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수원뉴스 시민기자들의 10월 12부터 14일까지, 2박 3일간의 워크숍 둘째 날 찾아갔던 통영의 자랑인 동피랑 벽화마을. 동피랑 벽화마을을 돌아보면서 우리 수원의 팔달구 지동과 꼼꼼히 따져 비교를 한 번 해보았다. 주말을 맞아 동피랑을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은 골목마다 꽉 들어차 있었다.

 

동피랑의 제일 꼭대기에는 통영을 방비하던 동포루가 서 있던 자리였지만, 동포루의 흔적은 그 자리에 서 있는 사진 몇 장이 흔적의 모두이다. 그 아래로 골목마다 온갖 그림이 그려져 있다. ‘동피랑’은 ‘동쪽에 있는 높은 벼랑’이라는 뜻으로, 비랑은 벼랑의 이 지역 사투리이다. 비랑이 변하여 피랑이라 불리는 것이다.

 

통영만 강구안에 정박 중인 이순신 장군의 재현 거북선과 강구안의 저녁노을(위), 아래는 정조대왕의 꿈이라는 수원 화성과 노을빛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야경


 

동피랑과 수원의 지동의 유사점

 

우선 통영 동피랑과 수원 지동의 유사한 점은 무엇일까? 통영 동피랑은 통영에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이다. 좁은 골몰과 촘촘히 붙은 판잣집들이 줄을 지어 서 있던 곳이다. 수원 지동 벽화길 역시 수원에서 낙후된 곳 중 한 곳이다. 또한 동피랑이 벼랑에 조성된 마을이라면, 수원 벽화길 역시 ‘용마루길’이라는 지대가 험한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동피랑의 가장 높은 곳에 포루가 있었다면, 수원 지동벽화길은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창룡문부터 남수문까지의 성을 끼고 있다. 동피랑의 마을 아래 통영의 재래시장인 중앙시장이 있다면, 지동에는 지동시장과 못골시장, 그리고 미나리광시장이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수원 재래상권의 중심지가 된다.

 

이렇게 동피랑과 수원지동벽화길은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동피랑이 전국적으로 유명한데 비해, 수원지동의 벽화길은 아직은 소문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동피랑은 벌써 2년에 한 번씩 새로 그림을 그리지만, 수원 지동벽화길은 지난 해 시작을 해 아직 조성 중에 있다.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의 벽화


 

동피랑과 지동의 차이, 서로 다르지만 비교할 만

 

동피랑은 원래 철거예정지였다. 마을 꼭대기에 자리한 이순신 장군이 설치했다는 통제영의 동포루가 자리했던 곳으로, 포루를 복원하고 공원화하는 계획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2007년 철거될 운명에 처해있던 동피랑은 2008년부터 전국의 미술대학 18개 팀이 벽화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2010년에는 국내 19팀과 외국 작가들 4팀이 참여하여 그림을 그렸다. 최근의 작품은 2012년 4월에 그려진 작품이다. 동피랑의 그림은 일정액의 지원금을 주고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으며, 통영시에서는 몇 채의 빈집을 매입하여 작가들이 이곳에 상시 거주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피랑이 일부 전문가들의 참여로 그려진 것이라면, 수원 지동벽화길은 순전히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자발적인 참여로 그려진 그림이다. 그림 자체로 보자면 동피랑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유치원생부터 70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혹은 아버지와 딸이, 혹은 세 모녀가. 또 친구들끼리 참여하여 소중한 시간을 벽화를 그렸다. 주말이면 이 골목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시끌벅적하다. 모두가 자발적인 참여를 한 아마추어들이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동피랑에 비해 더 뜻이 있는 벽화길이다.

 

 지동 벽화길의 벽화와 벽화를 그리는 유아원생들과 자원봉사자들


 

거기다가 입소문이 나자 삼성전자 등 대기업의 직원들까지 수원 지동벽화길을 조성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동피랑이 좁은 한 동네에 그려진 벽화마을이라면, 수원 지동은 모든 계획을 마치면 3km에 달하는 거대한 벽화마을 길로 조성이 된다. 또한 지동 벽화길은 테마가 있는 그림길이다. 사계절을 만날 수가 있는가 하면, 꿈이 있는 길이기도 하다.

 

동피랑에서 내려다보는 통영은 이름답다. 그곳에는 거북선과 이순신장군의 정신이 있다. 앞으로 펼쳐지는 통영만과 강구안의 일몰은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그렇다면 수원 지동벽화골목에는 무엇이 있을까? 수원에는 정조의 꿈인 화성과 행궁이 있다. 그리고 제일교회 종탑에서 내려다보는 화성의 아름다움이 있다. 또한 종탑 노을빛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일몰의 아름다움은 어느 곳에도 뒤처지지 않는다.

 

‘지동벽화길’ 이런 것이 필요하다.

 

지동제일교회 종탑 꼭대기에 올라 화성을 내려다본다. 종탑을 한 바퀴 돌면 수원의 모든 곳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만큼 명소가 될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지동이 동피랑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우선은 동피랑은 주민들이 직접 참여를 하여 자신들의 주거공간을 관람을 위해 할애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동도 일부는 그러한 곳이 있다. 하지만 동피랑에는 미치지 못한다. ‘열린마을’로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동피랑에는 쉴 곳이 있다. 하지만 지동에는 다리를 편히 쉴 공간이 부족하다. 또한 동피랑에는 사람들이 워낙 많이 찾아들다 보니, 골목길마다 먹을 것 등이 주민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지동에는 꽁꽁 닫힌 문만이 있을 뿐이다. 스스로 문을 열어 그런 것을 주민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유도를 해야만 한다.

 

동피랑 벽화마을 아래 조성된 재래시장인 중앙시장(위) 아래는 수원 지동 시장 앞에서 매주 열리는 각종 공연과 지동의 한 가정 집 옥상에서 열린 옥상음악회 


 

지동에 소재한 서울목욕탕이 얼마 안 있으면 작가들의 공간으로 바뀔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동의 벽화길은 길다. 더 많은 작가들이 이 길에 들어와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누구나 지나가면서 들여다볼 수 있는 그런 공간, 아무라도 작가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있어야만 한다.

 

동피랑은 이미 벽화마을과 재래시장, 그리고 강구안의 거북선 등을 연계하여 즐길 수가 있다. 그것 또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지동은 화성과 단절되어 있다. 관광객들에게 화성과 지동을 연계하는 동선이 필요하다. 또한 지동 벽화길과 전망대, 재래시장과 수원천, 행궁의 무예24기 관람 등의 동선을 끊어지지 않도록 연결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지동은 그 외에도 주말마다 이루어지는 지동교 위에서 펼쳐지는 각종 공연과, 지동 여기저기서 펼쳐지는 옥상음악회, 황금마차 등 동피랑이 갖지 못한 많은 것들을 갖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최대한 부각시켜야 할 때이다. 주민들이 즐기는 것이 아니라, 수원을 찾은 관광객들이 즐길 수 있는 마당으로. 이제는 동피랑을 넘어 전국 최고의 벽화길로 나아갈 때이기 때문이다.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e수원뉴스 시민기자와 담당자 등 30여명이 떠난 ‘시민기자 워크숍’. 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다가 보니, 꽤 많은 양의 사진을 찍었다. 700여장의 사진을 정리하다가 그 안에 꽤 그럴 듯한 풍경이거나, 아니면 시민기자들이 놓친 곳들도 있어, 내 나름대로 10경을 정해본다.

 

사실 이렇게 워크숍을 떠나, 2박 3일을 돌면 나는 나름대로 녹초가 된다. 쉴 새 없이 찾아다니고, 사진을 찍어대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딴 분들은 몰라도 이미 20년이 넘게 우리 문화재를 찾아 전국을 헤맨 나이기 때문이다. 장서에는 3,000여장의 CD에, 전국에 산재한 문화재을 퐐영한 자료들로 차 있다.

 

 

 

먼저 걷고 돌아본 이번 워크숍

 

이번에도 다를 바가 없다. 단체가 함께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만큼 더 열심을 내어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소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혼자 미친 듯 돌아다닌 답사 길에 미안함이 조금 가시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해설사의 설명 중에는 들어야 할 이야기도 많고, 모르고 있던 부분도 있다. 이참에 꼭 한마디 할 만은 해설사들이 너무 오래 사람들을 붙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 시간에 한 곳이라도 더 많이 보아야 할 사람들이다. 시민기자들도 기자이다. 기본적인 소양을 이미 갖추고 있는 분들을, 생 초보 다루듯 해서야 그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가?

 

사실 난 어디를 기거나 해설사들의 설명은 일체 거절하는 편이다. 문화재 기사를 20년 넘게 써 온 사람으로서, 그 해설이 오히려 글을 쓰는데 방해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첫 느낌을 글로 쓰는 나에게는 사실 해설을 듣는다는 것 자체도 부담이 된다. 이번 워크숍에서도 먼저 뛰고, 하나라도 더 취재해야 하는 나로서는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사비를 드려 통영을 가기도 쉽지 않으니 말이다.

 

 

 

나름대로 정한 워크숍에서 만난 풍광 10경

 

이번 2박 3일간의 워크숍 기간 중 해설사의 안내로 돌아본 시민기자들이 놓친 부분도 있을 테고, 함께 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10경을 선정해보았다. 제일먼저 전주 한옥마을의 지붕이다. 해설사가 안내하는 길로 따라갔다면, 이목대를 오르는 길에 있는 포토죤을 만날 수가 없다. 지붕과 지붕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한옥마을의 지붕은, 사진을 찍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거치는 곳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통영시 명정동에 소재한 사적 제236호인 충렬사 입구 건너편, 명정동 194번지에 자리한 ‘정당샘’이다. 이 샘은 1670년 제51대 통제사인 김경이 팠다고 전해진다. 충렬사에서 사용했다고 하는 이 샘은 처음에는 하나를 팠는데 물이 탁해, 또 하나를 곁에 팠더니 믈이 맑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샘 이름은 ‘일정(日井)’과 ‘월정(月井)’이라고 붙이고, 일정은 충무공 향사에 사용하고, 월정은 주민들이 사용했다. 이 두 물을 합하여 ‘명정’이라고 부른다. 이 우물곁으로 시체나 상여가 지나가면 물이 흐려진다고 하여, 지금도 이 우물곁으로는 상여가 지나지 못한다. 햇볕을 받지 않으면 물이 흐려진다고 하는 명정은, 우물을 보호하는 지붕을 덮지 않고 있다. 한번은 그 위에 팔각정을 지었더니, 마음에 돌림병이 돌았기 때문이란다.

 

두 번째는 사적 제402호인 통제영지 내에 있는 국보 세병관 동편 문밖에 서 있는 비석군이다. 통제영지는 통영시 문화동 602번지 일원에 있는 삼도수군 통제영의 본영이다. 당시에는 100여 동의 전각들로 차 있었다고 하니, 그 위용이 실로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에는 현재 국보 제305호인 세병관을 비롯하여, 운주당, 백화당, 중영, 병고, 장원홍예문, 교방청, 산성청, 12공방 등이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통제영지를 복원 및 보수를 하느라 부산하다. 세병관 동편 작은문을 나서면 만나게 되는 수많은 비석군들. 출입을 시키지 않아 일일이 확인을 할 수가 없지만, 역대 통제사들의 선정비 등이 아닐까 한다. 그 밑으로는 전각 안에 비가 하나 서 있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112호인 ‘두룡포 기사비’이다.

 

이 기사비는 통제사를 지낸 이경준의 치적을 기록한 이경준 사적비로, 조선조 인조 3년인 1625년에 제16대 통제사인 구인후가 세웠다. 이경준은 제5대와 9대 두 차례 통제사를 지냈으며, 두룡포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한 무장이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는 동피랑벽화마을에서 내려다보이는, 통영항의 안편 강구안에 정박한 거북선과, 그 거북선이 있는 강구안의 저녁노을이다. 첫째 날과 둘째 날 돌아본 전주와 통영에서 만난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이충무공 유적을 돌아보다

 

세째 날인 14일, 통영유람산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찾아간 사적 제113호인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에 소재한 이곳은 선조 25년인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한산대첩에서 왜선을 섬멸한 후, 선조 26년부터 30년인 1597년까지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삼았던 곳이다. 두억포에는 임진왜란 때 전함인 판옥선과 척후선 등 100여척이 정박해 있었으며, 740여명의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매표소인 한산문을 들어서면 해안가로 길게 제승당으로 가는 길이 있다. 그 바닷길에 서서 물을 바라보면 물속 바위에 하얗게 달라붙은 조개껍질이 보인다. 이 또한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과 어우러진 아름다움이었다. 제승당 곁에 서 있는 수루에 올라가면 한산만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한산만은 통영의 미륵도와 한산도 사이에 있는 만으로, 이곳은 안쪽은 넓고 입구가 좁다. 이 한산만은 수심이 낮아 소형선박들의 출입이 가능한 곳이다. 크고 작은 섬들과 낮은 수심, 여기저기 만과 포구들을 이용한 이순신 장군의 전략이 한산대첩의 승리를 만들어 낸 곳이기도 하다.

 

아홉 번째는 제승당 안에 있는 적송들이다. 적송은 우리의 소나무로 나무가 단단하고 벌레가 먹지 않으며, 소나무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목재감이다. 이러한 적송이 유적지 안에 숲을 이루고 있다. 수백 년은 되었을 것 같은 소나무들의 아름다움 또한 멋지지 아니한가? 유적지 관람 후 다시 통영으로 돌아오는 배 뒤편에는 갈매기들이 따라붙었다.

 

승객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받아먹기 위해 따라오는 갈매기 떼. 배가 지나가면서 생기는 물길과 허공을 비상하여 과자를 따라 물속으로 풍덩 빠져드는 갈매기들. 그렇게 전주와 통영의 워크숍에서 만난 광경들은, 앞으로도 한참이나 기억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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