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곡성군 오산면 가곡리 2에 소재하고 있는 보물 제1322곡성 가곡리 오층석탑오산면 가곡리 매봉 북쪽 경사면에 위치한 절터에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얹은 모습이다. 가곡리 오층석탑은 그동안 보아왔던 많은 석탑과는 달리 처음 본 순간부터 발길을 붙든 탑 중의 하나였다.

 

가곡리 오층석탑은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곡리 석탑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반형 석탑의 양식은 물론,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건립되던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가곡리 오층석탑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각 층의 지붕돌 위에, 또 다른 돌로 몸돌받침을 만들어 몸돌을 괴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몸돌에 조성한 감실에는 누가 있었을까?

 

가곡리 오층석탑은 2단의 기단을 조성했다. 아래기단은 여러 장의 석재를 이용해 3단으로 쌓아올렸다. 아래기단에는 탱주와 양우주 등 기둥 모양이 없으나, 윗기단에는 모서리기둥인 양우주가 새겨져 있다. 2단으로 된 기단석 위에 5층의 비몸인 몸돌을 쌓아올렸는데, 1층 몸돌에 비해 2층서부터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몸돌에 비해 5층의 지붕돌은 알맞은 비례로 줄어들었는데, 1층 몸돌은 4매의 돌, 2층 이상의 몸돌은 1매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각 몸돌에는 모서리기둥인 양 우주를 새겨 넣었으며, 2층부터 5층까지의 몸돌 남쪽 면에는 네모난 홈을 파서 감실의 효과를 내었다. 아마도 이곳에는 작은 부처의 상을 모시지는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몸돌 밑에 받침돌을 조성

 

오층석탑의 1층부터 4층까지의 지붕돌의 받침은 3단이고, 5층 지붕돌받침은 2단으로 되어 있다. 지붕돌 윗면의 경사는 완만하나 양끝의 귀마루가 매우 두텁게 표현되어 있다. 백제계 탑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백제계 탑의 특징으로, 이 가곡리 오층석탑이 백제계 석탑을 모방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지붕돌의 처마 선은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 이르러 위로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런 모습이 비상하는 듯한 자연스러움을 보여준다. 가곡리 오층석탑은 특징은 층마다 지붕돌 위에 또 다른 돌로 몸돌받침을 만들어 몸돌을 괴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이렇게 층마다 몸돌받침을 조성해 놓아, 탑의 높이가 한층 더 높아졌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석탑

 

이 석탑은 맨 위부분인 상륜부를 제외한 각부의 부재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고,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반형 석탑의 양식은 물론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건립되던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석탑은 담양 남산리 오층석탑(보물 제506)과 매우 유사하다. 특히, 탑신과 지붕돌에 나타난 표현양식과 더불어 몸돌받침이 있는 점은 고려시대 석탑의 대표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백제탑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멋을 보여주고 있는 가곡리 오층석탑. 해는 벌써 긴 그림자를 남기고 있는데, 그곳을 떠나기가 아쉽다. 조금만 더 살펴보았으면 하는 것이, 답사를 하면서 매번 이렇게 조급한 걸음에서 오는 조바심이다. 언제나 마음 편하게 관람을 하는 마음으로 문화재를 대할 수 있으려는지.

돌 하나하나를 다듬어 칠층 높이의 땀을 쌓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것일까? 보물 제459호인 ‘장락동 칠층 모전석탑’. 제천시 장락동 현 장락사 앞에 서 있는 모전석탑은, 우리나라에 몇 기 안 되는 모전석탑 중 하나이다. 회흑색의 점판암(粘板岩)으로 조성된 이 모전석탑은 현재 높이가 9.1m에 달하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이 모전석탑을 조성하는데 쓰인 점판암은 장력강도와 내구력이 큰 얇은 판으로, 쉽게 쪼개지는 세립의 점토질 변성암이다. 점판암은 검은색·파란색·보라색·붉은색·녹색·회색 등을 띤다. 점판암의 어두운 색은 탄질물이나 미세한 황화철에 의한 것이며, 붉은색과 보라색은 산화철인 적철석에 의한 것이고, 녹색은 녹색의 운모질 점토광물인 녹니석이 많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접판암으로 조성한 칠층석탑

 

점판암은 채석된 원석으로부터 약 7.5㎝ 두께로 쪼개진다. 정을 원석의 가장자리에 대고 나무망치로 가볍게 두드리면 벽개면을 따라 틈이 생기게 되는데, 정이 지렛대 역할을 하여 원석이 매끈한 표면을 가진 2개의 조각으로 쪼개진다. 원석이 16~18개의 조각이 될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한 후, 손 작업이나 회전절삭기를 이용해 적정한 크기로 다듬는다.

 

이러한 점팜암의 특성을 이용해 만들어진 장락동 칠층 모전석탑. 모전석탑이란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쌓은 탑으로, 흙벽돌을 쌓아 올린 전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탑(模塼塔)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탑이 서있던 절터 주변이 논밭으로 변하여 절의 규모는 알 수 없다. 뒤편으로는 장락사라는 새로 지은 절이 있다. 7층에 이르는 거대한 장락동 모전석탑. 주위를 압도하듯 버티고 서 있는 탑의 위용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천년 세월 버텨낸 칠층석탑

 

탑을 받치는 기단은 점판암이 아닌 자연석으로 1단을 마련하였으며, 그 위로 벽돌로 이루어진 7층의 탑신을 올렸다. 탑신은 1층의 네 모서리에는 점판암 대신 화강암을 다듬은 기둥을 세워, 탑 전체의 조형을 단단하게 하였으며 그 모습이 특이하다. 또한 남쪽과 북쪽 면에는 사리를 두는 감실(龕室:불상이나 사리 등을 모시는 방)을 설치하여 문을 달아 놓았는데, 현재 남쪽의 것은 없어졌던 것을 새롭게 조성해 달아놓았다.

 

각 몸돌을 덮는 지붕돌은 재료가 벽돌처럼 만든 돌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경사면 위아래 모두 층급을 두었으며 처마도 짧고 수평을 이룬다. 탑의 머리 부분에는 머리장식이 없어지고 장식받침인 노반만이 남아 있다. 윗면 한가운데에 동그란 구멍이 있고 구멍둘레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1967년 무너지기 직전에 탑을 해체하여 보수했는데, 7층 지붕돌 윗면에서 꽃무늬가 조각된 청동조각이 발견되어, 상륜부에는 청동으로 머리장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탑신 전체에는 표면에 회를 칠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주목된다.

 

 

 

 

오랜 세월 한 장 한 장 땀 흘려 쌓은 흔적이 보이는 장락동 칠층 모전석탑. 보물로 지정이 되었기에 소중한 것이 아니다. 그 한 장 한 장을 오랜 시간을 일일이 쪼개고 다듬어서 쌓은 노력을 행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 하나의 탑을 조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세월을 노력을 했을까? 그리고 이 탑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깃들어 있는 것일까?

 

그 하나하나에 새겨진 정성이 오늘까지 전해진다. 하나의 문화재를 보존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문화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 안에 숭고한 우리 선조들의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기에 우리가 문화재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야 한다는 점이다.

 

 

 

 

 

 

 

 

 

 

 

 

 

몸은 늙어가고, 답사는 끝이 안보이고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상상 외의 것들을 만날 수가 있다. 가끔은 그런 문화재를 만나게 되면 당황한다. 한 마디로 잘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참 그동안 무엇을 했나하는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경주 서악동 태종 무열왕릉 옆에 있는 마을로 들어가면, 뒷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 산은 선도산으로 오르는 길인데, 마을 끝에서 우측 길로 보면 고분이 몇 기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삼층석탑이 보이는데, 일반적인 탑과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어 특이하다.

 

주사위 모양의 돌로 쌓은 기단

 

서악동 산 92-1에 소재한 보물 제65호 서악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때의 석탑이다. 화강암으로 축조된 이 탑은 일반적인 형태의 탑과는 다르게 모전석탑형이다. 밑에 있는 바닥 돌 위에 화강암으로 네모지게 만든 커다란 돌 8개를 이층으로 엇갈리게 쌓아 기단을 만들어놓았다.

 

서악리 삼층석탑의 기단은 주사위 모양의 커다란 돌덩이 8개를, 2단으로 쌓은 독특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 윗면에는 1층의 몸돌을 받치기 위한 1장의 평평한 돌이 끼워져 있는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장의 돌로 되어 있고, 1층 몸돌에는 큼직한 네모꼴의 불상을 모셔두는 감실을 얇게 파서 문을 표시하였다.

 

 

 

그 위에는 3단의 몸체를 쌓았는데, 1층 몸돌 남쪽 문틀 양편에는 인왕상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인왕상은 그 동안 심하게 마모가 되어 알아보기가 힘들다. 몸돌 위에 올린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표시해 놓았다. 전체적으로 기단에 비해 몸돌이 갑자기 작아져 있는 형태이다. 석탑의 부분은 그동안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아직도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퇴화하는 석탑

 

높이 5.07m, 기단 폭이 2.34m인 서악리 삼층석탑은 돌을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의 형태로, 이런 유형의 석탑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비교적 투박하게 화강암을 다듬어 쌓은 탑으로, 색다른 느낌을 준다.

 

문의 좌우에는 1구씩의 인왕상이 문을 향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표시하였으며, 처마는 평행을 이루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퇴화되는 과정에서 성립된 석탑으로 추측된다. 각 층의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커서 균형이 맞지 않고 둔중한 느낌을 준다.

 

아직도 제대로 공부도 못했는데, 몸은 늙어가

 

그동안 매번 이야기를 하는 것이, 벌써 20년 넘는 세월을 답사를 하러 다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20년 동안 내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만난 문화재는 이제 겨우 20% 정도일 것으로 추산한다. 아직 보고 싶은 것들도 많고, 가고 싶은 곳들도 많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했음을 늘 탓하고 살아야만 한다.

 

 

 

오늘 서악산 삼층석탑을 보면서, 참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이 삼층석탑이 보물로 지정이 되어 부러운 것이 아니다. 천년 세월, 그렇게 변함없이 서 있는 모습이 부러운 것이다. 사람도 저렇게 버틸 수만 있다면, 좀 더 여유를 갖고 답사를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 말이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2 운주사 경내에 소재한, 보물 제797호 운주사석조불감(雲住寺石造佛龕)을 보는 순간 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금동으로 목조각으로 만든 작은 불감을 수도 없이 보았지만, 이렇게 거대한 석조불감이 있다니. 불감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을 뜻하는 것이다.

 

하기에 일반적인 건축물보다는 그 규모가 작다. 다탑봉 골짜기에 자리한 운주사 석조불감은 건물 밖에 만들어진 감실의 대표적 예이다. 다탑봉이라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운주사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산의 정상에 이르는 동안 여러 기의 석탑과 불상을 볼 수 있다.

 

 

팔작지붕으로 꾸민 거대 석조불감 

 

건물을 본뜬 불감감실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양쪽 벽을 판돌로 막아두고 앞뒤를 통하게 하였다. 그 위는 목조 건축의 모양을 본떠 옆에서 보아 여덟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처럼 다듬은 돌을 얹어놓았다. 감실 안에는 2구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등이 서로 맞붙은 모습으로 흔히 볼 수 없는 예이다.

 

불상을 새긴 수법은 그리 정교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 들어 나타난 지방적인 특징이 잘 묻어나온다. 이처럼 거대한 석조불감을 만든 유례를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등을 서로 맞댄 감실 안의 두 불상 역시 특이한 형식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의 특징을 그대로

 

불감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안에 계신 부처님의 상을 보니, 눈을 지그시 감고계시다. 누군가가 입을 훼손한 듯도 하다. 꺼멓게 보이는 부분이 아마 무엇인가를 갖고 훼손을 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부처님 스스로 말 많은 세상, 입을 다물어 버리셨는가도 모르겠다. 좀 더 멀리 떨어져 바라다본다. 그래도 석조불감 안에 좌정하신 부처님은 미동도 없다.

 

그저 세상사 다 접어두고,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누군가 열심히 마음을 다하면 언젠가는 저 눈도 뜨시지는 않을까? 뒤로 돌아가 본다. 또 한분의 부처님이 앉아계시다. 등을 서로 맞대고 계신 두 분의 부처님들이 어떤 말을 우리에게 하는 것일까? 두 손을 모아 가슴으로 올린 부처님 역시 한일자로 굳게 입을 다물고 계시다.

 

 

 

그러나 찬찬히 올려다보면 그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느껴진다.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저 두 분은 등을 마주하고 계시는 것일까? 한분은 인간세계를 바라다보면서 할 말을 잊으신 것이고, 또 한분은 피안(彼岸)인 운주사 안을 바라보면서 참 세상을 알려주시는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네 속 좁은 인간들이 그 뜻을 어찌 알리요. 하지만 운주사 불감 안에 계신 부처님들은 오늘도 인간들에게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계시다. 혹 그것이 세상을 바로 살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마디 일침은 아니었을까? 남을 먼저 생각하라는 그런 주문은 아니었을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에 스쳐 지나간다.

 

 

운주사 불감 안에 좌정하신 부처님을 바라보다가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만다. ‘맞습니다. 세상에 가장 더러운 것은 바로 저랍니다. 오늘 그 모든 것을 참회합니다.’ 눈을 들어보니 주변에 가득한 탑들 위로 초여름의 무더운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아마도 불감 안에 두 분이 매우 더우셨는지.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나들목을 나와 안동 쪽으로 가는 큰길을 벗어나, 마을 안으로 난 작은 길로 접어들면 우측에 우뚝 선 전탑이 보인다. 보물 제57호 안동 조탑리 오층 전탑이다.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에 소재한 이 전탑은 통일신라 때의 작품이다.

 

조탑리 전탑은 안동 동부동의 전탑과 같은 양식으로 축조가 되었다. 탑은 흙으로 쌓은 기단 위에, 화강석으로 몸돌을 만들었다. 탑의 높이는 8,65m이고, 기단의 너비는 7m이다. 남면에는 감실을 내었고, 감실 양 편에는 인왕상을 조각하였다. 인왕상은 아직도 힘이 넘치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조각 기법이 뛰어나다. 천년 세월을 이 인왕상이 전탑을 지킨 것인지도 모른다.

 

돌과 벽돌로 쌓은 희귀한 전탑

 

1층 지붕돌부터는 한 변이 27cm에 두께가 5,5cm가 되는 벽돌을 사용하여, 어긋나게 쌓아올렸다. 몸돌은 1층의 높이에 비해,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든다. 탑의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으나, 보존 상태는 깨끗하다. 다만 조선시대에 수리를 거치고, 1917년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는 동안, 원형을 많이 잃어버렸다고 한다.

 

 

전탑들은 일반 석탑에 비해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공을 들였을 것 같다. 국보 제1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안동 신세동 칠층 전탑을 보더라도, 그 탑을 세우기 위한 공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밭 가운데 쓸쓸하게 서 있는 이 전탑을 보면서 우리의 문화재들이 참 수난을 많이 당했음을 느낀다.

 

이곳을 찾았을 때 누군가 주변에 똑 같은 크기의 고무 통에 연꽃을 수도 없이 심어놓았다. 커다란 불심이라도 작용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쓸쓸히 서 있는 보물인 탑이 너무 한적해 보였기 때문인가.

 

 

 

뛰어난 전돌 쌓기로 조성한 탑

 

이 조탑리 전탑은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화강암 석재와 벽돌을 혼용해서 만든 특이한 탑이다. 1층의 몸돌은 화강암을 이용했으며, 위로는 전돌을 사용한 탑이다. 우리나라 전탑에는 거의 모두 화강암을 혼용하고 있으나, 이 전탑에서는 그러한 의도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나 있다.

 

기단은 흙을 다져 마련하고 그 위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화강석으로 6~7단을 쌓아 1층 몸돌을 이루게 하였다. 남면에는 감실을 파서 그 좌우에 인왕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1층 지붕부터는 벽돌로 쌓았는데 세울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문양이 있는 벽돌이 남아 있다.

 

2층 이상의 탑신에는 2층과 4층 몸돌 남쪽 면에 형식적인 감실이 표현되어 있고, 지붕돌에는 안동에 있는 다른 전탑과는 달리 기와가 없다. 한 마디로 조탑리 5층 전탑은 일반적인 전탑의 형태와는 다른, 특이한 형태로 조성을 해 눈길을 끈다.

 

아무리 열변을 토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문화재를 사랑하고 보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우리 문화재 역시 남다른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온전히 보존할 수가 없다. 안동 조탑리 오층 전탑 주변에 놓인 고무 통 속에 연꽃이 만개를 할 때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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