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 눈이 쌓였을 때 답사는 예측을 하기가 어렵다. 단순히 눈이 쌓인 것이 아니고 그 눈 속에 돌도 있고, 물도 흐르기 때문이다. 하기에 겨울철 답사는 늘 여기저기 멍이 들고 깨어지기가 십상이다. 그래도 겨울철에 답사를 나가는 것은 딴 계절과 또 다른 경치 속에 있는 문화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리 488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명주사.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의 말사이다. 만월산에 자리하고 있는 명주사는 고려 목종 12년인 1009년에 혜명과 대주스님이 창건하여 비로자나불을 모신 화엄종 계통의 사찰이다. 명주사라는 사명도 혜명과 대주스님의 법호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몇 차례의 화재로 아픔을 겪은 명주사

 

명주사는 지금처럼 작은 사찰이 아니었다. 고려 인종 1년인 1123년에는 청련암과 운문암이, 그리고 조선조 숙종 2년인 1673년에는 향로암이 부속암자로 창건되었다. 정조 20년인 1781년에는 명주사 츨신의 고승인 인파스님이 원통암을 창건하였다. 그 후 헌존 15년인 1849년과 철종 4년인 1853년에 원통암이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중건하였다.

 

명주사는 철종 11년인 1860년 명주사가 있는 산 전체를 화재가 뒤덮여 명주사와 인근 암자들이 전소가 되었던 것을, 월허스님이 명주사를 1861년에는 인허스님이 운문암과 향로암을 중건하였다. 1864년에는 학운스님이 원통암을 중건하였다. 그러나 고종 15년인 1878년 다시 명부사가 소실되었고, 그 뒤 중건하였으나 대한 광무 원년인 1987년에 다시 소실이 되는 화마의 아픔을 겪은 절이다.

 

 

조선 후기의 뛰어난 부도군

 

명주사를 들어가기 전에 만날 수 있는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리 산58에 소재하고 있는 명주사 부도군.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부도군은 모두 12기의 부도를 한꺼번에 아울러 문화재자료로 지정을 하였다. 부도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며,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명주사에 마련된 이 부도 밭에는 모두 12기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으며, 4기의 비석도 함께 남아있다.

 

양양 명주사를 찾아간 날은 눈이 쌓여있던 날이다. 길은 말끔하게 눈이 치워져 있었지만 부도 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길에서 치워놓은 눈으로 인해 무릎까지 눈이 빠진다. 걸음을 옮기기조차 쉽지가 않지만 그래도 답사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눈밭을 겨우 들어가는데 미끄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눈이 많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하필 그 눈 속에 돌이 있을 줄이야. 정말 눈물이 찔끔난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보는 사람은 없지만 왜 그리 창피하던지.

 

 

명주사 부도군에 있는 12기의 부도 중에서 7기는 3단을 이루는 기단 위로 탑 몸돌 및 지붕돌을 갖추었는데, 사각의 바닥돌과 둥근 탑 몸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다. 나머지 5기는 받침돌 위로 종 모양의 탑 몸돌을 올린 모습으로,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큼지막한 머리장식을 두었다. 5기의 비는 낮은 사각받침위로 비의 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갖춘 구조이다.

 

원래 이 명주사 부도들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는데, 1994년 지금의 자리로 모두 모아 놓았다고 한다. 명주사 부도군은 역대 명주사에서 입적을 한 고승들의 부도로, 조선 후기 강원도 내의 부도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원당형이 7기 석종형 5기와 비석 4기가 전해진다.

 

 

이 중 연파당 부도는 짝을 이루고 있는 탑비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조선 순조 18년인 1818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함께 서 있는 4기의 비석은 순조 12년인 1812년에서 고종 20년인 1883년 사이에 세워진 것이다. 눈이 쌓인 날 찾아간 명주사 부도군. 눈이 쌓여 기단을 볼 수가 없어 아쉬웠지만, 또 다시 찾아가리라 마음을 먹는다. 문화재란 늘 찾아보고 보듬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날이 춥다. 이렇게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 사람들은 움직이기가 만만치가 않다. 혹 감기라도 거릴까봐 밖에 출입을 했다가도 일찍 귀가를 한다. 집에 들어오면 나가기가 귀찮아진다. 추운날씨는 아무래도 사람들이 웅크려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추운 날에도 자리를 지키고 계신 분들이 있다.

 

수원 화성 남문인 팔달문에서 지동교 사이에는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이곳은 버스정류장을 비롯해 지동교 방향으로 들어오면서 길 한편에 보면 항상 자리를 잡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 나름 자신의 자리가 있는 듯, 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바로 노점상들이다. 자신의 점포가 없이 길가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작지만 소중한 물건들이 있어

 

노점상들이 파는 물건은 다양하다. 하지만 이 노점상들 중에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들이 파는 물건들은 거의 농산물들이다. 잡곡이며 야채, 나물 등으로부터 별별 것들이 다 있다. 그 중에는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는 것들도 가끔 만날 수가 있다. 사실 이런 노점상 할머니들을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노점에서 다양한 것들을 팔고는 계시지만 엄연히 자식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분들은 어떤 질문에도 답을 하지 않으시려고 한다. 고작해야 한 두어 마디가 고작이다.

 

할머니 날이 추운데도 나오셨네요.”

집에 있으면 몸만 아프니까 움직여야지

물건은 누가 갖다 주시나요?”

차로 운반할 때도 있고, 더러는 이곳 가까운 곳이 맡기고 다니기도 하고

, 자녀분들이 이렇게 추운 날 나오신다고 하면 말리지 않으세요?”

“............”

 

이상하게 자녀들이나 가족들 이야기만 나오면 그때부터 함구를 하신다. 이럴 경우 대개 이 할머님들은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굳이 자식들까지 들춰가면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으신 것이다.

 

 

자리 좀 지키게 했으면 좋겠어!”

 

무슨 말일까? 이곳에서 노점상을 하시는 분들 중 팔달문 옆 버스정류장 쪽에서 장사를 하시는 분들은 지동교 쪽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장사를 하시는 할머니들보다 유난히 물건이 적다. 왜일까? 그것은 단속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적은 물건을 얼른 보따리에 싸서 치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사를 하는 것도 서러운데, 가끔 단속반들이 오면 얼른 보따리에 싸서 숨어야 해. 봐달라고 해도 신고가 들어와서 어쩔 수 없다는 거야. 시장에서 파는 물건들도 아닌데 너무 할 때도 있어. 그냥 자리라도 좀 편하게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채 말끝을 맺지 못하신다. 어떤 날은 하루에 몇 번씩 쫓겨 다니기도 했다고 하신다. 단속반들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버스정류장이나 상가 앞거리에서 노점은 단속대상이기 때문이다. 팔달문 상가 조정호 회장은 어차피 낮 시간에 차 없는 거리로 운영이 되는데, 이곳에 노점상들이 장사를 할 수 있으면 좋은 볼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양성화를 시켜주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하지만 해당 기관에서도 나름 고충이 있다는 것이다. 심심찮게 노점상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민원으로 접수가 되는 전화를 받으면 단속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

 

관광상품으로 양성화 시킬 수는 없을까?

 

하지만 물건이라 봐야 얼마 되지도 않는다. 대개 변두리에서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라 버스를 이용해 나오시기 때문에 많은 양이 아니다. 그저 한 보따리 정도를 이고 나오셔서 길에 깔아놓는 것이 고작이다. 물건도 우리가 도심을 벗어나면 논밭두렁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다. 직접 농사를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노점상을 자주 이용하시는 주부들도 계시다.

 

 

이 할머님들 물건이 정말 싸고 좋아요. 직접 농사를 지으신 곡물과 들과 산에서 채취한 나물들을 잘 다듬어서 갖고 나오시잖아요. 가끔은 진한 시골 된장도 살 수가 있어요. 이분들이 무슨 점포를 갖고 계신 상인들처럼 많은 것을 파시는 것도 아닌데, 이분들이 조금 편하게 장사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침부터 겨울비가 추적거리고 온다. 오늘도 할머니는 우산 하나 펼쳐놓고 쭈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만 바라볼 것이다. 그러다가 해질녘이면 어디론가 가버리신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은 하루쯤 쉬셔도 될 텐데. 비가 오는 겨울날이 반갑지가 않다.

 

동짓달은 음력 11월을 말한다. 그 동짓달에 동지(冬至)가 있다. 동지는 말 그대로 겨울에 이른다는 말이다.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날인 동지가 지나면 조금씩 해가 길어지기 시작한다고 한다. 동지는 우리나라에서는 4대 명절로 삼았다. 바로 설날과 대보름, 추석과 동지가 4대 명절이다.

 

예전에는 동지를 작은설(=亞歲)’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동지를 작은설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이날부터 해가 조금씩 길어지기 때문에, 이 날을 첫날로 삼은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하기에 첫날이라는 개념이 동지에는 있었던 것 같다. 하기에 이 첫날 붉은 팥으로 팥죽을 쑤어, 재액을 방비한 것이나 아니었을까?

 

 

동지로 졍월을 삼기도

 

과거에는 동짓달을 정월로 삼기도 했다. 아마도 작은설이라고 부르던 것도 그때의 유풍일 것으로 보인다. 설날 떡국을 끓여먹으면 한 살이 더 먹는다는 속설이 전하듯, 동지에도 팥죽을 먹으면 한 살을 더 먹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만큼 동지는 우리의 세시에서는 중요한 날이기도 했다.

 

동지에 팥죽을 쑤어서 먼저 사당차례를 지내고 난 뒤, 음식을 먹기 전에 집안의 곳곳에 팥죽을 뿌리는 것도, 모두 일 년간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함이다. 동지에는 팥죽을 먹어야 하는 이유도 알고 보면 축사(逐邪)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즉 작은설인 동지에 일 년간의 재액을 막아 무탈하니 살기를 바라는 과거의 유풍 때문이다.

 

 

동지 상다리가 휘게 차린 까닭은?

 

요즈음이야 동지 팥죽을 먹을 때보면, 그저 동치미에 김치 정도의 반찬을 준비한다. 그만큼 동지의 유풍이 많이 퇴락해진 것인 듯하다. 어린 시절 동지가 되면 집에서는 음식을 하던 기억이 새롭다. 작은설이라고 하여 많은 음식을 차려 팥죽과 함께 먹고는 했다. 아무래도 동지를 새날이 시작되는 절기로 본 듯하다.

 

그렇게 음식을 한 상 가득차려 내오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집안의 어르신이 하시는 말씀이

동지에 음식을 잘 차여 먹어야 일 년 동안 배가 고프지도 않고 풍성하게 살 수가 있다. 상을 가득 차려 많이 먹고 팥죽을 먹어야 다음 해에 배를 곯지 않고 살아간다고 옛 선인들이 말씀을 하셨다.”라는 말을 들었다.

 

 

아마도 그렇게 동지에 음식을 잘 차려먹어야 다음해에 잘 먹고 살수가 있다는 말도 그저 하는 말이 아니다. 동지는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절기이니, 그 겨울을 잘 나기 위해 한 상 잘 차려먹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영양을 충분히 보충하기 위한 방법으로 풀이를 할 수 있다.

 

옛 유풍을 따라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먹었다

 

꼭 동지라서가 아니다. 팥죽도 있고 어차피 저녁을 먹어야하니 조금 더 움직였을 뿐이다. 동지가 되기 전에 집집마다 이미 김장을 다 담갔으니, 김치는 있는 터라 이것저것 찬이 있는 것에 한두 가지 더 준비를 했을 뿐이다. 이왕이면 내년에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산다면 그도 좋지 않을까?

 

 

하긴 잘 못 먹고 산 것이 아니다. 시간이 바쁘다 보면 제대로 끼니를 시간에 맞추어 먹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저녁에 되면 지인들과 어울려 술 한 잔 마시다가 보면, 끼니를 거르기가 일쑤다. 그런 한 해의 마무리를 제대로 한 번 해보자는 생각에 차린 동지받이 상이었을 뿐이다. 그래도 한 상 잘 차려먹으니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이, 내년에는 무엇인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사람들은 겨울이 되면 화성을 돌아보기를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는다. 길이 미끄럽기도 하거니와, 찬바람이 많이 불어대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렇게 화성을 돌 때 딴 곳보다 더 춥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수원천과 방화수류정의 용연과 같은 물이 있기에 조금의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하만 그보다 더한 이유는 바로 바람을 막아 줄 건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옛날보다 겨울이 많이 춥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도 화성을 돌아보는 사람들을 보면, 봄부터 가을까지에 비해 현저히 줄어든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과거 장용영의 군사들이 화성을 지키기 위해 순례를 돌고, 초소 등에 머물고 있었을 당시는 지금보다 몇 갑절은 더 추웠을 것이다.

 

 

몸에 밴 정조대왕의 백성 사랑

 

이번 19일에 대선이 있다. 가끔 휴대폰에 낯모르는 번호가 뜬다. 그리고는 이번 대선에서 누굴 찍겠느냐고 물어온다. 또한 주변의 지인들과 자리를 함께하면, 으레 묻는 것이 이번에 누굴 찍을 것이냐고 묻는다. 내 대답은 언제나 한결 같다. ‘정조스타일’이 답이다. 정조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두말 않고 찍겠다고 한다.

 

사실 어려서 부친인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보아야했던 정조로서는,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 가장 포악한 폭군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근본이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한 임금이었다. 화성을 축성 할 때만 보더라도 임금을 꼬박꼬박 지불을 한 것은 물론, 수시로 상품을 지급하고 축성을 하는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열어주었으며, 더운 여름에는 몸을 보호하는 척서단과 제중단이란 약을 직접 조제해 내려주기까지 했다.

 

 

내가 항상 ‘정조스타일’을 찍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정조는 막대한 국고를 소비하는 화성을 축성하면서도, 인건비가 미쳐 지급이 되지 않으면 공사를 중단하기도 했다. 그만큼 철저하게 백성을 사랑한 임금이다. 수원이 화성유수부로 승격되고 성을 쌓으려고 보니, 많은 민가들이 성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축성의 책임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주저하고 있을 때, 정조는 그런 연유를 듣고 과감히 결정을 내린다. 바로 성을 세 번 구부렸다 폈다 해서라도 모두 수용하라는 것이었다. 기존의 성을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하면 그만큼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하지만 정조는 국고가 더 들어가는 것보다 백성들의 불편함을 더 생각한 것이다.

 

동북공심돈(위)과 문을 들어서 우측에 마련한 온돌방

 

겨울철 화성에서 만나는 정조의 마음

 

12월 5일 수원에는 3시간 여 만에 10cm가 넘는 눈이 쌓였다. 27년 만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렸다고 한다. 믈론 12월 초에 이렇게 왔다는 뜻이다. 다음 날 일부러 화성을 걸었다. 눈이 온 다음날은 칼바람이 불었다. 옷깃으로 파고드는 바람으로 인해, 체감온도는 영하 10도 밑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이렇게 추운 겨울, 눈이 내리고 난 뒤 일부러 화성을 돌아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바로 이 겨울에 화성에서 정조의 마음을 읽고 싶어서이다. 겨울이라고 해서 화성에 무슨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반문을 한다. 하지만 화성의 일부라도 돌아본다면, 그곳에서 정조의 마음을 충분히 알아낼 수가 있다.

 

화성에는 많은 구조물들이 있다. 그 구조물 안에 바로 정조의 ‘애민정신(愛民精神)’을 만날 수가 있다. 소라각이라고 하는 동북공심돈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에 온돌방이 보인다. 밑에는 아궁이까지 있는 온돌방이다. 아무리 추워도 이곳을 들어가면 추위를 거뜬히 이겨낼 수가 있다.

 

봉돈(위)과 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마련한 온돌방

 

그곳에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 창룡문을 지나 구조물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면서 걷는다.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온다. 하지만 정조의 따듯한 마음을 읽어서인가, 처음보다 한결 걸음도 가벼워지고 추위도 덜 느끼게 된다. 봉돈 안으로 들어서 본다. 좌측에는 무기고가 있고, 우측에는 역시 온돌방이 마련되어 있다.

 

47,000명 정도의 장용영 군사들이 화성에 주둔을 했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그들 모두가 성을 지킨 것은 아니다. 아마도 각 시설물마다 적은 인원들이 주야 교대로 성을 지켰을 것이다. 그들이 눈과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곳곳에 그런 시설물들이 있다. 남수문 쪽으로 가다가 만나게 되는 동남각루, 그 아래에도 온돌방이 있다. 크지 않아 많은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겨울철 몇 명 정도의 군사들이 들어가 몸을 녹일 수 있는 공간이다.

 

동남각루와 그 밑에 마련한 온돌방. 화성에는 구조물 곳곳에 온돌방이 있어 군사들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온돌방이 화성의 구조물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여름철이면 시원한 포루 등의 마루를 이용해 더위를 피할 수 있고, 겨울이면 온돌방을 이용해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마련한 화성. 그 하나만으로도 정조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 바로 이런 점이 우리가 ‘정조스타일’을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많은 전설을 간직한 이 미륵대원의 동쪽. ‘하늘재’로 오르는 길목에 서 있는 석탑 한기. 모든 석조물들이 아래편에 모여 있는데 비해, 이 삼층석탑만 떨어져 있다. 석탑을 찾아 오르다보면 좌측에 솟대와 장승이 서 있고, 하늘재를 오르는 길임을 표시하는 석비가 서 있다.

이 석탑을 찾았던 날은 눈이 채 녹지 않은 주변이 미끄럽다. 눈밭 위에 누군가 이곳을 다녀갔음을 알게 하는 발자국이 찍혀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미륵리 사지이다 보니, 이곳이라고 찾지 않았을 리가 없다. 탑 너머로 아름다운 월악산 줄기의 자태가 보인다. 탑과 월악산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신라의 양식을 따른 고려 초기의 비보석탑

월악산을 배경으로 하늘재를 오르는 언덕 위에 서 있는 삼층석탑.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석탑은, 일반형의 단순한 삼층석탑이다. 석탑에는 고려시대의 탑에서 보이는 안상이나, 석불 등을 조각하지 않았다. 밋밋한 삼층석탑은 기단이 견실하다. 그리고 그 위에 삼층의 몸돌과 노반을 얹었는데, 몸돌은 위로가면서 급격히 줄고 있다.

탑 전체의 분위기는 매우 안정적이며,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에서 신라탑의 유형을 본다, 이 탑이 미륵리 사지의 한편에 올라앉아 있는 이유를, 지기를 충족시키는 비보사탑 설이라고 보기도 한다. 비보사탑설이란 도선국사에 의해 제기된 논리로, 땅 기운이 약한 곳에 세워 기운을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김두규 교수는 『풍수지리의문화의 이해』에서 「비보진압풍수 행위란 부족하거나 지나친 것을 눌러주는 풍수 행위로서, 물이 부족한 지역에 연못을 파거나, 골바람이 부는 곳에 나무를 심거나, 잘못된 물길을 돌리거나, 군사적 취약점에 있는 곳에 비보사찰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한 미신행위가 아니라, 정교한 과학적 논리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변과 어우러진 단아한 모습

백제의 석탑은 7세기 이후에 목탑을 석탑으로 변화를 시키면서, 독창적인 조탑의 모습을 보인다. 이에 비해 신라의 경우에는 백제보다 늦은 7세기경에 석탑을 쌓기 시작해, 8세기에 들어서 본격적인 탑의 조성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 초기의 석탑이라고 추정되는 이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면 지방 장인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리의 많은 석조물 등을 보아도 섬세하기보다는 단아하고 장중하다. 삼층의 기단은 먼저 지대석을 놓고, 지대석 위에 하대, 하대중대, 하대갑석의 순으로 하층기단을 구성하고 있다. 하층기단의 돌들은 서로 엇갈리게 놓아, 무게의 중심을 분산해 견실하게 하였다. 그 위에는 4매의 판석을 세워 상대중석을 만들고 상대갑석을 얹어 상층기단을 형성하였는데, 상대중석에는 양우주와 중앙에 탱주를 모각했다.

몸돌은 밋밋하게 조형하였으며, 옥개석은 낙수면이 완만하다. 옥개석의 받침은 5단으로 꾸몄으며, 위에는 4매의 노반을 얹었다. 이렇게 기단을 견실하게 만든 이유도 비보사탑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천년세월을 월악산과 한몸이 된 석탑

중원 미륵리 삼층석탑은 천년의 세월을 월악산과 함께 했다. 뒤로 보이는 월악산이 마치 한 몸인 양 느껴진다. 눈이 쌓인 탑 주변과 군데군데 눈이 쌓인 탑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아마 저 밑에 보이는 미륵대원지의 모든 것을, 이 석탑이 품어 안고 있었을 것이다. 이 삼층석탑이 서 있는 곳이 남북교통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하기에 이 석탑 앞에서 이곳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잠시 멈추어 숨을 돌리고는 했을 것이다. 천년 세월을 그렇게 말없이 서 있는 삼층석탑. 지금은 여기저기 파손이 되고, 탑의 틈새는 벌어져 있지만, 그 단아함은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이다. 이러한 소중한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는 우리 땅의 곳곳이,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을 한다.

삼층석탑을 바라보며 숨을 돌리고 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온다. 천 년 전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 남북으로 길을 잡았을 것이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는 삼층석탑.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 하나를 간직할지 궁금하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