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서악동에 있는 신라 태종무열왕릉의 동쪽에 보면 보물 제70호인 서악리 귀부와, 경상북도 기념물 제32호인 김인문의 묘가 있다. 김인문의 묘 곁에 있는 이 거북모양의 받침돌은 김인문의 묘비를 세웠던 것이다. 현재는 비문과 머릿돌은 사라지고 받침돌만 남아있다.

 

이 거북모양의 받침돌은 국보 제15호인 태종무열왕의 귀부와 쌍벽을 이루고 있다.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조각기법이 뛰어나, 7세기 귀부모양의 변화를 잘 보이고 있다. 귀부의 모양이 몸체는 거북이에, 머리는 용의 모습으로 변하기 이전에 원형의 모습으로 남아있어, 한국 석비 받침돌의 초기 모양이라 할 수 있다.

 

 

사실적인 조각 뛰어나

 

무열왕비의 거북이가 앞발가락은 다섯 개, 뒤는 네 개인데 비해, 보물 제70호인 서악리 귀부는 앞뒤가 모두 다섯 개다. 목에 새긴 다섯 가닥의 주름은 사실적이며, 거북의 등에 새긴 6각모양의 무늬도 조각솜씨가 뛰어나다. 등에는 비를 받쳐 세웠던 네모난 구멍이 뚫려져 있다.

 

앞발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어 이 거북이가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앞발과 뒷발의 발가락은 금방이라도 땅을 움켜잡고 앞으로 나아갈 듯 힘차게 표현하였다. 등에 새겨진 귀갑문도 통일신라 말기와 고려 초에 나타나는 귀갑문보다 화려하게 조각을 했다.

 

 

김인문은(629~694)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문무왕의 친동생이다. 23세 때에 당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돌아와, 무열왕을 도와 김유신과 함께 삼국을 통일하는데 기여를 하였다. 1931년 서악서원에서 김인문의 비석조각을 발견하여, 이곳이 김인문의 무덤임을 확인하였다. 무덤은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형태로 무덤의 밑 둘레가 82m, 지름이 29,9m에 높이는 6,5m이다.

 

귀감이 되는 옛 선인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벌써 천 4백년이 지난 후이지만, 그의 이름은 아직도 우리 후대에 전하고 있다. 요즈음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그런 이름을 남긴다는 것에 대해서 무의미하다는 생각인가 보다. 스스로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동들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에 대해, 참으로 안타깝다.

 

 

아마 선대인 조상님들이 이런 자손들을 본다면, 죽어서나마 올바로 눈을 감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역사는 언젠가는 올곧은 평가를 하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사람들이 얼마나 사후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겠는가? 후세에 사가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요즘사람들이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방에 산재한 많은 문화재들을 만나다가 보면 그 문화재가 갖고 있는 속 깊은 의미를 되새길 수 있어서 좋다. 그런 문화재를 답사한다는 것이 행운이란 생각이 든다. 문화재를 만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물 제70호인 김인문의 묘비인 서악리 귀부. 이곳에서 다시 세상의 지혜를 배운다.

 

 

수원시 영통구 창룡대로 265에 소재한 수원박물관에는 야외전시장이 있다. 이 전시장에는 많은 비와 수원시에서 발굴이 된 무덤 등이 그대로 옮겨져 있다. 수원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기관과 문중으로부터 기증받은 유물과 수원 관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유물을 옮겨와 전시하고 있다.

 

야외 전시장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수원에서 관리를 지낸 인물들의 업적을 나타내는 선정비, 의장석물, 묘제석물, 생활 유물 등이 야외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야외전시 유물 중에는 수원시 향토유적 제 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목동 석곽묘(石槨墓)’가 있어, 수원박물관을 찾아오는 관람객들의 눈길을 끈다.

 

 

통일신라시대의 매장 문화를 알 수 있어

 

석곽묘는 일명 돌덧널무덤이라고도 부른다. 돌덧널무덤은 지하에 네모난 구덩이를 파고 자연 할석이나 자갈돌을 쌓아 직사각형의 공간을 마련한 무덤을 말한다. 여기에 시신을 직접 묻거나 목관에 넣어 매장한 후 판돌이나 나무를 이용해 뚜껑을 덮었다. 이 야외 전시장에서 만나 볼 수 있는 돌덧널무덤은 이목동에서 발굴한 것을 옮겨온 것으로 수원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통일신라시대의 석곽묘이다.

 

발굴상태 그대로 옮겨와 복원을 한 석곽묘는 머리 받침석이 있고, 장정 한 사람이 누워있을 정도로 땅을 판 후 사방을 돌을 쌓은 형태이다. 이 석곽묘의 발굴 당시 회청색의 연질 완과 연황색의 연질 대부완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런 통일신라시대의 석곽묘 중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경주 대릉원에 있는 천마총이다.

 

 

23기의 고분이 모여있는 경주 대릉원

 

대릉원이라는 명칭은 삼국사기에 미추왕을 대릉에 장사를 지냈다라는 기록 때문이다. 이 대릉원에는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경주시 황남동에 소재한 12만 평이 넘는 거대한 고분군이다.대릉원에는 23기의 고분이 모여 있는 곳으로, 경주의 무덤들은 릉, , 총 등으로 구분 짓고 있다.

 

이 중에서 릉은 임금을 매장한 고분이고 묘는 왕이 아닌 사람들의 무덤, 그리고 총은 왕릉으로 보이지만 매장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치가 않을 때 붙이는 명칭이다. 하기에 경구 전역에 산재한 많은 묘 중에는 미추왕릉과 같이 릉이라는 명칭이 붙은 묘와, 김유신 묘와 같이 왕이 아닌 사람들의 묘, 그리고 황남대총이나 천마총처럼 총이라는 명칭이 붙은 묘명이 있다.

 

 

전설과 함께 문화재이야기를 들려주자

 

미추왕은 신라 제13대 임금이다. 경주 김씨 최초의 왕인 미추왕은 삼국사기에 미추왕은 백성에 대한 정성이 높았다. 5명의 신하들을 각처에 파견해 백성의 애환을 듣게 하였다. 재위 23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대릉에 장사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추왕의 릉을 죽릉혹은 죽장릉이라고 부르는데 그 연유가 전한다.

 

신라 제14대 왕인 유례왕 때 이서국의 침입이 있었는데, 이때 어디선가 귀에 대나무잎을 꽂은 수많은 병사들이 나타나 적을 물리치고 난 뒤 사라져 버렸다. 삼국사기 제2권 신라본기 제14대 유례 이사금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유례 이사금 14년인 297년에 보면 봄 정월에 지랑을 이찬으로 삼고 장흔을 일길찬으로 삼았으며, 순선을 사찬으로 삼았다. 이서고국이 금성을 공격해 왔으므로 우리 편에서 크게 군사를 일으켜 막았으니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왔는데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모두 귀에 대나무 잎을 달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함께 적을 물리친 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 대나무 잎 수만 장이 죽장릉(미추왕릉) 앞에 쌓여있는 것을 보았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앞 임금이 음병으로 싸움을 도왔다고 했다

 

물론 이 전설은 수원지역이 아닌 경주지역에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이들과 함께 수원박물관 야외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돌덧널무덤인 석곽묘를 보면서 설명을 한다면, 쉽게 석곽묘와 릉의 비교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를 고민할 때이다.

 

경북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65~1에는 삼국시대에 조성한 삼존불입상이 전하고 있다. 보물 제63호로 지정된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은 경주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보존을 하고 있다는 것. 이 석불들은 선방사 터에 누워져 있던 것을 모아서 세웠는데,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것은 지자체나 문화재청에서만 할 일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문화재지킴이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문화재들이 어디에 자리하고 있던지 제대로 보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은 전각을 지어 보호를 하고 있으며. 지금은 주변에 삼불사라는 절이 들어와 보존을 하고 있다.

 

 

후덕한 상을 보이는 본존불

 

삼존불은 각각 조성이 되었지만, 이곳에 있던 절에서 한 시대에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자리하고 있는 본존불은 머리에 상투 모양의 육계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표면이 매끄럽게 표현되었다. 얼굴은 어린아이 표정의 네모나게 표현을 했으며 풍만하다.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문 입, 깊이 파인 보조개, 살찐 뺨 등을 통하여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이 본존불은 수인으로 보아 석가모니불이다. 목이 표현되지 않은 원통형의 체구에 손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는데,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은 올리고 있다. 묵직해 보이는 옷은 불상을 전체적으로 강직해 보이게 하지만, 어린 아이와 같은 표정과 체구 등으로, 후덕한 인상에 따뜻한 생명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협시보살의 표현 놀라워

 

삼존볼 중 왼쪽의 보살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가는 허리를 뒤틀고 있어 입체감이 나타난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 보병을 잡고 있는데, 보관에 새겨진 소불로 보아 이 협시보살은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오른쪽의 보살은 대세지보살로 역시 잔잔한 내면의 미소를 묘사하고 있는데, 무겁게 처리된 신체는 굵은 목걸이와 구슬장식으로 발목까지 치장하였다.

 

이 삼존불은 조각솜씨가 뛰어나다. 다정한 얼굴과 몸 등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 신비가 풍기고 있는 작품으로,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거기다가 천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보존상태가 좋아 당시 신라 석조각의 정수를 엿볼 수 있다.

 

 

문화재에게 날마다 서원을 하다

 

경주 삼존불입상을 만나면 늘 한 가지 서원을 한다. 바로 이 해가 다 지나고 2014년에는 우리 모두가 아픔을 당하지 않고,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늘 마음속으로 서원을 하는 것이 있다면, 모든 사람, 모든 일, 그리고 언제나 그저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빌어본다.

 

세상살이가 점점 힘들다고 한다. 그렇다고 피해서는 살 수가 없으니 어찌하랴. 이렇게 서원이라도 할 수 밖에. 가진 것도 없고, 힘도 없는 민초들이야 그저 빌어서라도 어려움을 이겨낼 수만 있다면 천 번인들 빌지 못할 것이 없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우상숭배를 한단다. 하지만 세상에 우상 아닌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부처님의 마음자리라면 우상이 아닐까? 우상숭배라도 좋으니, 2014년 한 해 그저 무탈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이다.

 

보물 제136호인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慶州 南山 彌勒谷 石造如來坐像)’, 경북 경주시 배반동 산66-2에 소재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보리사 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 있는 이 석조여래좌상은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석불좌상으로,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뒤편에 조성한 광배의 뒷면에도 선각으로 된 약사여래불을 조성했다. 광배 뒤편에 새긴 약사여래불이 처음부터 조성을 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렇게 앞으로는 석조여래좌상을 조각하고 뒤편에도 선각으로 약사여래불을 조성한 경우는 보기 드문 예이다.

 

마귀를 쫓는 항마촉진인의 내력

 

이 석조여래좌상의 머리칼은 작은 소라 모양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인 육계가 높게 솟아 있다. 얼굴은 둥근 편인데 은은한 웃음을 띤 표정이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법의는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나 힘없이 축 늘어진 느낌이며, 군데군데 평행한 옷 주름을 새겨 넣었다.

 

결기부좌를 한 형태로 좌정한 석조여래좌상의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있다. 이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인데 다소 연약해 보인다. 옛날 석가모니가 성불하기 전에 정각산의 선정굴에서 내려와, 보리수 아래 앉아 결가부좌하고 다시 선정에 들어갔다.

 

 

선정에 든 석가모니를 본 제6천의 마왕 파순은, 만약 석가모니가 성불하여 부처가 된다면 일체의 중생이 구제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석가모니가 성불을 하고나면 마왕의 위력이 중생들에게 못 미친다고 생각을 해, 염욕, 능열인, 가애락이라는 3인의 미녀를 보내어 석가모니를 유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번번이 성공하지 못하자 마계의 모든 군사를 동원했다. 마왕 파순은 칼을 석가모니에게 겨누면서 "비구야, 나무 아래 앉아서 무엇을 구하는가. 너는 신성한 금강보좌에 앉을 자격이 없는 자이다." 라고 소리쳤다. 이 말을 들은 석가모니는 "천상천하에 이 보좌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뿐이다. 지신(地神)이여 이를 증명하라." 고 하면서 선정한 오른손을 풀어서 오른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으로 땅을 향했다.

 

그러자 지신이 땅에서 튀어나와 마왕 파순을 물리치며 석가모니의 말을 증명하였는데, 이 때의 수인이 바로 항마촉지인이다. 항마촉지인은 항마인, 촉지인 등의 명칭으로도 불리고 있는데, 이 수인은 오직 석가모니만이 취하는 수인이다.

 

마귀는 쫓고 중생은 고치고

 

불상의 뒤편에 조성한 광배는 장식적이다. 광배에는 작은 부처상인 화불과 보상화, 넝쿨무늬 등을 화려하게 조각을 하였다. 광배 뒤편에 선각으로 약사여래불을 조성한 경우는 밀양 무봉사와, 남원 만복사지 석불입상 등에서 보이는 특이한 경우이다.

 

 

경주 남산 미륵곡 보리사 터에 소재한 석조여래좌상. 전면은 항마촉지인을 한 여래좌상이 세상의 악한 기운을 쫓고, 뒤편에는 약사여래불을 조성해 중생을 질병에서 구제하고 있다. 이렇게 앞뒤로 조성한 석가여래와 약사여래로 인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편해지기를 바란 것일까?

 

내년 봄, 꽃이 피는 계절이 돌아오면 날을 잡아 경주일대를 한 번 돌아보리라 마음을 먹는다. 남산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수많은 부처님들을 만나보기 위해서.

 

날이 잔뜩 흐렸다.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몰려와, 금방이라도 한 줄기 비를 쏟아부을 듯한 기세이다. 이런 날 문화재 답사를 한다는 것은, 평소보다 두 배는 어렵다. 그것도 포장이 되어있는 도로로 다니는 것이 아니다. 질퍽한 맨 땅을 밝고 다녀야 하니, 그 고통은 답사를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선뜻 이해하기가 힘들다.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5-2에 소재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경주구황동당간지주 (慶州九黃洞幢竿支柱)’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게 되는데, 이 깃발을 꽂는 높이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받침돌을 거북이인 당간지주, 이런 받침돌 처음이야

 

당간이야 절마다 볼 수가 있다. 대개는 절 입구에 세워 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이곳에 당을 걸어둔다. 그런 당간은 특별한 형태를 보이지 않는다. 거의 보편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나 지역에 따라서 조형하는 방법은 약간씩 차이가 난다. 구황동 벌판에 외롭게 서 있는 당간지주 한 기.

 

분황사의 것으로 보이는 이 당간지주는, 양 기둥에 별다른 조각을 두지 않은 간결한 모습이다. 그런데 이 당간지주는 다른 면이 있다. 훼손이 되어 처음에는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기둥사이에 놓인 당간의 받침돌을 들여다보니 특이하게도 거북모양이다. 동편을 바라보고 있는 당간지주 사이의 간대가 돌거북이라니 놀랍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당간지주를 보았지만, 이렇게 받침돌이 거북의 형상을 한 것은 처음 만났다.

 

하긴 아직 우리나라에 있는 문화재의 10% 정도나 보았을까? 20년이 넘는 세월을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였지만, 이제 겨우 눈을 떠가고 있는 정도이다. 그리고 그 많은 문화재들의 아주 작은 일부분을 보았을 뿐이다. 마음이 바빠진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많은 문화재들이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분황사 것으로 추정되는 당간

 

분황사 바로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당간지주. 기둥의 안쪽 면에는 아래와 중간, 윗부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이 구멍은 당간지주를 관통해 당간을 단단히 고정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밋밋한 형태로 조성을 한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한다.

 

 

천년 세월을 그렇게 서 있었을 당간지주 한 기. 분황사당간지주는 아마도 숱한 신라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만나게 되는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문화재들이 발길을 붙들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문화재들이 안고 있을 이야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화를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한 맺힌 역사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으련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걸음을 재촉해 당간지주를 떠난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뒤를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것은, 그 오랜 세월 저렇게 비바람에 씻기면서도, 그 자리를 지키기 있다는 굳건함 때문이다. 오늘 따라 조금만 더워도 답사를 미루고 있는 나 자신이 무척이나 초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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