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시 기안동 산2-2 등 40필지에 조성이 된, 경기도 기념물 제93호 ‘수원고읍성 (水原古邑城)’은 최초로 조성한 시기가 고려시대로 알려져 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흙을 다져 쌓은 이 고읍성은 토성으로 조성을 하였다.

 

고려 때 수원에 읍성으로 쌓았으며, 조선 정조 13년인 1789년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읍성을 쌓을 때까지 사용되었던 곳으로 추정한다. 당시도 이곳이 수원부의 행정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토성으로 쌓은 수원고읍성

 

수원 고읍성은 본래 낮은 산의 능선을 이용하여 계곡 아래의 평지까지 에워 싼 형태였으나, 성터의 대부분이 무너지고 남아 있는 부분은 길이가 540m 안팎이다. 아래는 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다져 쌓은 것으로 보이는 성벽은, 윗부분의 넓이는 2∼2.5m이고 높이는 4∼5m, 경사면은 7~8m 정도이다. 이 토성에는 동문터와 서문터로 추정되는 부분도 있다.

 

수원고읍성의 옛 기록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1,320m쯤 되며, 성안에는 2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 성벽을 자연지형에 따라 복원하여 보면, 융릉의 뒤편까지 토성이 뻗어있기 때문에 4km쯤 되어 큰 차이가 난다. 결국 이 성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조선시대까지 읍성의 기능을 갖고 있다가, 수원 화성으로 읍치를 옮길 때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화성이 축성될 때까지 읍성의 기능을 가져

 

이 수원고읍성은 아래에 활석을 깔고 그 위에 판축을 하거나 적갈색 통양을 두텁게 쌓아서 조성하였다. 현재 토성의 성벽은 도로로 인하여 잘려있으며, 이곳을 마을사람들은 ‘고서문(古西門)’ 또는 ‘고자문(古字門)’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이 서문 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의 동북쪽 꼭대기에도 동문 터가 남아있다.

 

11월 10일(토) 오후에 찾아간 수원고읍성. 주변은 정리가 안되어 있어서, 안내판이 없었다면 읍성인지 아니면 그저 토축이 쌓인 것인지조차 구별이 되질 않는다. 읍성 내에는 관아와 객사, 군영, 운금루 등의 건물지만 일부 발굴이 되었으며, 다른 건물들은 이미 심하게 훼손이 되어 자리조차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주변 정리부터 해야

 

성내에는 고려시재와 조선조의 기와와 자기류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고 하는데, 고려시대부터 수 백년 동안 수원의 읍성으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에, 많은 전각과 군사들이 기거를 하였던 것 때문인 듯하다.

 

경사면을 밟고 올라가는데 쌓인 낙엽으로 인해 길이 미끄럽다. 그저 길가에 서 있는 안내판 하나로 이곳이 수원고읍성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외에 이곳이 수원고읍성이라는 것을 선뜻 알아보기가 힘들다. 다만 석축 위로 길처럼 조성되어 있는 것이 바로 옛 읍성의 성벽의 위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 무슨 큰 역할을 하였겠느냐고 한다. 하지만 토성은 그 나름대로 지키는 방법이 있었다. 고려 때 쌓은 성이라면 당시의 전쟁을 할 때의 주 무기는 칼과 창, 활 등이다. 만일 적이 이 경사진 면을 기어오른다고 하면, 겨울에는 물을 뿌려 경사면을 얼리고, 여름에는 물을 부어 미끄럽고 발이 빠지도록 한다.

 

낮은 토성이긴 하지만, 이 토성은 읍성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감당을 해왔을 것으로 보인다. 길지 않은 구간을 돌아보았지만, 주변이 엉망이다. 기념물이라고 해도 역시 문화재이다. 문화재 주변이 온통 정신이 사납다. 문화재 안내판이 무색할 정도로 방치되어 있는 수원고읍성. 담당부서에서는 주변부터 정리를 해주기를 바란다.

99칸의 대갓집. 그러나 후손들이 관리를 하기가 어렵다고 신흥재벌에게 사랑채와 행랑채를 팔았다고 한다. 원래는 99칸의 커다란 대갓집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남은 집으로만 보아도 그 규모를 어림잡아 짐작할 수가 있다. 도대체 이 집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내촌리 222-14에 소재한 경기도 기념물 제12호 '김좌근 고택'을 찾아갔다.


이 김좌근 고택은 벌써 올들어 두번이나 찾아가보았다. 갈 때마다 복원 공사중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7월 23일 그 무더운 더위를 피해 찾아간 백사면 내촌리. 아직 주변은 정리가 끝나지 않았지만, 반듯하게 복원이 끝나가는 집은 그 규모가 엄청났음을 알 수가 있다.

 



김병기가 부친의 묘지관리를 위해 지은집


김좌근 고택은 이천 백사면 내촌리 소일마을 상단인 마을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뒤로는 얕은 산자락을 배산으로 남향으로 지어진 이 집은, 전통 한옥으로 지은 99칸의 집이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집의 치목이나 석재를 사용한 것을 보아도, 이 집의 과거 위세를 알 수가 있을 정도이다. 지금은 담장과 행랑채는 사라지고 안채와 별채인 사랑채만 남아있다.


이 집은 영의정 김좌근의 아들이며 고종 때 어영대장과 이조판서를 지낸 김병기가  부친의 묘지관리를 위한 별장으로 지었다고 한다. 십 수년 전까지만 해도 솟을대문과 고래등 같은 기와집으로 남아있었다는 김좌근 고택은 사랑채와 행랑채가 두 겹으로 안채를 싸안고 있는 규모있는 대갓집의 모습을 지켜왔다고 한다. 그런 집이 지금은 사랑채와 안채만이 남아있다.

 






관리가 힘들어 팔아버린 집


집이 워낙  크고 관리가 힘들어지자, 후손들이 신흥재벌하게 이 집을 팔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랑채 등을 옮겨가는 도중에 그 회사가 부도가 나서, 그나마 이건을 중단하는 바람에 지금의 모습을 지켜낼 수 있었다고 전한다. 우리의 많은 고택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원래 김좌근 고택은 대문과 중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갈 수 있도록 구조가 되었다. 안채는 ㄷ자 형으로 중문과 연결된 사랑채가 있었으며, 바깥문은 대문과 연결된 행랑채가 ㄱ 자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안채와 별채인 사랑채가 안채로 통하는 중문과 안채의 담으로 가로막혀 두 동의 건물이 서로 독립된 형태로 서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두 개의 건물 사이에도 가로막힌 건물이 있었으며, 뒤편으로는 널마루로 짠 회랑을 달아내어 서로 왕래를 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은 회라잉 없어졌으나, 과거에는 이 회랑을 이용해 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도 이동을 할 수 있는 동선이 있었다는 것이다.


'닥터 진'의 김병기가 지은 집, 옛 풍취는 그대로 남아


복원 공사를 마친 집을 돌아본다. 사랑채의 한편을 잘 다듬은 장초석으로 주초를 삼고, 그 위에 누마루를 올려 누정을 삼았다. 집은 날아갈 듯한 팔작지붕으로 마련하고, 치목과 치석이 모두 제대로 된 장인의 솜씨를 마련한 듯하다.

 





꽃담을 아름답게 조성한 안채는 지금 난 중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가 있다. 아직은 주변 정리가 끝나지 않아 잡초가 수북히 쌓여있기는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중문에 붙여 방을 드렸다. T 자 형으로 조성한 안채는 툇마루를 길게 놓았다. 이 안채가 특이한 것은 중문을 통해서 들어가는 곳이 앞쪽이지만, 그 뒤편의 형태도 똑 같이 조성을 했다는 것이다.


안채는 서쪽으로 부터 다락과 3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팔작지붕이다. 부엌은 세칸 규모로 문을 들어서면 토를 달아 내었다. 그 오른쪽에도 다락을 드렸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만 보아도 당시 이 집의 위세를 알만하다. 일부가 사라져버려 제대로 가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제대로 모습을 갖추었다면 그 어느 집보다 뒤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김좌근 고택을 돌아보면서 새삼스럽게 세상을 배운다. 요즈음 드라마 '닥터 진'에서 보이는 김씨들의 세도가 세월이 지나면서 달라졌음을. 하기에 영원한 세도는 없는 것인가 보다. 하긴 닥터진에서 대원군과 권력다툼을 하는 좌의정 김병기의 구성은 역사와는 많이 다르게 표현이 되었지만 말이다. 


여주군 점동면 흔암리는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줄다리기를 하고 난 뒤, 줄에 액송기를 꽂아 마을 뒤편에 흐르는 남한강에 갖다 놓는다. 정월 대보름 줄다리기를 할 때는 남한강이 꽁꽁 얼어 얼음 위에 줄을 올려놓게 되는데, 얼음이 녹으면 이 줄이 물에 가라앉아 수많은 물고기들의 산란처가 되기도 한다. 이 흔암리에는 선사주거지가 있다. 모두 16채의 집터가 발굴이 되었는데, 남한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 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남한강가의 집단 선사주거지

 

흔암리 선사유적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60년대에 김원룡에 의해서다. 그 후 서울대박물관 고고학조사단이 1972년도부터 매년 발굴을 실시한 결과, 모두 20여기에 가까운 움집터를 확인하였고 다수의 유물과 탄화곡물을 발견하였다. 집 자리가 확인된 곳은 마을 뒤편을 흐르는 남한강에서 300여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표고 123m의 산정상부 지점으로 유적은 이 산 경사면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이 선사유적지의 발굴에서 출토된 토기는 구멍무늬토기,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 등이 있다. 민무늬 토기에는 화분형, 사발, 단지, 짧은목 토기 등이 출토되었으며, 빗살무늬토기와 붉은 간토기 등도 상당수 발굴되었다. 석기로는 돌칼, 반달돌칼, 바퀴날도끼, 돌도끼, 돌화살촉 등이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농경용 연모와 함께 땅을 파 만든 저장고에서 쌀, 보리, 조, 수수 등의 곡식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서 나온 탄화미는 늦은 연대라 하더라도 연대가 최소한 기원전 7세기까지 올라가는 것들로 판명되었다.

 

▲ 재현된 움집 현재 흔암리 선사유적지의 움집들은 당시의 기둥구멍을 확인해 세운 것으로, 안에는 화덕자리 등을 꾸며놓았다.

▲ 움집 출입구 기둥구멍의 벽체가 곧바로 위로 올라간 것은, 기둥의 서까래가 땅에 땋지 않은 반 움집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흔암리 유적지의 집의 형태

 

흔암리 선사유적지의 집들은 남북장축으로 풍화된 화강암반을 'ㄴ자'로 파고 지붕을 씌운 것이며, 포탄형의 특징적인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다. 주거지의 내부시설에는 화덕자리, 간단한 저장구덩이, 기둥구멍 및 출입구 등이 있다. 움집의 구조는 평면은 긴 네모꼴이며 가장 큰 집터는 길이 10m, 너비 4.2m로 나타나 상당히 큰 편이다. 이렇게 큰 집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에도 집단주거지의 주축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현재 흔암리 선사유적지의 움집들은 당시의 기둥구멍을 확인해 세운 것으로, 안에는 화덕자리 등을 꾸며놓았다. 발굴 당시 나타난 움집들은 움의 깊이가 조금씩 차이가 있었으며, 같은 집터에서도 4벽이 서로 다르고 기둥구멍의 벽체가 곧바로 위로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둥의 서까래가 땅에 땋지 않은 반 움집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연모 중에서 그물추가 있었다는 것은 흔암리 선사유적지의 생활에서 농경을 주로 했지만, 뒤편을 흐르는 남한강에서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 화덕자리 움집 안에는 화덕자리를 재현해 놓았다. 발굴 당시에는 이 화덕자리에서 숯이 발견되기도 했다.

 
▲ 남한강 흔암리 선사유적지에서 300m 정도 떨어져 있는 남한강. 이곳에서 물고기도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현된 선사유적지 아쉬움이 남아

 

흔암리 선사유적지는 마을회관을 기점으로 양편으로 오를 수가 있다. 마을회관 앞에서 좌측 길로 들어서면 전신주에 '흔암리 선사유적 150m'라는 이정표가 걸려있다. 그런데 불과 10m 정도를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곳에는 흔암리 선사유적 80m'라는 이정표를 걸어 놓았다.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 이정표다. 이런 안내판이 보일 때마다 화가 치미는 것은, 우리 문화재에 대해 관계부서에서 얼마나 무관심한가를 보이는 것이란 생각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정표 하나도 확인하지 않은 문화재보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안내판1 선사유적지가 150m 전방에 있음을 알려준다
ⓒ 하성

▲ 안내판2 불과 10m 정도를 안으로 들어갔는데 80m 라는 이정표가 걸려있다. 사소한것 하나도 확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한 곳의 입구는 마을회관 우측 길로 남한강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석비가 서 있는 곳으로 오를 수가 있다. 얼핏 생각을 해보아도 두 개의 거리가 맞지 않는 이정표 중 하나는, 이곳에 있어야 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 주거지 석비 선사주거지를 알리는 석비는 남한강 방향으로 나가는 곳에 있다.

 

펜스로 둘러놓은 선사유적지는 현재 5동정도의 움집을 재현해 놓았다. 안으로 들어가면 화덕자리만 하나씩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서 발견된 토기나 연모 등을 모조품이라도 놓아두었다면 좋았을 것을. 돌아보면서 아쉬움이 남는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을 때 볼 것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한 움집에는 누군가가 술을 마시고 빈병과 쓰레기를 버리고 갔다. 한 마디로 문화재의 관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 쓰레기 누군가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쓰레기를 버려놓았다. 문화재의 관리소홀의 한 단면이다.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15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흔암리 선사유적지. 우리의 농경문화와 더불어 강가를 주거지를 삼은 취락구조를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치고는 너무나 볼품없이 재현이 되었다는 생각이다.(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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