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471호 위봉산성은 조선 후기 변란을 대비하여 주민들을 대피 시켜 보호할 목적으로축성된 산성이다. 이 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조선조 숙종 원년인 1675년부터 숙종 8년인 1682에 걸쳐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위봉산성을 쌓을 때는 이웃 7개군민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한다. 위봉산성의 성벽 높이는 1.8 ~ 2.6m 이고 길이는 16km에 달한다.

 


 

 

산성 내 시설물로는 성문 4개소, 암문지 6개소, 장대 2개소, 포루지 13개소와 그 외에 추정 건물지 15개소, 수구지 1개소가 확인되었다. 위봉산성은 다른 산성과는 달리 군사적 목적뿐만이 아니라, 유사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기 위한 행궁을 성 내부에 두는 등 조선 후기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위봉산성은 완주군 소양면 천녀 고찰 송광사 곁을 지나 고개를 넘어 위봉사로 가는 길에 만난다. 산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길을 숨가쁘게 올라가면 그 고개마루에 위봉산성이 자리한다. 산성의 좌측으로는 성문자리가 있고, 우측으로는 30m 정도의 성벽을 정리했다. 성문지는 잘 보존되어 있으나, 성문지 위에 있을 누각이 사라져 네모진 구멍으로 위가 올려다 보인다. 성문은 외성을 쌓아 적이 성문에 접근 할 수 없도록 하였다.

 

산성 성문지 부분이 보존되어 있다. 위봉산성의 성벽 높이는 1.8 ~ 2.6m 이고 길이는 16km에 달한다

위봉산성 의 성문지. 비교적 잘 보존이 되어있다

성문지 위에 누각이 소실되 구멍이 뜷려있다

 

도로가 성벽을 끊고 있는데 건너편에 보면 성벽위로 여장, 총안을 둔 것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성 안으로 찬찬히 훑어보면 다른 성과는 다른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성벽을 쌓은 돌이 다듬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를 쌓아놓았다. 자연미가 풍기는 성벽은 오히려 다듬은 성벽보다 아름답다. 울퉁불퉁한 성 돌을 그대로 맞추어 쌓아놓은 성벽이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성이다.   

 

성문을 보호하는 옹성. 옹성은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는 중요한 시설이다

성문을 부수기 위해 옹성 안으로 적이 들어오면 사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다

 

위봉산성은 전투에서 적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어진과 패 등을 옮겨 보호하기 위한 성이기도 하다. 또한 변란이 일어나면 백성들을 피신시키기 위한 곳이기도 하다.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된 위봉산성은, 1894년 갑오농민혁명 때, 전주성이 농민군에게 함락이 되자 태조의 어진을 옮겨 모셔 제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했다. 성 안에는 위봉폭포와 위봉사가 있어 늦가을 바람 따라 찾아가 볼만한 곳이다. 역사를 따라 길을 간다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한 자료가 이제는 CD로 3,000장이 훨씬 넘었다. 20년이 넘는 시간을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으니, 아마도 김정호 선생만큼은 안되도 이제는 구석구석 꽤 돌아다닌 듯하다. 하지만 아직 우리 문화재의 10분지 1도 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꼭 쓰고 싶은 책이 4권 정도이다. 하나는 정자요, 또 하나는 고택이다. 그리고 마애불에 대한 책도 한 번은 내고 싶다. 그리고 끝으로 성곽이다. 성곽은 가는 곳마다 힘든 것을 마다하지 않고 한 바퀴를 돈다. 그것은 언젠가 성에 대한 역사이야기가 아니라, 성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쓰고 싶어서이다.

 

 

덕주공주가 청건했다는 덕주사를 가는 길

 

성을 보면 그 성곽이 얼마나 견고하게 쌓여졌는지 알 수가 있다. 월악산에 있는 덕주사를 오르다가 만나는 덕주산성.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의 남쪽에 있는 이 산성은 돌로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덕주공주가 신라 말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덕주사를 오르는 길목에 만날 수가 있다.

 

원래 이 덕주산성은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덕주공주는 이곳 덕주사에 마애불을 조성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성은 고려 고종 43년인 1256년에 몽고군이 충주를 공략하자, 갑자기 구름, 바람, 우박이 쏟아져 적군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덕주산성의 동문인 덕주루의 밖과 성안

 

월악대왕의 가호가 있다고 전하는 덕주산성에는 얽힌 이야기가 많다. 조선조 말기에는 명성왕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고 전한다.

 

3개의 성문이 남아았는 덕주산성

 

덕주산성은 둘레가 32,670척(9,800m)에 이르렀던 성이다.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인 월악루, 동문인 덕주루, 북문인 북정문의 3개 성문이 남아 있다. 한창 복원을 하고 있는 덕주산성의 남문은, 동창으로부터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무지개모양으로 만든 홍예문으로 되어있다. 아름답게 조성을 한 월악루는 좌우를 막은 석벽은 내외 겹축으로 길이가 100간이나 된다.

 

 

덕주루 성문의 안편 무지개아치와 덕주산성의 성벽 외부

 

덕주골 입구에 서 있는 동문인 덕주루는 남문과 비슷하며, 새터 말 민가 가운데 있는 북문은 내외에 홍예가 있으며 홍예 마룻돌에는 태극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내외 5겹의 성벽으로 쌓여있다. 아는 축조연대가 각기 달라 시대에 따른 성을 쌓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5겹으로 된 철옹성에는 슬픈 사연이 많아

 

상덕주사의 외곽을 둘러싼 상성(내성으로 제1곽), 상, 하 덕주사를 감싼 중성(제2곽 동문주변), 그 외곽으로 하성이 있으며(제3곽) 송계 계곡인 월천의 남쪽을 막아 쌓은 남문과 북쪽의 북문을 이루는 관문형식의 외곽성(제4곽) 등 첩첩히 쌓여진 철옹성이다. 이러한 성이기 때문에 명성황후는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하여, 성문을 축조한 것일까? 권력이 무엇인지 참 슬픈 우리 역사의 한 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덕주루라고 현판이 붙은 동문. 보기에도 견고한 성이다. 문루 위로 올라가면 주변으로 쌓여진 성곽이 얼마나 첩첩이 쌓았는지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단단하게 쌓은 성곽이 어떤 일로 다 무너져 내렸을까? 역사란 이렇게 모든 것을 피폐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북문인 북정문과 문 위에 복원한 문루

 

송계리에 소재한 덕주사를 돌아보고 명오리를 지나 나오면 새터 말 도로변에 북문인 북정문이 있다. 최근 보수를 한 북정문은 평지에 있어서인가 동문인 덕주루보다 더 견고하게 축조가 되어있다. 북정문 곁에 놓여진 돌들을 보면 그 크기가 2m 가 넘는 것들이 있어, 이 덕주산성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북문 주변에 놓인 옛 성돌의 크기를 보면 덕주산성의 견고함을 알 수가 있다(위) 아래는 돌 축대를 쌓기 위해 사용한 석주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 역사의 훼손된 부분을 보는 것은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저 어디를 가나 온전히 보존이 되지 않고 있는 우리의 역사들. 그 안에는 우리 선조들의 땀과 피와 한이 맺혀져 있다. 그런 것 하나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과연 먼 후대에 우리의 자선들에게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그러한 역사의 죄인으로 남지 않는 길은, 우리의 것을 온전히 보존하여 전해주는 길 뿐이다.


사적으로 지정된 전주의 전동성당은 중국의 벽돌공 100명이 건축에 들어가는 벽돌을 구워 1908년부터 성당 신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우리나라에서 중국인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지은 성당이 있다. 바로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에 소재하고 있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인 풍수원 성당이다.

풍수원 성당은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세운 고딕양식의 건축물이다. 고종 광무 10년인 1905년에 착공하여, 이년 후인 1907년에 완공을 하였다. 낙성식은 1909년에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풍수원 성당에 사용된 벽돌은 바로 중국인 벽돌공들이 제작을 한 것으로 보인다. 풍수원 성당은 제2대 정규하(아우구스띠노. 1863 ~ 1943) 신부가 설계한 것이다. 중국인 기술자 진베드로와 함께 공사를 시작하여, 전국에서 네 번째로 세운 성당이자 최초의 한국인 신부에 의해 세워진 성당이다.


한국에서 네 번째로 세운 성당

설날 연휴가 끝나가는 25일 오후 찾아간 풍수원 성당. 요즈음에는 답사를 다니는 것도 힘들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구제역으로 인해 모두 막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길에서 가깝거나, 축사가 없는 마을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풍수원 성당은 몇 번이나 들려보려고 마음을 먹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이번 연휴에는 일부러 길을 잡았다.

풍수원 성당은 조선 순조 원년인 1801년 신유박해, 고종 3년인 1866년 병인양요, 고종 8년인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 때 탄압받던 신도들이 피난을 온 곳이었다. 고종 27년에는 프랑스인 르메르 이신부가 초가 사랑방에 초대신부로 부임을 한 초기의 성당이다. 풍수원 성당은 강원도에서 고딕양식으로 가장 먼저 세운 건물이기도 하지만, 중국인 기술자들이 참여를 한 최초의 성당이기도 하다.




삼랑식 평면으로 지어진 고딕식 건물

이 풍수원 성당을 돌아보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전주 전동성당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다. 성당이라는 특성상 그 건축의 형태가 같을 수는 있다고 하여도, 전동 성당보다 먼저 중국인 기술자에게 건축의 소임을 맡겼다는 점이 풍수원 성당을 더 돌아보게 만든다. 앞쪽으로는 높은 탑처럼 올린 풍수원 성당은 양편에 출입구를 두었다.

양편에 있는 출입구는 길게 통로를 내어 바람과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하였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중앙이 돌출되어 있고, 양편으로 문을 내었다. 풍수원 성당은 나지막한 언덕 위에 서남 방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성당 건물은 열주의 아케이드와 천장에 의해 실랑과 측랑이 구분되는 삼랑식 평면으로 지었다.



전면 중앙에 도출하여 위치한 주현관과 2층의 원화창, 그리고 3층의 2연 아치창과 2연 비늘창이 있다. 종루의 중첩은 위로 향하면서 줄어든 부축벽과 함께, 수직성을 강조하고 있다. 전체적인 건축방식은 일반적인 성당과는 약간의 차이가 난다. 건물 아래편에는 환기와 습기를 막을 수 있는 공기구멍을 내었다.

2,000
명의 신도가 시작한 풍수원 성당

풍수원 천주교회는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주한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처음 종교행위를 시작할 당시 풍수원 성당에 모인 신자수가 2,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초가집을 성당으로 사용을 하면서도 이만한 인원이 모였다고 하는 것을 보면, 천주교 박해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풍수원 본당은 춘천, 원주, 화천, 양구, 홍천, 횡성, 평창, 양평 등 12개 군의 29개 공소를 관할했다. 1896년에는 원주 본당이 분할되고, 1920년에 춘천 본당이 분할되었다. 그 후 1948년에는 홍천 본당을 분할하게 된다. 풍수원 성당은 1982년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다.

강원도에서 최초로 지어진 고딕풍의 건물이라는 점과, 중국인 기술자와 한국인 신부에 의해서 지어졌다는 점 등이 문화재로 지정하게 된 계기일 것이다. 하지만 풍수원 성당은 강원도 유형문화재이기 보다는, 사적이나 등록문화재로 지정을 해야 옳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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