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시 창천동 현 이천시립도서관 앞에 자리를 하고 있는 이천향교. 그 역사만큼이나 고풍스런 멋을 지니고 있는 향교이다. 향교란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조까지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으로,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립 교육기관이다. 향교는 '교궁(校宮)' 또는 '재궁(齋宮)'이라고도 불렀으며, 고려시대에는 향학이라고 했다.

 

향교의 구성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성으로 앞에는 교육을 하는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고, 뒤편으로는 공자를 비롯한 명현들을 모시는 대성전인 문묘 가있다. 이천향교는 조선조 태종 2년인 1402년에 세워진 유서 깊은 곳으로, 망현산 밑에 자리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 망현산을 아리산 혹은 위후산이라고도 부른다.

 

 

변인달이 처음 신축한지 600년이 지나

 

이천향교는 감무 변인달이 신축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이천이 도호부로 승격이 된 세종 26년인 1444년에는, 관헌인 교수 1인을 두고 학생은 90명이나 되는 큰 교육기관이었다. 권근이 지은 <이천신치향교지>에 의하면 1401년인 신사년 봄에 감무로 부임한 변인달이, 안흥정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직접 향교 터를 물색하고 지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변인달은 공무를 보면서도 틈을 내어 직접 관리감독을 하였다고 한다.

 

향교의 홍살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 3, 측면 2칸의 명륜당이 있다. 명륜당의 옆에 있어야 하는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와 없는 것으로 보아, 그동안 처음의 형태에서 많이 축소가 된 것으로 보인다. 명륜당의 뒤로 돌아가면 대성전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는데, 계단 우측에는 <동계승서계강(東階升西階降)>이란 비석이 보인다.

 

 

즉 대성전으로 올라가려면 3단으로 구분이 되어있는 계단의 동쪽으로 올라가서, 내려올 때는 서쪽 계단을 이용하라는 뜻이다. 향교의 대성전을 드나들 때는 반드시 이 예의를 지켜야만 한다. 우리는 어딜 가나 이런 길이나 계단의 의미를 남다르게 부여하고 있다. 즉 길이나 문도 중앙의 것은 일반인이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활짝 열린 이천향교 대성전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경사진 곳에 터를 잡은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은 모두 3단으로 축대를 쌓았으며, 맨 위에 정면 3, 측면 2칸 반의 대성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 한단 밑으로는 동무와 서무가 자리를 하고 있다. 대성전으로 오르는 축대를 보면, 600년이 지난 이천향교의 역사가 한 눈에 보인다.

 

 

큰 화강암을 이용해 쌓은 축대는 보는 것만으로도 그 세월을 짐작할 수가 있다. 장대석으로 쌓아올린 계단이며, 축대, 그리고 기단 등이 고풍스럽다. 계단을 오르면 동무와 서무 앞에는 각각 '헌관위(獻官位)' '집사위(執事位)'라고 쓴 비석이 서있다. 즉 문묘제향을 지낼 때 헌관과 집사들의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세한 것까지 배울 수 있는 곳이 이천향교다.

 

44일 이천에 볼일이 있어 들렸다가 향교를 찾아갔다. 처음으로 간 것은 아니지만, 문화재란 그곳을 지날 일이 있으면 곡 잊지 않고 들어다 본다. 그것은 아무리 사람들이 관리를 잘 한다고 해도, 어느 순간 훼손이 되어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항상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대성전 문이 활짝 열려있다. 전국에 있는 향교를 수없이 다녀보았지만 아직 대성전의 문이 열려있는 것은, 제향을 지낼 때를 빼고는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걸음을 재촉해 관리를 하는 분에게 촬영을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먼저 대성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천 향교 대성전에는 모두 25명의 성현을 모시고 있다. 대성전 정면에는 중앙에 공자를 비롯해. 맹자와 증자 등을 좌우에 모시고 있다. 우측 벽에는 문정공 동춘당 송준길을 비롯해 10분을, 좌측 벽에는 문순공 남계 박세채 등 10분을 모시고 있다. 처음으로 들어가 본 이천향교의 대성전. 아마도 퍽이나 운이 좋았던 날이었다는 생각이다.

 

 

어디를 가나 문화재란 일부만 보아서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그저 속속들이 살펴보아야 비로소 그 진면목이 보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본 이천향교 대성전. 이런 일이 있어 문화재 답사가 즐거운 것이 아니겠는가?

영월읍을 가로 질러 흐르는 동강. 그곳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이 되어 영월 땅으로 유배를 간 후, 그것마저 부족해 수하들을 시켜 단종을 죽음으로 몬 수양의 슬픈 이야기가 전하는 정자가 있다. 단종이 죽고 난 뒤, 낙화암에서 동강 푸른 물로 몸을 날려 단종을 따른 시녀와 종인들의 슬픈 영혼을 위로하는 사당이 있다.

 

그 사당 앞에 자리 잡은 정자가 동강 푸른물을 굽어보고 있는 금강정이다. 금강정은 세종 10년인 1428년 김복항이 처음으로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금강정을 찾은 날은 벌써 꽤 오래되었다. 사람들은 그 주변에서 운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이 금강정의 슬픈 이야기는 모르고 있는 듯하다.

 


단종이 숙부인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해가 세조 3년인 1457년이었으니, 시녀와 종인들이 이곳에 와 동강 푸른물에 몸을 날렸을 때는, 이미 금강정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아마 시녀와 종인들은 단종이 머물던 동헌을 떠나, 이곳으로 와 이 금강정에서 마음을 추스르지 않았을까? 동강을 굽어보고 있는 금강정은 대답이 없다.  

 

금강정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자삼이 영월 군수로 있을 때, 금강정이란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정면 네 칸의 팔작 정자

 

금강정은 이자삼이 영월 군수로 있을 때, 정자를 고쳐짓고 금강정이라 이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송시열이 숙종 10년인 1684년에 쓴 금강정기가 남아있다고 한다. 금강정은 처음으로 이 자리에 짓고 나서 벌써 600년 가까이 된 셈이다.

 

금강정은 30cm 정도의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둥근 기둥을 이용하여 정자를 지었다.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의 정자는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정자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머름형태의 평난간을 둘러놓았다. 화려하지 않은 금강정의 처마를 올려다보면 조금은 색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처마 밑 장식을 용이나 닭 등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금강정은 잉어를 조각한 듯하다. 아마 밑을 흐르는 동강 맑은 물을 상징이라도 하는 것인가 보다.

 

금강정은 30cm 정도의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둥근 기둥을 이용하여 정자를 지었다.

잉어를 조각해 놓은 듯하다.

 

아름다운 금강정, 세월은 슬픔도 잊어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금강정. 그동안 수차례 보수를 하였겠지만, 그 아름다운 모습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정자 뒤편에 있는 시녀와 종인들의 넋을 위하는 민충사와 함께 동강을 굽어보고 있어, 역사를 알고 나니 슬픔을 간직한 듯 보인다.

 

금강정 앞으로는 동강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조망대를 설치하였다.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니 멀리 흘러 남한강으로 이름을 바꿔 흐르는 동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모시던 임금이 사약을 받는 모습을 본 시녀와 종인들도 이렇게 동강 맑은 물을 내려다보았을까? 그 때 그들의 마음을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금강정에서 바라본 동강. 단종이 죽은 후 이곳에서 동강으로 뛰어 든 시녀와 종인들이 마음을 느껴보다.

 

 

금강정은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의 정자는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난간에는 여기저기 낙서를 해 놓은 것이 보인다. 젊은 사람들이 찾아와 서로의 사랑을 약속하면서 굳은 맹서라도 한 것일까? 역사의 슬픈 흔적은 그 낙서로 인해 다 지워지는 듯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을 다 잊는 사람들. 그래서 사람들은 세월이 약이라고 하는가 보다. 여기저기 쓰인 낙서를 보다가 쓴 웃음을 짓고 만다.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낙서. 이제는 그런 모습을 보고도 화가 나지도 않는다. 그저 그러려니 할 뿐.

 

오늘도 금강정 앞으로 흐르는 동강은 그렇게 말이 없다. 600년 전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자에 올라 동강을 굽어보며 잠시 고개를 숙인다. 이 찬 물로 뛰어들었을 시녀와 종인들이 넋이라도 위로를 할 생각으로. 세월은 그렇게 흐르고, 슬픔을 안은 역사는 그리 계속되는 것인지. 

 

조망대 난간에 쓰인 낙서

젊은이들이 사랑을 확인한 것일까?
 

 

 

충북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 청안면사무소 옆에 자리한 충북 유형문화재 제93호 청안동헌. 처음으로 청안동헌이 세워진 것은 조선조 태종 5년인 1405년이라고 한다. 청안현의 관아로 세워진 청안동한은 일반적인 동헌의 형태와는 다르다. 세월이 지나면서 여기저기 손을 보고 변형이 된 청안동헌은 여러 가지 구조기법으로 등으로 미루어 볼 때, 19세기 후반의 건물로 추측된다.

 

한편에 방을 드린 구조

 


청안동헌은 현재 청안면사무소 곁에 있어 찾기기 쉽다. 높은 네모꼴 주초를 사용하고 그 위에 둥근기둥을 세웠다. 목재는 소로로 수장한 굴도리를 썼으나, 부연을 달지 않고 보머리에 초가지 장식이 없는 검소한 형태로 꾸며졌다. 이런 모습은 관아건물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지만, 현존하는 유적이 드물어 조선시대 관아건축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앞에서 청안동헌을 바라보면 좌측에 세 칸의 마루를 놓고, 우측에는 두 칸의 방과 반 칸의 다락이 있는 아궁이를 두었다. '안민헌(安民軒)'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청안동헌은  1913년부터 3년간 중수하여 일경(日警)의 청안주재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청안지서장 사택으로 사용하면서, 건물구조가 많이 변형되었던 것을 1981년 복원 수리하였다.

 

현재 청안동헌은 동헌 한 동만 남아있어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원래 관아에는 고을 원이 공무를 보는 동헌, 정당과 익실을 갖춘 객사, 수령이 기거하는 내아와 동헌의 입구인 아문 등이 있어야 하지만, 동헌을 제외한 다른 건물은 모두 남아있지 않다.

 

세칸으로 마루를 깐 대청은 뒤편에는 판자문을 내었다
 

대청의 외벽은 창호로 꾸몄다.

 

방을 네 개로 쪼갠 청안동헌

 

청안동헌의 특징은 우측으로 보이는 방이다. 대청마루에서 방문을 보면 교살불발기 창호로 꾸몄다. 우측의 문을 열면 다시 그 안으로 창호가 있고, 앞으로는 길게 마루를 놓았다. 밖의 창호에서 방을 가로질러 마루를 놓은 것이다. 방문은 밖과 안 모두 세살문으로 꾸몄다. 방은 밖에서 보면 큰 방 하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방을 네 등분하여 모두 4개의 작은 방이 있다.

 

대청의 뒤편에는 판자문으로 막았고, 측면은 세살문으로 처리해 들어 올릴 수가 있도록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전혀 꾸밈이 없이 검소하다. 아마 당시 이 건물을 지을 때 민가의 모범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측 외벽은 별다른 구조물이 없이 아래 위, 좌우 모두 삼등분을 하여 나무를 가로질렀다.

 

대청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교살불발기 창호로 꾸며 운치가 있다.
 

방앞에는 툇마루를 놓고, 그 앞에 외문 창호를 달았다.
 

큰 방을 네개로 나누어 작은 방을 만들었다. 여러 용도로 사용하면서 나뉜 것으로 보인다.

 

방을 드린 우측 끝으로는 위로는 다락을 낸 반 칸 정도의 아궁이가 있다. 양편으로 아궁이를 내어 놓은 이 방은 네 개의 방을 덥히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마루 밑은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해 놓았으나, 현재는 전체를 돌로 막아놓았다.  

 

세심한 관리가 필요해

 

일반적으로 어디를 가나 동헌은 그냥 덩그러니 건물만 남아있다. 청안동헌도 예외는 아니다. 토요일에 답사를 간 청안동헌은 청안면의 직원 한분이 여러 가지 설명을 곁들이는 바람에 편하게 답사를 할 수가 있었다. 담을 사이로 있는 청안치안센터 건물 옆에는 커다란 고목이 한 그루 서 있어, 청안동헌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방 옆에는 반칸 정도의 한데 아궁이를 놓고, 외벽으로 처리를 하였다.

불이 타 위를 잘랐다는 나무. 청안동헌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고목은 밑동만 남아있고 잘려진 가지에 새 가지가 돋아나 있다. 안내를 하신 분의 이야기로는 이 나무가 불에 타 위를 잘랐다는 것이다. 그 옆에 있는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도 오래 묵은 역사의 나무란다. 주말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청안동헌. 문을 바른 창호지는 찢고간다는 사람들. 도대체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곁에 면사무소인데도 훼손을 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막아내기란 버겁다는 것이다. 언제나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려는지.

정자 앞을 흐르는 물이 차고 희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 한벽당. 1404년 처음으로 지어졌으니 600년 가까이 되었다. 한벽당은 호남의 정자 중에서도 수일경이라 하는 곳이다. 앞으로는 작은 물고기가 노니는 맑은 물이 흐른다. 사시사철 물이 얼마나 시원하고 맑았기에 한벽당이라 불렀을까?

 

전주천 맑은 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벽당.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들려 사시사철 그 이름다움에 취했던 곳이라고 한다. 한벽당은 승암산 기슭 절벽을 깎아내고 새웠다. 조선조 건국시 개국공신인 월당 최담이 태종 4년에 처음으로 건립을 했다고 하니, 벌써 600년 가까이 오랜 세월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전주천을 바라보는 정자

 

한벽당은 운치가 있다. 물빛 고운 전주천에서 잡히는 물고기를 이용해 끓여내는 오모가리 매운탕 한 그릇을 들고 한벽당 밑으로 나가면 한 여름이 훌쩍 지난다. 까마득한 지난 날 아마 우리의 선인들도 그런 맛에 취해서 한벽당을 찾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벽당 곁에 붙어지은 요월대가 있어 낮에는 한벽당에서 밤이면 떠오르는 달을 맞이하는 요월대에서 즐겼을 것이다. 어찌 짧은 시 한수 나오지 않을 것인가? 이곳을 찾아들었던 사람들도 그런 절경에 취해 거나하게 탁주 몇 잔을 마셨을 것이다.

 

 

 

주변이 모두 절경과 볼거리

 

한벽당 주변에는 볼거리가 많다. 오랜 세월 묵묵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전주한옥마을을 비롯하여 커다란 고목이 된 은행나무들이 경내에 즐비한 전주향교 등이 있다. 요즈음에는 주변에 전주전통문화센터에서 많은 공연을 하기 때문에 즐기고 먹고 볼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명소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전해지는 것인가 보다.

 

한벽당은 사시사철 아름답다. 봄이 되면 건너다보이는 산에 산벚꽃이 피어나는 모습이 아름답다. 여름이면 정자 앞을 흐르는 차디찬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더위가 가신다. 정자 주변에 있는 고목이 만들어내는 그늘은 더 더욱 시원함을 더한다. 가을이면 전주천을 덮는 억새가 하늘거린다. 찬 겨울이라도 정자는 언제나 운치가 있다. 경치만 놓고 가늠하자면 가히 선계라 할 만하다.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 한벽당. 맑은 물빛이 고운 정자다. 한벽당 가까운 곳에는 월당 최담의 비가 서 있어, 이곳이 유서깊은 정자임을 알려주고 있다. 멋스럽지만 난해하지 않고, 아름답지만 화려하지 않은 정자. 물빛 고운 한벽당은 그렇게 속으로 멋스러움을 감추고 있는 정자이다


강릉시 죽헌동 201번지에 소재한 오죽헌은 보물 제16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오죽헌은 신사임당(1504∼1551)과 아들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지금은 5만 원 권의 인물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다. 신사임당은 모든 여성들의 근본이 되는 여인으로,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다. 사임당의 아들인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은 집이다. 규모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정면에서 오죽헌을 바라보면 왼쪽 두 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한 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오죽헌은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다.


보물 제165호로 지정이 된 강릉 오죽헌


조촐한 집에서 인물이 태어나다.


오죽헌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별당건물이다. 이 오죽헌의 오른쪽 방은 신사임당이 용이 문서리에 서려있는 꿈을 꾸고, 이율곡을 낳은 방이다. 방문 위에는 ‘몽룡실’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꿈에 용을 보았다는 것이다. 왼편에 있는 마루방은 율곡 이이가 6살 때까지 공부를 하던 방이다.


오죽헌은 정면 세 칸으로 지어진 집이다. 이단의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 위에 덤벙주초를 사용해 기둥을 세웠다. 왼편 두 칸 마루방 안에는 오죽헌이라는 현판과 더불어, 수많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그만큼 오죽헌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려간 듯하다. 두 칸으로 된 측면을 돌아서면, 몽룡실 뒤편에는 마루가 놓여있다. 작은 별당이지만, 쓰임새를 생각해서 지은 집이다.




난 오죽헌에 가면 나무를 본다.


매년 한 번 이상은 들리는 오죽헌이다. 갈 때마다 그 분위기가 달라지는 오죽헌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오죽헌 안에는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백일홍이라고 부르는 ‘배롱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홍매화’이다. 이상하게 오죽헌을 들리는 시기가 늦은 가을부터 초봄 사이였으니, 아직 한 번도 이 나무들이 실하게 꽃을 피운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인연이 닿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항상 오죽헌에 들려 돌아보는 이 세 가지의 나무는 각각 의미가 남다르다. 돌계단을 올라 오죽헌으로 들어가는 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배롱나무가 서 있다. ‘사임당 배롱나무’라고 명명하는 이 나무는 강릉시의 시화(市花)이기도 하다. 배롱나무는 백일홍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100일간이나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신사임당 배롱나무라고 부르는 수령 600년의 백일홍과 율곡송(아래)

이 배롱나무의 원줄기는 고사했다. 현재의 나무는 원줄기에서 돋아 난 싹이 자란 것이다. 그 수령은 이미 6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 나무의 수령을 보니,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이 나무를 바라보면서 살았을 것이다. 아마 봄 날 공부를 하다가 나른해지면 이 배롱나무를 쳐다보면 기지개라도 켜지 않았을까?


천연기념물인 홍매화인 율곡매


오죽헌의 옆에는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48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매화나무는 수령이 600년이 지났다. 1400년대 경에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오죽헌을 건립하고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 율곡매는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직접 관리를 했다고 전해진다.  



오죽헌을 짓고 난 후 최치운이 심었다는 매화나무.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선생이 관리를 했다고 한다.
 

신사임당은 매화나무를 잘 그렸다. 맏딸의 이름을 ‘매창(梅窓)’이라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했다. 이 매화나무는 높이 7m, 땅위의 줄기둘레는 2m 가까이 되는 고목이다. 이 매화나무를 돌아보고 난 후, 끝으로 찾아본 것은 바로 ‘율곡송’이다. 이 세 나무를 돌아보는 즐거움은 오죽헌이라야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600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 자리에 서 있는 오죽헌. 그리고 수령 600년인 배롱나무와 매화나무. 그런 오랜 세월을 간직한 것들이 있어. 오죽헌의 나들이가 또 다른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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