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담벼락부터 안 담벼락까지, 담벼락을 꾸민 방법이 다 다르다. 굴뚝도 일반 가정집과는 전혀 다른 벽돌굴뚝을 조성하였다. 중요민속자료 제136호인 충북 괴산군 칠성면 율원리의 김기응 가옥. 안채는 19세기 초에, 그리고 나머지는 1900년대를 전후해서 지어졌다는 김기응 가옥은,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안으로 들어가 보아도, 전통적인 상류주택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바깥담벼락의 꾸밈이 돋보이는 집

 

김기응 가옥은 외벽부터가 남다르다. 솟을 대문을 가운데 두고 양편으로는 행랑채를 마련했는데, 행랑채는 ㄱ 자 형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문을 들어서면 우측 끝에 한 칸을 달아내어, 전체적으로는 한편이 잘라나간 ㄷ 자 형이다.

 

대문 밖의 외벽은 고택 답사를 하면서 처음 본 꾸밈이다. 돋아 나온 벽은 위로는 붉은 벽돌을 놓고, 그 밑에 수키와를 두 장을 마주 해 원을 만들었다. 그 밑으로는 돌을 쌓아 전체적으로는 3단으로 구분을 하여 문양을 만들었다. 이런 담벼락을 본 적이 없어, 이 집을 지을 때 담장 하나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바깥담벼락 대문 좌우에 마련한 행랑채의 담벼락이 외벽이다. 벽돌과 기와, 돌을 이용해 쌓은 문양이 특이하다.

▲ 행랑채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안마당을 낀 행랑채가 있다. 행랑채의 구성으로 보아 이 집의 살림살이 규모를 알만하다.

 

솟을대문의 우측으로는 쪽문이 나 있다. 충청도 고택의 양반 집을 보면, 대부분이 이렇게 대문이나 중문의 우측으로 쪽문을 내어 출입을 하는데, 당시 양반가의 대문 조성을 할 때 유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안마당이 있다. 행랑채는 대문을 들어서면서 우측부터 한 칸의 돌출된 광이 있고, 꺾어져서 광과 헛간, 방, 부엌이 드리고, 대문을 지나면 방과 헛간이 있다. 그리고 담장으로는 연결이 되었지만, 안으로는 떨어진 꺾어진 부분에 한 칸의 헛간을 두고, 세 칸의 광과 방을 드렸다. 김기응 가옥의 특징은 공간 구성을 적절히 이용하여, 집의 분위기를 아름답게 꾸몄다는 점이다. 

 

안담을 쌓은 안에 자리한 사랑채

 

▲ 사랑채 일각문 사랑채는 안마당을 지나 우측으로 자리했다. 흑담으로 담장을 두르고 일각문을 내었다

▲ 쪽문 사랑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쪽문. 위로는 까치구멍을 내어 마치 행랑채에 붙은 부엌쯤으로 알게 했다.

 

넓은 안마당을 지나면 황토로 쌓은 안담이 있다. 안담은 안채를 들어가는 중문에 붙여 ㄱ 자로 꺾어 일각문을 두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랑채를 조성하였다. 사랑채는 큰 사랑, 대청, 작은 사랑으로 구성이 되어있지만, 겨울 추위를 막기 위해 앞을 모두 문을 달아냈다. 이 사랑채의 뒤편으로는 지붕을 달아내 안채로 연결한 통로가 있는 것이 보이는데, 바깥을 담장으로 둘러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사랑채의 일각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작은 쪽문이 보인다. 이 쪽문을 통해 안채로 드나들 수가 있다. 이 지역의 고택에서 보이는 사랑채와 안채의 연결을 하는 일반적인 동선이 흐름이다. 그런데 이 쪽문 위로는 까치구멍을 내어, 이것이 문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중문채에 붙은 부엌문으로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아마 외부인에게 이 문을 알려지는 것을 막자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 굴뚝 사랑채 뒤편의 굴뚝. 검은 벽돌과 붉은 벽돌을 사용해 무게를 내고 있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쪽문의 사이는 담으로 막아 놓았는데, 그 안에 높은 벽돌 굴뚝을 놓았다. 이 벽돌 굴뚝은 검은 벽돌과 붉은 벽돌을 이용해, 흡사 어느 궁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형태로 꾸며놓았다.

 

또 다른 형태의 안채 담벼락

 

안채를 들어가기 위해 중문을 향하는데, 중문 옆으로 쌓은 담벼락이 바깥 담벼락과는 또 다르다. 중문의 담벼락은 돌출을 시켜 위로는 붉은 벽돌을 6줄을 놓고, 그 밑으로는 돌로 쌓았다. 김기응 가옥의 담벼락은 모두 다르게 조성을 해, 용도를 구분한 듯하다. 

 

중문을 들어서면서 우측으로 네 칸의 광이 있다. 그리고 그 끝을 떨어트려 안채가 시작이 된다.이 광의 문을 보면 일반적인 가옥의 광과는 다른 문을 달아냤다. 광의 문 까지도 세세하게 신경을 써서 아름답게 꾸민 흔적이 보인다.

 

▲ 중문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중문의 담벼락은 또 다른 문양을 조성했다. 집안의 곳곳에 다른 담벼락을 꾸민 것이 이 집의 특징이다.

▲ 중문채 중문에 달린 중문채는 광채로 구성하였다. 광의 문의 꾸밈이 색다르다.

 

안채는 ㄷ 자 형태로 꾸몄는데, 부엌, 안방, 두 칸 대청, 뒷방을 차례로 놓고, 꺾어져서 마루와 건넌방, 부엌을 두었다. 중문을 들어서 안채를 보면 좌측 중문채와 접한 부분에 한 칸의 광을 내었다. 방과 광 사이에는 다락을 위로 두고, 밑으로는 뒤쪽으로 나갈 수 있는 작은 쪽문을 낸 것도 이 안채의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오밀조밀하게 공간 구성을 한 김기응 가옥. 건물마다 특징이 있는 문양을 사용한 담벼락. 그리고 벽돌로 쌓아올려 중후한 감을 주는 굴뚝. 김기응 가옥만이 갖고 있는 특징이다.

 

▲ 안채 중문을 들어서면 ㄷ 자로 꾸민 안채가 있다.

우리나라에 99칸 고래등 같은 집들이 있다. 전북 정읍에 있는 김동수 가옥이 99칸이었으며, 경주 최부자집도 99칸이라고 했다. 그런데 충남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 갈산중학교 인근에 자리한 충남 민속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전용일 가옥은, 그보다 반 칸을 더 합한 99칸 반이라는 것이다.

현재 전용일 가옥에서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문은, 예전에는 사랑채를 지나 안채를 들어갈 수 있는 중문이었다고 한다. 99칸 반의 대저택. 전용일 가옥의 주인은 왜 이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지은 것일까?


99칸 반의 저택, 지방 토호의 상징인가?

99칸 반의 집이라니, 그 규모가 가늠이 되질 않는다. 아마 이 지역의 부농의 집이었을 목조기와집은 지금은 안채 28칸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800년대 중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전용일 가옥의 안채는 바람벽을 둔 중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청과 온돌방을 두고, 좌우의 날개채를 달아 남향을 향한 집이다.

안채는 전체적으로 보면 ㄷ 자형을 띤 집의 구조지만, 사랑채가 떨어져 있어 튼 ㅁ 자형이다, 중문을 달린 중문채와 안채의 날개채 사이에는 쪽문을 낸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가옥구조로 축조가 되어있다.




예전에는 100칸이라는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한 칸을 뺀 99칸의 집을 짓는 것이 지방의 토호들이나 세도가들이 집을 짓는 방법이었다. 일설에는 100칸의 집은 궁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대부가나 토호들이 100칸을 지으면 바로 모반이 된다고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 99칸에서 전용일 가옥은 그보다 반 칸을 더 달아낸 99칸 반의 집이었다고 한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 후원을 보아도 이 집의 세를 알만하다. 현재는 안채를 중심으로 네모난 대지위에 높은 담장을 쌓고, 그 안에 안채만이 남아있지만 모든 것 하나하나가 전용일 가옥의 가세를 알기에 충분하다.



부재 등이 돋보이는 전용일 가옥

전용일 가옥의 사랑채 앞에는 연못이 있고, 연못 주변 건물에는 팔각 돌기둥을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석조 부재 등이 아직도 인근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당시에 돌을 깎아 기둥을 세운 건축물을 지었다고 하니, 아마도 지방의 사대부가들도 이런 집을 짓기가 어려웠을 것만 같다.

집안 곳곳을 살펴보면 이 집이 부재 사용법 하나서부터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쪽문의 문턱 하나에도 세심한 배려를 한 전용일 가옥. 조선 후기 건축 기술과 세련된 솜씨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전용일 가옥은 19세기 중반에 세워진 대표적인 양반집이다.



홍성의 대부호 양반집으로 알려진 전용일 가옥. 영원한 세도는 없다는 옛 말이 실감이 난다. 한 때는 99칸 반의 대부호답게, 그리고 지방의 세력가답게 인근 근동에서 이 집의 덕을 보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고 했다는 한다. 현재 남아있는 안채의 규모나 그 사용한 부재들을 보면, 이 집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가 있다. 99칸 반의 영화로움은 사라졌어도, 그 자취는 집안 곳곳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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