새 나라의 시작을 의미하도록 신원사(神院寺)에서 신원사(新元寺)로 고쳤다. 신원사의 중악단은 조선왕조가 계룡산신에게 봄 ,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사를 드리던 장소이다. 중악단은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궁중의 건물을 짓는 건축형태로 조성이 되었으며, 199932일 보물 제1293호로 지정이 되었다.

 

 

삼악 중 중앙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 중악단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산8 신원사 결내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제1293호인 공주 계룡산 중악단. 중악단은 나라에서 계룡산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중악단은 묘향산의 상악단, 지리산의 하악단 중에서 그 중앙에 있다고 하여 중악단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중악단만이 남아있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져 왔으며, 신라 때는 오악의 한 곳으로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북쪽의 묘향산을 상악으로,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3년인 1394에 처음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며, 효종 2년인 1651년에 제단이 폐지되었다. 그 후 고종 16년인 1879년에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짓고 중악단이라 하였다.

 

 

난 가을이면 계룍산 신원사를 찾는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신원사의 가을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절은 온통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도배를 한다. 경내에 들어서면 마치 신선이 살고 있는 곳을 찾아온 듯하다. 중악단으로 오르는 길에 만나게 되는 신원사의 단풍은, 매년 보아도 특별하다.

 

단묘의 건축법을 엄격히 지킨 중악단

 

공주 계룡산 구릉지에 마련한 중악단은 동북과 서남을 중심축으로 하여,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했다. 중악단의 둘레에는 담장을 둘러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고 있다. 건물배치와 공간구성에 단묘(壇廟)건축의 격식과 기법을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

 

중악단의 현판은 조선 후기 문신 이중하(18461917)가 쓴 것이라고 한다. 중악단 내부 중앙 뒤쪽에 단을 마련하고, 단 위에 나무상자를 설치하여 그 안에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셔 두었다.

 

 

중악단은 1.5m의 높은 돌 기단 위에 정면 3, 측면 3칸의 규모에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조선 후기의 특징적인 수법으로 조각, 장식하여 화려하고 위엄이 있다. 중악단은 국가에서 시행하는 산신제를 지내는 곳이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 있다.

 

각 지붕 위에는 각각 7개씩 잡상을 배치하여, 궁궐의 전각이나 문루 또는 도성의 문루에서 사용하던 기법을 쓴 점도 특이하다. 지금은 조선시대에 산신제를 지내던 상악단과 하악단이 없어져 그 유적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중악단이 잘 보존되어 있어 나라에서 산신에게 제사지냈던 유일한 유적으로 남아있는 소중한 전각이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번지에 소재한 갑사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이 된 갑사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이란 절의 중심건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이다. 이 갑사대웅전은 원래 지금의 자리가 아닌 대적전 자리에 있던 것을, 선조 37년인 1604년에 새로 지으면서 자리를 옮긴 듯하다.

 

갑사는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악 중 서악(西嶽), 고려시대엔 묘향산 상악(上嶽), 지리산의 하악(下嶽)과 더불어, 3악 중 중악(中嶽)으로 일컬어지는 명산 계룡산의 서편에 자리한다. 갑사는 백제 구이신왕 1년인 420년에 고구려 승려인 아도화상이 지었다는 설과, 556년에 혜명이 지었다는 설 등이 전한다.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창건한 갑사

 

갑사는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최초 사찰인 선산 도리사를 창건하고,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 땅 계룡산을 지나가게 되었단다. 갑자기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찾아가보니 천진보탑이 있었다는 것. 이로써 탑 아래에 배대에서 참례를 하고 갑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때가 백제 구이신왕 원년인 420년이다.

 

위덕왕 3년인 556년에는 혜명대사가 천불전과 보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였으며, 679년에는 의상이 수리해서 화엄종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신라 화엄 10찰의 하나가 되었다. 의상대사는 천여 칸의 당우를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량으로 삼아 전국의 화엄 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어 크게 번창되었다.

 

 

진흥왕 원년인 887년에는 무염대사가 중창한 것이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임진왜란 와중에도 융성하였다. 그러나 선조30년인 1597년이 일어난 정유재란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이후 선조37년인 1604년에 인호, 경순, 성안, 보윤 등이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건했고, 효종 5년인 1654년에는 사정, 신징, 경환 등이 중수하였다.

 

이 후에도 부분적인 개축과 중수를 거쳐 고종 12년인 1875년에 대웅전과 진해당이 중수되고, 1899년에는 적묵당이 신축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갑사에는 조선 후기 들어 새롭게 조성된 불상과 탱화 경판이 남아있다. 또한 갑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 영규대사를 배출한 호국불교 도량으로도 유명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맞배지붕에 다포계 양식인 대웅전

 

갑사의 대웅전은 859년과 889년에 새로 지었으나, 1597년의 정유재란으로 인해 건물이 모두 불타 버린 것을 선조 37년인 160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충남 유형문화재인 갑사대웅전은 정면 5, 측면 4칸으로 옆면이 사람인자 모양으로 생긴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양식이다.

 

가운데 3칸은 기둥 간격을 양 끝 칸보다 넓게 잡아 가운데는 공포를 2개씩 놓았고, 끝 칸에는 1개씩을 배치하였다.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되어있으며 불단에는 충남유형문화재 제165호인 석가여래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의 삼세불을 모시고 있다. 삼세불의 뒤편에 걸린 탱화는 보물 제1651호로 지정된 영산회상도와 약사회상도, 아미타회상도가 걸려있다. 또한 국보 제298호인 삼신불괘불탱이 불단 뒤편에 보관되어 있다.

 

 

갑사를 답사한 지가 꽤나 시간이 흘렀다. 107일 가을 단풍이 계룡산 아랫자락을 물들이기 시작했을 때니 벌써 두 달이 더 지난 셈이다. 하지만 문화재 답사를 하고 바로 정리를 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한 번 답사에 많게는 20여 가지가 넘는 문화재를 보고오기 때문이다. 갑사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있어 우선 몇 가지만 소개를 하고 미루고 있던 것이, 이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앞으로 며칠간은 그동안 소개하지 못했던 갑사의 문화재를 소개하려고 한다, 문화재는 어느 것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주변의 모습은 바뀐다고 해도, 문화재가 바뀌지는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인 갑사석조약사여래입상(甲寺石造藥師如來立像)’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번지, 계룡산 갑사 경내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석불입상이 만들어진 시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갑사의 동쪽 계곡 약 100m 지점, 자연 동굴 안에 있는데, 원래는 갑사 뒷산의 사자암에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이 갑사의 석조약사여래입상이 서 있는 자리는, 갑사 경내에서 우측 계룡산으로 오르는 등반길 곁이다. 여래입상이 바라보는 곳은 갑사계곡의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곳으로, 갑사구곡의 제6곡인 명월담의 물이 모이는 곳이다. 그만큼 차고 맑은 물이 바로 앞을 흐르고 있어, 이 자리에만 가도 절로 몸 안에 병이 씻기어 나갈 듯하다.

 

 

고려 중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

 

이 석조약사여래입상의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인 육계가 큼직하게 조성이 되어있고, 얼굴은 긴 편이다. 법의는 양 어깨에 걸쳐 입었으나, 가슴을 약간 노출시키고 있다. 법의는 무릎 아래까지 늘어져 있으며, 가슴 아래로는 반원형의 옷주름으로 표현하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왼쪽 어깨 부근에서는 한 가닥의 주름이 어깨너머로 넘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양 팔은 가슴까지 끌어 올렸으며, 손 모양을 살펴보면 오른손을 가슴까지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왼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제작 연대가 미상인 이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전체적인 구성미와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석조불상으로 추정된다.

 

 

치성 드린 술, 그대로 계곡에 쏟아

 

공주 갑사를 다녀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지난 7일에 다녀왔으면서도, 중간에 이것저것 기사를 쓸 일이 많다보니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했다. 벌써 20여 일이 훌쩍 지나버렸으니, 문화재 답사를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가 않다. 30년 가까이 문화재 답사를 계속했으면서도, 아직도 이렇게 글을 바로 쓰는 버릇을 갖지 못하고 있다.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을 찾아가던 날, 그 곳에는 몇 사람의 여인들이 막 치성을 끝내고 있었다. 모습들을 보니 아무래도 무속인들 같다. 술병을 챙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불자들 같으면 약사여래입상에 굳이 술병을 들고 갈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진촬영을 하기 전 잠시 석조여래입상 앞에 고개를 숙이고 참례를 한다.

 

황급히 술병을 감추는 사람들 앞에서 사진을 함부로 찍을 수가 없어 잠시 기다린다. 카메라만보고도 놀라 술병에 담긴 술을 황급히 따라버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래 계곡 가까이 가니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렇게 치성을 드리고 난 뒤 막걸리며 소주 등을 그냥 계곡에 버리고 가는가 보다. 명산이라는 곳 계곡에 들어가면 이런 일을 하도 많이 목격했기 때문에 이젠 나도 무엇이라고 말도 하지 않는다. ‘쇠귀에 경읽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약사여래님 정말 효험이 있죠.”

 

잠시 계곡 촬영을 하고 있으려니 40대로 보이는 여인 한 사람이 약사여래입상 앞에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절을 하는 것만 보아도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전국의 사찰을 문화재를 답사한다고 수없이 돌아다니면서, 이제는 절을 하는 모습만 보아도 간절함의 척도를 알 수가 있을 정도이다.

 

곁으로 다가서니 사진은 찍지 마세요.”라고 한다. 그럼 사진만 찍지 않으면 질문은 괜찮다는 말이 아니던가?

오늘 처음 오셨나요?”

아뇨, 여러 번 다녀갔어요.”

이 정도면 쾌재를 불러도 될 듯하다. 답이 시원하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

잡 안에 환자가 있어서요.”

, 이곳에 와서 치성을 드리고 좀 나아셨나요?”

그럼요. 왔다가 가면 조금씩 나아지고는 해요. 그러니까 이 멀리까지 와서 불공을 드리죠.”

 

 

대답은 거기까지였다. 차 시간이 바빠서 얼른 불공을 드리고 돌아가야 하니, 더 이상은 말을 시키지 말라고 한다. 사실은 누가 아픈 것인지, 어떻게 아픈 것인지, 차도가 얼마나 있는지 등을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인이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고, 이곳을 다녀가면 좋아진다고 믿고 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물을 수 있으랴. 다시 한 번 발치 끝에서 고개를 숙이고 나서 걸음을 옮긴다. 나야 세상 모든 아픈 이들을 위해 통으로 드린 서원이지만.

 

답사를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린 공주 계룡산 갑사. 대전에 거주할 때부터 수도 없이 들렸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에 들릴 때마다 이상하게 촉박한 시간이었던 터라, 경내조차 제대로 감상을 할 수 없었던 것이 늘 마음에 걸리고는 했다. 그래서인가 이번에는 곳곳을 돌아보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갑사 일주문을 지나 이로 오르다가 보니 안내판 하나가 보인다. 갑사구곡(甲寺九曲)이 있다는 것이다. 갑사구곡은 일제 강점기 때 윤덕영이라는 사람이 계룡산으로 들어와, 간성장이라는 별장을 짓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절경을 이루는 곳마다 구곡의 경물을 큰 바위에 새겼다는 것이다.

 

 

안내판에 적힌 절경 갑사구곡

 

갑사 구곡은 계룡산의 이름에 맞게 닭과 용을 주제로 장소의 정체성을 부각시켰다고 한다. 주역의 이치에 맞게 아름다운 곳을 선정했다고 하는 갑사구곡은 다음과 같다.

 

1곡 용유소 - 용이 노니는 소

2곡 이일천 - 수정봉과 연천봉에서 발원한 물이 합수되는 곳

3곡 백룡강 - 우기에 물보라가 마치 흰 용이 꿈틀대는 것과 같은 모습

4곡 달문택 - 연못으로 배를 띄워놓고 풍류를 즐긴 곳

5곡 금계암 - 금계포란 또는 천조인 닭으로 새벽을 알림

6곡 명월담 - 달 밝은 밤 잔잔한 물 위에 비치는 달빛이 마치 하늘이 물속에 잠긴 듯함

7곡 계명암 - 계룡산이 처음 열릴 때 산속에서 닭이 날개짓을 하면 울었다는 곳

8곡 용문폭 - 자연 폭포인 높이 10m 정도의 폭포가 낙수치는 절경

9곡 수정봉 - 산봉우리가 수정처럼 맑고 깨끗한 백색을 띤 암석으로 된 바위산

 

 

계곡을 따라 오르다

 

이런 내용을 보면 은근히 회가 동한다. 아직까지 계곡 쪽으로는 한 번도 내려가 보질 못했다. 모처럼 계곡 안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어본다. 흙길이라 그런지 발밑에 밟히는 감촉이 그만이다. 가끔은 돌부리에 걸리기도 하지만, 설령 넘어져 무릎이 까인들 무엇이 대수랴. 길을 따라 갑사 쪽으로 걷다가 보니 옛날에 지은 건물이 보이고 계곡 위로 다리가 걸려있다.

 

걷기 시작하면서 바위만 열심히 찾아본다. 혹여 어느 바위에 갑사구곡을 적어 놓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리 위에서 위아래를 살펴보니 저만큼 아래 글자가 보인다. 이일천(二一川), 두 곳에서 내려오던 물이 합수가 되는 곳이다. 그곳에서 자연산책로를 따라 위로 오르면 보물인 철 당간을 만나게 된다.

 

 

갑사 대적광전 앞에 서있는 보물 갑사승탑을 둘러보고 난 뒤, 계룡산 등산로를 따라 가면 우측에 갑사를 지을 때 짐을 나르느라 희생이 된 소들을 위하는 승우탑이 서 있다. 그 앞쪽에 제5곡인 금계암이 보인다. 그리고 계곡을 따라 위로 오르니 수월암이라고 바위에 각자를 한 글씨가 보인다.

 

누군가도 이 경치에 반했다

 

아마도 윤덕영이라는 인물 말고도 이곳의 아름다운 절경에 반해 많은 사람들이 글씨를 새겨 넣은 듯하다. 수월암에서 위로 조금 오르니 간성장이라고 음각해 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은계(銀溪)라고 파 놓았다. 그리고 보니 처음 계곡을 시작하는 곳에도 똑 같이 간성장이라는 글씨가 있었다. 아마도 그 처음의 자리가 윤덕영이 정자를 지었던 자리가 아니었을까? 암반 위를 구르는 계곡물이 마치 은처럼 맑아 보인다.

 

 

금계암을 벗어나 갑사 쪽으로 걷다가 등산로를 따라 용문폭포로 올라가는 길 우측 아래편 계곡 옆에 약사여래불입상이 서 있다. 그 계곡 위편 바위에 제6곡인 명월담이 새겨져 있다. 비록 9경중에서 찾아 낸 절경은 3경이지만, 이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 또한 행복이 아닐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시간을 내어 등산준비를 단단히 하고, 갑사구곡을 한 번 찾아보리라 마음을 먹는다. 문화재답사를 갔다가 만난 갑사계곡의 절경. 맑은 물이 흐르는 그 계곡에 단풍이 드는 계절에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계룡산 구룡사지 탐방기

 

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389번지 외 4필지는 충청남도기념물 제39호 공주구룡사지(公州九龍寺址)로 지정이 되어 있다. 구룡사지가 있는 상신리는 계룡산의 북으로 뻗은 중턱에 절터가 있으며 이 지역을 법당골, 부도골 등으로 부르고 있다. 마을에는 많은 석조물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주변에서 〈구룡사〉 라고 찍힌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구룡사터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의 안쪽 절의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는 당간지주가 서 있으며, 주춧돌과 장대석, 부도의 받침돌이 남아 있었는데,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에는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백제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들로 보아 백제 후기나 통일신라시대 전기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계룡산 북쪽의 절 구룡사

 

구룡사지는 계룡산의 사방에 있는 사찰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동에는 동학사, 서에는 갑사, 남에는 신원사, 그리고 북에는 구룡사가 있다. 구룡사를 제외한 나머지 절집들은 난을 당하기는 했지만, 아직 건재하고 구룡사만 사라진 셈이다.

 

구룡사가 있던 공주시 상신리는 계룡산 자락 골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대전 유성에서 공주 공암 쪽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동학사로 가는 길이 있다. 이곳을 박정자 고개라고 부르는데 조금 더 가면 온천리에서 좌측으로 계룡산 쪽으로 난 길이 있다. 먼저 나오는 곳이 하신리 마을이고 그 곳을 지나면 상신리 마을이 나온다. 대전, 공주를 가는 길에서 상신리 까지는 6km 정도가 된다.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다. 대전에서 방송일을 할 때 취재를 하려고 몇 번 들렸던 상신리마을은 참 운치있는 마을이었다. 마을 안길은 흙길에 돌이 듬성듬성 박혀있고, 마을의 담장은 돌로 쌓아 놓아서 그 위로 담장이가 타고 오르는 것이 퍽이나 시골스럽고 인상적이었던 곳으로 기억이 난다.

 

바위 위 덩그마니 앉은 소나무 한 그루

 

상신리는 찾아 들었을 때 처음 만나는 것은 바로 개울 곁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솟아있는 한 그루 소나무 때문이었다. 그 소나무가 어찌나 그리도 생명력이 있고 멋있어 보였는지 모른다. 이번 길에도 그 소나무는 그렇게 한 결 같이 바위 위에 뿌리를 박고 서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그 싱싱하던 푸름을 잃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바위에는 깊게 무엇인가를 적어 놓은 듯한 흔적들도 희미하다. 아마 장수를 위해 이름이라도 적어 놓은 것은 아닐까?

 

바위를 지나면 마을로 들어가는 우측 산자락에는 천하대장군이 좌측 개울가에는 지하대장군이 솟대와 함께 서 있다. 상신리는 산제(山祭)도 함께 지내는데 이 마을은 산제를 정성들여 지내지 않아서 염병이 돌았다고도 하고, 마을의 장승터에서 나무를 자른 사람이 화를 당했다는 이야기들도 전한다. 그래서 정월 열나흩날이 되기 전에 미리 장승이 있는 곳에 금줄을 치면 그날부터 외지인은 상신리로 들어갈 수가 없다.

 

마을 주민 중에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제관을 선출하면 그날부터 금기를 지키게 된다. 우리 풍속에는 제를 지내는 제관들의 금기는 통례적으로 부부가 합방을 금지하고, 비린것과 날것을 먹지 않으며, 매일 냉수에 목욕을 하고, 출타를 금하는 등 까다롭게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

 

상신리의 장승은 양편에 2기씩 서 있는데 눈을 치켜뜨고 이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다. 복판에는 각각 <天下大將軍>과 <地下大將軍>이라고 묵서를 해 놓았다. 장승을 지나면 마을 첫 집이 식당이다. 그 모서리에는 금줄을 매어 놓은 선돌이 보인다.

 

 

옛 절터를 알리는 당간지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차를 돌릴 수 있는 공터가 보이는데 그 앞에 당간지주가 있다. 한편에는 돌담 위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가 그래도 옛 정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돌담은 그대로인데 집들이 많이 변했다. 하기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세월이었으니, 어찌 옛 모습 그대로이길 바랄쏘냐?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마을 공동 우물은 덮개를 덮어 놓았고 그 맑은 물이 흐르던 물길은 메말라버렸다. 마을 안길이 예전에는 흙길에 돌을 박아 놓아 걷는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온통 시멘트로 발라버려 삭막한 기분마저 든다. 어즈버 세월이 이리도 변하게 만들었을까? 마을을 돌고 보니 무엇인가 섭섭한 기분이 든다. 그대로 있기를 바란 내가 잘못이긴 하지만.

 

 

과거에 구룡사가 어느 정도의 절집이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존하는 동학사, 갑사, 신원사의 규모로 볼 때, 아마 그 정도의 절집이 아니었을까 추측을 할 뿐이다. 계룡산 북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구룡사지에 남아있는 당간지주. 윗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여러 쪽의 석재를 이용한 기단 위에 서 있다. 기단면에는 장방형으로 구획된 내구에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고 지주 사이에는 원형의 철통을 세웠던 주좌가 남아 있다.

 

오랜 시간 이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과 무언의 대화를 했을 구룡사지 당간지주. 바람도 없는 날인데, 갑자기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결에 날리는 흙먼지가 눈을 맵게 만든다. 세월이 지났으니 모든 것이 변해야하겠지만, 변화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오늘 또 마음의 아름다움을 하나 상신리에 버려두고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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