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군 간성읍에서 건봉사를 항해 가다가 보면, 해상 2리 마을이 있다. 이곳에서 개울 건너에 보면 커다란 노송 두 그루가 서 있는 곳에 작은 전각 한 동이 보인다. 개울 건너편에는 간성향교 기적비란 돌 표지석 한 기가 서 있다. 간성항교 기적비란 말에 개울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면 맞배지붕으로 지은 비각을 만난다. 비각은 정면과 측면 각 한 칸으로 지어졌으며, 높이 70cm 정도의 장초석 위에 기둥을 올렸다. 내부에는 홍살을 두른 안에 비 한 기가 서 있다. 이 비가 바로 간성형교 기적비이다. 이 비를 세우게 된 내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임진왜란에 성인의 위패를 모신 곳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병들이 간성항교로 들이닥쳤다. 왜병들은 간성향교를 점령하고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이 때 향교의 재임이었던 김자발과 박응열 등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인의 위패를 거두어 정결한 곳에 봉안을 했다는 것이다. 간성항교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왜병들은 위패를 두 사람이 거두어 간 뒤 간성항교에 불을 질렀다. 전소한 향교는 위패를 피신시켰던 김자발과 박응열의 발의로, 임진왜란 때인 1592년에 10월에 중건을 시작하여 이듬 해 2월에 공사를 마쳤다고 한다. 이 기적비는 순조 5년인 1805년에 향교 유림인 김, 박 등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나를 부끄럽게 만든 비각

 

소나무 두 그루가 전각을 내려다보듯 서 있다. 그 아래 맞배집 한 칸으로 서 있는 비각. 그저 시골 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비각이다. 내 앞에 서 있는 향교 기적비란 표지석이 아니라면 누구의 열부각이나 효자각 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몇 년 전에 이곳을 몇 번이나 지나면서도 그리 생각이 들어 들리지 않았던 곳이다.

 

새삼스레 세워 놓은 표지석 하나 때문에 이 비각의 남다름을 알아낼 수 있었다니. 더구나 지정문화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저 홀대를 하고 지나쳤던 것이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다. 매번 떠들어대는 것이 문화재의 가치는 지정, 비지정, 혹은 그 품격을 갖고 논하지 말라던 나였기 때문이다.

 

 

형조판서 서영보의 글씨

 

비각은 단출하다. 정면과 측면 한 칸이지만, 정면이 측면보다 약간 넓게 조성하였다. 홍살을 띤 안에는 비가 한 기 서 있다. 비의 대좌와 머리에 놓은 개석은 화강암으로 하였으며, 개석의 앞뒤로는 당초문과 꽃 봉우리가 새겨져 있다.

 

몸돌은 섬록화강암으로 조성하였으며, 높이는 142cm이다. 붉은색의 비문으로 써 있는데, 비문은 영의정이던 이병모가 찬하고 형조판서 서영보의 글씨라고 한다. 조선후기의 문신인 서영보는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니, 당대 최고의 명필이 글을 쓴 셈이다. 글을 전각한 것은 유한지이다.

 

그저 모르고 지나쳤던 비각 하나.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아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작은 비 하나에도 큰 뜻이 있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건봉사의 문화재를 답사하러 가다가 만난 이 비 하나로, 다시 한 번 문화재답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전북 장수군 대곡면 주촌에는 의녀 논개의 성역으로 조성이 되어있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논개의 동상과 조부모의 묘, 그리고 논개의 생가를 복원한 초가 등이 자리하고 있다. 날치 차가운 12,, 눈발이 날리고 있는데 찾아간 논개 생가지. 2만 여 평의 땅에 논개를 알 수 있는 여러 가지 조형물들이 있고, 그 한편에 초가로 지은 논개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논개는 조선조 선조 7년인 1574년 9월 3일, 이곳 장수군 주촌마을에서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주촌마을에는 생가가 있었으나, 1986년 대곡저수지 축조로 수몰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복원된 집터는 논개의 할아버지가 함양군 서상면에서 재를 넘어와, 이곳에 서당을 차렸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4칸 초가, 평범한 시골집

 

논개는 선조 26년인 1593년 6월 남편인 현감 최경희를 따라, 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논개 자신이 싸움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남편인 최경희를 따라 진주로 옮겨왔을 것이다. 남편 최경희는 중과부족으로 성이 함락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결을 했다.

 

논개는 죽은 남편의 원수를 갚고자, 스스로 기생으로 가장하여 왜장들의 승전연에 참석을 한다. 이 자리에서 논개는 왜장 ‘모곡촌육조’를 유인하여, 의암으로 함께 투신을 한 의녀이다. 논개의 복원된 생가는 4칸의 초가이다. 돌담을 두르고 사립문을 단 안으로, 넓은 마당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으로 네 칸 초가가, 그리고 우측으로는 세 칸 광채가 자리한다.

 

 

의녀가 태어난 초가, 그 안에서 상념에 잠기다.

 

1986년까지 논개가 태어난 생가가 있었다고 했으니, 복원된 현재의 생가도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안채는 모두 네 칸으로 되어있다. 집을 바라보면서 좌측에 한 칸의 부엌을 돌출하여 지었고, 남은 세 칸은 방으로 조성하였다. 들어지은 집은 앞으로 툇마루를 놓고, 맨 끝 방은 앞에 한데 부엌을 들였다.

 

측면 두 칸인 초가는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집이다. 뒤편으로 돌아가 보니 봉화처럼 생긴 굴뚝이 눈길을 끈다. 안채를 돌아 광채를 둘러본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채의 구성이다. 아무래도 400년 세월이 지나다가 보니, 복원을 하였다고 하지만 그 때와는 다르지 않을까? 그저 논개의 집을 보겠다고 들린 관광객들의 왁자한 소음이, 신경을 거슬리는 것도 복원된 집이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인가 보다.

 

 

잠시 돌아보던 발길을 쉬려고 툇마루에 앉아본다. 안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는 친절하게도 ‘안방’ 등 알림 패를 달아 놓았다. 안에 있는 기물들이야 옛 것일망정, 논개 살아생전의 것은 아닐 테니, 나에게는 그리 큰 의미가 없다. 다만 그 당시의 분위기만 알고 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많은 시인들이 논개를 칭송한 것도, 그만큼 당시의 여인들로서는 실천하기 힘든 구국의 행동 때문은 아니었을까?

 

논개여,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만해 한용운은 그의 시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에서 이렇게 읊었다. 사실 논개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서에서 기록을 하고 있지만, 정작 당시가 아닌 100여년이나 지난 뒤였다. 『호남절의록』『호남상강록』『호남읍지』『동감강목』『매천야록』등의 문헌에서 논개의 출생과 성장에 대해 기록을 하고 있다.

 

논개를 기억하다.

 

주촌에서 출생한 논개는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여인이었다.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에 태어난 ‘사갑술’의 사주를 갖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주를 타고 태어나면 큰 인물이 된다고 하는데, 여인이기에 나라를 위한 충절을 그렇게 행동으로 옮긴 것은 아니었을까? 뒤편 장독대를 돌아본다.

 

 

장독대 앞에 돌로 쌓은 우물이 있고, 그 물이 넘치면 작은 물길 옆으로 빨래터를 마련하였다. 물론 조형을 그렇게 한 것이겠지만, 저 맑은 물에 세파에 찌든 속내를 빨아버리고 싶다. 오늘 비록 이 초가를 떠나지만, 논개를 기억해 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시(時)’라고는 담을 쌓은 문외한이니 무엇이라 칭송을 할 것인가? 다만 기억해 내는 것만으로 마음에 담아낸다.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는 동주막리, 마근동, 술골, 용적골 등의 자연마을이 모여 이루어진 곳이다. 옛 주곡리 앞으로 큰 길이 나 있었는데, 이 길가에는 술집이 많이 모여 있어서 '주막거리' 또는 '주곡(酒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이름을 따서 현재의 주곡리가 생겼다.

 

500년 역사의 주곡리 장승

 

주곡리에는 큰 장승들이 서있다. 마을 입구 좌측에는 '천하대장군'이 우측 건물 담벼락에 가까이에는 '지하여장군'이 있다. 주곡리 장승의 특징은 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솟대와 함께 집단으로 모여 있다는 점이다. 매년 새로 장승을 깎아 솟대와 함께 새로 세우는데, 집단으로 뭉쳐있어 넓은 면적을 차지하지 않는다.

 

 

 

이 주곡리의 장승이 처음 세워진 것은 연산군 4년인 1498년이다. 청주 양씨 9세손인 첨정공 춘건이 낙향을 하여 이 마을에 정착을 한 후, 마을 주민들의 화합을 목적으로 마을 입구에 장승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매년 정월 14일 밤에 장승제를 지내고 있으니, 500년이 지난 전통을 지닌 마을이다.

 

마을주민을 살린 장승

 

이 주곡리의 장승은 임진왜란 때 마을주민들을 살렸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야습을 획책한 왜병들이 주곡리에 들어섰는데, 마을입구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총을 쏘아댔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총을 쏘아도 물러서지를 않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시간 총소리에 놀라 잠을 깬 주민들은 왜군의 침입을 알고 서둘러 피신하였다. 아무리 총을 쏘아도 물러서지도, 쓰러지지도 않는 사람들을 괴이하게 여긴 왜병들이 다가가 확인을 해보니, 사람이 아니라 장승이었다. 결국 장승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아 지성으로 정성을 드린 마을주민들의 목숨을 장승들이 지켜낸 것이다.

 

 

 

선조 32년인 1599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뒤 선조는 '마을을 지킨 장승을 수호신으로 삼으라'고 했다. 그 후 논산지역에서는 각 마을마다 입구에 장승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 주곡리의 장승은 논산시 향토유적으로 지정이 되었다.   

 

'로표장승' 역할을 하는 주곡리 장승

 

길을 가는 행인들이 먹을 것을 해결하고 피곤한 몸을 쉬기도 했던 주막거리에서 유래된 주곡리. 마을 입구에 세워진 장승은 자연스레 길을 안내하는 로표장승의 역할을 했다. 주곡리의 장승은 남장군인 천하대장군과 여장승인 지하대장군으로 구분이 되어 있으며, 아래에는 동방 신도내 20리, 서방 논산 30리, 남방 연산 20리, 북방 공주 40리라 적혀 있다.

 

 

 

 

주곡리의 남장승은 사모를 쓰고, 여장승은 족두리를 섰다. 나무의 면을 깎아 얼굴을 조성했는데 눈과 코는 돌출을 시키고 주변을 깎아냈다. 솟대도 매년 새로 깎아 장승군에 함께 묶어세우는데, 끝에는 새를 한 마리 올린다.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곡리 마을을 지켜 온 수호신인 장승. 장승이 서 있는 마을 입구에는 장승의 내력이 적힌 안내판을 세워 후손들에게 알리고 있다. 이 장승으로 인해 마을의 공동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의 전통이 한낱 시시콜콜한 옛 풍습으로 치부 되어가고 있는 요즘, 바람직한 마을의 모습을 본 듯하다.

석남사는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절로, 고려 초에 해거국사가 중창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조 태종 7년인 1407년에는 국가에 복이 있기를 기원하는 '자복사(資福寺)'로 지정이 되기도 했다. 절에는 대웅전 등 많은 전각들이 국보나 보물, 혹은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다. 민가와는 달리 절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전각 등의 훼손이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오랜 시간 충실한 보수로 인해, 그 본모습을 지켜내기 때문이기도 하다.

석가모니의 팔상도를 모시는 영산전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에 소재한 석남사의 영산전은, 보물 제82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영산전은 석가모니불과 그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를 함께 모신 전각의 명칭이다. 석남사의 영산전에는 16나한을 함께 모셔 놓았다.



석남사의 영산전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꾸며진 크지 않은 전각이다. 석남사의 입구에 있는 금강루라는 누각 밑으로 난 입구를 지나면 계단 중간 우측에 자리한다. 그리 크지는 않은 전각이지만, 나름대로 독창적인 건축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낮은 자연석 기단위에 위로 올라 갈수록 좁아지는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이 영산전이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명종 17년인 1562년이다. 이 영산전은 임진왜란 때도 소실을 면하였다. 조선 초기에서 중기 사이에 건축양식을 갖고 있어,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작아도 소중한 문화재

석남사 영산전은 딴 전각에 비해서 크지가 않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작은 전각으로 주위를 돌아보면, 나름대로 탄탄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산전은 돌 축대를 쌓고, 돌로 쌓은 돌담으로 앞을 둘렀다. 그리고 지붕 가구는 오량으로 구성하였다.

이 영산전은 지은 지도 오래되었지만,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전국의 많은 사찰의 전각들이 소실되고 폐허가 된 것에 비해, 이곳은 피해가 없었다는 것이다. 석남사는 영조 1년인 1725년에는 해원선사가 영산전과 대웅전의 기와를 갈았다는 기록이 있다. 대웅전은 원래 영산전 앞에 있던 것을, 영산전 뒤로 높여놓았다. 그러나 영산전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영산전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형태가 자연스럽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주추로 사용했다는 점이나, 그 위로 올린 민흘림기둥의 일부가 여기저기 파여 있다. 그만큼 오랜 시간을 큰 보수 없이 보존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영산전 앞의 석탑

계단을 오르면 영산전 게단 양편에 두 기의 석탑이 서 있다. 고려 말기의 탑으로 보이는 이 두 기의 탑은, 절 아래쪽에 서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이 탑 중에 영산전 방향으로 있는 석탑은 옥신석에 감실이 마련되어 있다. 누군가 그 안에 작은 부처를 갖다가 놓았는데. 이곳이 감실임을 나타내려고 그런 것 같다.

석남사는 유서 깊은 절이다. 현재 석남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영산전 외에, 대웅전과 석탑, 그리고 마애불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 산비탈에 늘어선 전각들이 자리한 석남사. 여름철 녹음이 짙어지면 이곳을 다시 찾고 싶다. 또 다른 느낌이 들 것이란 생각에.

선소유적지. 사적 제392호인 선소유적은 여수시 시전동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고려시대부터 배를 만들던 조선소가 있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 선소유적은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하게 한 거북선을 최초로 건조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선조 24년인 1591년, 이곳 여수에 전라좌수사로 부임을 하였다. 전라좌수영의 본영인 여수는 선조 26년인 1593년 8월부터, 선조 34년인 1601년 3월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었다. 이곳은 옥포, 합포, 당항포, 율포, 노량, 명량, 한산도 등에서 수군이 왜적에게 대승을 거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이다.


배를 만들고 숨겨두었다는 굴강

그리고 보니 벌써 선소유적을 다녀온 지가 꽤나 시간이 흘렀다. 10월 10일 여수를 답사하면서 다녀온 선소유적. 선소유적 입구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표석으로 삼았다는 벅수가 나란히 한 쌍이 서 있다.

이곳 선소유적은 지도상으로 보면, 가막만의 가장 북쪽에 조선소가 있다. 현재 이곳 선소유적지 안에는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했던 ‘굴강’과 칼과 창을 만들던 ‘대장간’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칼과 창을 갈고 닦았다는 ‘세검정’과 수군지휘소였던 ‘선소창’, 수군들이 머물렀던 ‘병영막사’ 등을 돌아볼 수가 있다.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 없었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 이 말은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한 수군의 거점인지 알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곳 선소는 나라를 구하는데,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선소유적 안으로 들어가면 바닷물을 돌로 쌓은 방파제가 있다. 입구는 좁게 만들어 놓아, 배를 숨겨 놓을 수 있도록 하였다.

‘굴강’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조선시대 해안 요새에 만든 군사항만 시설이다. 여기에서 고장난 배를 수리하거나, 군사물자를 배에 싣고 내린 곳이라고 한다. ‘굴강(掘江)’이라는 명칭은 대피한 배를 보호하기 위한 방파제를 흡사 작은 만처럼 조형을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선소주변에는 승리의 함성소리가

선소의 중심부에 마련된 직경 42m(면적 1,388㎡)정도의 굴강. 거북선 두 척이 들어갈 수 있었다는 굴강은, 깊이가 돌로 쌓은 축대 위에서 바닥까지는 5~6m 정도가 된다. 북쪽으로 난 굴강의 입구는 폭이 9m 정도에 이르며, 방파제 역할을 하는 축대는 자연선과 깬돌로 막쌓기를 하였다.

이충무공 선소 유적지는 2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였다. 보고서에 의하면 1980년 1차 발굴조사 시 출토유물은, 금속류 7종에 94개, 자기류 2종에 13개, 기타 4종에 18점이 출토되었다. 1985년 2차 발굴조사 시 출토유물은 금속류 5종에 21개, 자기류 4종에 387개, 기타 4종에 44개가 발굴이 되었다.





이곳 굴강에서 서남방향으로 20m 부근에는 ‘세검정(洗劒亭)’과 군기고가 현재 복원되어 있다. 항상 검을 닦고 갈았다는 세검정. 그 마루에 앉아 앞으로 보이는 바닷물을 바라본다. 400여 년 전 해전에서 승리를 하고 난 거북선과 수군들이 이 세검정 앞을 지나면서, 승리의 환호로 이곳이 떠나갈 듯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의 선조들이 승리의 함성을 지르던 이곳 여수 선소유적. 그곳 세검정 마루에 걸터앉아 자리를 뜨질 못하는 이유는, 그러한 함성이 그립기 때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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