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경축전이 열리는 가야산 단풍이 지난 1일을 기점으로 이번 한 주가 최고 절정에 이룰 것으로 보인다. 대장경축전장에서 해인사까지 일명 해인사 가는 길로 잘 알려진 붉은 계곡 홍류동 계곡을 따라 이어진 6.3km100리길이 온통 붉은 단풍으로 물들었다.

 

녹음이 짙던 자리엔 빨갛고 노란 단풍이 수놓았으며 가을 햇살에 단풍잎은 막바지 아름다움을 뽐내며 더욱 붉게 타들어 가고 있다. 가야산 19경 중 신라말기 최치원 선생이 말년을 보냈다는 농산정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낙화담을 비롯한 16개 명소가 홍류동을 따라 줄지어 있다.

 

 

가야산 소리길, 홍류동 계곡

 

이 곳 홍류동 계곡은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몸속까지 느끼며 힐링을 할 수 있다고 하여 '가야산 소리길'이란 별명으로도 불리고 있다. 홍류동 계곡의 단풍을 즐기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 있다. 대장경축전장을 관람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무엇보다 진짜 대장경(대장경 진본 8)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축전장이기 때문이다. 또 대장경축전 입장권 하나면 가야산, 해인사 등 모두가 무료이고 차량을 축전장 부근에 두고 가볍게 움직여야 교통체증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장경축전장에서 세계 최초 전시되는 화엄경변상도 완질본 80점 등 축전장에서 관람과 체험을 즐기고 홍류문-농산정-낙화담-영산교를 이어지는 홍류동 계곡을 지나면 해인사가 기다리고 있다.

 

마애불과 암자비경 탐방도 병행해

 

 

암자비경 탐방도 매력적인 프로그램이다. 해인사에서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가을 산사의 정취를 맛볼 수 있다. 해인사에서 가야산 정상으로 가는 중턱에 있는 1200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마애불입상을 만나는 것도 놓칠 수 없는 기회이다. 축전 기간 동안 수능을 위한 기도처로 각광 받았던 마애불입상 부처님의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올 해는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물 제222호인 합천 치인리 마애여래입상은, 해인사를 뒤편으로 돌아 가야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옆의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조각했다. 높이 7.5m의 불상을 표현하였으며, 민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인 소발이 크고 높직하다. 미소가 없는 풍만한 사각형의 얼굴에는 날카로운 눈꼬리와 두꺼운 입술, 턱주름 등이 표현되었으며, 귀는 어깨에 닿을 듯 길고 목에는 3개의 주름인 삼도가 뚜렷하다.

 

어깨는 넓고 당당하여 얼굴과 함께 자신만만한 자세의 불상을 나타내고 있다. 양 어깨에 걸친 법의는 왼쪽 어깨에서 매듭을 지어 고리를 만들었으며, U자형으로 연 가슴에는 내의가 보이고 띠 매듭을 지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엄지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었고, 왼손은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가슴에 대어 손등을 보이고 있다. 특히 손은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처리하여 생동감이 느껴진다.

 

머리 뒤에는 단순한 원형의 머리광배가 있을 뿐인데, 이를 지탱하는 자연광배가 신광의 구실을 함께한다. 얼굴과 두 손은 정교하게 조각한 반면 신체는 마치 돌기둥에 새긴 듯 옷주름을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이 불상은 각 부분의 표현이 힘이 있고 당당하면서도, 세부수법에서 세련된 면이 보여 9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마애불상으로 추정된다.(사진자료 / 대장경축전 홍보팀. 문화재청)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산1-1, 합천 해인사를 들어서다가 보면 좌측으로 탑과 비 등이 서 있다. 해인사 절 입구의 일주문에서 남쪽으로 약 50m 지점에 서 있는 이 유물 중 유난히 눈에 띠는 탑이 한 기 서 있다. ‘길상탑’이라 하는 탑이다. 이 삼층석탑은 일반적인 절의 건물 배치와는 무관하게 길가에 세워져 있다.

2단의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세운 구조로 짜인 이 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갖추고 있다. 일반적으로 석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보관하는 것으로, 부처님과 동일시 여겨진다. 그러나 이 길상탑은 그런 용도로 세우진 것이 아니다. 길상탑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곳에 세워진 것일까?


1966년 탑에서 나온 복장물로 밝혀진 탑의 내용

길상탑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아오던 탑과는 다르다. 신라 때의 탑이면서도 크기가 작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현재 보물 제124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길상탑은, 신라 진성여왕 8년인 895년에 해인사에 거주하던 훈혁스님이 조성을 했다고 한다. 벌써 이 탑을 세운지가 1,120년 가까이 된 고탑이다.

1966년 길상탑에서 나온 유물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을 하고 있다. 탑에서는 작은 157개의 소탑과 함께 탑에 대한 기록을 적은 ‘탑지(塔誌)’가 발견이 되었는데, 모두 4장으로 된 이 탑지는 당시 신라의 대문호인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탑지의 내용을 보면 신라 진성여왕 8년인 895년에, 통일신라 후기의 혼란 속에서 절의 보물을 지키려다 희생된 스님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이 탑을 축조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탑 옆에 그 내용 중 일부라도 적었으면 좋았을 것을,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바로 이렇게 탑의 외형만 소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어떻게 길상탑의 탑지를 쓸 수 있었을까?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는 ‘서울(경주)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역사 기록에 전하는 것이 없어 그 세계(世系)는 알 수 없다’라고 적고 있다. 가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은 그의 가문이 진골이 아닌 육두품임을 뜻한다. 최치원은 육두품 출신으로 당시 신라의 진골제도로 인해 출세를 하지 못하게 되자, 당으로 유학을 떠난다.

12세에 당으로 건너간 최치원은 유학 6년 만인 18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를 하였다. 당에서 관직을 두루 거치던 최치원은 늘 고국인 신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동문선에 전하는 그의 시를 보면 그가 얼마나 고국을 그리워했는지 가늠이 간다.



가을바람에 오직 괴로이 읊나니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 적구나
창밖 삼경에 비가 내리는데
등 앞의 외로운 마음 고향을 달리네.
(秋風惟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신라로 돌아 온 최치원은 당에서 배운 정치와 행정경험을 토대로 신라를 개혁하려 했다. 그러나 진골세력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은둔의 길을 택했다. 40여 살 장년의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난 최치원은, 경주 남산과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그렇게 방랑을 하던 최치원이 합천 해인사에 들어온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치가 않다. 다만 해인사에 최치원이 거닐던 ‘학사대’ 등이 있고, <삼국사기>에는 그가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진성여왕 8년인 895년에는 최치원이 합천 해인사에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때 마침 도적의 무리가 보물을 갈취하려고 하자, 스님들이 보물을 지키겠다고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 해인사에 머물던 최치원은 이를 보고 탑지를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이 적은 탑지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단아한 자태를 보이는 길상탑

길상탑은 신라 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꼭대기의 머리 장식은 모두 다 없어진 상태로, 현재는 석재 하나를 올려놓았다. 탑신인 몸돌은 1층의 몸돌이 2, 3층보다 크며,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모두 5단이다. 지붕돌인 옥개석의 처마는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위로 치켜 올라 경쾌한 느낌을 준다.



기단은 바닥돌 위에 아래층 기단을 쌓고, 윗면에 얇은 괴임을 새긴 후 위층 기단을 얹은 형식이다. 위층의 기단은 하나의 돌로 조성을 해, 다른 탑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로 조성이 되어있다. 몸돌이 기단부보다 갑자기 좁아져 균형이 깨어진 듯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스님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세웠다는 해인사 길상탑. 어쩌면 그 안에서 나온 유물들이 있어 더욱 귀하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길가에 서서 해인사를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 길상탑의 탑지를 적은 최치원은 이 시대를 동경하고 있지나 않을까? 정작 주인인 스님들보다 최치원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은, 학사대에 꽂힌 지팡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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