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안타깝다. 사실 지난 12일 정재만교수의 죽음을 듣고 며칠 간 마음이 불안한 상태였다. 정교수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79년이었으니, 그 때만 해도 젊은 혈기가 넘칠 때였다. 당시 국립무용단이 제23회 정기공연으로 춘원 이광수 원작의 꿈을 김지일 극본, 송범 안무로 ··이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렸는데, 그때 정재만 교수를 처음 만났다.

 

당시는 무용음악을 작곡하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아 그 작품의 작곡을 맡은 것이 인연이 되어 정교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시 더블게스트로 주인공을 정했는데 남자 주인공은 국수호 교수와 정재만 교수였고, 여자주인공은 박순자씨와 단송 홍금산 선생이었다. 그 이후 정교수와는 만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양평에서 벽사 춤 아카데미 강습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당시는 신문을 맡아 운영했기 때문에 당연히 취재를 간 것이다. 벽사는 고 한성준 선생의 호이자, 선생의 춤을 물려받은 따님인 한영숙 선생의 호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재만 교수도 벽사라는 호를 사용했으니 3대 벽사가 되는 셈이다.

 

 

오롯이 스승의 춤을 온전히 후대에 전승을 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정재만 교수. 나이가 동년배인 바람에(66) 친구려니 하고 생각하지만, 늘 사는 곳이 달랐다. 정재만 교수는 오직 후대를 키우겠다고 학교와 연구소 등을 다니면서 생활을 했고, 나는 역마살이 끼어서 팔도를 내 집처럼 휘돌아 다녔으니 만날 일도 별로 없었던 것만 같다.

 

그래도 이야기가 나오면 늘 솔깃해서 듣고는 했던 것이 바로 그의 춤 세계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인 한영숙류 승무 보유자이기도 한 정재만 교수. 지난 12일 익산에서 제자 강습회를 마치고 부산으로 이동하던 중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고나서 한참이나 멍멍한 시간을 보냈다.

 

화성 정남면 출신 춤꾼 정재만

 

불귀의 객이 된 정재만 교수는 1948년 경기도 화성군 정남면에서 태어났다. 정교수는 우연한 기회에 송범무용연구소에 들어가 한국 춤과 인연을 맺었다. 이곳에서 어린 정교수를 발견한 한영숙 선생은 그를 제자로 데려가 승무를 가르쳤다. 이후 그는 세종대와 숙명여대에서 30년이 넘게 후학을 양성하다, 지난해 정년퇴임했으며 명예교수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춤도 웰빙이 필요합니다.” 이미 10여 년 전에 정재만 교수는 우리 춤도 달라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2004년 양평군에 소재한 한화리조트 무궁화 홀에서 100여명의 전수생들에게 ()벽사춤 아카데미 2004 하계수련회를 열고 있는 정재만 교수를 만났을 때 한 말이다.

 

그리고는 또 10년이 지났다. 그리고 보니 정교수와는 한번 만나고 나면 10년 이상을 만날 일이 없었다. 가끔 통화정도만 하는 사이였으니 말이다. 이제 10년이 지나도 다시 볼 일이 없게 생겼다. 그것이 마음이 아프다. 가장 아픔인 것은 아직도 할 일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많은 일을 혼자 감당해 내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제 고인이 된 춤꾼 정재만교수. 그곳에서라도 늘 아름다운 춤을 출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이 세상에 오만가지 상념일랑 훌훌 털어버리고 마음 편하게 떠나시기를 바란다.

-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무당(巫堂)’, 사회에서는 심심찮게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일부 종교에서는 심할 경우 마귀로 표현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 속에서 무당은 한 때 최고의 권력자요, 신을 대신하는 집제자이기도 했다. ‘()’란 글자를 혹자는 이렇게 해석을 하기도 한다. 하늘(무자의 위 획)과 땅(무자의 아래 획)이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있다(무자 안의 두 개의 사람 인). 그리고 그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l이을신자이다) 것이 바로 무당이다.

 

무당은 본인이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무당은 신내림이라는 무의식을 통해 태어나거나, 지연신통(自然神通)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무당이 된다. 하기에 무당은 어쩔 수 없이,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접신이 되는 과정을 거치는 강신무(降神巫)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10세부터 신병을 앓았다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235-16에 거주하는 임영복(, 59). 굿판에서는 소리 잘하고 춤 예쁘게 추는 무당으로 소문이 나 있다. 지금은 내놓고 누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나는 무당이다라고 말을 할 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역사가, 수많은 외래종교가, 혹은 사회가 이들을 색안경을 끼고 보았기 때문에, 오래도록 고통 속에서 살아왔단다.

 

어려서부터 정말 힘들게 살아왔어요. 위로 오빠가 있었는데 세 살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데요.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그냥 사용하려고 했데요. 부모님이 이혼을 하시고 나서 아버지를 따라 증평으로 내려갔어요. 거기서 집을 하나 구해 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아버지가 몹시 편찮으셔서 그 집과 땅을 처분하고 고모네 집으로 들어갔죠.”

 

10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환란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몸이 자주 아프고 병치레를 해 고모가 점집을 찾아갔더니, 무당이 하는 말이 그 아이를 무당 집에 양녀로 주어라. 그래야 그 아이가 살 수 있다고 하더란다. 그때만 해도 남의 집에 양녀로 들어가면, 말이 좋아 양녀지 식모나 종과 다름없이 부려먹고는 할 때였다. 할 수 없이 고모가 데리고 살다가 23세에 결혼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부터 이미 신병이 시작한 것인데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젊어서 결혼을 해 벌써 37년이란 세월을 살았네요.”

 

결혼 후 심해진 환각과 환청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 역시 하나 뿐인 딸을 찾았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의 소개로 현재의 남편을 만났다. 시집을 오고 나니 시집에는 시부모님들과 삼촌들까지 대가족이었다. 새벽이면 일어나 연탄불에 밥을 해야 하는데, 매일 5개씩의 도시락을 싸야 했단다.

 

그런데 밥을 하고 솥뚜껑을 열면 밥 솥 안에 구더기 같은 것들이 뱀처럼 바글거렸어요. 그러면 놀라서 곁에 있는 설거지통에 물을 들이붓고는 했죠. 아침마다 수도 없이 골목길을 파고 한 솥씩 밥을 갖다가 묻었어요. 이 집에서 오래 살다가는 아무래도 제 명을 못 살 것 같아 남편을 졸라 분가를 했죠.”

 

 

그렇게 나가서 생활을 한 곳이 바로 병점이라고 한다. 집에 있으면 날마다 머리가 빠개지듯이 아프고 배가아파 기침을 하면 병원으로 달려가고는 했다. 피가 넘어오는데도 병원에서는 신경성 위장염이라고 했단다.

 

의사에게 욕을 하고는 했어요. 각혈을 하는데 무슨 신경성 위장병이냐고요. 남편은 그런 나를 믿지 않고 사람으로 대우도 해주지 않았어요. 그런 상태에서도 제가 계속 내림을 거부하니까 잡자기 둘째가 아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때는 정말 겁이 덜컥 났죠.”

 

믿어주지 않는 남편으로 인해 고통도 받아

 

이미 신통이 되어있는 상태라 환청과 환각으로 참을 수가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심지어는 3개월이나 6개월씩 대소변을 받아내고는 할 정도로 심하게 몸이 망가졌다. 몸무게도 40kg을 조금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남편에게 사업을 그만두라고 했다. 남편이 망할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남편은 무시를 하고 듣지 않았다.

 

남편의 사업이 망하는 것이 눈에 보여 그만두라고 했더니 네가 뭔데 그만 두라느냐고 무시를 하데요. 결국엔 말 그대로 망했지만요. 내림을 받고서도 풍파는 가시질 않았어요. 우선은 시집에 알릴 수도 없었지만 제일 먼저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도 친구를 마음대로 집으로 한 번도 데려오질 못했으니까요. 거기다가 집에서 징소리가 나면 아이들이 제 시간에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요. 부모님들을 거역하기 일쑤였죠.”

 

 

그렇게 내림을 받고도 한참이나 고통을 받았단다. 현재 살고 있는 수원 연무동 시장 인근에서 고기 집을 시작했는데 그것도 다 날려버렸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생전 장사라고는 해보지 않았으니, 남들에게 이용만 당했다고.

 

기자(祈子)라면 제대로 굿을 해야

 

한 번은 남편이 운영하는 회사에 스님이 찾아 오셨데요. 그런데 남편을 보고 집안에 우환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손금을 좀 보자고 하더니 손금 안에서 여인이 고깔을 쓰고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보이더라고 했데요.”

 

그때는 이미 내림을 받고난 후였다. 처음에 내림을 받고난 후에는 상당히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일도 꽤 많았다. 하지만 남편은 심하게 단속을 시작했고 애꿎은 소리를 하기 일쑤였다. 굿은 보통 밤에 하기 때문에 밤새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어디 가서 누구와 무슨 짓을 하고 왔느냐고 다그쳤다는 것이다.

 

참 힘든 세월이었어요.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없애고 나서 전안 문을 걸어 잠가놓고 계룡산으로 들어갔죠. 거기서 단판을 지으려고요. 참 울며불며 매달렸더니 제자야 나하고 같이 팔도유람이나 하자는 말이 들렸어요. 그리고는 벌써 10년 정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지금은 남편이 제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어요. 아이들도 이젠 다 커서 이해를 하고 있고요.”

 

 

무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누구나 다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임영복씨는 어려서부터 신병이 와 있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해 더 많은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벌써 신내림을 받은지 30년이 다 되어간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뀐 세월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때의 고통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제가 기자들에게 굿과 소리를 가르치는 것은 저라고 남들보다 잘난 것은 없지만, 그래도 신령을 모시는 사람들이 절차를 무시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떻게 신령의 이름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굿거리 제차를 무시하면서 밥을 먹을 수가 있나요. 그래서 지하에 조그마한 연습실을 조성해 놓고 사람들을 일대 일로 가르치고 있어요.”

 

60년 세월 중에서 50년을 시달렸다. 그나마 이제야 겨우 좀 편안해졌다고 한다. 앞으로도 신령의 사람으로 생활을 해야 하지만, 그래도 내 운명이 그렇다면 좀 더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했단다. 문을 나서는데 인사를 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귓가에 오랜 여운을 남긴다.

 

어차피 이렇게 고통을 받고 살 운명이라면, 차라리 아프지나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무당을 택했어요. 남들이 내 인생을 살아주는 것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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