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저곳에 저수지를 만들면 족히 1만 명은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정말인가? 그러면 저곳에 저수지를 만들라

 

1795년 능행차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장안문에 오른 정조대왕과 화성유수 조심태가 나눈 대화 중 일부이다. 만 명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저수지를 조성하기를 상소한 조심태. 그리고 그 때 조성한 저수지가 바로 만석거이다. 정조는 이 외에도 화성 주변에 만석거와 축만제, 만년제 등을 조성해 치수를 통한 과학적인 농경을 실시한다.

 

현재의 수원을 농업도시 수원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수원이 어떻게 농업도시가 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한 것이다. 하지만 수원이야말로 과거 정조시대부터 지금까지 농업개혁의 도시이자 농업연구의 도시이다.

 

정조는 정조 17년인 1793년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오랜 시간 구상해 왔던 개혁을 시도하였다. 도시의 규모와 위상을 한양의 도성과 버금가도록 만들고 최고의 축성기술을 이용하여 공격과 수비에 용이한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한양 육의전 외에 화성에도 시전을 설치하여 상업발전을 도모하였으며, 농업기반시설을 조성하여 농업 진흥을 이루도록 독려하였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이상도시를 모범적으로 만든 뒤 이 모델이 전국적으로 파급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곳 수원화성은 정조가 만들고 싶었던 조선의 축소판이며 1794년은 그 첫발을 디딘 기념비적인 해다.

 

수원화성박물관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특별기획전을 준비하였다. 농업도시 수원의 전통을 재조명하고 수원시와 농림축산식품부가 함께 준비 중인 농어업역사문화전시체험관 건립에 내실을 기하고자, ‘수원화성 착공 220주년 기념으로 <정조시대 농업개혁의 산실, 수원화성> 특별기획전시를 마련하였다.

 

 

정조대왕이 꿈꾼 나라는 강한 국가였다.

 

조선조 제22대 국왕으로 등극한 정조는 정조 2년인 17786, 당시 사회가 마치 병든 사람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병든 사회를 타개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개혁과제를 대내외에 천명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경장대고(更張大誥)’이다. 백성이 풍요롭게 살고, 인재를 키워 나라를 살찌우며, 군사제도를 강화하여 국방력을 키우고, 재물의 씀씀이를 다져 재정이 튼튼한 나라. 정조가 꿈꾼 나라는 이 네 가지에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은 농업이 국가의 주요 산업이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물론이고 국가의 재정수입도 그 해 농사의 풍흉에 달려 있었다. 정조는 어느 임금보다 농업 생산성을 안정시키고 증대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갔다.

 

매년 정월에 권농교(勸農敎)와 권농윤음(勸農綸音)을 반포하여 백성들에게 부지런히 농사지을 것을 권하고, 지방관들에게는 이에 대한 행정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당대의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종합하기 위해 전국의 선비들이 정리하여 올린 응지농서(應旨農書)’를 바탕으로 농서대전農書大全편찬을 추진하였다.

 

 

만석거부터 조성하기 시작

 

정조는 1794년 화성성역을 일시 중지하고 대신 둔전을 만들고 화성유수 조심태가 간한 만석거(萬石渠)’라는 수리시설을 축조하도록 명령하였다. 만석거 축조로 인해 화성 장안문 밖의 드넓으면서도 척박했던 대유평은 수전지대로 변했으며 극심한 가뭄도 무사히 극복하였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화성에서 1798만년제(萬年堤)’, 1799년에는 축만제(祝萬堤)’가 연이어 축조되었으며, 수리시설 축조와 더불어 개간된 둔전에서 얻은 소출은 화성을 수리하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정조대 서둔동 일대에 조성된 농업기반시설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에는 권업모범장과 농림학교가 들어섰으며, 해방 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과 농촌진흥청이 설립됨으로써 수원은 농업연구와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30일 오후 3시게 개막식을 갖고 201521일까지 특별기획전으로 전시가 되는 수원화성 착공 220주년 기념’ <정조시대 농업개혁의 산실, 수원화성>전에는 수원화성의 수리시설과 둔전에 관한 자료는 물론 3D 영상물을 제작하여 척박했던 땅을 개간하여 둔전을 만들고, 수리시설을 통해 풍작을 이루는 모습을 이야기하듯이 풀어냈다.

 

특히 영상제작을 위하여 일제강점기 지적도 등을 검토하여 수원의 옛 지형과 물길을 고증하였다. 수리관개와 관련된 농기구와 함께 연출하여 보다 입체적인 상영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이번 전시회에는 <홍재전서><응지농서>, 5.6m에 달하는 윤음과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농학자로, 1836년 화성유수로 부임하여 농업개혁가로서 변모를 실현한 사유구의 관련유물 등이 전시된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다 도와주마.

너희 자손들 부귀공명하고 무병장수하게 도와주고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 집안에 우환 없고 날마다 복이 넘치게 들어오게 도와주마.“

 

20일 오전 10, 수원시 영통구 원천동 595번지에 소재한 매원초등학교 건너편, 광교호수공원 마당극장에서는 한바탕 질펀한 굿판이 벌어졌다. 원천동주민자치위원회가 주관을 하는 주민소통과 화합하는 공감의 장 마련을 위한 2014 원천저수지 당산 용왕제 축제가 판을 벌인 것이다.

 

 

지금은 광교호수공원으로 명명된 이곳은 과거 원천유원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곳이다. 수원은 물론 근동의 사람들은 이곳에 대한 추억이 남다른 곳이다. 연인끼리 이곳을 찾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가 하면, 과거 멀리 떠나지 못하는 신혼부부들도 이곳으로 신혼여행을 오고는 했던 곳이다.

 

원천동은 장주면 원천이 태장면 원천리가 되고, 광교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이의동으로 흘러 원천저수지가 되었다. 이 물은 수원의 동쪽 경계를 흐르는 냇물로 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수자원이었다. 이러한 원천저수지는 후에 원천유원지로 조성이 되어 수많은 추억을 많은 사람들에게 만들어 주었다.

 

 

옛 추억을 되살리다.

 

이곳 원천동에는 아직도 원천유원지 시절을 못 잊는 토착민들이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다. 지금은 광교신도시로 탈바꿈을 해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주변은 완전히 변해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곳 원천동에는 두 곳의 서낭터가 있었다. 원천동 80-15에 있던 서낭터는 역말 사람들이 모시던 서낭으로 수백 년 묵은 소나무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 한 곳은 원천동 155번지에 있던 서낭터로 원천유원지 입구 어수내 마을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서낭은 마을 주민들이 당제를 지내던 곳으로 지역주민들의 대동단결을 위한 서낭제가 지내졌으나, 원천유원지가 개발되면서 사라졌다. 이러한 원천유원지의 변화를 안타깝게 여기던 주민들이 원천이라는 이름과 옛 풍취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원천 저수지 당산 용왕제를 축제화 시킨 것이다.

 

 

이날 굿은 경기안택굿보존회(회장 고성주) 회원들이 담당을 했으며, 앉은부정으로 굿을 시작했다. 이날 이 용왕제를 지내는 자리에는 영통구 지역의 박광은 국회의원과 경기도의회 오완석의원, 수원시의회 조석환의원, 최영옥의원 등이 참석을 했다. 또한 수원시 김영규 안전기획조정실장과 이해왕 영통구청장 등도 함께 자리를 했다.

 

굿판은 열린 축제요 나눔의 미학이란다

 

토요일이라고 해도 오전시간이라 그리 많은 주민들이 동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 사람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200여 명의 주민들은 순서가 바뀔 때마다 큰 박수로 화답을 했다. 이해왕 영통구청장은 인사말을 통해

우리가 이렇게 원천저수지 당산 용왕제를 열게 된 것은 우리 시민 모두가 잘 살고,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있기를 바라는 의미에서이다. 또한 우리 전통을 지켜 가는데 우리 모두가 함께 동참하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다. 이러한 용왕제를 우리는 우리의 문화로 받아들여 앞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다.

 

 

굿은 경기안택굿보존회 부천지부장인 이정숙의 본향도당맞이에 이어 고성주 회장의 안당제석굿으로 이어졌다. 이어서 김애선의 살풀이와 임영복의 대감굿, 김현희 외 3명이 추는 신칼대신무 등이 무대에 나섰다. 대감굿에서는 굿판에 모인 관람객들에게 술을 따라주고 떡을 나누어주었다.

 

끝으로 굿석에 들어선 고성주 회장은 창부와 서낭굿을 하면서 한바탕 소리를 풀어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박수를 치면서 즐거워했으며 굿을 마친 후에는 굿상에 진설된 모든 음식을 관람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굿판은 열린 축제요 나눔의 미학이란다. 처음부터 끝까지 굿을 지켜본 한 시민은

정말 즐겁습니다. 사회자가 굿은 종교로 다가서지 말고 즐거운 축제로 다가서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마음을 열고 보니 정말 흥겹기 짝이 없습니다. 앞으로 이 용왕제를 매년 이어간다고 하니 우리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축제로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라고 한다.

 

가끔은 이런 집들을 볼 수가 있다. 양을 너무 많이 주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음식을 남겨야 하는 집. 이런 집이 있다고 하면 남들은 ‘맛이 없겠지’라고 생각을 하기가 쉽다. 하지만 맛도 좋고 음식 값도 착한데 양까지 푸짐한 집이 있다고 하면, 도대체 어떤 집일까? 라는 궁금증이 든다.

 

27일(토) 아우와 함께 화성시의 산 한 곳을 산행을 했다. 산은 그리 높지는 않았으나 숲 전체가 벌목으로 베어놓은 나무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 정말로 최근에 한 산행 중에 가장 힘들고 위험한 산행이었던 것만 같다. 그렇다고 소득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그저 장수 버섯 몇 개를 채취한 것이 고작이었다.

 

 

비 온 뒤에 습한 숲, 땀으로 범벅이 돼

 

장마 끝에 올라가는 산행은 힘들다. 그것도 등산로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니다. 계곡을 따라 사선으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미끄러지고 만다. 낙엽 밑에 물기라도 있으면 영락없이 미끄러지니, 그 또한 산행에서 힘든 일중 하나이다. 그렇다고 편한 길도 아니다. 온 산 전체가 벌목 한 나무들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어. 딴 곳보다 몇 배나 더 힘들었나 보다.

 

그렇게 몇 시간을 산을 헤맸지만 결국 찾아야 할 것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이 각각 물을 얼려 두 통씩이나 준비를 했지만, 그것마저 오래 가지를 않을 듯하다. 워낙 숲이 습하다가 보니 땀이 비 오듯 한다. 전날 과음을 했다고 하는 일행은 어지간히 힘이 들었나보다. 결국 몇 시간 산행을 하지도 못하고 포기를 하는 수밖에.

 

 

이 칼국수 먹다보니 대박일세.

 

돌아오는 길에 보니 ‘얼큰 바지락 칼국수’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나나 일행이나 땀도 흘리고 그 전날 먹은 술기운 탓에 두 사람이 다 ‘얼큰 칼국수‘라는 글씨가 눈에 띠었나보다. 차를 돌려 칼국수 집으로 들어갔다. 화성시 봉담읍 덕리 244-2번지. ’덕봉 해병대 칼국수‘라는 간판이 달려있다. 이곳 가까운 곳에 해병대 사령부가 있어서, 해병대 칼국수 집인가 보다.

 

이 집은 칼국수와 만두 밖에는 메뉴가 보이지 않는다. 칼국수 전문점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메뉴를 보니 얼큰 바지락 칼국수 6,000원, 바지락 칼국수 5,000원, 멸치 칼국수는 4,000원이다. 한 편에는 ‘보리밥’과 ‘막걸리 1인1잔은 공짜’라는 문구도 보인다. 가격도 착한데다가 서비스까지 좋다.

 

 

얼큰 바지락 칼국수 2인분을 시켰다. 큰 사기그릇인 함지박에 하나 가득 담아다 주는 칼국수. 2인분이라고 한다. 국자로 저어보니 바지락이 더 많은 듯하다. 작은 그릇에 옮겨 국물을 먹어본다. 정말 얼큰하다. 아뿔싸! 그런데 먹느라고 바빠 사진 찍는 것을 잊어버렸다. 지금이라도 찍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휴대폰을 이용해 사진을 찍었지만 폼이 안 난다.

 

무슨 2인분이 이렇게 많아요?

 

두 사람 다 산행을 하고 내려온 뒤라 속도 허하고, 더구나 전날 과음을 한 탓에 얼큰한 것도 당기고. 과음 후에 딱 맞는 음식인데 이건 고민이 하나 생겼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를 않는다, 웬만한 양은 두 사람이 바닥까지 먹어치운다. 그런데 배가 불러 오는데도 함지박 안에는 그대로 남아있는 칼국수.

 

 

“2인분이 왜 이렇게 많아요?”

“여기 오시는 분들 중에는 그 양도 적다고 하는데요.”

“군인들이라 그런 것 아닌가요?”

“아뇨. 마을 분들도 양이 적다고 하세요.”

 

세상에 이렇게 많은 양을 갖고도 양이 적다고 하면, 그 분들 정말 칼국수 무지 좋아하는 모양이다. 정말 얼큰하고 시원한 것이 속이 확 풀렸다. 이렇게 맛이 있는 칼국수가 양까지 푸짐하니 이야말로 대박집 아닌가? 두 사람이 결국 다 못 먹고 남기고 말았다. 어디가서 음식을 먹을 때 남기는 법이라고는 없었는데 말이다.

 

 

세상에 이런 식당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맛도 좋고 가격 착하고 거기다가 양까지 푸짐한 이 해병대 칼국수집. 식당 앞에는 저수지가 있어, 칼국수를 먹고 난 후 물가에서 잠시 바람도 쏘일 수가 있다. 이래저래 맛있는 집, 자칫 이 좋은 집을 놓칠 뻔 했다.

부도탑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 같지가 않다. 부도탑 보다는 오히려 석등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논산시 부적면 탑정리 산 5에 소재하고 있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50호인 논산 탑정리 석탑을 보고 느낀 소감이다. 탑정리 석탑은 탑정저수지 북쪽 제방 끝에 서 있는 탑으로, 원래의 자리는 이곳에서 50m 정도 떨어진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탑정리 석탑을 옮긴 이유는 일제 시대에 저수지 공사를 하면서, 탑이 있던 자리에 물이 차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탑은 고려시대의 탑으로 보고 있으며, 탑의 전체 높이는 283cm에 기단부의 높이가 184cm이다. 탑신의 높이는 54cm에 지나지 않는다. 이 탑을 부도탑으로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석등으로 보아야 하느냐를 놓고 한참이나 망설였다.

 

 

태조 왕건이 지었다는 어린사(魚鱗寺)’

 

사료에 의하면 연산현 서쪽 17리에 탑정리가 있고, 탑정리에 어린사(魚鱗寺)가 있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고려 태조 왕건이 남으로 견훤을 정벌할 때에, 이곳에 주둔하여 어린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주변에 성을 쌓았다고 하나, 지금은 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 탑은 왕건이 개국사찰로 세운 개태사에 속해 있던 많은 암자 중, 적사암의 대명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하지만 문헌상 기록은 없다.

 

이 탑을 보면서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한다. ‘어린사라는 절 이름을 들으면서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 그저 감탄을 할 뿐이다. 고려 초에 왕건이 이곳에 성을 쌓았다는 것은, 이곳의 지형이 평지이거나 높지 않은 구릉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이곳에 절을 지으면서 어떻게 이곳에 호수가 들어찰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천년 후에 이곳에 저수지가 생길 것을 미리 알았다.

 

탑정호는 충남 논산시 부적면과 가야곡면에 걸쳐 있는 저수지를 말한다. 1941년에 착공을 하여 1944년에 완공을 한 인공호수로, 그 규모가 상당하다. 면적은 1522천 평에 달하며, 제방길이는 573m이고, 둘레가 20km이나 되는 거대한 저수지이다. 이 저수지가 들어선 곳에 어린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린(魚鱗)’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물고기와 물속에 사는 온갖 것들을 말한다. 결국 어린사는 물고기가 많은 절이라는 표현인데, 당시에는 이곳에 물고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성을 쌓을 수 있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고쳐 초기에 왕건은 이곳이 천년 후에 저수지가 들어설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지명을 찾아보면 상당히 많이 있다. 용인시 이동면에 있는 이동저수지 인근에도 이와 같은 지명이 있다. ‘어비리라는 곳이다. 논밭이 즐비한 이곳이 고기가 살이 찐다는 표현을 한 것이다. 용인 어비리는 이동저수지가 들어서 그야말로 물고기가 살이 찐다는 지명이 맞아 떨어졌다. 어린사 역시 그렇게 절 이름에, 이미 이곳이 저수지가 들어설 것을 예측한 것이다.

 

석등과 같은 형태의 탑정리 석탑

 

탑정리 석탑은 지대석 위에 8각의 간주석을 세우고, 그 위로 받침돌을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탑의 구성을 보면 하대석, 간석, 중대석, 탑신부와 옥개석으로 되어있다. 이런 형태는 어디서도 볼 수가 없는 모습이다. 흡사 석등과 탑을 합쳐 놓은 듯한 형태로 보인다.

 

더구나 이 탑의 탑신 아래의 받침 부분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석등 양식이다. 8개의 연꽃잎을 양각하여 장식하였다. 혹 이 탑이 별개의 탑신을 올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즉 화사석이 들어설 자리에 있는 지금의 탑신이, 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혹 화사석 대신 놓아 둔 것은 아니었을까?

 

더구나 일제시대에 저수지를 조성하고, 그들에 의해서 옮겨졌다고 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문헌상으로 확실하다면 무슨 걱정을 할까? 문헌도 없고, 받침이나 간주석의 형태 등으로 보면 부도이기 보다는 석등이라야 맞는다는 생각이다. 탑정리 석탑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석탑을 보라갔다가 어린사라는 절이 더 궁금해지는 날이다.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에 자리한 사적 제422호인 이성산성. 일부에서는 백제 혹은 고구려에서 축성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하지만, 성곽의 발굴에서 조사된 바로는 신라시대의 성으로 보기도 한다. 그 이유는 고고학적인 유물과 축성방법으로 보아, 신라의 성이라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성산성은 본래 백제 한성시대(서기전 18~서기 475)의 도읍지로 주장되어 오기도 했다. 그러나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1986년부터 2003년까지 10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결과로 볼 때, 신라가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한강유역을 확보한 후 신주를 설치할 때, 이 신주의 주성으로 쌓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눈길에 찾아간 이성산성

 

이성산성을 오른 것은 산성 안에 남아있는 저수지를 돌아보기 이해서이다. 눈 내린 다음에 찾아간 이성산성을 오르는 길은 눈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등산객들이 밟은 발자국인지 눈길에 발자국들이 흐트러져 있다. 조심스럽게 눈길을 걸어 산으로 오른다. 해발 210m의 높지 않은 이성산에 쌓은 포곡식 산성인 이성산성.

 

20여분을 오르다가 보니, 저만큼 성돌이 보인다. 이성산성은 산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석축을 하였다. 성벽을 돌아가면서 10여개소의 치를 두었다고 하는 이성산성. 그러나 이번 답사는 성 안에 남아있는 저수지를 답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성 안에는 두 곳의 저수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 한곳을 돌아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온전한 배수로가 남아 있는 저수지

 

이성산성 안에 있는 저수지는 2차에 걸쳐 조성이 되었다. 1월 3일 찾아간 저수지 주변에는 흰 눈이 쌓여있고, 저수지 안에는 마른 풀들이 보인다. 이 저수지는 산성 내의 자연계곡 아래쪽을 막아 물을 가두어 사용하였다. 네모난 직사각형의 저수지는 1차 저수지를 준설한 후, 4면에 석축을 하여 2차 저수지를 조형하는 방법을 택했다.

 

석축은 단을 만들어 쌓았으며, 50×20×40cm 의 돌로 5cm 정도로 들여쌓기를 하였다. 이렇게 들여쌓기를 하는 것은 저수지의 벽이 붕괴되는 것을 방비하기 위함이다. 저수지는 보기에도 매우 단단하게 축조를 하였다. 한편에는 배수로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저수지 물이 넘치면 경사진 배수로를 따라 성벽 밑에 물을 모으는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모인 물은 다시 더 밑으로 난 2차 배수로를 따라 흐르게 하였다.

 

 

수차례 석축을 한 이성산성

 

이성산성은 외벽의 성벽을 쌓은 돌들이 네모나다. 그러나 각이 진 것이 아니라 옥수수알처럼 밖을 둥그렇게 다듬은 형태이다. 그래서 일반 성곽과는 달리 성벽이 모나지가 않았다. 저수지가 있는 곳 주변의 성곽은 일부가 남아있는데, 안으로 보면 이보다 더 이른 시기에 축조된 성곽이 보인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가 처음으로 축조를 하고 그 후에 신라가 보축을 하여 사용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눈길을 밟으며 찾아간 이성산성의 저수지. 당시에 이 산 꼭대기에 이렇게 저수지를 마련했다는 것이 놀랍다. 이렇게 산성에서 적과 교전을 하기 이해서는 무엇보다도 식수가 중요했을 것이다. 그런 용도로 볼 때 이 저수지의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저수지 위편에 ‘이성산성 약수’라고 목판을 단 나무로 만든 작은 전각이 보인다.

 

그러나 돌로 쌓은 약수는 입구가 봉해져 있어 아쉽다. 모처럼 찾은 이성산성의 물맛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잃다니. 봄이 되면 이성산에 꽃들이 만개할 때 산성을 한 바퀴 돌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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