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시 가금면 창동리를 지나다 보면, 길가에 5층 석탑과 석불이 서 있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 동쪽의 낮은 산 쪽으로 쇠줄로 이어 만든 철렁다리를 건너면 돌계단이 나타난다. 낮은 구릉을 넘어서면, 강 쪽 밑으로 가파른 계단이 보인다. 낙엽이 쌓이고 눈이 채 녹지 않은 계단을 내려가려면 조심을 해야 한다.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영락없이 강물로 처박힐 판이다. 강가로 내려서면 우측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높이 6m가 넘는 거대한 마애불이 조성이 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의 자화상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이 마애불이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아마 선조 25년인 1592년 4월 26일부터 3일간 벌어진 인근의 탄금대전투로 인해, 이런 이야기가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왜군과 탄금대에서 전투를 한 신립은 적병 수십 명을 죽이고, 전쟁에 패하게 되자 스스로 탄금대 앞 남한강으로 뛰어 들었다. 같이 이 전투에 참여했던 부장 김여물과 이종장도 신립의 뒤를 따라 전사하였는데, 이 일로 인해 왜군은 충주성에 입성하게 된다.

 

결국 신립의 패전으로 인해 선조는 한양을 떠나 평안도로 피난을 하게 되었다. 이 남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마애불이 왜 신립 장군의 자화상이라고 할까? 그것은 아마 마을사람들의 염원인지도 모르겠다.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한 무장 신립의 마음을, 남한강을 바라다보고 있는 이 마애불과 같다고 생각을 했던 것일까? 아마도 멀지 않은 곳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버린, 신립 장군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그러한 전설과 같은 이야기는 마을 사람들의 소박한 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대적으로 많은 차이가 나는 이러한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때로는 황당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랴. 마을 사람들 마음속에 전해지는 그 내적 사고가, 오늘날 우리들의 끈끈한 정을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마애불을 보기 위해서는 가파른 계단을 내려서야 한다. 낙엽과 눈이 쌓여 미끄럽다. 아래로는 남한강의 물이 보인다.


충주지역의 대표적인 마애불

 

남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연 암벽에 조성을 한 이 마애불은 윗부분은 돋을새김을 하였다. 아래로 내려오면서 선각으로 처리를 한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낮은 돋을새김을 한 것이 선각처럼 보인다. 아래는 생략이 된 듯한 이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거대마애불에 속한다.

 

크고 길게 찢어진 눈꼬리, 큼직한 코와 귀 등이 자애로움보다는 근엄함을 엿보게 한다. 흡사 근엄한 장수상의 상호다. 그래서 신립 장군의 자화상이라고 했던 것은 아닌지. 법의는 통견으로 그려냈는데, 구불구불한 선을 어찌 저리도 부드럽게 처리를 할 수 있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절벽에 그려낸 마애불의 법의 자락이 바람이라도 불면 너풀거릴 것만 같다. 11세기 고려 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창동 마애불. 어찌 보면 투박하기 만한 이 마애불이 오히려 정감이 드는 것은, 토속적인 느낌이 들기 때문인가 보다.

 


마애불의 윗부분은 돋을 새김을 하였다. 찢어진 눈꼬리와 뭉뚝하고 큰 코가 위엄있게 보인다. 그래서 신립의 자화상이라고 했을까?


통견으로된 법의. 선각인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돋을새김을 한 것이다. 법의의 굴곡된 주름이 자연스럽게 너풀거리는 듯 하다.


어떻게 이런 곳에 조성을 한 것일까?

 

창동 마애불은 발목 밑의 부분이 생략이 되어 있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생략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암벽에 마애불을 조성한 밑 부분의 바위가 아래쪽으로는 움푹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저 부분이 저렇게 들어간 것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일까? 만일 그 밑 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이라면, 그 부분에 발이 있었을 것이다. 전체적인 크기로 보아 그 움푹한 곳이 바로 발목 부분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계단을 놓고 마애불의 앞쪽에도 난간을 둘러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지난 세월에는 강물이 발목까지 출렁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곳에 마애불을 조성을 할 수가 있었을까? 일반적으로 마애불은 산이나 들에 조성한다. 자연적인 절벽을 이용해 마애불을 조성하지만, 이렇게 강가에 조성을 한 예는 극히 드물다. 그것도 당시의 지형적인 여건이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주변을 보면 이곳이 물에 잠기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위에서 밧줄이라도 타고 내려온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해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마애불의 밑을 보면 움푹 들어가 있다. 저 곳이 떨어져 나간 부분이라면 발이 있었을 것이다.


커다란 바위에 조각을 한 창동 마애불. 고려시대의 거대마애불이다.

 

전국을 다니면서 많은 문화재들을 본다. 그 하나하나가 정성이 가득하다. 아무리 사소한 문화재라고 해도, 그것을 만든 장인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그 정신이 오래도록 문화재를 지켜 온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즈음 살아가는 사람들이 쉽게 생각할 수도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 그것은 우리 선조들의 노력과 땀이기에, 우리가 그것을 눈여겨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확한 표현기법은 알아보기가 힘들다.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인해 그 형체조차 식별이 어려운 까닭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되면, 괜히 마음 한편이 우울해지기도 한다. 충남 보령시 내항동 767-10에 소재한 충남 문화재자료 제317호인 ‘대천 왕대사 마애불’은 그렇게 바위 암벽에 오랜 시간 서 있었다.


바위 암벽에 음각을 한 왕대사 마애불은 조성시기를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 왕대사가 있는 산을 ‘왕대산’이라고 부르는데,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절의 이름도 ‘왕대사’라 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미륵정토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더운 날씨에 답사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땀도 땀이지만 걸음걸음이 천군만근이기 때문이다. 미쳐 물이라도 준비하지 못하면, 이것은 답사가 아닌 극기훈련에 속한다. 그 정도로 한 여름철의 답사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왕대사 마애불은 왕대사 대웅전을 바라보고 좌측 바위에 조성하였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그 형체조차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저 단순하게 절집을 찾았다고 하면, 마애불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이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바위에 새겨진 거대마애불이 속하는 이 마애불은, 그 형태로 보아 통일신라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선각으로 조성한 왕대사 마애불


왕대사 마애불은 선각으로 조성을 하였다. 커다란 바위암벽의 평평한 면을 이용하여 전체에 차게 조성을 하였는데, 안면의 윤곽은 제대로 파악조차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미륵불로 조성을 한 이 왕대사 마애불은 법의의 형태와 몸의 뒤에 새겨진 신광 등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용화세상의 기원하는 민초들의 염원이 깃들어 있는 미륵불로 알려진 왕대사 마애불. 나발과 두광, 상호 등은 마멸이 심해 알아볼 수조차 없다. 하지만 목에는 희미하지만 투박하게 표현한 삼도가 보이고, 광배는 배 모양의 주형거신광배로 보인다.


이 왕대사 마애불은 경순왕과의 관계로 인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나 거대마애불인 점 등으로 볼 때, 오히려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왕대사 경내에서 한 숨을 돌리다.


 

 

마애불을 돌아보고 난 뒤, 왕대사 경내를 찬찬히 돌아본다. 움직일 때마다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이런 날 대웅전에 들어가 참례라도 한다면, 대웅전 마루에 땀방울로 흥건히 젖을 듯하다. 그저 어간문 앞에서 잠시 목례를 하고, 낮은 담장 너머로 펼쳐지는 앞을 바라본다.


잘 조성이 된 논에는 한 여름의 열기에도 벼들이 파랗게 자라있다. 아마도 저 논에도 부지런한 농부들의 땀이 물이 되어 흘렸을 것이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 한 점이 땀을 식힌다. 그저 바람이라도 시원하게 불어주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남들은 피서를 간다고 난리들인데, 어쩌자고 이 무더위에 답사를 하는 것인지. 그것도 팔자려니 하면, 무엇이 더 행복할 것인가? 바람 길을 따라 또 길을 나서보련다.

 

경기도 여주군과 양평군을 잇는 남한강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남한강의 세 곳의 보중 맨 아래 자리하고 있는 이포보를 아래주고 있는 산성이 있다. 바로 파사산성이다. 사적 제251호로 지정돼있는 파사산성은,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와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의 경계에 있는 파사산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남서쪽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삼국시대의 석축산성이다.

 

이 파사산성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정상을 지르는 길이 있다. 성에서 내려와 능선 길을 따라 조금 가다가 보면, 이정표가 그 아래 마애불이 80m 거리에 있음을 알려준다. 밑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산 정상 밑에 거대한 바위가 보인다. 이 바위를 인위적으로 깎아 마애불을 선각하였다. 상자포리 마애여래입상은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 36-1에 소재하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고려시대의 특징인 거대마애불

 

선각을 한 마애불은 고려 시대의 특징인 거대마애불이다. 인위적으로 깎아 만든 수직절벽에 높이 5.5m 정도의 큰 마애여래입상을 선각했다. 희미하긴 하지만 그 모습은 당당하다. 거대마애불들 중에는 규모가 커서 비례가 안 맞는 경우도 있지만, 상자포리 마애불은 규모가 큰데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규모가 알맞다.

 

상자포리 마애불은 이중의 두광을 갖추고 있으며, 어깨부문이 각이 져서 당당해 보인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법의를 걸치고, 연꽃 대좌 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선각이 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에 선각을 한 선이 일부 지어지기는 했지만, 그 당당함을 알아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사각형인 얼굴에 어깨까지 늘어진 귀와 큰 눈과 코, 그리고 입 등 거대 마애불답게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며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팔꿈치가 각이 되게 가슴 앞에 두었으나, 왼손은 마모가 되어 알아보기가 힘들다. 이러한 표현은 보물 제822호인 이천 설봉산 영월암 마애불과도 같은 표현기법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천년 세월의 서원을 바위에 담아

 

많은 선각을 한 마애불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비바람에 씻겨 점차 그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다. 상자포리 마애불의 경우에도 선각을 한 선들이 많이 희미해졌다. 천년 세월을 그렇게 돌에 새겨 놓았으니, 점차 사라져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선각 마애불들을 보존할 수 있는 대책이 하루 빨리 서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인가도 모른다.

 

 

 

어린 소녀가 열심히 마애불을 향해 절을 한다. 무슨 기원을 하고 있을까? 주말과 휴일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상자포리 마애불. 마애불의 동쪽 바위틈에서는 맑은 물이 솟아나온다.

 

목도 마르고 날도 더운지라 바가지에 떠서 한 모금을 마신다. 속이 시원하다.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남한강 물줄기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유난히 반짝인다. 상자포리 마애불의 주변에서는 기와조각이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도대체 저 바위를 어떻게 타고 내려오면서 선각을 한 것일까? 마애불을 만날 때마다 갖는 질문이다. 이곳에도 절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점차 희미해져가는 선각 마애여래입상을 보면서,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르면 그저 바위벽만 남아있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 문화재로 지정된 많은 마애불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데도 속수무책이다. 자연적인 풍화를 막을 수는 없는 것일까? 언제 또 다시 찾아올 줄 모르는 마애불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저 아래 흐르는 남한강이, 생명의 강이 될 수 있도록 보호해 달라는 속마음과 함께.

도솔천(兜率天)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 위에 도솔천이 있다고 한다. 유순이란 고대 인도의 거리 단위로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 대략 11~15㎞라는 설이 있다.

 

도솔천은 육계(六界) 육천(六天) 가운데 제4천으로 미륵보살이 사는 곳이라는 것이다. 도솔천에는 내원과 외원이 있는데,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토이며, 외원은 천계 대중이 환락하는 장소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내원과 외원이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 안 깊숙한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도솔산에 자리한 선운사

 

고창 선운사 안으로 들어가면, 선운산 깊숙한 곳에 도솔암이 자리하고 있다. 선운산은 높이 336m이다. 본래 도솔산(兜率山)이었으나 백제 때 창건한 선운사가 유명해지면서, 선운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선운산의 주변에는 구황봉(298m)·경수산(444m)·개이빨산(345m)·청룡산(314m) 등의 산들이 솟아 있다. 선운사를 지나 도솔암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그러고 보면 외원에서 내원으로 가는 길인가 싶다.

 

도솔암 극락보전을 지나쳐 위로 오른다. 극락보전은 아미타여래상을 주불로 모시는 곳이다. 흔히 극락전 혹은 무량수전이라고도 명명한다. 조금 오르니 눈앞에 펼쳐지는 기암괴석과 절경들. 순간 자연에 압도당한다. 나한전이 자리하고 있다. 도솔암 나한전은 아라한을 모시는 곳이다.

 

나한은 소승불교의 수행자 가운데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성자를 말한다. 아주 오랜 옛날 이곳 용문굴에 살고 있던 이무기가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혀, 인도에서 나한상을 모셔다가 안치하였더니 이무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지어진 나한전은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천년 세월의 마애불, 그 모습에 압도당하다

 

나한전을 지나면 깎아지른 바위 암벽에 새긴 보물 제1200호인 도솔암 마애불을 만난다. 아마 도솔천을 오르기 위해 이 모든 것이 도움을 주지나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마애불 중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되는 도솔암 마애불은 미륵불로 추정된다. 결국 미륵정토를 가기 위해서는 주변에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연결이 된다는데 놀랍기만 하다.

 

지상 6m의 높이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좌정하고 있는 미륵불. 그 높이가 5m, 폭이 3n나 되며 연꽃문양을 새긴 계단모양의 받침돌까지 갖추고 있다. 마애불의 머리 쪽을 보면 구멍이 뚫려 있고, 구멍 속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보인다. 아마 이 마애불을 보호하기 위한 전각이 있었던 것 같다. 동불암이라는 누각을 세웠던 자리라고 한다. 마애불을 올려다보면서 마음속으로 기원을 한다. 이 모진 세상에서 벗어나 피안의 세계인 도솔천으로 올라가겠다고.

 

 

 

도솔암 내원궁.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전각이 하나 보인다. 마침 사시예불 시간인지 염불소리가 청아하다. 상도솔암이라고 부르는 도솔암 내원궁은 바로 미륵정토인가 보다. 거대한 자연 바위 위에 초석만을 세우고 전각을 지었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본다. 주변 경관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고통 받는 중생들을 위해 지장보살을 모신 내원궁. 보물 제280호로 지정이 된 이 지장보살은 고려 후기의 불상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꼽힌다. 사후세계의 주존인 지장보살좌상을 모신 이 내원궁이야말로 인간이 고통 받는 사바세계에서 가장 이상형의 피안인 듯 하다.

 

 

 

누가 세상에 태어나 고통을 받고 싶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사람이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작은 행복만이라도 소유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도솔암 내원궁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면서, 이곳이 바로 도솔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결국 마음 하나에 도솔천이 있음을 깨닫는다.

충청남도 천안시 풍세면 삼태리 산 27번지, 태학산의 해선암 뒷산 기슭 큰 바위에 높이 7.1m나 되는 거대한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이 마애불을 해질녘 찾아가면 백제의 미소라는 서산 마애삼존불과는 또 다른, 고려의 은은한 미소를 만나볼 수 있다.

바위를 깎아 돋을새김으로 처리한 삼태리마애불은 고려시대 거대마애불의 완벽한 예술품이라고 평가를 할 만하다. 불상의 전체적인 형태나 얼굴 모습, 옷주름의 표현 등에서 고려시대의 불상 양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마애불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보물 제407호로 지정된 삼태리마애불의 얼굴 부분은 바위의 주변을 깎아내 돋을새김으로 조각하고, 몸의 부분은 선각처리를 하였다. 이는 고려 후기 마애불의 일반적인 양식으로, 이 마애불이 만들어진 시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즉 거대한 마애불이라는 점, 그리고 일부를 돋을새김 하여 부분 강조를 한 점 등, 고려 마애불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런 학술적인 면이 아니라고 해도, 삼태리마애불은 지역적 연고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통일신라 후기 이후 이 지역의 특징이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백제의 미소 못지않은 고려의 미소.

민머리 위에는 둥근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솟아 있다. 삼태리마애불의 특징은 바로 이 머리상투 부분이다. 큰 바위에 솟아나게 만든 이 상투부분이 거대한 바위 위로 솟아나 있어, 흡사 큰 바위에 조각을 한 마애불을 갖다 붙인 듯한 느낌이 들게 조성하였다. 살이 오른 넓적한 얼굴과 길게 치켜 올라간 눈, 커다란 코와 작은 입으로 인해 이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나 그 근엄한 표정 중에서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보인다. 해질녘에 찾아가면 그 신비의 미소가 더욱 느껴진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는 삼태리마애불. 아마도 이 마애불을 조성한 장인의 마음이 그렇게 여러 차례 변화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긴 시간 이 마애불을 조성하면서 점차 마음의 문을 열어간 듯하다. 삼태리마애불은 참으로 특이하게 생겼다. 목이 짧아서 목에 있어야 할 3줄의 삼도가 가슴까지 내려와 있는 것도 특이하다. 법의는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묵직하게 처리하였다. 상체와 양쪽 옷자락은 세로선의 옷주름을 표현하였고, 하체에는 U자형의 옷주름을 새겼는데 옷주름은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지역적 특성이 강한 마애불

두 손은 가슴까지 들어
,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했으며 오른손은 왼손 위에 손등이 보이도록 하였다. 이런 수인은 고려시대의 미륵불에서 나타나는 수인과 같은 것이어서 이 마애불이 미륵불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마애불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은, 경기도 안성과 충청도 충주, 천안 등에서 흔히 나타나는 미륵신앙이 강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삼태리마애불 역시 지역 특성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애불의 윗부분 바위에는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 미륵불을 보호하기 위한 전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거대한 마애불을 바라다보고 있노라면, 세상에서 찌든 시름을 다 잊게 된다. 그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겼으면서도,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를 지켜내고 있는 삼태리마애불. 해질녘 바라다본 마애불의 미소에 마음속에 가득한 세상을 향한 미음이 봄눈 사라지 듯 한다. 마음이 답답하고 미음이 가득하다면, 이 삼태리마애불을 찾아가 고려의 은은한 미소를 바라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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